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상인 집단은 사회에 새로운 자본주의 시각을 어떻게든 확산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상인 친화적인 경제체제를 구축하려면 빈곤한 노동자나 소작농 등 당시 적대적인 사람들이 상인 집단의 사고방식을 따르도록 변화시켜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상인 집단은 적대적인 사람들을 강하게 대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난한 자들을 강제로 일하도록 해야 하며, 대부분 사회복지는 그들 게으름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으므로 철폐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점차 자본가는 자신 스스로에게 적용한 근면이나 성실의 규율을 ‘게으른’ 노동자들에게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본가 미덕은 ‘비생산적이고 게을러터진’ 노동자를 가차 없이 대할 수 있는 권리나 의무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가치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자본가가 노동에서 ‘의미’를 찾아 낸 것은 노동자에게 노동을 강제하고 노동자의 계급투쟁을 막고자 함이었습니다. 
















노동자는 점차 길들여졌습니다. 심지어 일자리를 잃게 되면 괴로움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일자리를 잃는 일은 단지 수입원이 사라진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실업은 사회적인 죽음이 되었습니다. 일터에서 함께 했던 동료들과 더 이상 교제하지 못하고, 동시에 오랜 기간 일터에서 누렸던 역할과 지위를 상실합니다. 소위 ‘퇴직의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노동자는 몇 년간 우리 속에 갇혀 있다가 도망쳤으나 갑자기 많아진 자유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우리 주위를 빙빙 돌며 우리 속 ‘지옥’을 그리워하는 가축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일은 절대 고통스럽지 않으며, 노동자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베버의 ‘소명의식’에서 시작해 지금의 ‘인간중심 경영’ 이론이나 ‘소비주의’에 이르기까지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더 세련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회사는 노동자가 행복한 ‘한 가족’으로 느끼도록 ‘인간중심 경영’ 운동을 전개합니다. 회사는 ‘한 가족’이라는 생각에 따라 우리는 직장에서 상당 수 친구를 사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일상은 직장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하루 대화 3분의 2 이상을 직장에서 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많은 사람이 직장에서 동료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 연구 결과를 보면, 노동자들에게 제일 친한 친구 10명 이름을 적어보라고 요청할 경우 동료 직원 이름을 단 한 명이라도 적은 사람은 절반 이하로 나타났습니다. 평균적으로 이웃 주민이 동료보다 명단에 더 많이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중요한 일이 닥치면 누구와 상의하느냐는 질문에 동료를 단 한 명이라도 적은 사람은 절반 이하였습니다. 동료와 친밀한 유대를 맺고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



많은 기업이 직원들 자율성이나 완화된 위계질서, 업적과 성취에 따른 보수 체계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성과를 거두어야 월급이 오르고 고용 안정도 보장된다는 현실은, 단순한 암시일지라도, 동료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유발합니다. 생계를 놓고 동료와 은밀히 경쟁할 때 친밀함이 형성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회사는 노동자의 여가시간까지 빼앗아가며 저녁 회식이나 맥주 파티, 체육대회, 산악회, 친목행사 같은 여러 명목으로 노동자 불만이나 소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일의 의미를 만들어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경영진은 노동자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일에 몰입(engagement)하도록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심지어 노동자가 스스로 회사나 직장 상사처럼 힘 있고 부유한 존재로 여기도록 동료애나 가족 같은 회사, 이윤 나누기(profit sharing), 애사심, 주인의식(ownership)과 같은 ‘인간중심 경영’으로 노동자를 속이고 있습니다. 















‘인간중심 경영’은 심리학자 엘튼 메이오(1880~1949)가 노동자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노동조합 결성을 막고자 기업가 록펠러(1839~1937)에게 제안해서 만든 연구입니다. 록펠러 재단은 메이오 연구에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대환영이었습니다. 그들이 메이오 심리학 연구를 후원한 이유는 노동자에게 돈을 덜 주면서도 그들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이오 이론은 노동자가 실제 착취당하지만 대우를 잘 받은 듯 믿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메이오는 노동자가 관리자 조작에 쉽게 흔들리는 단순한 감정 덩어리라고 가정했습니다.


 

인간중심 경영을 계기로 종업원에게 보내는 따뜻한 미소가 급여 인상보다 훨씬 더 돈이 남는 장사라는 교훈을 전 세계 경영진이 즉시 깨달았습니다. 인간중심 경영은 노동자에게 좋은 듯 들리지만, 아름다운 말로 실질적인 노사 협상을 대신합니다. 

















경쟁에 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힘든 노동자는 불안과 고독, 소외 같은 감정을 느낍니다. 소외된 노동자는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해야 했기 때문에 했어'라고 말합니다. '바로 내가 원해서 그것을 했어'라는 말이 중요한 데, 그렇게 하지 말하지 않는 사람에겐 복종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실제로 관리직 숫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자신 삶 모든 것을 바쳐 자발적으로 제대로 일하지 않으니 위협하거나 혼내줄 관리자가 더 많이 필요한 것입니다.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지 아예 잊고 살게 됩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노동자에게 자본주의는 계속 일하도록 동기 부여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건 바로 ‘소비주의’입니다. 소비주의란 소득과 지출이 더 늘수록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자네가 일하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자네가 노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월급으로 받은 돈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네. 집에 가면 자네가 주문한 싸구려 소비재가 잔뜩 뒹굴고 있을 거야. 자네가 그렇게 갈망했던 행복은 그것으로 얻게 될 거야. 직장에서 일하면서 느낀 비참한 시간을 소비재가 전부 보상해줄 걸세.’ 노동자는 기계화된 노동 과정과 소외된 현실의 삶을 감당하기 위해 소비를 통해 잠시 현실에서 벗어납니다. 

















소비주의는 더 많고 더 비싼 상품을 사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환상을 낳습니다. 심지어 싸구려일지라도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면 ‘소확행’이라는 소소한 행복으로 노동의 고통을 잊게 된다고 우리는 믿게 되었습니다. 소비는 현실 고통을 한순간 잊게 만들고,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 마취제이자 아편 역할을 합니다.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1931~1989)는 소비하는 삶을 '코미디'라고 불렀습니다. 나날의 단조로움을 피하려는 소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소비, 문제를 잊기 위한 소비는 결국 우리 삶을 코미디로 만들어 버립니다. 
















소비주의의 본질은 현실 문제를 능동적으로 사유하고 비판적으로 반성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현실 고통을 한순간 잊게 만들고, 체념하게 만드는 고통의 완화제일 따름입니다. 소비주의는 현실의 모순을 심리적 차원으로 환원시켜, 어떻게든 자본주의 본질만 건드리지 않으면서 뭔가를 해소해보라는 놀라운 전략입니다. 결국 기존 지배 체제와 질서에 순응하게 되고 이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소비주의가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유와 실천을 제약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노동자는 많은 상품을 소비하지만, 여전히 불행과 불안을 느낍니다. 그러면 노동자는 자신 소득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곤 합니다. 불행의 근본 원인을 이렇게 잘못 판단하면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필요하다는 감정에 점점 괴롭게 됩니다. 현재도 열심히 일하지만 장차 더 열심히 일해 더 빨리 승진하고 돈도 더 많이 벌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물질적인 것을 손에 넣으면 일시적으로 만족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점점 커지는 소비 규모 때문에 일과 소비의 악순환만 반복됩니다. 행복을 향한 ‘손쉬운 방법’으로 소비를 선택하게 되면 빚 때문에 망하거나 최대 수입만 는 고갈된 영혼만이 남습니다. 
















자본의 술책은 임금노동자를 빚 속에 빠뜨려 빚이 청산되지 않도록 하면서 빚의 상환에 전념하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임금노동자의 빚은 과거 노예제도와 유사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빚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게 없기에 빚에 의존해 살게 되는데, 과거 노예주나 식민지 지배자들이 그랬듯이 현대사회의 지배계층도 부채를 통해 임금노동자를 통제하려듭니다. 현대인도 융자나 주택대출 같은 부채를 갚아야하기에 부채가 없을 때보다 더 고분고분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더 기진맥진한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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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부자가 소비하면 필연적으로 부자로부터 가난한 자에게 부(富)가 낙수처럼 흐른다고 봤고, 이를 통해 고용이 창출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스미스는 상업 사회가 경제적으로 불평등해 질 수 있음을 인정했고, 불평등이 점차 심해질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그럼에도 상업 사회가 더 많은 부를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의 ‘게으르고 사치스런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임금노동자로 종사해야 하겠지만, 기초적인 조건만 누릴 수 있던 ‘발가벗은 야만인들’ 상태보다는 부유해진다는 논지를 폈습니다. 
















그렇지만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는 행복은 절대적인 빈곤보다 더 민감한 상대적인 빈곤 문제를 일으킵니다. ‘오늘날 가장 궁핍한 사람조차 수백 년 전 왕보다 더 잘 사는 데, 몇몇 사람이 그렇게 엄청 잘 사는 게 뭐가 그리 대수로운 일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절대적인 빈곤보다 상대적일 때 더 큰 빈곤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윌 듀런트는 “가난은 부(富)에 의해 만들어지며, 부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 우리는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른다”라고 지적합니다. 

 















행복은 절대적인 수준이 아니라 ‘주변 사람과 비교할 때 내 삶의 질이 어떠한가?’라는 비교로 크게 좌우됩니다. 계층 간 소득 격차가 큰 나라일수록 자살률이 높습니다. 소득 불평등이 심한 지역에서 강도와 절도 사건이 빈번합니다. 절대적인 빈곤 수준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난하지만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보다 전체적으로 형편이 낫지만 특정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보다 못 사는 공동체에서 더 많은 범죄가 일어납니다. 잘 살아야 한다는 가치가 공유되어 있지만, 반면에 잘 살 수 있는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논어』에서도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인 빈곤을 더 염려했습니다. 정치하는 데 있어서 “백성이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백성이 불평등한 것을 걱정하라. 백성이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안정되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 대개 분배가 균등하면 가난한 백성이 없고 서로 사이가 좋으며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안정되면 나라가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다”[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盖均無貧和無寡 安無傾]라고 강조했습니다.



과거에 평범한 사람은 부자가 어떻게 사는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돈도 있었고 부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흔치 않았고 돈을 감추고 살았으며 자신 권력을 과시하고 싶을 때나 간혹 부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이제 부는 향락과 개인적인 만족이라는 형태로 공공연하게 표출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의 환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감추던 향락을 이제부터는 돈으로 살 수 있고 드러내놓고 즐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누구든 부자가 어떻게 사는지 쉽고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부자가 호화롭게 사는 삶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크게 보도합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부자들의 집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자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이라는 증상이 생겼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평생 절대 소유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괴로울 정도로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셜 미디어든 다른 형태의 대중적 노출이든,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은 보통 사람이 소유한 것을 하찮게 보이도록 합니다. 비록 우리가 객관적인 기준에서 삶을 넉넉하게 누리고 있고, 인류 역사 전체로 놓고 볼 때도 극히 잘 사는 사람일지라도 그렇습니다.

 















사회운동가 홍세화(1947~ )는 “성공한 자의 거머쥔 부를 동경하는 것은 ‘90퍼센트 사람들’이 덥석 문 당근”일 뿐이라고 지적하며, “그 가능성은 로또복권 당첨 확률에 불과하지만, 모두 성공 예감으로 뜀박질하도록 내몰아 기대하는 미래상으로만 자신을 일치시키고 오늘의 자신을 배반하도록 한다”라고 꼬집습니다. 또한 그는 그 이면을 깨달아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내 생각은 내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게 아니라, 지배계급이 나에게 갖도록 요구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해야 한다.” 

 















어떤 시대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사회를 지배합니다. 사회의 물질적인 힘을 지배하는 계급이 동시에 사회의 정신적인 힘까지 지배합니다. 지배계급은 자신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자신 이익을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처럼 관념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지배 사상’은 지배계급이 자신 이익을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이익이라고 강제할수록 더욱 보편적이고 영원한 진리인 것처럼 표현됩니다. 귀족이 지배하던 시대는 명예나 충성 같은 개념이 지배했고,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는 자유나 관용, 부 같은 개념이 지배합니다. 
















행복의 결정 요인은 상대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 행복을 판단할 때, 자신 실제 상황을 과거 혹은 현재의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복이 상대적이라면 국가가 객관적으로 경제를 개선하고 부양책을 마련한다고 해서 반드시 국민이 행복해진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하며, 행복은 객관적으로 충족되지 않기에 국가의 경제 정책이 국민 행복 증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여건이 극도로 좋아진 후에도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예를 들면,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해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기본적 필요’가 무엇이든지간에, 일단 한 번 누구에게나 그것을 무료로 제공하면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빈곤층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 지구에 불평등이 만연한 것에 극도로 분노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소득은 다른 의미 있는 일과 더불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일 이후(이외)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일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한다. 보편 기본소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가 언급한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강력한 공동체 덕분에 삶의 만족도”가 커진 사회가 요즘 일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일본 젊은 층 대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취직률은 저조하고, 저임금에 시달리고, 워킹푸어로 일하고, 현대판 홈리스라고 볼 수 있는 피시방에서 난민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이들은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일본 20대 젊은 층이 느끼는 생활 만족도와 행복지수는 78.3퍼센트까지 상승했습니다. 일본 중학생과 고등학생 95퍼센트가 자신은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꽤 높은 행복지수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입니다. 절반 이상이 가끔 자살 충동을 느끼고, 3분의 1은 간헐적으로나마 우울증을 경험합니다. 서울에서만 매년 학생 1만 6,000명이 학교를 떠나고, 전국적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이 적게는 17만 명, 많게는 36만 명이나 된다는 조사가 있습니다.
















1980년 절정기를 맞았던 일본의 ‘입시 전쟁’이 상징하듯 ‘좋은 학교, 좋은 회사, 좋은 인생’이라는 중산층 꿈으로 일본 전체가 압도되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1990년대 이후 중산층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기업의 정식 구성원이 되지 못한 젊은이가 증가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 층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요즘 일본 젊은이는 예전만큼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습니다. 술도 많이 안 마십니다. 해외여행도 그리 안 즐깁니다. 유학생 수도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선거 때 투표하러 가는 젊은이 수도 현저히 줄고 있습니다.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태어난 지역에 애착을 느끼는 젊은이가 증가하고, 대도시권으로 이동하는 인구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2011)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1985~ )는 그 원인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고 느낀다.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될 때, 지금 행복하다.” 만화 <피너츠>의 ‘철학하는’ 강아지 스누피 역시 이와 유사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내 인생엔 목표도, 방향도, 의미도 없어. 그런데도 난 행복해.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네. 내가 뭘 잘하고 있는 거지?” 

 















사람들은 흔히 목적이 없으면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 행복하지 않은 것은 혹시 아닐까요?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1948~ )는 “현재보다 미래 목적이 왜 더 중요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합니다. 미래는 어쩌면 현재보다 추구할 가치가 적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삶이란 자연스러운 삶을 능숙하게 살아내는 것이다. 좋은 삶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지 않으며, 의지와 관련 없고,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목적이 없으면 무의미하다고 간주되는 시대에 목적없이 즐기며 사는 사람이 호모 루덴스(즐기는 인간)다. 좋은 삶이란 환경에 따라 사는 삶이다. 좋은 삶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삶을 의미하거나, 상식에 반드시 부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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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최선의 사회 체제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선거란 시민의 권리인 동시에 약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인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커다란 착각이다. 그들은 의회 의원을 뽑는 동안에만 자유로울 뿐이다. 의원들이 선출되는 즉시 시민들은 곧바로 노예가 되어버린다.” 
















선거는 민주주의에 대한 보장책으로서 너무 과대평가되어 있습니다. 사회운동가 엠마 골드만(1869~1940)은 여성들에게 여성참정권 운동에 대해 연설하면서, 여성이 선거에 참여하는 일에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과도한 기대는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보통선거권이란 현대의 미신입니다.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면 지금까지 남성들이 실패해 온 일들을 여성들이 이뤄낼 거라는 황당한 생각에 맹목적으로 동조할 수는 없습니다. 남성들의 정치사가 증명해 주는 바에 따르면, 지금까지 성취는 정치활동을 통해 이룩된 적은 결코 한 번도 없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성취한 모든 권리는 지속적인 투쟁, 자기주장을 위한 중단 없는 투쟁을 통해 얻어진 것이지, 참정권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선거 결과는 다수의 의견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의견’이란 무엇일까요? 유권자가 정보를 충분히 얻거나 비판적으로 성찰하거나 서로 토론할 기회도 없이 그냥 투표하는 일은 단순히 ‘견해’일 뿐입니다. 그러한 견해는 유권자가 특정 시점에 일시적으로 내리는 판단일 뿐, 사정이 달라지면 또 다른 의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선거 과정은 거의 최면술과 같아서 선거 전략으로 인해 투표자의 사고력은 둔화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투표한 후보자가 선출된 경우에도 나중 그 인물의 행위를 보고 실망하는 사람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1883~1950)는 정치가들의 영향력 때문에 유권자가 독립된 정치 의지를 가질 수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정치 과정을 분석하여 우리가 알게 된 결과는 유권자가 진정한 자기 의지가 아니라 ’가공된 의지’(manufactured will)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개인이 정치가들 제안에 영향받지 않은 나름대로의 자기 의지가 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에서 대중이 무엇인가를 선호하는 일은 정치가들이 우리가 그 무엇인가를 선호하도록 만든 행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로버트 위브(1930~2000)는 대중의 참정권은 시민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토대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는 듯 보이게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보통 선거권과 다수결이라는 규칙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이 국가를 형성한다는 이미지를 사람들 상상력 속에 불어넣었다.” 결국 ‘자유로운 인간이 자기가 살아갈 정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투표장에 가는 장엄한 모습’은 그저 환상에 불과합니다. 
















민주주의 선거에서 이용되는 ‘다수결’ 원칙은 간단하고 깔끔하고 공정한 기법으로 느껴지지만, 단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결정할 때만 최선의 기법입니다. 선택지가 둘을 넘어서면, 다수결 선호에 모순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케네스 애로(1921~2017)는 민주주의가 전제로 하는 다수결 원리가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냈습니다. 개인 다수 선호도가 사회 전체 선호도로 이행될 수 없습니다. 이를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라고 합니다.
















유권자 3분의 1은 A > B > C 순으로 후보를 선호하고, 다른 3분의 1은 B > C > A 순으로 선호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C > A > B 순으로 선호한다고 가정해 보죠. 그런데 전체로 보면 A는 B를 이기고, B는 C를 이기고, C는 A를 이긴다는 이상한 예상 결과가 나옵니다. 그것도 모두 3분의 2의 확률로 동일합니다. 그래서 유권자 모두 자신이 선호한 후보자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합니다. 하지만 유권자 3분의 2가 원치 않는 후보자가 당선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선거의 역설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36.64%), 김영삼(28.03%), 김대중(27.04%) 세 후보 중 유권자 60퍼센트가 원치 않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투표를 두 단계로 나누어 진행하더라도 여전히 모순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A보다 B 선호도가 높고, B보다 C 선호도가 높다면, A보다 C 선호도가 높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이보다 더 복잡할 수 있다. B가 빠진 두 번째 투표 상황에서 A와 C만 투표할 경우 C보다 A 선호도가 더 높게 나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신중하게 처신하지 않으면 모든 유권자가 C가 낫다고 생각하는데도 A를 뽑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선호도가 가장 낮은 A는 B나 C 결정에 무관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A는 상대적 순위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권자가 모든 후보자를 놓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위를 매기도록 한 뒤 각 후보자가 얻은 순위를 합산해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얻는 후보자를 선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방식도 다른 종류의 결함이 있습니다. 아주 소수 투표자가 아주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어떤 후보자를 딱 한 단계만 높이거나 낮추어도 결과가 완전히 뒤집힐 수 있습니다. 1등에 근접했던 후보자가 별안간 꼴등으로 떨어지거나 그 반대 상황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사실 결함이 없는 투표제는 불가능합니다. 사회가 다수결 투표라는 민주적인 방법에 따라 바람직한 결정을 내린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모든 투표제는 전략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바로 무관해 보이는 대안에 영향을 미쳐 전략적으로 선거 결과를 조작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선택은 ‘무관한’ 대안이 새로 추가될 경우 바뀔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인들 모두 이 모순을 알고 이용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대다수 유권자가 다수결 투표가 진정 공정하다고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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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 옹호론자들은 자신 주장을 증명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진리는 없다'라든가, '진리가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주장 자체가 그 진리를 인정하는 꼴이기에 자기모순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회의주의자들은 종종 웃음거리가 되곤 합니다. 철학자 아낙사르코스(BC 380~320)가 ‘세계는 환상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아낙사르코스 자신도 환상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의 말은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누군가가 ‘모든 진리 주장은 알고 보면 권력욕의 표출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면, 이 명제 자체도 그 사람의 권력욕의 표출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누군가가 ‘우리는 언어와 그 개념의 덫에 걸려 있다’라고 주장한다면, 이 또한 모순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주장조차도 언어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덫에 걸려있는 상황’을 표현하고 싶어도, 우리를 옭아매는 바로 그 개념이 아닌 다른 것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러한 ‘자기 지시’(self-reference)의 모순은 흔한 일입니다.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이 이해하는 주체인 ‘나’ 자신을 포함할 때 필연적으로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자기 지시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나 러셀의 ‘이발사의 역설’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거짓이다’ 혹은 ‘이 이발사는 스스로 머리를 깎지 않는 마을 모든 사람의 머리를 깎아준다’라는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자기 지시의 역설이 존재합니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에서 ‘난 거짓말쟁이야’란 발언을 그대로 믿어준다면, 스스로를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이 사람은 진짜 거짓말쟁이일까요? 그가 진실을 말한 것인데도요? 하지만 반대로 그가 완전히 정직한 사람이라고 해도 모순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말을 안 하는 정직한 사람이 자신을 거짓말쟁이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참도, 거짓도 아닙니다. 아무 쓸데없는 소리일 뿐입니다. 



러셀의 ‘이발사의 역설’ 또한 그렇습니다. 한 이발사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앞으로 나는 자기 수염을 '스스로 깎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수염을 전부 깎아줄 것이오. 다만 '스스로 깎는' 사람은 깎아주지 않겠소.” 이 때 이발사의 수염은 누가 깎아줘야 할까요? 다른 사람이 이발사의 수염을 깎아주는 경우 이발사는 수염을 '스스로 깎지 않는' 사람에 속하므로, 선언한 바에 따라 자신 수염을 스스로 깎아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 수염을 깎는다면 이발사는 수염을 '스스로 깎는' 사람에 속하므로, 선언한 바에 따라 자신의 수염을 깎을 수 없습니다. 이발사는 어찌하면 될까요?
















이 같은 문제가 참도 거짓도 될 수 없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자기 지시 문제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건 원인의 일부가 자신이라면 이 원인은 사건과 분리될 수 없어 자신의 피드백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피드백은 원자물리학에서 관찰자가 관찰 대상에 영향을 끼치는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관찰자는 관찰되는 시스템에 영향을 끼치고 그럼으로 정보를 잃게 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러셀은 이 같은 역설을 풀기 위해 10년의 세월을 절망적으로 보냈으나, 결국 1931년 괴델이 이런 역설을 풀려는 시도는 전혀 가망이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괴델의 명제는 학문의 기본적인 확신을 흔들었습니다. 인간 인식에는 언제나 틈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 명제는 증명될 수 없다’는 문장도 불확실한 진술입니다. 괴델의 말처럼 이 문장은 증명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이 참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논리 도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언급한 이유는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일이 생각보다 까다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발사의 역설은 사물을 속성에 따라 서로 다른 집단으로 분류하는 일이 얼마나 복잡한지 보여줍니다. 이처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섹시투스 엠피리쿠스(2C?~3C?)는 회의주의가 함축하는 이런 자기 지시 문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좀 더 유연한 형태로 변환시켰습니다. 엠피리쿠스는 진정한 회의주의자라면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라는 식의 모순된 주장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의주의자는 판단을 유보할 뿐입니다. 회의주의의 목적은 진리가 존재한다는 독단주의를 치유하여 마음의 평온을 얻는 것입니다. 회의주의 핵심은 다음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회의주의란 어떤 방식으로든 감각된 것이나 생각한 것을 대립시키는 능력이다. 이때 서로 대립하는 대상과 생각이 팽팽히 맞서기에, 우리는 판단중지(epoche)에 이르게 되며, 그로써 평온함(ataraxia)에 도달하게 된다.” 회의주의는 일종의 치유책입니다. 독단주의자를 치유하여 독단이 가져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회의주의 목적은 확고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자만과 경솔을 치유하고자 함입니다.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진리는 영원하지 않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글로 썼건 또박또박 명시했건 냉철한 시간에 분별 있는 사람이 뭔가를 얻어냈더라도 이는 얄팍하고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똑같이 건전하고 똑같이 이성적인 다른 사람이 논박하고 나서면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그런 것은 실재에 참된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 회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 역시 우리가 실재의 본질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궁극적인 실재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는 무뢰한이거나 바보다. 바보라 함은, 우리 인간이 감각 지각으로만 지식을 얻을 수 있기에 궁극적인 실재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를 무뢰한이라 함은, 그러한 한계를 알면서 그릇된 자신 철학을 따르라고 우리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우리 정신은 정념이 지배하며, 이성은 개인 생존과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나중에 분석적, 계산적 기능을 수행할 뿐입니다. 도덕률 또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인 묵계일 뿐이며, 객관적인 진리와 무관합니다. 예컨대, 에스키모인은 겨울에 늙은 부모와 함께 이동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죽게 놔둔다고 합니다. 뉴기니아의 도부족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를 용납합니다. 아프리카의 누엘족은 기형아를 출산하면 하마가 사는 강물에 던지는 풍습이 있습니다. 멜라네시아의 어느 부족은 친절함과 정직함을 악덕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믿는 가치가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면, 세상에는 옳은 것도 없고 옳지 않은 것도 없다는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면 도덕 문제에 확신을 가질 수 없기에 어떤 도덕 문제에 도 진지하게 의견을 개진할 수 없다는 우려가 커집니다. 
















흄이 도덕률조차 객관적 진리와 무관하다고 말한 점은 독단을 비판하고, 상식을 맹종하는 일상 태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입니다. 흄에 따르면,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손가락 생채기보다 전 세계 파멸을 선택하는 것이 이성과 상충되지 않으며, 낯선 사람 편의를 위해 나 자신의 파산을 선택하더라도 이성과 상충되지 않습니다. 이성이 진리를 인식하고, 자유의지가 정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념의 실현을 위해 나중에 이성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든 합리적인 것이 언제나 올바르다는 낙관론은 오해입니다. 사이코패스의 문제는 이성의 결여가 아니라 감정의 결여에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의심은 믿음 ‘뒤에나’ 온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의심을 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감정적으로 우연을 얼마나 잘 인정하는지, 회의적인 질문에 얼마나 많이 노출되어 왔으며 그에 따라 얼마나 잘 훈련되어 있는지가 포함됩니다. 의심하는 일은 기술입니다. 의심은 학습되고 연마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믿는 성향은 본능에 가깝습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새로운 정보를 대할 때 바로 진실로 받아들이지만 나중에 따로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거짓으로 거부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장자(BC 369?~286?)는 삶의 질곡을 헤쳐 나갈 방안으로 어떤 지식이나 어떤 실천적 강령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세계와 삶에 대해 우리 시선을 단적으로 바꾸기를 제안합니다. 특정한 시선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마음을 해방시켜 세상을 ‘아예 다른 눈으로’, 아예 다른 방식으로 볼 때, 그때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세계와 삶은 전혀 다르게 변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여기지만 자신 행위는 종종 사회적으로 유형화되고 구조화됩니다. 심지어 매우 개인적인 일로 보이는 자살 행위조차도 사회에서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사회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주장은 우리를 얽매고 있는 무언가로부터 해방시키는 효과가 분명 있습니다. 자연스럽다거나 필수 불가결하다, 선하다, 진리라는 것이 실상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은 사실상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인 힘, 이데올로기의 산물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당연한 믿음 안에 갇혀서 다른 삶의 방식을 꿈꾸는 상상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우리 생각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상호주관’이라는 아이디어는 우리 삶의 순간적인 맥락을 넘어서 볼 수 있도록 하고 우리 자신 행동 원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더욱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는 폭로와 비판,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무기입니다. 
















***


파블로 피카소 <황소 머리>(1942)



피카소의 작품 <황소 머리>는 1990년대 경매에서 293억 원에 팔렸지만, 왠지 조잡해 보입니다. 이러한 조잡함에도 예술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자전거 손잡이에 안장을 결합시켜 소의 머리 모양을 떠올릴 수 있는 피카소의 상상력 때문입니다. 

상상력은 오랫동안 잉태 기간을 거치면서 서서히 형성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때 생깁니다. 절박한 순간에 처했을 때 상상력은 별로 관계없는 요소들을 연관 지으며 그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게 합니다.

상상력은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그려 보는 일입니다. 상상력은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접촉하여 이루어지는 신비스러운 능력입니다. 상상력은 필요한 모든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존속 가치가 있는 과거 사실을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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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자연에 수학 형태의 법칙이 실제 존재하기에 자연에 객관적인 법칙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케플러의 제1 법칙도 행성 궤도가 타원에 가까울 뿐입니다. 실제 자연을 아주 비슷하게 기술한 자연에 대한 근사치일 뿐입니다. 과학자들은 실제로 복잡한 자연 세계의 여러 조건 중 특정 조건에만 초점을 맞춘 뒤 과학 법칙을 얻어냅니다. 그래서 많은 과학 법칙이 수학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자연이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연에서 수학적인 관계를 만족하는 특정 변수에만 초점을 맞춰서 변수 사이에 연관 관계를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냅니다. 

















수학조차 진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수학은 정교한 공리체계입니다. 공리란 수학 체계에 바탕을 이루는 기본 가정이고 전제입니다. 기하학에서는 참이라고 가정하는 단 하나의 공리, 곧 ‘점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지만, 위치는 있다’라는 공리에서 출발합니다. 결국 공리란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로써 어떤 학문이나 인식체계의 가장 기초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공리체계는 형식논리입니다. 공리라는 유효한 전제를 이용해 필연적으로 유효한 결론을 도출하여 오류를 줄이려는 시도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 믿음 중 일부를 완전히 확실하다고 간주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기반으로 자신의 나머지 세계관을 세우는 주춧돌로 공리를 이용합니다. 우리는 유효한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다른’ 질문 모두를 묻고 대답하는 데 공리를 이용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신학의 공리는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했으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죄를 대신해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라는 점이다. 이 공리를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은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이나 주장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공리를 인정하는 기독교 신자는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이 이 공리에서 도출되는 정리(定理)이기에 논리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철학자 아르케실라오스(BC 315?~240?)는 공리로 어떠한 것도 증명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증명하려면 우리는 진리가 도출되어 나오는 전제를 가정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또 다른 전제에 근거함으로써 그 전제를 증명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결코 정지점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결론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근거가 탄탄한 믿음 근저에는 근거가 없는 믿음이 자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근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믿음에 대해 어떤 설득력 있는 근거도 내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학자 쿠르트 괴델(1906~1978)은 수학을 포함한 모든 공리체계가 모순이 있는지 여부는 그 공리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이를 보통 ‘괴델의 정리’ 또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라고 합니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증명되어도, 우주 자체가 증명되는지 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안에서는 결코 증명될 수 없고, 벗어난 다음에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수학자 레오폴트 뢰벤하임(1878~1957)과 토랄프 스콜렘(1887~1963)은 공리체계가 완벽하더라도 의도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실이 발생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예컨대, 한국 사람을 규정하는 속성을 빠짐없이 다 적어놓았다고 하죠. 그런데 적어 놓은 속성 모두를 만족시키지만, 동시에 한국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진 뜻밖의 동물이 발견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불안전한 공리가 보완되면 진리가 발견될 가능성을 열어놓았지만, 뢰벤하임-스콜렘 정리는 공리 체계가 완벽하더라도 의도하지 않은 완전히 다른 결과 값을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수학조차 진리인지 알 수 없는 회의주의입니다.
















철학자 에드먼드 게티어(1927~2021) 역시, '정당화된 참인 믿음은 지식인가?‘<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1963)라는 논문에서,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 사이에 회자되어 온 지식에 대한 이론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믿음이 정당화되고 참이 되는 상황이 존재하지만, 지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를 ‘게티어 문제’라고 칭합니다.



플라톤 이래로 많은 학자는 지식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뭔가를 알기 위해서는, 첫째로 그것이 참(true)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대한민국 수도가 대전이 라고 믿는다면 진짜 수도가 서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둘째, 당신 믿음(belief)이 참이어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이 온당한 이유도 없이 ‘우연히’ 서울을 대한민국 수도라고 믿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옳다고 판명되었을지라도 당신이 지식을 갖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운 좋게 맞은 추측일 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그 믿음은 당신에게 정당화(justified)되어야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정당화에 있습니다. 사실을 알고 있다는 주장에 근거가 충분하지 않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지식이란 전방위적으로 믿음을 정당화하는 매우 엄격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부분이 지식으로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는 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내용이 정말로 알고 있는 게 아닐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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