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시민 자유는 우리 현대인이 생각하는 자유 개념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고대 자유는 곧 도시 통치에 어떤 역할을 맡는 것이었다. 고대 자유는 의회에 출석하고, 토론장에서 의견을 발표하고, 논쟁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어느 한 쪽 편을 들면서 투표할 특권과 의무로 이뤄져 있었다. 아울러 행정관으로 봉사하거나 필요한 경우에 배심원으로 일할 가능성도 고대 자유에 속했다. 고대 자유는 정치 과정에 대한 무관심을 허용하지 않았다. 공적 일이 가장 중요했다."<개인의 탄생>



















토크빌은 자유를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자연적 자유(natural liberty), 다른 하나는 시민적 자유(civil liberty) 또는 공민적 자유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발생한 모순과 충돌이 대단히 컸던 탓에 프랑스인은 그들 구호(자유, 평등, 박애) 중 자유를 자연적 자유, 곧 구속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는 자유로 이해했다. 그들은 혁명 전 사회에서 수많은 불합리한 제한과 압박을 받았고, 혁명으로 이 제한과 압박을 깨부쉈으므로 그 결과 모두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토크빌은 미국이 자유로운 국가지만 미국인이 자기 국가에서 누리는 자유는 결코 자연적 자유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미국인의 자유는 처음부터 영국인에게서 쟁취한 것, 곧 시민적 자유, 공민적 자유라고 본 것이다. 미국 독립 혁명의 기원은 식민지 백성이 모국 영국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겠다고 요구한 것이다. 그들은 임의로 조종당하거나 자기 재산을 침범당하지 않는 기본적 자유를 원했다. 이러한 자유는 시민적 자유이며, 특정한 권리 영역에서의 자유이지 프랑스인이 생각한 전면적이고 보편적이며 무한정의 자유가 아니다.



토크빌은 프랑스인이 이러한 공공 정신을 훈련받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공공 정신은 시민의 기본 조건이다. 미국은 시민이 국가를 이루지만 프랑스에는 시민이 없고 속민(subjects)만이 있을 뿐이다. 시민은 공공사무를 자신의 일로 여기지만 속민을 공공사무를 윗사람 일로, 자신을 관리하는 사람의 일로 생각한다. 이것은 간단하지만 중대한 차이다. 토크빌은 프랑스 독자들에게 미국의 민주주의를 설명하면서 자극적인 방식을 선택한다. “대혁명 이래로 프랑스인은 줄곧 시민을 소리 높여 외쳤다. 심지어 입으로는 모든 사람을 시민이라고 불렀다. 시민 말고는 다른 존재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온 거리를 가득 채운 시민’의 사회는 사실 말로만 시민이었을 뿐이다. 프랑스인은 그토록 시민을 떠들썩하게 외쳐 댔지만 모두 뼛속은 여전히 속민이었다. 진정한 시민이 될 수 없어서 시민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 정치의 근본이 고도의 독립성을 갖춘 타운 그리고 마찬가지로 고도의 독립성을 가진 주라고 해석합니다. 연방 대통령은 주지사에게 지시를 할 수 없다. 처음부터 타운의 행정은 시민이 선출한 공공사무위원이 책임지고 처리한다. 타운에는 심지어 대표도 없다. 모든 타운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단위로서, 주에는 주 의회가 있어서 각 타운의 법률과 규범을 제정한다. 하지만 주의 법규 범위 밖에서는 타운이 직접 민주주의로 운영되는 타운 집회를 통해 자신의 처리 방법을 결정한다. 주는 여타 타운을 대표하고, 연방 내의 다른 각 주와 관련을 맺기도 하지만, 주 정부는 여전히 임의로 타운의 독립권을 간섭하거나 침범할 수 없다.



이것이 토크빌이 19세기에 본 미국의 상황이다. 그 이후로 미국 정치에는 여러 가지 변동이 생겼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 특히 구조에 깔린 설계의 정신은 줄곧 보존되었다. 미국 정치의 실체는 자립적인 단위로서의 수천 개, 수만 개의 타운이며 대부분의 권력은 이러한 위계로 배치되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pp. 170-174.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칸트의 도덕법칙은 의미를 상실한다. 자유롭지 않은 존재에게 도덕법칙을 명하는 것은 난센스다. 칸트는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너는 자유롭다. 너는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해, 너는 도덕적 존재이기에 분명 자유로운 존재일 것이다. 자유로운 의지가 지향하는 궁극의 가치는 최고선이다. 그리고 자유의지가 최고선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두 조건은 바로 영혼불멸과 신인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자신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 그리고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요청함으로써 최고선을 지향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실천이성의 요청’, 나아가 ‘실천이성의 우위’다.



홉스 철학의 의미도 절대왕정의 옹호라는 그 표면상의 주장이 아니라, 바로 철저한 ‘개인주의’, 합리적으로 계산해서 자신 이익(자유의지)을 추구하는 개인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점에 있다. 개인들이 계약을 통해 자신들 주권을 ‘양도’한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다른 이유도 없다. 오로지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철저한 계산의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결과적으로 구성해낸 국가 모습은 개인의 자유의지와 모순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일단 개개인의 권리의 ‘양도’를 통해 성립한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모든 안전과 번영은 적으로 국가 몫이며, 개개인들에게 외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한 것이 된다. 개개인의 집합은 다중일 뿐이며, 국가라는 끈이 없다면 이 다중은 그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구슬에 불과한 존재들이다. 여기에는 오직 국가가 외적으로 부여하는 정치만이 있을 뿐, 개개인들의 내적인 힘[자유의지]을 통해서 그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정치는 존재할 수 없다. 홉스의 세계에서는 국가와 다중이 있을 뿐, 개개인들이 서로간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하는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의 법과 시민사회 고유의 도덕, 관습, 문화 차원들 사이의 구분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국가라는 주물과 그것이 형태를 찍어낼 때 사용되는 재료로서의 다중이라는 구도를 극복하고서 시민사회의 자율성, 시민사회라는 고유한 차원을 창조해낸 것이 근대적 정치의 가장 핵심적인 성취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홉스의 정치철학은 오히려 전근대적인, 아니 전근대보다 더 후퇴한 그 무엇이라고까지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그 이론적 구성 과정에서 전제되는 강렬한 개인주의와 그 구성 결과에서 나타나는 강렬한 반-개인주의가 드러내는 모순이야말로 홉스 정치철학의 핵심적인 한계라 할 수 있다.



로크에게 자연권의 기초는 사유재산이다. 로크는 자신이 확립한 경험적 주체 개념에 입각해 정치적 주체를 사유했다. 인식론적 맥락에서 주체적 경험은 곧 ‘인식’이다. 이에 비해 정치철학적 맥락에서 주체적 경험은 바로 ‘노동’이다. 인식의 주인공이 마음[자유의지]라면 노동의 주인공은 몸이다. 노동이란 한 주체가 자연을 가공해 변형하고, 그 변형을 통해 그 자신도 변형되는 과정이다. 이때 가공된 대상은 곧 노동주체의 ‘소유’가 되며(노동가치설), 그 소유를 통해서 주체는 그 자신의 고유한 것으로서 ‘property’를 가지게 된다. 노동은 이렇게 한 주체 고유의 ‘property’를 생성시키는데, 노동 이전에 한 개인이 천부인권으로서 소유하는 것은 생명과 자유이므로 결국 한 개인의 ‘property’는 그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뜻한다.



다만 내전 시대를 살았던 홉스에게 생명이 가장 소중했다면, 명예혁명 시대를 살았던 로크에게는 재산이 가장 중요했다. 로크 사유에서는 사유재산을 가지고서 사회계약을 하는 것이지 사회계약을 통해서 사유재산이 분배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과 자유만이 아니라 사유재산 또한 자연권인 것이다. 스피노자에게서의 자연권은 한 주체의 ‘존재’ 즉 내적인 역량이지만, 로크에게서는 그의 ‘가진 것’ 즉 외적인 소유다. 이것은 형이상학자인 스피노자와 경험주의자인 로크 차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경험주의자인 로크가 당대 현실을 상세하게 관찰하기보다는 원시적인 상황을 상정해 논의를 전개한 것은 묘하게 느껴진다. <통치론>의 저자 로크는 자신이 <인간지성론>의 저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다. 로크 정치철학의 이런 경향은 영국 중산층에게 유리했는데, 사유재산을 절대시하는 것은 곧 위로는 권력자들의 강제적 탈취를 부정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하층민들의 무력 도발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로크의 저작이 18세기 이래 본격화되는 ‘자유주의’ 철학의 성경이 된 것은 바로 사유재산에 대한 이런 절대 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철학사 3>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기회를 제한하는 어떤 구조도 없다. 모든 사람은 재산을 늘리고 쌓을 권리와 기회가 있다. 다시 말해 평등한 사회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은 사라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분 차이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귀족이나 평민, 승려, 장인, 농부 등이 모두 같아진다. 그래서 사회 지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재산이 많고 적음에 따르게 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 돈이 있으면 부러움을 받고 존경을 얻을 수 있는데, 이는 평등한 사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불평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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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주의는 헬레니즘시대(BC 305-30)에 이집트의 현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해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에 근거한 사상이다. 1471년에 피치노가 <해르메스 문서>를 번역해 출간함으로써 활성화되었다(하지만 훗날 이 문헌은 사실상 2세기의 신플라톤주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문헌이었음이 밝혀지게 된다). 헤르메스주의는 자연을 영험한 힘으로 가득찬 곳, 힘 – 공감과 반감(인력과 척력) -의 그물망으로 이해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들은 그 심층적 힘을 읽어내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고자 했다. 아울러 파라켈수스(1493~1541)가 역설했듯이, 인간을 소우주로 보고 이 소우주로서의 인간에게서 대우주로서의 자연의 생명력을 발견하고자 했다.



헤르메스주의는 근대 물리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중력’ 개념으로서 물리학의 중심에 있는 만유인력 개념이 이 헤르메스주의에서 연원했다. 근대 물리학 맥락에서 ‘운동’이란 사물의 본성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의 ‘상태’일 뿐이다. 사물 자체는 그저 x로 놓으면 그만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발견이라기보다도 특정 영역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초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명의 차원과 물리의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론적 분절을 예민하게 고려하기보다는 연속적인 방식으로 파악했다는 점에 있다. 근대 역학은 이 체계에서 물리적 측면을 따로 떼어내어 그 부분을 탐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은 틀린 것이고 새로운 존재론이 맞는 것임을 뜻하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이 경우 역학의 맥락에서) 그런 존재론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그 존재론이 ‘옳다’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이다. 역학이라는 특정한 맥락을 위해 이런 식의 존재론 혁신이 필요했다고 해서, 그 존재론이 존재론 자체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보다 더 ‘진리’인가 하는 것은 따져볼 문제다. 아니, 애초에 양자의 비교는 짝이 잘 맞지 않는 비교라 하겠다. 짝이 맞는 비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와 근대 역학을 철학화한 기계론적 유물론의 세계일 것이다.



‘과학적 사유’의 기본틀은 무엇인가? 첫째,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을 세계에서 분절해낸다. 현대식으로 말해 어떤 ‘계’(system)를 분절해낸다. 이 점에서 과학적 사유는 철학적 사유와 다르다. 철학적 사유가 세계를, 삶을 그 전체로서 보려는 데 핵심이 있다면, 과학적 사유는 반대로 세계의 어떤 부분을 오려내서 ‘대상화’함으로써 시작한다. 둘째, 이 계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을 변항(variable)으로서 잡아낸다. 즉, 시간에 따라 양적으로 변화하는(때로는 계속 유지되는) 핵심적인 존재단위들(entities)을 설정한다. 이것이 과학기술이라는 행위의 핵심적인 존재론적 설정이다. 예컨대 낙하 운동의 경우 시간(t), 거리(s) 등이 될 것이고, 천문학적 계의 경우 질량(m), 거리(R), 힘(F) 등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변항들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이 변항들 중 가장 근본적인 변항, 정확히 말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변항은 시간(t)이다. 왜일까? 과학의 기본 목적은 운동의 법칙성을 잡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운동이란 항상 시간에서의 운동이다. 따라서 모든 변항 중 가장 일차적인 변항은 바로 시간이라는 변항인 것이다. 셋째, 이 변항들에 관한 데이터를 모아 그것들 사이의 함수관계, 특히 미분방정식을 사용한 함수관계를 잡아낸다. 이 함수관계가 확증되면 그것은 ‘법칙’으로 승격된다.



넷째, 이렇게 얻어낸 수학적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그 이론에 있어 중요한 부분 – 그곳을 실증할 경우 그 이론의 설득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질 수 있는 부분 -에 관련해 실험을 즉 ‘결정적 실험’을 행한다. 이렇게 실험을 통해 이론의 타당성을 확증한다. 다섯째, 모든 운동 법칙은 결국 시간의 함수이므로, 시간-변항의 각 함수값은 곧 해당 시간에서의 그 운동 법칙 전체의 함수값을 산출한다. 따라서 운동 법칙에 미래의 어떤 시간을 대입하면 미래의 해당 계의 상태를 예측할 수 있다. 예컨대 천문학에서, 훗날 라플라스가 장담하게 되듯이, 물리법칙과 해당 초기조건만 주어지면 어떤 시간에서의 우주 상태도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북아에서 왜 먼저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했을까’라는 물음은 곧 과학기술 발전은 인류 역사에서 긍정적인, 때로는 거의 당위적인 가치를 가진다는 판단을 은연중에 깔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 특히 기술문명이 가져온 세계가 과연 긍정적이고 심지어 당위적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사람들은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과학기술의 비극들에는 무관심하고, 과학기술이 가져오는 흥미/재미와 ‘부가가치’에만 관심을 쏟는다. 드론이 가져올 편리와 부가가치에는 관심을 가져도 (최근 중동이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무차별로 이루어지는) 무인폭격의 섬뜩함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에 열광하면서도 그것이 가져올 불행에 대해서는 거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런 흐름은 대중매체/대중문화에 의해서 점차 공고한 것이 되고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음 물음은 결국 자본주의-과학기술-대중매체에 의해 형성된 가치를 밑에 깔고서 제시되는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가치와는 반대의 가치를 가진 경우, 오히려 물음을 반대로 던져야 할 것이다. “왜 서양에서는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비전이 몰락하고, 외물에 집착함으로써 마음을 잃어버리는[玩物喪心] 과학기술이 기형적으로 발달했는가?’라고. 하지만 오늘날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 가치에 이미 강하게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과학기수은 운명공동체다. 자본주의는 신기술을 발명해야 이익을 볼 수 있고, 신기술은 자본을 통해서 일반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막강한 힘은 경제만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돈의 힘이 정치는 물론이고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문화도 지배하는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감각을 가지고 볼 때, 동북아 지식인들이 왜 외물을 조작하려는 경향[機心, 기심]을 경계하면서 내면 가꾸기에 힘썼는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물질문명의 폭주가 가져올 파괴와 혼란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 문명에서 물질문명은 지식인들보다는 장인들에게 맡겨져 있었고, 이 두 집단 사이 거리는 멀었다. 그리고 동북아 지식인들은 그 거리를 메울 수도 있었을 자본주의 경향에 대해서도, 특히 윤리 없는 상업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 신기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감각적 쾌락을 주는 사람들은 상찬의 대상이 되지만, 이런 가치들의 폭주를 경계했던 선철들의 지혜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매도되기 일쑤다. 바로 그런 가치/시선이 이미 현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근대 과학기술문명의 세계사적/인류사적 함축에 대해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왜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나 자연과의 합치를 잃어버리고 인간이 만든 장난감에만 열광하는지. 왜 우리 선철들이 그토록 애써 가꾸었던 ‘사랑의 마음’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사물의 조작과 계산에만 몰두하고 인간 스스로를 그런 틀 속에 밀어 넣어 물화(物化)하고 있는지. 왜 사람과 사람 관계는 소홀히 하면서 외물이 가져다주는 흥미와 이익에는 그토록 집착하는지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근대성과 과학기술문명에 대해 보다 균형 잡힌 시선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무엇이 진정한 ‘진보’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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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6-07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위한 도구,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보는 시각의 한계는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존재와 비존재, 목적과 수단 등에 대한 지나친 분화를 통해 과학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이러한 세분화된 관점이 종합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를 페이퍼를 통해 생각해봤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06-08 15:15   좋아요 1 | URL
넵, 그런 것 같습니다.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닌데, 분석으로 부분만 보고 종합적인 판단을 못하여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대로의 인간일 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대로의 

인간이기도 하다.” 

- 군나르 시르베크








우리는 나중에 발생한 일이 이전 일보다 더 완벽한 상태라고 믿으며 ‘발전’ 개념을 확신한다. 하지만 이러한 확신은 그냥 새로운 태도일 뿐이며, 특히 19세기 말 무렵 이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은 태도다. 찰스 다윈(1809~1882)의 『종의 기원』(1859)이 발표되면서 진보란 개념이 확산되었고, 그와 함께 역사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생겨났다. 『종의 기원』 마지막 페이지에 ‘진보’라는 단어가 있다. “자연선택은 오로지 각 개체에 의해, 개체를 위해 작동하므로 모든 정신과 물질적 자질은 완성을 향해 ‘진보’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는 “진화는 특정한 방향성이 있는 진보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진화는 ‘무엇인가’가 어디론가 움직여 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일어나는 변이가 확장되거나 위축되는 일로 봐야 한다”라며, 다음과 같은 표현은 모두 잘못된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 35억 년 전 지구에 살던 생물은 박테리아와 그 사촌들 같은 아주 간단한 종류의 단세포 생물들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는 쇠똥구리와 해마, 피튜니아[관상용 식물], 인류 등으로 붐비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진보가 생명의 역사를 진전시켜 온 기본 추진력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는가?

· 지난 몇 십 억년 동안 동물은 전체적으로 몸의 크기, 먹이 섭취 및 방어 기술, 뇌와 복잡한 행동, 사회적 조직화, 환경 조절의 정확성 등에서 상승 진화했다.

·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 생물의 구조나 생리 기능에서 전문화 정도가 커진다.

· 인간의 해부학적 복잡성, 신경의 정교함, 습성의 다양성과 유연성 등 호모 사피엔스의 생명 특성을 보면, 인간은 틀림없이 어떤 진보의 경향을 보인다.

· 생명체 발달 과정은 복잡화, 조직화, 전문화를 통해 진화 단계를 하나씩 밟아 사다리 위로 올라간다. 어마어마한 대뇌 피질과 기막히게 복잡한 행동 패턴을 소유한 인류는 우리가 아는 한 그 정상에 위치에 있다.

· 인류가 지구 시간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존재라는 지질학 발견을 봐선, 진화 방향은 인간을 향한 예정된 진보다. 

· 다른 생물은 인류보다 못하다.



우리가 이렇게 착각하는 이유는 “경향성을 알고 싶어 하는 강렬한 인간 욕망이 종종 실재하지도 않는 방향성을 찾아내거나 입증되지 않는 원인을 추론해” 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건에서 반드시 패턴을 찾아내려는 습성이 있어서, 단순히 무작위로 발생한 사건도 뚜렷한 경향성을 잡아내어 그 원인으로 삼는다. 대부분 사람은 순전히 무작위적인 결과에서도 규칙성이 자주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착각인 “외견상 방향성이나 경향성은 사실 자연계에서 변이 정도가 축소되거나 확장된 ‘부차적’ 결과이지, 어떤 것이 특정 방향으로 움직인 결과가 아니다.”
















‘다른 생물은 인류보다 못하다‘는 믿음은 인간의 ’고질병‘이다. 이러한 인본주의 사상은 중세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이미 ‘세상은 곧 인간과 같다’라는 개념으로 그 씨앗을 엿볼 수 있다. 신학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우주관은 “인간이 신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세계가 인간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여겼다. 수도사였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역시 인간 이성에 대해, 인간 삶에 대해, 인간 구원에 대해 인간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성 토마스와 같은 스콜라 신학자들 또한 인간 본성을 영광스런 신의 피조물로 찬양했으며, 인간과 신의 동역(同役)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同役)자 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린도전서 3:9>) 더욱이 그들은 인간 이성 능력을 굳건히 믿었다. 이후 스콜라 철학에 영향 받은 단테(1265~1321)도 현세가 인간의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을 택하고 악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인간성에 대한 그의 희망과 궁극적 믿음은 중세 전성기를 지배했던 분위기를 대표한다. 이 점에서 단테는 인간에 대해 가장 긍정적인 확신을 표명한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중세 후기가 되자 신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새로운 계급, 곧 상인 계층이 번성했다. 상인은 당시 영주와 성직자, 기사, 농노로 이어지는 봉건 피라미드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상인은 농노를 자유민이라고 이름 붙인 임금노동자로 삼기위해 영주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상인은 또한 자신이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회가 안정되길, 소유권이 보장되길 원했다. 그들은 돈이 넘쳤는데, 세입을 늘리는데 한계가 있던 국가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왕은 상인들에게 세금을 늘려 국가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상인과 국가가 함께 공생하며 발전하는 체계가 만들어졌다. 신에게 사랑받지 못한 상인 계급은 자신들 위상을 강화할 다른 방법도 찾았다. 당시 유럽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했던 이슬람 세계가 상인들 소망을 이룰 방안이 되었다. 이슬람 세계가 그동안 연구한 그리스-로마 문명을 십자군 전쟁 원정으로 접하게 된 상인들은 기독교 이전 고전 사상에 탐닉하게 되었다. 그 사상은 중세 신학자들이 보잘것없고 덧없는 존재로 여겼던 바로 ‘인간’이었다. 무역이 발달했던 고대 그리스인에게 인간은 독립적이고 지적이며, 모험심이 강하고 능력도 있는 그런 존재였다. 중세 상인들에게 이러한 인간형은 전형적으로 돈을 잘 버는 바로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르네상스 시기(14~16세기) 상인 계급은 인본주의라는 뿌리를 고대 그리스에서 캐어내 자본주의에 이식했다. 

 


스피노자(1632~1677)는 인간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계를 판단하기에, 예컨대 ‘식물과 동물은 인간에게 양분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식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세계관으로 인간은 신이 “자신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면서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으로 여기고, 인간만의 가치를 세계에 투영해서 좋음과 나쁨, 질서와 무질서, 아름다움과 추함 같은 이항대립적 가치론을 구축한다. 하지만 이런 가치론은 사물의 참된 원인을 몰라서 내리는 인본주의일 뿐이라고 스피노자는 비판한다. 사람들은 모든 자연물이 어떤 목적을 위해 작용한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자연은 아무런 목적도 없으며, 모든 목적인(目的因)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특히 목적론 사고 속에서 사물은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본질만 가지며, 그러한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未完)의 존재로 간주된다. 사물 변화는 오직 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 설명되며, 이로부터 벗어난 것은 비본질적이고 비정상적일뿐이다. 이러한 목적론 사고가 갖는 위험성은 ‘차별주의’ 논리로 쉽게 전용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목적론 사고 바탕이 다름 아닌 ‘인본주의’ 사고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인 이상 애초부터 인본주의 사고를 벗어날 순 없지 않을까? 스피노자는 우리가 인본주의 사고를 벗어나 그 ‘외부’를 사유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예를 들어 현재 우리는 남자와 여자를 평등한 이분법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은 서양 역사에서 최근 들어 보편화되었다. 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 인류 분류 방식은 하위 속물에서 상위 이상형 상태까지 위계적 연속체를 이룬다는 ‘단성 모델’이 선호되었다. 물론 그때에도 인간을 크게 여자와 남자 두 무리로 분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상적인 형태는 단 하나라고 생각했다. 과거부터 계속되어 온 여성 억압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분류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단성 모델에서 전통적인 남성성은 더 큰 열정에 의해 단일 사다리의 정상에 있고, 전형적인 여성성은 힘의 생성이 상대적으로 약하기에 단일 사다리 밑에 위치한다). 객관적인 자연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범주를 통해서 자연과 교감한다. 이 점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어떠한 범주가 너무나 명확하기에 그 구분법은 시간과 문화를 초월해서 절대 변하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1948~ )도 인간이 항상 자신 망상 속 사다리의 꼭대기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고자, 다른 동물들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한다고 말한다. 드 발은 과학자들이 침팬지의 ‘키스’를 ‘입과 입의 접촉’이라고 부르고, 영장류의 ‘친구’를 ‘특히 좋아하는 제휴 파트너’라고 부르며, 까마귀와 침팬지가 도구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에 대해서는 인류를 정의하는 종류의 도구 제작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해석한다. 어떤 면에서 동물들이 우리보다 뛰어난 인지 능력을 지닌다면 – 예를 들어 특정한 새들은 수천 개의 씨앗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기억할 수 있다 – 과학자들은 이를 지능이 아니라 본능이라고 치부한다.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1948~ )는 “인본주의란 과학을 통해 인류가 진리에 다가설 수 있고, 그래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신념지만, 과학은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 면에서 인류가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속임수를 지탱하기 위해서 사용”되어 왔을 뿐이라고 냉소한다. 과학자들은 수년 전에 인간만이 도구를 이용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얼마 뒤 침팬지나 코끼리 같은 몇몇 동물이 나무 막대기와 돌 같은 물건을 도구로 이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들은 인간만이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를 변형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침팬지가 막대기를 목적에 따라 변형시킨다는 사실이 또다시 밝혀졌다. 그들은 이제 인간만이 도구를 이용해 다른 도구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자연에서 인간만이 독보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통해 수정되고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라곤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라고 느끼고 싶어 하는 욕구밖에 없다. 

















도시에 사는 까마귀들은 횡단보도가 있는 도로 위에 견과류를 떨어뜨려 지나가는 차바퀴에 껍질이 깨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다음에는 부리로 길 건너기 버튼을 눌러 자동차가 지나가지 못하게 막은 다음에 껍데기가 열린 견과류를 안전하게 회수해 온다. 이러한 행동은 여러 도시에서 여러 번 관찰되었다. 
















문어는 무척추동물로 분류될 뿐 아니라, 지능이 없다고 알려진 달팽이나 조개류와 마찬가지로 연체동물에 속한다. 조개류는 심지어 뇌가 없다. 하지만 문어는 뇌가 있으며 영리하다. 어린아이들이 열지 못하도록 설계된 약병 뚜껑을 문어는 열 수 있다는 사실이 보고된 바 있다. 무척추동물 치고 문어 뇌는 거대하다. 호두 정도 크기인데, 아프리카 회색앵무새 뇌 크기와 똑같다. 훈련된 어떤 회색앵무새는 구어체 영어단어 수백 개를 의미 있게 사용하는 법을 익혔다. 형태와 크기, 재료 개념 또한 이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수학을 할 수 있었으며, 질문을 던졌다. 회색앵무새는 또한 조련사를 고의로 속이다 못해, 속인 일이 발각되면 사과할 줄도 알았다. 동물 뇌의 처리 능력을 좌우하는 것은 신경세포 수다. 문어는 신경세포 3억 개가 있다. 쥐는 2억 개가 있고, 개구리는 아마도 1600만 개가 있을 터다.



미국 시애틀 아쿠아리움에 사는 태평양대왕문어는 반쯤 돌려서 나사로 고정시킬 수 있는 야구공 크기의 플라스틱 공을 즐겨 가지고 놀았다. 직원은 공 안에 음식을 넣어두었는데, 나중에 놀란 점은 문어가 공을 여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 나사를 조여 원래대로 조립해놓았다는 사실이다. 집에서 어류를 키우는 사람 다수는 문어가 자신들과 함께 텔레비전 보기를 즐기는 듯싶다고 말한다. 권위 있는 저서 『두족류: 가정 수족관을 위한 문어와 오징어』에서, 심지어 주인과 문어가 함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도록 TV를 수조와 같은 방에 두라고 권한다.



타인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고도로 발달한 인지 상태로, 소위 ‘마음 이론’(theory of mind)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마음 이론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능력이라 여겨졌다. 일반적인 어린이는 마음 이론이 3세에서 4세 사이에 발생한다. 마음 이론은 의식의 중요한 요소라고 간주되는데, 자의식의 존재를 암시하는 까닭이다(‘난 이렇게 생각하지만, 당신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개조차도 자신에게 없는 지식이 다른 개체에게는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다른 생물 마음이 어떠한지 그려보는 지구상 모든 생물 가운데 으뜸은 틀림없이 문어일 듯하다. 그런 능력이 없다면, 문어는 각양각색의 기만술로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어 암컷한테는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호르몬이, 수컷한테는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이, 둘 다에게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코스테론이 있다. 암컷 문어의 에스트로겐 수치는 산란 연령일 때와 수컷을 만날 때 급등한다. 수컷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도 올라간다.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은 인간의 욕구와 공포, 사랑, 즐거움, 슬픔에 관계하는 화합물이며서 여러 생물에게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든, 원숭이든, 새든, 바다거북이든, 문어든, 조개든 간에 내면 깊숙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생리적 변화는 동일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무뇌 생물인 가리비의 작은 심장조차도 포식자가 접근해오면 한층 빨리 뛴다.



인간은 다른 동물이 감정과 지능이 없다고 여기려 한다. 이런 선입견은 어류와 무척추동물에 대해서 특히 더하다. 하지만 동물은 우리가 상실했거나 결코 획득한 적 없는 감각이 확장된 세계에서 우리가 끝내 듣지 못할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존재다. 

















동물들이 잠을 자는 방식도 놀랍다. 돌고래와 고래는 꿈을 꾸지 않는 비렘수면으로 잠을 자는 데, 한쪽 뇌 반구만 잠들 수도 있다. 즉 어느 한 시점에는 뇌 반쪽만 잠을 자고 있다는 뜻이다. 한쪽 반구가 잠을 충분히 자고 나면 서로 교대하여, 깨어 있던 반구는 깊은 비렘수면에 푹 빠져든다. 뇌 반쪽이 자고 있을 때에도, 돌고래는 계속 움직이고, 심지어 음성대화까지 할 수 있다. 뇌 활성을 교대로 ‘켜고, 끄는’ 경이로운 기술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수생 포유류만 양쪽 뇌가 따로따로 깊은 비렘수면을 취하는 능력을 지니지 않았다. 조류도 할 수 있다. 조류는 주변을 지켜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새가 혼자 있을 때는, 뇌의 반쪽과 그 반쪽이 담당한 눈은 깨어서 주변에 어떤 위협 요인이 있는지 계속 지켜본다. 그렇게 할 때, 다른 쪽 눈은 감긴다. 그럼으로써 그 눈을 담당하는 뇌 반구는 잠이 들 수 있다.



새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는 더욱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일부 종에서는 새들이 무리지어 있을 때면, 양쪽 뇌 반구가 동시에 잠을 자는 개체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위협을 피할 수 있을까? 답은 참 창의적이다. 무리는 먼저 나뭇가지에 한 줄로 죽 늘어서 앉는다. 양쪽 끝에 있는 개체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뇌 양쪽 반구 모두가 잠에 빠져든다. 양쪽 끝에 앉은 새들은 뇌의 반쪽(서로 반대쪽)만 깊이 잠든다. 따라서 한쪽 끝 새는 오른쪽 눈을, 다른 한쪽 끝 새는 왼쪽 눈을 활짝 뜨고 있다. 그럼으로써 무리에서 양쪽 반구 모두가 동시에 잠들 수 있는 개체 수를 최대한 늘리면서, 무리 전체를 위해 두 마리 새만 위협 요인이 있는지 주변을 지켜본다.. 시간이 좀 지나면, 양쪽 보초병들은 일어나서 몸을 180도 돌려서 다시 앉아, 다른 쪽 뇌를 잠재운다.



대양을 건너서 수천 킬로미터 이주하는 철새들은 한 자리에서 충분히 잠잘 기회가 없다. 하지만 뇌는 이런 상황에서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철새들은 비행할 때 겨우 몇 초씩 지속되는 놀라울 만치 짧은 잠에 빠지곤 한다. 이 극도로 강력한 선잠만으로도, 오랫동안 전혀 잠을 자지 못했을 때 뇌와 몸에 닥칠 여러 결핍 증상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흰정수리멧새는 아마 장거리 비행 때 잠을 줄이는 능력 면에서 가장 경이로운 사례일 것이다. 이 흔한 작은 새를 미군이 수백만 달러 들여서 연구하고 있다. 미군은 24시간 잠을 자지 않는 군인을 만들고 싶은가 보다. 

















여왕개미 평균 수명은 14년이며, 한 마리가 평생 낳는 알의 수는 약 1억 5천만 개에 달한다. 이처럼 많은 알을 낳기 위해 여왕개미는 숫개미 여러 마리와 교미하며 적어도 정자 2억 개 이상을 비축한다. 여왕개미는 저정낭이라 불리는 정자주머니 속에 정자를 저장해 놓고 평생 사용한다. 여왕개미가 알을 낳을 때 저정낭에서 정자를 꺼내어 수정시키면 암컷이 되고 저정낭을 막아 미수정란을 낳으면 숫컷이 된다. 다시 말해 숫컷들은 동정녀로부터 태어난 개체다. 숫개미는 정자 도움 없이 오로지 난자로부터 만들어지는 반수체 동물이기에 그들 세포 속에는 언제나 단 한 벌의 염색체만 들어 있다. 숫개미는 아버지가 없는 개체다. 



남미 지역에 사는 잎꾼개미 군락 하나가 파 엎은 흙 양은 평균 20m^3가 넘으며 무게로 따지면 약 44톤이나 된다. 일개미 한 마리마다 자기 몸무게 너댓 배나 되는 흙덩이를 적어도 10억 번 이상 굴 밖으로 끌어낸다. 이파리를 운반할 때도, 사람으로 치면, 약 15km나 되는 귀갓길을 300kg이 넘는 짐을 입에 물고 시속 24km 속력으로 달리는 셈이다.



개미는 태양과 각도를 측정하여 갈 길 방향을 찾는다. 개미는 먹이가 있는 곳으로 가는 동안 태양과 각도를 측정해 두었다가 먹이를 짚어들고 180도 회전하여 집으로 향한다. 해를 방향지표로 사용하는 데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만일 먹이를 구하러 나가는 시각과 집으로 돌아오는 시각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생겼을 경우다. 하지만 개미 뇌 속에 생물시계가 있어서 한 시간에 15도씩 각도를 조절하여 정확하게 집으로 향한다.



일개미는 자기 의사도 전혀 없는 기계적인 개체가 아니다. 그들도 엄연히 독립적인 몸을 가지고 개별적인 삶을 영위하는 생명체다. 일개미가 알을 낳는 경우도 상당수 관찰되었다. 암놈인 일개미가 낳을 수 있는 알은 결국 미수정란이므로 모두 숫개미로 성장한다. 여왕이 버젓이 살아 있는 동안 일개미가 숫개미를 키우는 일이 언제나 순조롭지만 않다. 실제로 많은 종에서 여왕개미와 일개미들 간 갈등은 끊일 날이 없다. 일개미들은 대체로 여왕 화학물질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되는 군락 변방이나 굴 속 어느 한 방 입구를 막은 채 여왕 눈을 피해 자기들끼리 알을 낳는다. 여왕개미가 일개미의 역적모의를 눈치 채면 손수 역도 소굴로 행차하여 그들을 가차 없이 물어 죽이는 일도 있다. 개미 군락에서 일개미들이 아무런 지각도 없이 그저 전체 복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삼엄한 군주의 압제 하에서도 틈틈이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꿀벌이나 다른 곤충들이 빠르게 날갯짓을 하면 순간적으로 상당한 정전기가 발생한다. 정전기로 충만한 곤충 몸뚱이가 꽃 속으로 들어오면서 촉촉한 암술대와 암술머리에 닿으면서 식물의 중앙 관다발 시스템으로 직접 연결되는 전기장을 만들어낸다. 전기장은 뿌리로 연결되는 수분에 의해 접지되어 땅속으로 흐르게 된다. 이러한 정전기 이동은 곤충 몸에서부터 꽃가루가 떨어져 나와 암술머리에 달라붙기 쉽게 해준다. 또한, 꿀벌이 긴 겨울을 보내기 위해 취하는 방법 중 하나는 겨울 동안 자신들 머리 무게를 줄이는 것이다. 핀란드의 어느 한 학자가 꿀벌은 겨울에는 뇌 활동과 뇌 크기를 줄이고 꽃이 피는 봄에는 뇌 크기를 늘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야말로 겨울에 에너지를 절약하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자신 내부 컴퓨터 용량을 줄이는 것이다. 꿀벌을 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러한 ‘뇌의 축소’에도 불구하고 꿀벌은 겨울 동안에도 꽃이 피어 있던 방향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핀 머리만 한 크기의 뇌로서도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 것이다. 

















인간에게는 근면이 미덕이라는 윤리의식이 있지만, 게으름 피우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변별 있는 행동 양식이며,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이 공유하는 미덕이다. 이솝 우화에는 일벌과 일개미가 대단히 부지런한 동물로 나온다. 하지만 그 동물들이 과즙을 모으거나 집을 청소하는 시간은 낮 시간의 20%에 불과하다. 그외 시간에는 게으름뱅이처럼 일은 안 하고 빈둥거리기만 한다. 개미나 벌이 근면한 동물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것은 벌집이나 개미집 전체가 보여주는 번잡함 때문인 듯하다. 벌집이나 개미집은 겉보기에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작은 우주 같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각각의 개미와 벌이 매순간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개체 하나하나에 일일이 꼬리표를 붙여 관찰한 결과, 벌과 개미의 휴식 시간이 상당히 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최근에는 군집생활을 하는 곤충들이 사소한 활동에 에너지를 낭비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개미와 벌은 건전지와 같아서 집단을 위해 사용할 일정량의 에너지를 지니고 태어난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재충전 되지 않기에 빨리 사용하거나 천천히 사용할 수는 있지만 잘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한다고 해서 더 얻을 수는 없다. 결국 열심히 일할수록 빨리 죽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꿀을 모으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하는 벌들의 심정 공감된다.



인간은 생존에 쓰고도 남을 만큼의 자원을 모은다. 인간의 물욕은 대개 문화적인 탓인 것 같다. 사냥이나 채집을 통해 자원을 획득하고, 그렇게 획득한 자원을 대체로 그날그날 소비하는 동물들은 하루에 서너 시간만 일한다. 사실 일밖에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싶어 하는 선천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기에, 인간은 일부러 게으름을 육욕이나 대식과 함께 일곱 가지 죄악(seven deadly sins)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옥수수가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내보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다. 또는 나무가 다른 나무와 조난신호를 ‘주고받을 것’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한다. 또한 아무도 식물이 공격을 받게 되면 재빠르게 화학적 대응책을 강구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한다. 식물들은 단순히 한자리에 앉아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하면 이에 대응할 수 있고 또 방어물질도 동원할 수 있다. 비록 식물이 신경망도 없고 뇌도 없지만 그들 세포는 서로 연락도 할 수 있고 협조된 대응 체계도 만들어낼 수 있다. 비록 전기충격처럼 신경 섬유를 따라 빠르게 전달할 수는 없지만 식물의 여러 다양한 부분은 질병에 대해 반응할 수 있고 식물의 다른 부분과 의사소통을 할 수도 있다. 몇 년 전만해도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놀라운 발견이었다.



옥수수는 상업적으로 중요한 작물이기에 많은 연구가 있었으나 최근에서야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먹성이 좋은 옥수수 천공충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먹거리인 옥수수 줄기를 갉아먹기 시작하면 옥수수는 냄새나는 화학물질을 만들어내 이에 대응한다. 이 화학물질은 휘발성이 강하고 바람에 의해 멀리까지 전달된다. 이 냄새는 바로 조그만 나나니벌들을 자극해 모여들도록 하는데, 나나니벌은 옥수수 천공충 애벌레에 모여든다. 암컷 나나니벌은 천공충 애벌레 몸뚱이 속에 알을 낳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나나니벌 애벌레가 깨어나 자라나면서 옥수수 천공충 애벌레를 서서히 안으로부터 갉아먹는다. 나나니벌 애벌레가 당장은 옥수수를 보호해주는 못한다. 천공충 애벌레는 금세 죽지 않고 계속해서 옥수수 줄기를 갉아먹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공충 애벌레가 성충이 되는 것을 막아 천공충 번식을 제어하기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대단히 중요한 방어 전략이 된다.



생물학자들은 꽃을 피우는 식물을 속씨식물이라고 부른다. 속씨식물 종의 수는 대략 26만여 종이나 된다. 지구상 모든 식물 종의 수가 30만 종정도 된다고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 주변 식물 중에서 속씨식물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꽃을 피우는 식물이 생물학적 분포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나비나 나방, 딱정벌레, 벌, 베짱이, 메뚜기 같은 곤충들만 전부 더해도 100만 종은 훌쩍 넘기 때문이다. 딱정벌레만 해도 그 종류가 4만5,000종을 넘고 지금도 새로운 종이 매일매일 발견되는 실정이다.



생물학은 정확하게 말하면 과학이 아니다. 화학이나 물리학과는 다르게 어떤 규칙이나 법칙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에는 몇 가지 단순한 규칙이 보이기는 하지만 생물학 분야는 일반적으로 광범위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꽃’과 같은 정도의 생물은 아주 간단하게 그 정의와 특성을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꽃은 그 크기나 모양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다양하다. 



우리가 동물이나 식물이 단순하고 열등하다고 여겨 지배하려 든다면, 우리가 만든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하는 일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며 물리학자 김상욱(1970~ )은 우리의 잘못된 논리를 꼬집는다. “폭발물 탐지 로봇은 인간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위험에 몸을 내던진다. 기계지능이 인간과 비교하여 열등한 것이 있다면 욕심이 없다는 것이다. 수많은 종교가 추구하던 궁극의 경지란 대개 자아와 욕심을 버려서 도달하는 상태다. 기계지능은 버려야 할 자아나 욕심이 아예 없다. 기계지능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한 열반의 경지에 이미 도달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 대신 이들이 지구를 지배할 때 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 상상하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지도 모른다. 더 낫다는 기준에 반드시 인간이 고려되어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2010) 저자 존 그레이에게 인본주의의 다른 말은 곧 악의 상징, 루시퍼의 속성인 ‘오만’이다. 인간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경계를 넘어’버렸다는 의미에서 그에게 거의 ‘악’에 가까우며, 그 대표적인 오만한 인간의 사상이 인본주의라는 것이다. 그레이에게 서양 인본주의의 기원은 기독교에 있다.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은 좌든 우든 기본적으로는 이 ‘인본주의’ 사상과 ‘진보’의 결합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는 게 그레이의 주장이다. 기독교의 힘은 어느새 사라져버렸고, 그 자리에 과학과 기술이 들어와서 종교의 위치를 차지했다. 인간은 다시 자신이 과학과 기술을 잘 다스려서 운명을 개척하여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과학과 기술이 ‘객관적 지식’인 듯 보여도 그것의 활용방식은 인본주의이고, 그 인본주의의 기원은 기독교이고, 기독교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편협한 신화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 역시 하나의 허상이다.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조슈아 그린(1974~ )은 “인본주의가 중요한지 아닌지 알아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다. “인본주의는 우리의 주관적 느낌을 마치 추상적인 도덕적 실체인 양 만드는 편리한 합리화 도구일 뿐이다. 합리적 논증이 필요 없는 상황이라면 인본주의를 수사적인 무기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인본주의에 호소하는 것은 논증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논증의 시간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사람-동물 관계에서 뿐 하니라 사람-사람 관계에서도 수사적인 무기로 삼지 말아야 한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1949~ )은 인본주의가 지배 계급의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비판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틈이 메워질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커지고 있는데도 인본주의 방식은 이런 진짜 모순을 덮으면서 시스템 문제를 ‘인간’과 개인 문제로 돌려버린다. 겉으로 진보적이고 의식 있게 보이는 인본주의이야말로 오히려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평론가 문강형준(1975~ )은 휴머니즘 강조가 사회문제를 개인 ‘인간’ 문제로 둔갑시킨다고 비판한다. <인간극장>처럼 휴머니즘(인본주의)을 방영하는 다큐멘터리는 “매번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감동적으로 그려내,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일상의 행복’을 선전하는 프로그램은 일말의 진실은 있을지 몰라도, 생활세계의 잡다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을 싸잡아 ‘마음의 변화’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런 메시지야말로 힘든 세상 문제는 그대로 두고 정신의 변화만 요청해서 자기만의 가짜 행복에 빠져들게 만드는 아편이기도 하다. 오직 마음의 문제로만 환원시키면 결국 사회와 인간의 분리만 가속된다. 행복은 결코 개인적인 결단으로만 가능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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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습관들이기 나름인가 보다!” 

- 셰익스피어, 『베로나의 두 신사』 中








4,000년 동안 존재했던 인간사회 100여 개를 표본 삼아 분석한 한 인류학자는 식인풍습 사회가 34%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현재 식인이 불러일으키는 우리 혐오감은 보편적인 일이 아니다. 인류에게 식인이 생각보다 낯선 일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왜 식인을 할까? 예를 들어, 비행기 추락사고의 생존자들이 굶어죽을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람들은 대개 먼저 죽은 사람을 먹는 것이 도덕적으로 용납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아닐지라도 사람은 식인을 왜 할까?
















특정 사회에서는 시체를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먹는다. 인류학자들은 자기 부족 시체를 먹는 행위를 족내 식인풍습이라고 부르는데, 다양한 형태가 있다. 베네수엘라 아마존의 야노마미족은 시체를 장작불에 태워서 타고남은 뼈 조각을 수습해서 가루로 만든다. 죽은 자 친척들이 뼈 가루를 바나나 죽에 섞어 먹는다. 반대로 파라과이의 구아야키족은 시체를 잘라서 굽는다. 죽은 사람 가족을 제외한 부족 전체가 시체 살을 종려나무 수액에 곁들여 먹는다. 뼈는 잘라서 불태워 버린다. 족내 식인풍습은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를 흡수한다는 의미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완전히 통합된다. 

















장례의식 절차로써 자손이 죽은 자를 먹는 것이 허락된 사회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원한 결합을 상징한다. 이런 사회에서 적절한 식인 의식이 거행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 삶이 불행해 질 것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 같은 장례 만찬은 종교적인 일체감과 관계가 있거나, 죽은 자의 살이 살아있는 자들을 은유적으로 먹여 살린다는 생각과도 관계있다. 물론 그런 의식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정당성이 부여되더라도 오늘날에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회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모든 문화에서 쉽게 인정하는 가치 – 고인의 마지막 소망을 존중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 사랑의 표현 –를 고려한다면 그렇다. 고인에 대한 존경이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반면, 투피-구아라니족이나 카리브족처럼 많은 남미 부족은 전쟁 포로를 처형하여 의례적으로 먹었다. 아즈텍 사람들도 수십만 명을 식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즈텍 문명은 전쟁-인신 공양-식인풍습의 복합적 문화 풍습을 만들었다. 식인 대상은 주로 전쟁 포로였다. 아즈텍 군대는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의식 후 식인할 포로를 되도록 많이 잡아오는 일에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적의 항복이 이루어지기 전에 너무 많은 적군을 죽이게 될까봐 군사적 우세를 밀고 나가는 것을 종종 삼갈 정도였다. 아즈텍 문명의 피라미드는 가파른 경사로가 있는데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희생자 몸뚱이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쉽게 굴러떨어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 희생자를 성직자가 거두어다 사람들에게 인육으로 배분했다. 아즈텍인들의 식인풍습은 종교적 의식 일환으로 사람을 겉치레로 먹는 시늉이 아니었다. 식인풍습은 불과 100년 전까지도 전 세계 광범위하게 생각보다 많이 행해진 문화였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사람에게 식인은 천성이 아니지만, 문화적으로 이에 쉽게 길들여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류는 ‘천성이 아니지만’ 주변 생태 환경이 파괴되고 고갈되어 먹을 것이 없을 경우에만 식인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을까? 문명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 듀런트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밝힌다. “다른 식량이 부족해 식인풍습이 생겼다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일단 생겨난 인육에 대한 입맛은 식량부족 사태가 해결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인육은 사람들이 열렬히 찾는 대상이 되었다. 원시 부족은 인육을 즐겨 먹는 것을 절대 수치로 느끼지 않았다. 아마 인육을 먹은 것이나 동물 고기를 먹는 것이나 도덕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식인 풍습은 한때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원시부족 중 식인풍속이 없는 곳은 거의 없었다. 멜라네시아에서는 친구들에게 구운 인육을 대접하면 추장의 사회적 명성이 크게 높아지곤 했다. 브라질의 한 현인 추장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인육보다 맛있는 사냥감은 알지 못 한다. 당신네 백인들은 정말 음식을 너무나 가린다.” 



아일랜드인, 이베리아인, 픽트인(로마 제국 시기부터 10세기까지 스코틀랜드 동부 및 북부에 거주하던 부족), 11세기 데인족(덴마크계 게르만족) 같은 후대 종족들도 식인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고기를 주요 교역 상품으로 취급하고, 장례식 같은 건 모르던 부족도 상당수 달했다. 콩고의 우알라바 강에서는 남자와 여자, 어린 아이를 말 그대로 식품 일종으로 산 채 사고팔았다. 뉴브리튼 섬에는 현재 우리가 정육점에서 고기를 팔 듯 인육을 파는 가게가 있기도 했다. 솔로몬 제도 일부 지역에서는 잔치에 쓰기 위해 인간 제물을(여자를 더 선호했다) 돼지처럼 살찌우기도 했다. 한편 푸에고인들(남미 마젤란 해협 남쪽 섬사람들)은 ‘개고기에는 수달 맛이 난다’며 여자 인육을 개고기보다 높이 평가했다. 타이티 섬의 한 늙은 폴리네시아인 추장은 자신이 먹는 음식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백인 고기는 제대로 구우면 잘 익은 바나나 맛이 난다.” 하지만 피지인들은 백인 인육은 너무 짜고 질기며, 유럽 선원 인육은 먹을 수 없는 지경이라며 불평하곤 했다. 폴리네시아인 인육 맛이 더 났다는 것이다.



한편 16세기 철학자 몽테뉴 눈에는 죽은 사람을 구워먹는 것보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고문하는 것(몽테뉴가 살던 시대에는 그런 일이 다반사였다)이 더 야만적인 일로 비쳤다. 듀런트는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 인간은 서로가 가진 착각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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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법칙과 도덕법칙은 원래 하나다.

- 헨리 조지


경제학은 수학이 아닌 사상이다. 

경제학에서 단호하게 주장될 수 있는 

일반 규칙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 존 스튜어트 밀







17세기까지 유럽에서 경제학은 독립된 학문이 아니었다. 사업 경영은 대학 교과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을 중심으로 배우는 윤리학에 속했다. 상품의 ‘적정’ 가격은 시장이 아니라 길드 조직이나 왕실 대표단이 정했기 때문이다. 18세기 들어서자 경제와 도덕이 분리되었다. 당시 탄생한 근대 국가가 인구 규모와 생산성, 국제무역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주체가 되자, 유럽 몇몇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이 합쳐진 정치경제학이 탄생했다. 그렇지만, 19세기 중반 존 스튜어트 밀과 칼 마르크스가 마지막 정치경제학자가 되었다. 1870년대가 되면 경제학계에서 ‘개인의 경제 행위‘를 기초로 새로운 경제 이론을 세우려는 ‘혁명’이 일어나자, ‘정치경제학’이 ‘경제학’으로 바뀌었다. 즉, ‘정치경제학’은 경제 영역을 사회의 한 영역으로 생각하면서 경제 영역과 기타 영역(정치와 법률, 사상, 문화 등) 사이의 관계까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반면 축소된 ‘경제학’은 개인(소비자, 생산자, 투기꾼 등)이 자기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제 경제활동에 녹아있던 여러 정치적, 사회적 차원은 은폐된다. 경제학은 경제적 가치를 사회 전체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행위자에게 총 자산이 주어졌을 때 ‘한계적’ 증가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엘프리드 마셜은 이러한 새 패러다임을 종합하여 『경제학 원리』(1890)를 저술했다. 이제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인문학이 학문의 전부였는데, 19세기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과거 연구에 한정되자, 현재 상황을 중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은 사회과학인 경제학과 정치학, 사회학을 성장시켰다. 사회과학은 자본주의의 작동 메커니즘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지식 토대를 제공했다. 

















경제학은 점차 추상적인 ‘순수’ 경제이론이 지배하게 되었다. 정치로부터 더욱 확실하게 단절되면서, 수학 특히, 미분이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다. 1872년에 프랑스의 경제학자 레옹 발라는 미분 방정식을 이용하여 경제학을 최초로 수학화한 인물이다. 레옹 발라는 경제 시스템의 균형점과 자연에서의 균형점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보았다. 자연계를 보면 작용하는 모든 힘이 서로 상쇄돼 시스템이 균형 상태에 놓일 때, 비로소 균형이 이루어진다. 한 행성이 궤도에서 별 주위를 돌 때 행성을 안으로 끌어당기는 별의 중력과 그것을 밖으로 밀어내는 원심력이 서로 만나면서 균형을 이루는 것과 같다. 레옹 발라가 경제학에 수학을 끌어드린 이유는 경제 시스템, 특히 가격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그렇기에 예측을 위한 안정적인 균형점만을 고려한 것이다. 

















경제학의 역사를 시간 순서로 돌아보면, 짚어봐야 할 세 가지 문제점을 알 수 있다. (1) 현대 많은 경제학자는 경제학과 도덕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은 우리가 세상을 움직이고 싶은 방식이고, 경제학은 세상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학은 도덕과 분리될 수 있는가? (2)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을 도덕 관계, 문명사,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 문제와 구분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경제학을 ’정치가가 연구하는 학문 분야‘로 규정했다. 하지만, 고도화된 현대 시기에는 경제학을 정치학과 분리해야 하는가? (3) 경제학자를 포함한 많은 사회과학자는 인간 의식과 그에 따른 행동을 우리가 찾아낼 수 있고 법칙까진 아닐지라도 그 영향을 분석할 수 있는 모종의 규칙을 따른다는 확신한다. 그렇다면 경제학은 사회’과학‘인가?

















먼저, (1) ‘경제학은 도덕과 분리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부터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는 ‘외부효과’(externalities) 이론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영리 기업 이득은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총체적 ‘피해’에 비례하여 증가하기 때문이다. 외부효과란 개인이나 기업의 경제 활동이 사회에 피해를 주지만,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서 비용이나 가격이 너무 낮게 책정되는 현상을 말한다. 예컨대, 단지 버스 이용보다 자가용 이용이 더 싸기에, 자가용 이용을 더 선호한다고 해 보자. 그런데 자가용 이용 비용이 덜 드는 이유는 그에 따르는 모든 비용을 내가 부담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교통이 더 혼잡해지고 공기가 오염되고 소음이 발생하고 지구 자원이 고갈되는 비용 전부를 내가 다 물어야 한다면, 버스 타는 일보다 자가용 모는 쪽이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더 비싸다. 유럽을 예로 든다면, 이동 수단의 80%를 담당하는 승용차는 환경에 특히 나쁜 영향을 미친다. 혼자 승용차를 탈 때 1킬로미터당 배출되는 탄소 양이 장거리 비행 시 배출되는 탄소 양과 동일하다. 그래서 실제로 승용차를 모는 이들에게 차 소유에 따르는 비용 전체를 물린다면 엄청난 부자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자가용을 몰 수 없다. 여기서 소음이나 교통 혼잡, 대기 오염 등을 ‘외부효과’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생산과 소비는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기에 항상 외부효과를 낳는다. 그렇지만 내가 차를 몰지 버스를 탈지 결정하는 데 이러한 문제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따라서 외부효과를 차단하고자 오염 비용을 지불하도록 강제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일단 오염 비용을 물고 난 뒤에는 자유롭게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오염물질을 방출할 수 있는 특권(예컨대 탄소배출권)이 생긴다. 지불이란 사람들에게 일체의 책임을 면제해 준다. 탄소배출권은 환경오염에 도덕적 허가증이나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이렇게 확립된 시장에서 자신 특권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외부효과를 더 많이 늘릴 것이다. 즉 개인이나 기업은 자신이 사회에 전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비용을 전가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특권화된 ‘외부효과’는 자유 시장 경제에서 자기 이익을 쫓는 사람이 자동적으로, 그것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보편적인 공공의 불행을 극대화하는 데 소임을 다하도록 보장해준다. 

 















사람들은 탄소배출권을 비난하거나 반대하는 대신 ‘지속가능경영’이나 ‘ESG경영’이란 이름 아래 당연한 제도로 받아들인다. 기껏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을 상대로 벌이는 “사다리 걷어차기”라고만 볼 뿐이다. 철학자 세르주 라투슈는 『탈성장사회』에서 ‘지속가능’이란 단어는 ”사회의 이익이라는 환상 뒤에 자본 이익을 은폐하고 희생자들 저항 운동을 마비시키는 일이다"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진정한 사고(思考)의 독(毒)이다. 이는 대단한 모순어법이다." 사실 사람들이 탄소배출권을 나쁘게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 권한을 타인에게 양도하려면 권한 기반까지 양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산업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부수적인 환경오염을 참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참을 수 있는 기반 산업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예컨대 귀중한 의약품을 생산하는 산업의 환경오염은 참을 수 있지만, 고작 번지점프 장비를 생산하는 회사에 우리 희생을 양도하여 낭비시킬 수 없다. 탄소배출권 거래를 사고 팔 수 없는 정당한 이유는 번지점프 장비를 생산하는 업체가 귀중한 의약품을 생산하는 업체보다 탄소 배출을 단지 더 강렬하게 욕구한다고 해서 법이나 도덕적으로 더 강력하게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욕구(desire)한다고 항상 요구(claim)할 수는 없다. 

 
















정치학자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정부는 대기에 과도한 오염물질을 뿜어대는 기업을 위해 오염권 거래제도를 도입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도덕적 오명을 씌우고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늘 그렇듯 도덕적 논리가 없이는 시장논리도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제학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도 이렇게 말한다. “도덕은 거래나 장사 대상이 될 수 없다. 도덕을 행하려면 자신이 직접 책임과 리스크를 지고 현실에 뛰어들어야 한다.” 

















두 번째, (2) 경제학을 정치학과 분리해야 한다는 논리는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기 보다는 시장을 그냥 놔두는 일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믿음이다. 시장에서 정부는 전혀 필요 없다. 시장경제는 소위 자연 상태에서 완벽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사회가 개인 이익 추구 원리와 더불어 수요·공급의 경제법칙이 만유인력의 운동 법칙처럼 작동한다고 보았다. 그 결과 경제학에서 자유방임주의 이론들이 생겨났다. 자유방임 경제 철학은 비간섭 원리로서, 세상의 체제는 자율적이기에 더 낫게 하려고 시도해보았자 더 나빠질 뿐이므로 그대로 놔두라는 권고다. 경제학 법칙들이 – 자연의 법칙과 똑같이 – 신에 의해 확립된 이상 그 법칙들로부터 나온 것은 모두 틀림없이 좋은 것이라고 가정했기에, 경제학을 정치학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방임주의는 바로 그런 의미였다. 



신이 경제학 법칙을 자연 법칙과 똑같이 확립했다고 생각한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18세기 사상가들은 신이 이성적인 계획에 따라 세상을 만들었고, 신의 계획을 뉴턴이 이성을 사용하여 발견해냈다고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하찮은 인간이 무한하게 넓은 신의 마음, 특히 선한 신이 세상에 악(惡)을 왜 창조했는지는 결코 헤아릴 수 없다는 예전 믿음은 당시 새로운 생각과 더 이상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뉴턴의 발견 그리고 이 발견 위에 세워진 자연신학의 전반적인 요점은 뉴턴이 실제로 신의 마음을 헤아렸으며, 그것을 수식으로 증명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18세기 사상가들은 악의 문제에 답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다. 이들 추론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 신은 지극히 그리고 완전히 선하다. 정의상 신은 악을 행할 수 없다.

. 신은 뉴턴이 밝힌 대로 이성, 논리, 수학 등의 법칙에 따라 우주를 창조했다.

. 이 두 가정은 서로 상반될 수 없다. 만약 상반된다면 신은 전능하기에 이를 미리 알았을 것이며, 신의 선함으로 인해 이성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기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 게다가 만약 이성의 법칙으로 인해 신이 하나보다 더 많은 종류의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면, 신은 선한 존재이기에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가장 최상의 세계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 따라서 이 세계는 모든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상이다.



당시 사상가 대다수에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은 만약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서 최상이라면 이 세계를 변화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의 모든 악과 고통은 신의 계획의 일부이기에 전체 체계에 어떻게든 이득임이 틀림없다. 신이 운동 법칙으로 물리적 세계를 창조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스스로 작동하듯, 신은 인간 세계를 (인력이나 척력이라는 자연법칙과 유사한) 사회적 상호작용 법칙으로 창조하였고, 이 법칙에 따라 가장 조화로운 사회 질서가 마련되었다. 이 모든 사상의 최종적인 결과는 자유방임이라는 근본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학 철학이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자유방임주의 사상은 청교도주의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며, 중세와 근대와 달리 신학적 기반을 떠난 현대 사상에서 자유방임과 같은 자연 상태 이론은 공감대 형성 부족으로 불완전 이론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현실의 시장에서는 개인들의 권력이 평등한 것도 아니고 개인만 자원 배분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어떤 사람은 더 큰 자원 배분 권력을 갖고 있으며 다른 사람은 자원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집단을 만든다. 그 결과 대부분의 주요한 경제적 자원은 이러한 사람들과 집단들에 의해 권위적으로 배분된다. 토지와 화폐, 노동과 같은 대부분의 주요한 경제적 자원은 항상 정치적으로 배분되고 그것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정치와 권력이 배제된 순수한 시장에 의한 자원 배분은 불가능하며, 시장에만 맡기는 그 순간에도 시장 내부에서 정치와 권력은 작동한다. 그러므로 경제에 정치와 권력이 부재하는 상황을 가정하거나 바라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묻어 들어 있음’(embeddedness)이란 개념을 항상 자신 논리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간 경제는 여러 시장이 통합되어 균형을 찾아가는 체제가 아닌, 항상 사회에 묻어 들어가 있다. ‘묻어 들어 있음’이라는 용어는 자유주의 경제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가 정치와 종교, 사회관계들에 종속되어 있다는 생각을 표현한 말이다. 반면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자기 조정 시장’ 체제는 거꾸로 사회를 시장 논리에 종속시킬 것을 요구한다.” 

















더욱이 경제학자 랭카스터와 립시는 ‘차선(次善)’이론으로 자유방임 이론이 틀렸다는 점을 짚어낸다. 차선이론은 비록 자유방임 이론이 사실이라 해도 무의미하다고 본다. ‘차선’인 시장, 즉 완전경쟁 시장에 ‘거의 근접하는’ 시장이 세 번째나 네 번째로 좋은 시장, 혹은 아예 완전히 비경쟁적인 시장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의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자유방임의 근본적인 전제는 만약 모형 전제가 현실과 닮았다면 모형 결과 또한 현실과 근접하리라는 추론이다. 유감스럽게도 자유방임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지난 수십 년간 바로 그런 오류에 기대어 논의를 펼쳐왔다. 



완전경쟁 시장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시장이라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완전경쟁시장이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문제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시장을 ‘가능한’ 경쟁적으로 만들기만 하면 그 결과는 이상에 확실히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랭카스터와 립시가 밝혀낸 오류였다. 경쟁과 관련한 모형의 현실성은 효율에 관한 현실성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현실이 완전경쟁의 이상과 한 군데라도 어긋나면 최선의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완전경쟁에 가장 근접한 상태에서 얻어지는 결과는 어떤 다른 차선책에서 얻어지는 결과보다 못하리라는 것이 다. 완전경쟁 요건을 더 많이 충족시킬수록 – 전부 충족시키지 않는 한 – 완전효율이라는 이상에서 더욱 멀어진다.



특히, 앞에서 언급된 부정적 외부효과(공해, 소음, 악취 등)가 발생하는 부문에서 재화 가격은 모형이 예측하는 가격과 어긋나게 된다. 자유방임주의 수호자들은 아무 문제없다고 말한다. 어느 한 분야에서 정상적으로 가격이 매겨지지 않더라도 나머지 부문을 전부 경쟁적으로 만들어 올바른 가격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차선이론이 바로 그러한 정책 해법으로는 효율을 증대시킬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가격이 잘못됐으면 나머지 가격이 올라도 소용없다. 달리 표현하면, 다수 가격이 왜곡되어 있는 경제에서 하나만 시정하면 상황이 오히려 악화될 수 있다. 



차선이론이 우리에게 확실히 가르쳐주는 것은, 일반균형 모형에서 유용한 정책안을 끌어내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단순한 도구는 현실에서 무엇이 최선일지 알려주지 않는다. 각각의 상황은 – 각 부문, 각 시장, 각 정책안은 - 그 각각의 장단점을 따져 평가해야 한다. 차선이론이 가져온 가장 주된 효과는 경제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을 ‘겸손해지게’ 만들었다는 점이라고 립시는 설명했다. 자선이론은 극도로 이상화된 하나의 모형을 근거로 시장의 효율성에 관해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끝으로, (3) 경제학은 사회‘과학’인가?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사회적 행위의 원인과 과정,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사회적 행위에 대한 해석적 이해를 추구하는 과학이 바로 사회학”이라고 규정지었다. 베버는 “행위의 규칙성 발견이야말로 사회과학이 천착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굳게 믿었다. 즉 그가 지향하는 사회학 목적지는 사회현상의 인과적 설명을 포함하는 해석적 이해였다. 경제학자를 포함한 사회과학자들은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종속변수와 독립변수를 구별하며, 어떻게 하면 독립변수를 분리해낼 수 있는지 고민한다. 사회과학은 환원주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환원주란 현실을 여러 부분으로 쪼개보았을 때 전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다른 모든 변수 값을 결정할 어떤 변수를 방정식 내에서 찾는 것이며, 인과관계 사슬에서 빼냈을 때 결과를 바꿀 요소를 찾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들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종속변수로 발생하는 셀 수 없이 많은 현상을 독립변수로 설명하는 일이다. 환원주의에서는 중요도 순으로 원인 등급을 매기는 것이 필수다. 환원주의는 독립변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다는 점을 가정한다.
















사회과학자들은 환원주의 관점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도록 과거를 일반화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미래가 가진 문제는 과거에 비해 알려진 것이 너무 없다는 사실이다. 미래는 현재라는 특이점의 저편에 놓여 있기에 우리가 미래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과거로부터 어떤 연속성이 미래로 확장되어 나갈 것이라는 점과, 거기에서 또 우연을 만나게 되리라는 사실뿐이다. 물론 어떤 연속성은 너무나 강력해서 우연에 영향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의식 자체가 우연성이 될 경우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문제가 된다. 사회과학은 이런 문제를 너무나 자주 부정해왔다. 일반적인 경우 사회과학자들은 인간 의식과 그에 따른 행동은 찾아낼 수 있고 법칙까진 아닐지라도 그 영향을 분석할 수 있는 모종의 규칙을 따른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표준화된 사회과학 모델’은 사람들이 복잡한 여러 이유 때문에 특정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한두 가지 기본적인 ‘원인’으로 간결하게 설명하려 한다. 이러한 방법론은 인간 행동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시간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하면서 정적인 경향으로 흐를 수 있다. 또 보편적인 적용 가능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에 서로 다른 문화에서 상이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된다. 실제 경제와 정치 역사는 정확하기보다 부정확한 정보를 근거로 선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회귀분석 등 외삽(外揷, extrapolation: 데이터가 없는 부분을 가깝다고 생각하는 데이터로 미루어 추정하는 방법)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거나(인구 증가, 전염병 확산), 구조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는 대상을 예측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1849년 마차가 증가하기 시작한 런던에서 예측한 자료에는 1940년대가 되면 런던 모든 거리에 말똥이 거의 3미터 높이로 쌓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1908년 포드 T-모델 자동차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구조적인 변혁이 있었고 말똥이 쌓이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는 예측을 위한 변수가 많을수록 정확도가 증가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예측 모델에 변수가 추가되더라도 잘못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대표적 사례가 2011년 강도 9.1 규모의 지진이 일본 후쿠시마를 강타한 원전붕괴 사고다. 처음에 일본은 몇 가지 변수로 후쿠시마에 진도 9.1 지진이 약 300년마다 한번 발생한다고 예측했다. 이런 발생 빈도가 적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 전문가들은 일본 안전 성향과 경제 수준을 고려하면, 일본이 이 정도 발생 가능성을 충분히 대비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나중에 일본은 후쿠시마 원자로의 지정학적 위치와 같은 몇 가지 변수를 추가했다. 이럴 경우 지진 발생 가능성은 1만3천 년에 한 번 발생하는 것으로 예측이 변경되어 일본은 대비를 충분하게 하지 않았다. 예측 변수가 많아지더라도 정확도가 낮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황이나 사건의 전체 변수를 알지 못하기에 우리가 단편적으로 알게 된 추가적인 변수가 다른 변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 이처럼 변수를 지나치게 많이 반영하는 과잉적합(overfiting) 예측 모델은 신호(signal)가 아닌 알려지지 않은 소음(noise)에 더 적합하게 적용되어 결과가 매우 잘못될 수 있다. 

 















경제학은 부와 기회, 사회 복지 분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심오한 도덕적 문제를 초래한다. 따라서 경제 분석에는 반드시 윤리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경제학자는 빈곤이나 불평등, 환경, 사회 정의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책임이 있다. 더욱이 경제정책 실행에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과정과 협상, 타협이 수반된다. 따라서 경제학은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 끝으로 자연과학과 달리 경제학은 인간 행동과 관련된 복잡하고 역동적인 시스템을 다루기에 정밀하게 모델링하거나 예측하기가 어렵다. 경제 현상은 문화적 규범이나 역사적 맥락, 제도적 장치와 같은 다양한 요인에 영향을 받기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률이나 이론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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