“통상 낡은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낡은 것이라고 주장되는 이른바 전통은, 그 기원을 따지고 보면 극히 최근의 것이며 종종 발명된 것이다.



홉스봄 교수가 엮은 이 책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던 ‘오랜 전통’의 허상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홉스봄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새로운 국경일, 의례, 영웅이나 상징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등 ‘전통 창조’가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문제는 그런 발명된 전통이 역사와 동떨어져 있으며 정치적 의도에 의해 조작되고 통제된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황실의례가 대표적인 예다. 이 책은 특히 이 시기 유럽에서 전통의 창조가 ‘현재’의 필요를 위해 과거 이미지를 만들어낸 예를 추적하며, 만들어진 전통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자리잡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정치인들에 의해 국민국가 권위와 특권을 부추기기 위해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이 책은 집단적 기념행위가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이었으며, 신호와 의례가 사람들로 하여금 만들어진 ‘공식 기억’을 믿도록 하는 데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라는 시기에 전통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홉스봄은 이 시기 유럽이 산업경제가 도래하고 도시화가 전개되며 국민국가가 대두하는 와중에서 급변하고 있었다고 진단한다. 사람들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안정을 필요로 했고 그것이 전통이 창조되어야 할 이유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선거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대중정치가 출현한 시기다. 이때 국가는 어떻게 신민들이나 구성원들의 복종과 충성심을 확보하고 유지할 것인가, 혹은 그들 눈에 어떻게 정당하게 비칠 것인가라는 유례없는 문제에 직면했으며, 엘리트는 스스로를 대중과 연결시키기 위해 의례나 레토릭 그리고 상징물을 필요로 했는데, 그것이 전통 창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홉스봄 교수는 신생국이건 역사가 오랜 국가건 모두 오래 된 과거를 요구하기 마련이라고 지적한다. 1870년대 이후 유럽 각국은 ‘전통의 발명’이라는 견지에서 의미심장한 몇 가지 발전을 보였다. 첫째는 초등교육 발전으로 대부분 선진 유럽 국가들이 초등교육 의무제를 도입하고 자국 역사와 국민적 전통을 아동들에게 주입시켰다. 두 번째는 공식 의례의 발명인데, 프랑스에서 1880년 바스티유의 날이 국경일로 제정되고 <라 마르세예즈>가 국가로 지정되었으며,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0주년 기념행사(1887)와 60주년 기념행사(1897)가 대단히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세 번째는 공공 기념의 대량 생산으로, 수많은 기념물이 이 때 건립되었다. 현재 유럽 대도시들을 장식하는 수많은 동상과 건축물이 그 결과다.



1870년과 1914년 사이에 태어난 ‘신생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은 대체로 영국식 모델에 기초해서 국가 수도를 정하고, 국기, 국가, 국경일을 제정했다. 이런 전통에서 영국은 가장 앞선 전범을 보였는데, 1740년에 만들어진 영국의 <신이여 국왕을 보호하소서(God save the king)>가 세계 최초의 국가(國歌)이기 때문이다. 국기는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나타난 삼색기가 선례가 되었다. 만들어진 전통에서 무엇보다도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념행위다. 기념행위는, 그것이 없다면 일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집단적 기억을 안정화시키려는 계산된 전략이다. 그것은 과거로 하여금 현재에 돛을 내리게 하고, 시간이 멈춰 있을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1870년 이후 거행된 기념행위는 한 가지 면에서 그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예를 들어, 이전까지는 엘리트 중심이던 왕실의례가 이번에는 대중을 겨냥해서 거행되었다는 사실에 그 새로움이 있었다.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군주는 모든 신민의 집합체와 직접 관계를 설정해야 했던 것이다. 문제는 19세기 기념행사들이 대체로 민중을 ‘위한’ 것이었지만 민중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집단적 정체성과 전통의 창조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 들어 포스트모더니즘과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는 새로운 사조에 의해서도 촉진되었다. 이 두 사조는 역사적 서술의 중립성에 대한 역사가들의 무비판적 믿음에 종지부를 찍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각에서 볼 때 역사적 사료는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하며,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된 서술은 실은 권력 의지에 의해 구성된 담론일 뿐이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한 바대로 확고한 경제적 토대와 그 위에 구성되는 상부구조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면서 ‘사실’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 결과 랑케 이래 역사학을 지배해 온 실증주의가 도전받게 되었으며, 역사가들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과거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 사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가가 내세우는 모토는 과거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라, ‘왜 우리가 지금 하는 것처럼 과거를 개념화하는가’에 집중되었으며, 과거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왜 기억되는가’를 밝히는 것으로 변한 것이다. 역사는 이제 일종의 ‘공공 기억’ 학문적 권위 세례를 받은 과거의 재현”이라고까지 말해진다.



근대 들어 국가가 어떻게 신민들이나 성원들의 복종과 충성, 협력을 확보하고 유지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해야만 그들 눈에 정당하게 비칠 것인가라는 유례 없는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국가가 개인으로서 신민 또는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 정규적인 관계들이 점점 더 핵심적인 문제로 떠올랐다는 바로 그 사실로 말미암아, 한때 사회적 종속관계를 폭넓게 떠받쳤던 낡은 장치들은 취약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과거에는 한 통치자 아래에서 상대적인 자율성을 누렸던 집합체나 법인체, 하지만 역시 자기 구성원을 통제하면서 정상에서 버티던 더 높은 권위에 잇닿아 있는 권위 피라미드가 사회 위계를 성층화했고, 그런 구조에서 각 계층은 합당한 자리를 온전히 차지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계급이 관등을 대체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회적 변형들로 말미암아, 그런 낡은 구조는 침식되었다. 국가와 지배자가 직면한 문제들이 더 첨예하게 제기된 경우는 명백히 신민들이 시민, 즉 제도적인 차원에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정치행위 – 비등한 예로 선거의 경우 -의 주체로 변형된 경우였다. 그런 문제들이 한층 더 첨예해진 경우도 있었는데, 말하자면 대중으로 시민 정치운동이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지배체제의 정당성에 의도적으로 도전했을 때, 혹은 상위에 군림하는 몇몇 다른 인간집단체 – 가장 일반적으로 계급, 교회, 민족체 -에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국가질서와 양립할 수 없음을 위협적으로 시위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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