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법칙과 도덕법칙은 원래 하나다.
- 헨리 조지
경제학은 수학이 아닌 사상이다.
경제학에서 단호하게 주장될 수 있는
일반 규칙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 존 스튜어트 밀
17세기까지 유럽에서 경제학은 독립된 학문이 아니었다. 사업 경영은 대학 교과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을 중심으로 배우는 윤리학에 속했다. 상품의 ‘적정’ 가격은 시장이 아니라 길드 조직이나 왕실 대표단이 정했기 때문이다. 18세기 들어서자 경제와 도덕이 분리되었다. 당시 탄생한 근대 국가가 인구 규모와 생산성, 국제무역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주체가 되자, 유럽 몇몇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이 합쳐진 정치경제학이 탄생했다. 그렇지만, 19세기 중반 존 스튜어트 밀과 칼 마르크스가 마지막 정치경제학자가 되었다. 1870년대가 되면 경제학계에서 ‘개인의 경제 행위‘를 기초로 새로운 경제 이론을 세우려는 ‘혁명’이 일어나자, ‘정치경제학’이 ‘경제학’으로 바뀌었다. 즉, ‘정치경제학’은 경제 영역을 사회의 한 영역으로 생각하면서 경제 영역과 기타 영역(정치와 법률, 사상, 문화 등) 사이의 관계까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반면 축소된 ‘경제학’은 개인(소비자, 생산자, 투기꾼 등)이 자기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제 경제활동에 녹아있던 여러 정치적, 사회적 차원은 은폐된다. 경제학은 경제적 가치를 사회 전체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행위자에게 총 자산이 주어졌을 때 ‘한계적’ 증가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엘프리드 마셜은 이러한 새 패러다임을 종합하여 『경제학 원리』(1890)를 저술했다. 이제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인문학이 학문의 전부였는데, 19세기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과거 연구에 한정되자, 현재 상황을 중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은 사회과학인 경제학과 정치학, 사회학을 성장시켰다. 사회과학은 자본주의의 작동 메커니즘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지식 토대를 제공했다.
경제학은 점차 추상적인 ‘순수’ 경제이론이 지배하게 되었다. 정치로부터 더욱 확실하게 단절되면서, 수학 특히, 미분이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다. 1872년에 프랑스의 경제학자 레옹 발라는 미분 방정식을 이용하여 경제학을 최초로 수학화한 인물이다. 레옹 발라는 경제 시스템의 균형점과 자연에서의 균형점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보았다. 자연계를 보면 작용하는 모든 힘이 서로 상쇄돼 시스템이 균형 상태에 놓일 때, 비로소 균형이 이루어진다. 한 행성이 궤도에서 별 주위를 돌 때 행성을 안으로 끌어당기는 별의 중력과 그것을 밖으로 밀어내는 원심력이 서로 만나면서 균형을 이루는 것과 같다. 레옹 발라가 경제학에 수학을 끌어드린 이유는 경제 시스템, 특히 가격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그렇기에 예측을 위한 안정적인 균형점만을 고려한 것이다.
경제학의 역사를 시간 순서로 돌아보면, 짚어봐야 할 세 가지 문제점을 알 수 있다. (1) 현대 많은 경제학자는 경제학과 도덕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은 우리가 세상을 움직이고 싶은 방식이고, 경제학은 세상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학은 도덕과 분리될 수 있는가? (2)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을 도덕 관계, 문명사,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 문제와 구분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경제학을 ’정치가가 연구하는 학문 분야‘로 규정했다. 하지만, 고도화된 현대 시기에는 경제학을 정치학과 분리해야 하는가? (3) 경제학자를 포함한 많은 사회과학자는 인간 의식과 그에 따른 행동을 우리가 찾아낼 수 있고 법칙까진 아닐지라도 그 영향을 분석할 수 있는 모종의 규칙을 따른다는 확신한다. 그렇다면 경제학은 사회’과학‘인가?
먼저, (1) ‘경제학은 도덕과 분리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부터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는 ‘외부효과’(externalities) 이론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영리 기업 이득은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총체적 ‘피해’에 비례하여 증가하기 때문이다. 외부효과란 개인이나 기업의 경제 활동이 사회에 피해를 주지만,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서 비용이나 가격이 너무 낮게 책정되는 현상을 말한다. 예컨대, 단지 버스 이용보다 자가용 이용이 더 싸기에, 자가용 이용을 더 선호한다고 해 보자. 그런데 자가용 이용 비용이 덜 드는 이유는 그에 따르는 모든 비용을 내가 부담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교통이 더 혼잡해지고 공기가 오염되고 소음이 발생하고 지구 자원이 고갈되는 비용 전부를 내가 다 물어야 한다면, 버스 타는 일보다 자가용 모는 쪽이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더 비싸다. 유럽을 예로 든다면, 이동 수단의 80%를 담당하는 승용차는 환경에 특히 나쁜 영향을 미친다. 혼자 승용차를 탈 때 1킬로미터당 배출되는 탄소 양이 장거리 비행 시 배출되는 탄소 양과 동일하다. 그래서 실제로 승용차를 모는 이들에게 차 소유에 따르는 비용 전체를 물린다면 엄청난 부자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자가용을 몰 수 없다. 여기서 소음이나 교통 혼잡, 대기 오염 등을 ‘외부효과’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생산과 소비는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기에 항상 외부효과를 낳는다. 그렇지만 내가 차를 몰지 버스를 탈지 결정하는 데 이러한 문제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따라서 외부효과를 차단하고자 오염 비용을 지불하도록 강제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일단 오염 비용을 물고 난 뒤에는 자유롭게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오염물질을 방출할 수 있는 특권(예컨대 탄소배출권)이 생긴다. 지불이란 사람들에게 일체의 책임을 면제해 준다. 탄소배출권은 환경오염에 도덕적 허가증이나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이렇게 확립된 시장에서 자신 특권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외부효과를 더 많이 늘릴 것이다. 즉 개인이나 기업은 자신이 사회에 전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비용을 전가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특권화된 ‘외부효과’는 자유 시장 경제에서 자기 이익을 쫓는 사람이 자동적으로, 그것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보편적인 공공의 불행을 극대화하는 데 소임을 다하도록 보장해준다.
사람들은 탄소배출권을 비난하거나 반대하는 대신 ‘지속가능경영’이나 ‘ESG경영’이란 이름 아래 당연한 제도로 받아들인다. 기껏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을 상대로 벌이는 “사다리 걷어차기”라고만 볼 뿐이다. 철학자 세르주 라투슈는 『탈성장사회』에서 ‘지속가능’이란 단어는 ”사회의 이익이라는 환상 뒤에 자본 이익을 은폐하고 희생자들 저항 운동을 마비시키는 일이다"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진정한 사고(思考)의 독(毒)이다. 이는 대단한 모순어법이다." 사실 사람들이 탄소배출권을 나쁘게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 권한을 타인에게 양도하려면 권한 기반까지 양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산업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부수적인 환경오염을 참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참을 수 있는 기반 산업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예컨대 귀중한 의약품을 생산하는 산업의 환경오염은 참을 수 있지만, 고작 번지점프 장비를 생산하는 회사에 우리 희생을 양도하여 낭비시킬 수 없다. 탄소배출권 거래를 사고 팔 수 없는 정당한 이유는 번지점프 장비를 생산하는 업체가 귀중한 의약품을 생산하는 업체보다 탄소 배출을 단지 더 강렬하게 욕구한다고 해서 법이나 도덕적으로 더 강력하게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욕구(desire)한다고 항상 요구(claim)할 수는 없다.
정치학자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정부는 대기에 과도한 오염물질을 뿜어대는 기업을 위해 오염권 거래제도를 도입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도덕적 오명을 씌우고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늘 그렇듯 도덕적 논리가 없이는 시장논리도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제학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도 이렇게 말한다. “도덕은 거래나 장사 대상이 될 수 없다. 도덕을 행하려면 자신이 직접 책임과 리스크를 지고 현실에 뛰어들어야 한다.”
두 번째, (2) 경제학을 정치학과 분리해야 한다는 논리는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기 보다는 시장을 그냥 놔두는 일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믿음이다. 시장에서 정부는 전혀 필요 없다. 시장경제는 소위 자연 상태에서 완벽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사회가 개인 이익 추구 원리와 더불어 수요·공급의 경제법칙이 만유인력의 운동 법칙처럼 작동한다고 보았다. 그 결과 경제학에서 자유방임주의 이론들이 생겨났다. 자유방임 경제 철학은 비간섭 원리로서, 세상의 체제는 자율적이기에 더 낫게 하려고 시도해보았자 더 나빠질 뿐이므로 그대로 놔두라는 권고다. 경제학 법칙들이 – 자연의 법칙과 똑같이 – 신에 의해 확립된 이상 그 법칙들로부터 나온 것은 모두 틀림없이 좋은 것이라고 가정했기에, 경제학을 정치학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방임주의는 바로 그런 의미였다.
신이 경제학 법칙을 자연 법칙과 똑같이 확립했다고 생각한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18세기 사상가들은 신이 이성적인 계획에 따라 세상을 만들었고, 신의 계획을 뉴턴이 이성을 사용하여 발견해냈다고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하찮은 인간이 무한하게 넓은 신의 마음, 특히 선한 신이 세상에 악(惡)을 왜 창조했는지는 결코 헤아릴 수 없다는 예전 믿음은 당시 새로운 생각과 더 이상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뉴턴의 발견 그리고 이 발견 위에 세워진 자연신학의 전반적인 요점은 뉴턴이 실제로 신의 마음을 헤아렸으며, 그것을 수식으로 증명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18세기 사상가들은 악의 문제에 답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다. 이들 추론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 신은 지극히 그리고 완전히 선하다. 정의상 신은 악을 행할 수 없다.
. 신은 뉴턴이 밝힌 대로 이성, 논리, 수학 등의 법칙에 따라 우주를 창조했다.
. 이 두 가정은 서로 상반될 수 없다. 만약 상반된다면 신은 전능하기에 이를 미리 알았을 것이며, 신의 선함으로 인해 이성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기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 게다가 만약 이성의 법칙으로 인해 신이 하나보다 더 많은 종류의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면, 신은 선한 존재이기에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가장 최상의 세계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 따라서 이 세계는 모든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상이다.
당시 사상가 대다수에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은 만약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서 최상이라면 이 세계를 변화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의 모든 악과 고통은 신의 계획의 일부이기에 전체 체계에 어떻게든 이득임이 틀림없다. 신이 운동 법칙으로 물리적 세계를 창조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스스로 작동하듯, 신은 인간 세계를 (인력이나 척력이라는 자연법칙과 유사한) 사회적 상호작용 법칙으로 창조하였고, 이 법칙에 따라 가장 조화로운 사회 질서가 마련되었다. 이 모든 사상의 최종적인 결과는 자유방임이라는 근본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학 철학이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자유방임주의 사상은 청교도주의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며, 중세와 근대와 달리 신학적 기반을 떠난 현대 사상에서 자유방임과 같은 자연 상태 이론은 공감대 형성 부족으로 불완전 이론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현실의 시장에서는 개인들의 권력이 평등한 것도 아니고 개인만 자원 배분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어떤 사람은 더 큰 자원 배분 권력을 갖고 있으며 다른 사람은 자원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집단을 만든다. 그 결과 대부분의 주요한 경제적 자원은 이러한 사람들과 집단들에 의해 권위적으로 배분된다. 토지와 화폐, 노동과 같은 대부분의 주요한 경제적 자원은 항상 정치적으로 배분되고 그것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정치와 권력이 배제된 순수한 시장에 의한 자원 배분은 불가능하며, 시장에만 맡기는 그 순간에도 시장 내부에서 정치와 권력은 작동한다. 그러므로 경제에 정치와 권력이 부재하는 상황을 가정하거나 바라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묻어 들어 있음’(embeddedness)이란 개념을 항상 자신 논리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간 경제는 여러 시장이 통합되어 균형을 찾아가는 체제가 아닌, 항상 사회에 묻어 들어가 있다. ‘묻어 들어 있음’이라는 용어는 자유주의 경제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가 정치와 종교, 사회관계들에 종속되어 있다는 생각을 표현한 말이다. 반면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자기 조정 시장’ 체제는 거꾸로 사회를 시장 논리에 종속시킬 것을 요구한다.”
더욱이 경제학자 랭카스터와 립시는 ‘차선(次善)’이론으로 자유방임 이론이 틀렸다는 점을 짚어낸다. 차선이론은 비록 자유방임 이론이 사실이라 해도 무의미하다고 본다. ‘차선’인 시장, 즉 완전경쟁 시장에 ‘거의 근접하는’ 시장이 세 번째나 네 번째로 좋은 시장, 혹은 아예 완전히 비경쟁적인 시장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의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자유방임의 근본적인 전제는 만약 모형 전제가 현실과 닮았다면 모형 결과 또한 현실과 근접하리라는 추론이다. 유감스럽게도 자유방임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지난 수십 년간 바로 그런 오류에 기대어 논의를 펼쳐왔다.
완전경쟁 시장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시장이라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완전경쟁시장이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문제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시장을 ‘가능한’ 경쟁적으로 만들기만 하면 그 결과는 이상에 확실히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랭카스터와 립시가 밝혀낸 오류였다. 경쟁과 관련한 모형의 현실성은 효율에 관한 현실성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현실이 완전경쟁의 이상과 한 군데라도 어긋나면 최선의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완전경쟁에 가장 근접한 상태에서 얻어지는 결과는 어떤 다른 차선책에서 얻어지는 결과보다 못하리라는 것이 다. 완전경쟁 요건을 더 많이 충족시킬수록 – 전부 충족시키지 않는 한 – 완전효율이라는 이상에서 더욱 멀어진다.
특히, 앞에서 언급된 부정적 외부효과(공해, 소음, 악취 등)가 발생하는 부문에서 재화 가격은 모형이 예측하는 가격과 어긋나게 된다. 자유방임주의 수호자들은 아무 문제없다고 말한다. 어느 한 분야에서 정상적으로 가격이 매겨지지 않더라도 나머지 부문을 전부 경쟁적으로 만들어 올바른 가격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차선이론이 바로 그러한 정책 해법으로는 효율을 증대시킬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가격이 잘못됐으면 나머지 가격이 올라도 소용없다. 달리 표현하면, 다수 가격이 왜곡되어 있는 경제에서 하나만 시정하면 상황이 오히려 악화될 수 있다.
차선이론이 우리에게 확실히 가르쳐주는 것은, 일반균형 모형에서 유용한 정책안을 끌어내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단순한 도구는 현실에서 무엇이 최선일지 알려주지 않는다. 각각의 상황은 – 각 부문, 각 시장, 각 정책안은 - 그 각각의 장단점을 따져 평가해야 한다. 차선이론이 가져온 가장 주된 효과는 경제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을 ‘겸손해지게’ 만들었다는 점이라고 립시는 설명했다. 자선이론은 극도로 이상화된 하나의 모형을 근거로 시장의 효율성에 관해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끝으로, (3) 경제학은 사회‘과학’인가?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사회적 행위의 원인과 과정,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사회적 행위에 대한 해석적 이해를 추구하는 과학이 바로 사회학”이라고 규정지었다. 베버는 “행위의 규칙성 발견이야말로 사회과학이 천착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굳게 믿었다. 즉 그가 지향하는 사회학 목적지는 사회현상의 인과적 설명을 포함하는 해석적 이해였다. 경제학자를 포함한 사회과학자들은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종속변수와 독립변수를 구별하며, 어떻게 하면 독립변수를 분리해낼 수 있는지 고민한다. 사회과학은 환원주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환원주란 현실을 여러 부분으로 쪼개보았을 때 전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다른 모든 변수 값을 결정할 어떤 변수를 방정식 내에서 찾는 것이며, 인과관계 사슬에서 빼냈을 때 결과를 바꿀 요소를 찾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들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종속변수로 발생하는 셀 수 없이 많은 현상을 독립변수로 설명하는 일이다. 환원주의에서는 중요도 순으로 원인 등급을 매기는 것이 필수다. 환원주의는 독립변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다는 점을 가정한다.
사회과학자들은 환원주의 관점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도록 과거를 일반화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미래가 가진 문제는 과거에 비해 알려진 것이 너무 없다는 사실이다. 미래는 현재라는 특이점의 저편에 놓여 있기에 우리가 미래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과거로부터 어떤 연속성이 미래로 확장되어 나갈 것이라는 점과, 거기에서 또 우연을 만나게 되리라는 사실뿐이다. 물론 어떤 연속성은 너무나 강력해서 우연에 영향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의식 자체가 우연성이 될 경우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문제가 된다. 사회과학은 이런 문제를 너무나 자주 부정해왔다. 일반적인 경우 사회과학자들은 인간 의식과 그에 따른 행동은 찾아낼 수 있고 법칙까진 아닐지라도 그 영향을 분석할 수 있는 모종의 규칙을 따른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표준화된 사회과학 모델’은 사람들이 복잡한 여러 이유 때문에 특정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한두 가지 기본적인 ‘원인’으로 간결하게 설명하려 한다. 이러한 방법론은 인간 행동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시간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하면서 정적인 경향으로 흐를 수 있다. 또 보편적인 적용 가능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에 서로 다른 문화에서 상이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된다. 실제 경제와 정치 역사는 정확하기보다 부정확한 정보를 근거로 선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회귀분석 등 외삽(外揷, extrapolation: 데이터가 없는 부분을 가깝다고 생각하는 데이터로 미루어 추정하는 방법)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거나(인구 증가, 전염병 확산), 구조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는 대상을 예측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1849년 마차가 증가하기 시작한 런던에서 예측한 자료에는 1940년대가 되면 런던 모든 거리에 말똥이 거의 3미터 높이로 쌓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1908년 포드 T-모델 자동차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구조적인 변혁이 있었고 말똥이 쌓이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는 예측을 위한 변수가 많을수록 정확도가 증가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예측 모델에 변수가 추가되더라도 잘못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대표적 사례가 2011년 강도 9.1 규모의 지진이 일본 후쿠시마를 강타한 원전붕괴 사고다. 처음에 일본은 몇 가지 변수로 후쿠시마에 진도 9.1 지진이 약 300년마다 한번 발생한다고 예측했다. 이런 발생 빈도가 적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 전문가들은 일본 안전 성향과 경제 수준을 고려하면, 일본이 이 정도 발생 가능성을 충분히 대비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나중에 일본은 후쿠시마 원자로의 지정학적 위치와 같은 몇 가지 변수를 추가했다. 이럴 경우 지진 발생 가능성은 1만3천 년에 한 번 발생하는 것으로 예측이 변경되어 일본은 대비를 충분하게 하지 않았다. 예측 변수가 많아지더라도 정확도가 낮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황이나 사건의 전체 변수를 알지 못하기에 우리가 단편적으로 알게 된 추가적인 변수가 다른 변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 이처럼 변수를 지나치게 많이 반영하는 과잉적합(overfiting) 예측 모델은 신호(signal)가 아닌 알려지지 않은 소음(noise)에 더 적합하게 적용되어 결과가 매우 잘못될 수 있다.
경제학은 부와 기회, 사회 복지 분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심오한 도덕적 문제를 초래한다. 따라서 경제 분석에는 반드시 윤리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경제학자는 빈곤이나 불평등, 환경, 사회 정의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책임이 있다. 더욱이 경제정책 실행에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과정과 협상, 타협이 수반된다. 따라서 경제학은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 끝으로 자연과학과 달리 경제학은 인간 행동과 관련된 복잡하고 역동적인 시스템을 다루기에 정밀하게 모델링하거나 예측하기가 어렵다. 경제 현상은 문화적 규범이나 역사적 맥락, 제도적 장치와 같은 다양한 요인에 영향을 받기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률이나 이론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