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주의는 헬레니즘시대(BC 305-30)에 이집트의 현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해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에 근거한 사상이다. 1471년에 피치노가 <해르메스 문서>를 번역해 출간함으로써 활성화되었다(하지만 훗날 이 문헌은 사실상 2세기의 신플라톤주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문헌이었음이 밝혀지게 된다). 헤르메스주의는 자연을 영험한 힘으로 가득찬 곳, 힘 – 공감과 반감(인력과 척력) -의 그물망으로 이해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들은 그 심층적 힘을 읽어내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고자 했다. 아울러 파라켈수스(1493~1541)가 역설했듯이, 인간을 소우주로 보고 이 소우주로서의 인간에게서 대우주로서의 자연의 생명력을 발견하고자 했다.



헤르메스주의는 근대 물리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중력’ 개념으로서 물리학의 중심에 있는 만유인력 개념이 이 헤르메스주의에서 연원했다. 근대 물리학 맥락에서 ‘운동’이란 사물의 본성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의 ‘상태’일 뿐이다. 사물 자체는 그저 x로 놓으면 그만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발견이라기보다도 특정 영역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초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명의 차원과 물리의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론적 분절을 예민하게 고려하기보다는 연속적인 방식으로 파악했다는 점에 있다. 근대 역학은 이 체계에서 물리적 측면을 따로 떼어내어 그 부분을 탐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은 틀린 것이고 새로운 존재론이 맞는 것임을 뜻하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이 경우 역학의 맥락에서) 그런 존재론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그 존재론이 ‘옳다’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이다. 역학이라는 특정한 맥락을 위해 이런 식의 존재론 혁신이 필요했다고 해서, 그 존재론이 존재론 자체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보다 더 ‘진리’인가 하는 것은 따져볼 문제다. 아니, 애초에 양자의 비교는 짝이 잘 맞지 않는 비교라 하겠다. 짝이 맞는 비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와 근대 역학을 철학화한 기계론적 유물론의 세계일 것이다.



‘과학적 사유’의 기본틀은 무엇인가? 첫째,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을 세계에서 분절해낸다. 현대식으로 말해 어떤 ‘계’(system)를 분절해낸다. 이 점에서 과학적 사유는 철학적 사유와 다르다. 철학적 사유가 세계를, 삶을 그 전체로서 보려는 데 핵심이 있다면, 과학적 사유는 반대로 세계의 어떤 부분을 오려내서 ‘대상화’함으로써 시작한다. 둘째, 이 계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을 변항(variable)으로서 잡아낸다. 즉, 시간에 따라 양적으로 변화하는(때로는 계속 유지되는) 핵심적인 존재단위들(entities)을 설정한다. 이것이 과학기술이라는 행위의 핵심적인 존재론적 설정이다. 예컨대 낙하 운동의 경우 시간(t), 거리(s) 등이 될 것이고, 천문학적 계의 경우 질량(m), 거리(R), 힘(F) 등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변항들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이 변항들 중 가장 근본적인 변항, 정확히 말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변항은 시간(t)이다. 왜일까? 과학의 기본 목적은 운동의 법칙성을 잡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운동이란 항상 시간에서의 운동이다. 따라서 모든 변항 중 가장 일차적인 변항은 바로 시간이라는 변항인 것이다. 셋째, 이 변항들에 관한 데이터를 모아 그것들 사이의 함수관계, 특히 미분방정식을 사용한 함수관계를 잡아낸다. 이 함수관계가 확증되면 그것은 ‘법칙’으로 승격된다.



넷째, 이렇게 얻어낸 수학적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그 이론에 있어 중요한 부분 – 그곳을 실증할 경우 그 이론의 설득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질 수 있는 부분 -에 관련해 실험을 즉 ‘결정적 실험’을 행한다. 이렇게 실험을 통해 이론의 타당성을 확증한다. 다섯째, 모든 운동 법칙은 결국 시간의 함수이므로, 시간-변항의 각 함수값은 곧 해당 시간에서의 그 운동 법칙 전체의 함수값을 산출한다. 따라서 운동 법칙에 미래의 어떤 시간을 대입하면 미래의 해당 계의 상태를 예측할 수 있다. 예컨대 천문학에서, 훗날 라플라스가 장담하게 되듯이, 물리법칙과 해당 초기조건만 주어지면 어떤 시간에서의 우주 상태도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북아에서 왜 먼저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했을까’라는 물음은 곧 과학기술 발전은 인류 역사에서 긍정적인, 때로는 거의 당위적인 가치를 가진다는 판단을 은연중에 깔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 특히 기술문명이 가져온 세계가 과연 긍정적이고 심지어 당위적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사람들은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과학기술의 비극들에는 무관심하고, 과학기술이 가져오는 흥미/재미와 ‘부가가치’에만 관심을 쏟는다. 드론이 가져올 편리와 부가가치에는 관심을 가져도 (최근 중동이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무차별로 이루어지는) 무인폭격의 섬뜩함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에 열광하면서도 그것이 가져올 불행에 대해서는 거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런 흐름은 대중매체/대중문화에 의해서 점차 공고한 것이 되고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음 물음은 결국 자본주의-과학기술-대중매체에 의해 형성된 가치를 밑에 깔고서 제시되는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가치와는 반대의 가치를 가진 경우, 오히려 물음을 반대로 던져야 할 것이다. “왜 서양에서는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비전이 몰락하고, 외물에 집착함으로써 마음을 잃어버리는[玩物喪心] 과학기술이 기형적으로 발달했는가?’라고. 하지만 오늘날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 가치에 이미 강하게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과학기수은 운명공동체다. 자본주의는 신기술을 발명해야 이익을 볼 수 있고, 신기술은 자본을 통해서 일반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막강한 힘은 경제만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돈의 힘이 정치는 물론이고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문화도 지배하는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감각을 가지고 볼 때, 동북아 지식인들이 왜 외물을 조작하려는 경향[機心, 기심]을 경계하면서 내면 가꾸기에 힘썼는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물질문명의 폭주가 가져올 파괴와 혼란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 문명에서 물질문명은 지식인들보다는 장인들에게 맡겨져 있었고, 이 두 집단 사이 거리는 멀었다. 그리고 동북아 지식인들은 그 거리를 메울 수도 있었을 자본주의 경향에 대해서도, 특히 윤리 없는 상업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 신기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감각적 쾌락을 주는 사람들은 상찬의 대상이 되지만, 이런 가치들의 폭주를 경계했던 선철들의 지혜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매도되기 일쑤다. 바로 그런 가치/시선이 이미 현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근대 과학기술문명의 세계사적/인류사적 함축에 대해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왜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나 자연과의 합치를 잃어버리고 인간이 만든 장난감에만 열광하는지. 왜 우리 선철들이 그토록 애써 가꾸었던 ‘사랑의 마음’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사물의 조작과 계산에만 몰두하고 인간 스스로를 그런 틀 속에 밀어 넣어 물화(物化)하고 있는지. 왜 사람과 사람 관계는 소홀히 하면서 외물이 가져다주는 흥미와 이익에는 그토록 집착하는지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근대성과 과학기술문명에 대해 보다 균형 잡힌 시선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무엇이 진정한 ‘진보’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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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6-07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위한 도구,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보는 시각의 한계는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존재와 비존재, 목적과 수단 등에 대한 지나친 분화를 통해 과학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이러한 세분화된 관점이 종합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를 페이퍼를 통해 생각해봤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06-08 15:15   좋아요 1 | URL
넵, 그런 것 같습니다.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닌데, 분석으로 부분만 보고 종합적인 판단을 못하여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