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강연 ‘플랑크의 양자론과 그리고 원자물리학의 철학적 문제점들’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양자물리학의 가장 심오한 의미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과학이 자연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설명하고 이해하는 자연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관성의 한 요소가 자연과학에 도입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 세계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현상이 우리 관찰에 따라 달라진다고는 누구도 주장하지 못합니다 – 자연과학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 서 있으며 아울러 우리가 인간 본성에 내재된 인식 개념 또는 기타 다른 개념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암시했듯이 이 점은 단지 양자론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지난 역사에서 명백히 드러났듯이 자연철학 또는 자연과학은 언제나 인간과 자연 사이에 서 있었다. 어떤 시대의 과학사상이든 그 시대 사람들에게 물리적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역사상 그 시기에 세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하였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세계 그 차제에 관한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고 곧잘 여긴다. 하지만 수학적 예측치가 관찰된 실험 결과와 아무리 가깝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연 자체의 실재보다는 자연에 대한 해석에 의존한다.”<서양과학사상사>
















“일반적으로 대상이 존재하고 주체가 그것을 인식한다고 본다. 하지만 유심론인 유식학파는 식(識)이 있기에 경(境,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이 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경을 객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꿈을 실재로 착각하는 것과도 같다. 경은 허망한 성격, 즉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주관의 눈으로 대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항상 잘못 분별하는 것)’을 띠는 것이다. 이 허망함을 깨달아야만 ‘객관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될 수 있다..“<세계 철학사 2>
















“하이데거에게 현존재는 삶의 지향성인 존재를 망각한다. 그야말로 객관적인 대상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현존재는 자기가 만든 산물을 산물인지 모르고 자연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 현존재에서 객관적인 대상 세계가 사라지는 어떤 체험이 발생한다. 바로 불안 체험이다. 불안은 어떤 것의 부정이 아니라 전반적인 무(無)에서 나온다. 하이데거는 불안 경험에서 우리가 자연 과학의 객관적인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계기를 본다. 객관적인 세계가 무너지면 이 세계가 지향적인 삶의 세계임이 드러나면서 도구의 세계가 드러난다.”<현대 철학 아는 척하기>

















“자연에 보편법칙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와 같이 왜 그런 법칙이 존재하는지, 혹은 누가 그런 법칙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 다른 문제도 생긴다.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어떻게 우주에 존재하는 보편적 법칙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감각과 이성 모두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대체 어떻게,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고 발견할 수 있을까?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는 인간’이라는 관념은 우연히 진화한 인간 존재에게 너무 많은 능력을 부여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반론에 다른 논박도 있다. 자연의 법칙을 믿는 과학자들은 자연에 수학적 형태의 법칙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케플러의 제1 법칙도 행성 궤도가 타원에 가까울 뿐이다. 실제 자연을 아주 비슷하게 기술한 자연에 대한 근사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실제 복잡한 자연 세계의 여러 조건 중 특정한 조건에만 초점을 맞춘 뒤 과학법칙을 얻어낸다. 그래서 많은 과학법칙이 수학적 형태를 띠고 이다. 자연이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에서 수학적 관계를 만족하는 특정한 변수들에게만 초점을 맞춰서 변수 사이에 연관 관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예술과 같이 창조적 활동이다.”<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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