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부자가 소비하면 필연적으로 부자로부터 가난한 자에게 부(富)가 낙수처럼 흐른다고 봤고, 이를 통해 고용이 창출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스미스는 상업 사회가 경제적으로 불평등해 질 수 있음을 인정했고, 불평등이 점차 심해질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그럼에도 상업 사회가 더 많은 부를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의 ‘게으르고 사치스런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임금노동자로 종사해야 하겠지만, 기초적인 조건만 누릴 수 있던 ‘발가벗은 야만인들’ 상태보다는 부유해진다는 논지를 폈습니다.
그렇지만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는 행복은 절대적인 빈곤보다 더 민감한 상대적인 빈곤 문제를 일으킵니다. ‘오늘날 가장 궁핍한 사람조차 수백 년 전 왕보다 더 잘 사는 데, 몇몇 사람이 그렇게 엄청 잘 사는 게 뭐가 그리 대수로운 일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절대적인 빈곤보다 상대적일 때 더 큰 빈곤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윌 듀런트는 “가난은 부(富)에 의해 만들어지며, 부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 우리는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른다”라고 지적합니다.
행복은 절대적인 수준이 아니라 ‘주변 사람과 비교할 때 내 삶의 질이 어떠한가?’라는 비교로 크게 좌우됩니다. 계층 간 소득 격차가 큰 나라일수록 자살률이 높습니다. 소득 불평등이 심한 지역에서 강도와 절도 사건이 빈번합니다. 절대적인 빈곤 수준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난하지만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보다 전체적으로 형편이 낫지만 특정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보다 못 사는 공동체에서 더 많은 범죄가 일어납니다. 잘 살아야 한다는 가치가 공유되어 있지만, 반면에 잘 살 수 있는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논어』에서도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인 빈곤을 더 염려했습니다. 정치하는 데 있어서 “백성이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백성이 불평등한 것을 걱정하라. 백성이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안정되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 대개 분배가 균등하면 가난한 백성이 없고 서로 사이가 좋으며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안정되면 나라가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다”[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盖均無貧和無寡 安無傾]라고 강조했습니다.
과거에 평범한 사람은 부자가 어떻게 사는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돈도 있었고 부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흔치 않았고 돈을 감추고 살았으며 자신 권력을 과시하고 싶을 때나 간혹 부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이제 부는 향락과 개인적인 만족이라는 형태로 공공연하게 표출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의 환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감추던 향락을 이제부터는 돈으로 살 수 있고 드러내놓고 즐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누구든 부자가 어떻게 사는지 쉽고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부자가 호화롭게 사는 삶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크게 보도합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부자들의 집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자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이라는 증상이 생겼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평생 절대 소유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괴로울 정도로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셜 미디어든 다른 형태의 대중적 노출이든,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은 보통 사람이 소유한 것을 하찮게 보이도록 합니다. 비록 우리가 객관적인 기준에서 삶을 넉넉하게 누리고 있고, 인류 역사 전체로 놓고 볼 때도 극히 잘 사는 사람일지라도 그렇습니다.
사회운동가 홍세화(1947~ )는 “성공한 자의 거머쥔 부를 동경하는 것은 ‘90퍼센트 사람들’이 덥석 문 당근”일 뿐이라고 지적하며, “그 가능성은 로또복권 당첨 확률에 불과하지만, 모두 성공 예감으로 뜀박질하도록 내몰아 기대하는 미래상으로만 자신을 일치시키고 오늘의 자신을 배반하도록 한다”라고 꼬집습니다. 또한 그는 그 이면을 깨달아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내 생각은 내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게 아니라, 지배계급이 나에게 갖도록 요구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해야 한다.”
어떤 시대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사회를 지배합니다. 사회의 물질적인 힘을 지배하는 계급이 동시에 사회의 정신적인 힘까지 지배합니다. 지배계급은 자신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자신 이익을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처럼 관념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지배 사상’은 지배계급이 자신 이익을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이익이라고 강제할수록 더욱 보편적이고 영원한 진리인 것처럼 표현됩니다. 귀족이 지배하던 시대는 명예나 충성 같은 개념이 지배했고,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는 자유나 관용, 부 같은 개념이 지배합니다.
행복의 결정 요인은 상대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 행복을 판단할 때, 자신 실제 상황을 과거 혹은 현재의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복이 상대적이라면 국가가 객관적으로 경제를 개선하고 부양책을 마련한다고 해서 반드시 국민이 행복해진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하며, 행복은 객관적으로 충족되지 않기에 국가의 경제 정책이 국민 행복 증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여건이 극도로 좋아진 후에도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예를 들면,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해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기본적 필요’가 무엇이든지간에, 일단 한 번 누구에게나 그것을 무료로 제공하면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빈곤층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 지구에 불평등이 만연한 것에 극도로 분노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소득은 다른 의미 있는 일과 더불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일 이후(이외)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일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한다. 보편 기본소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가 언급한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강력한 공동체 덕분에 삶의 만족도”가 커진 사회가 요즘 일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일본 젊은 층 대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취직률은 저조하고, 저임금에 시달리고, 워킹푸어로 일하고, 현대판 홈리스라고 볼 수 있는 피시방에서 난민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이들은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일본 20대 젊은 층이 느끼는 생활 만족도와 행복지수는 78.3퍼센트까지 상승했습니다. 일본 중학생과 고등학생 95퍼센트가 자신은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꽤 높은 행복지수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입니다. 절반 이상이 가끔 자살 충동을 느끼고, 3분의 1은 간헐적으로나마 우울증을 경험합니다. 서울에서만 매년 학생 1만 6,000명이 학교를 떠나고, 전국적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이 적게는 17만 명, 많게는 36만 명이나 된다는 조사가 있습니다.
1980년 절정기를 맞았던 일본의 ‘입시 전쟁’이 상징하듯 ‘좋은 학교, 좋은 회사, 좋은 인생’이라는 중산층 꿈으로 일본 전체가 압도되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1990년대 이후 중산층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기업의 정식 구성원이 되지 못한 젊은이가 증가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 층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요즘 일본 젊은이는 예전만큼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습니다. 술도 많이 안 마십니다. 해외여행도 그리 안 즐깁니다. 유학생 수도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선거 때 투표하러 가는 젊은이 수도 현저히 줄고 있습니다.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태어난 지역에 애착을 느끼는 젊은이가 증가하고, 대도시권으로 이동하는 인구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2011)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1985~ )는 그 원인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고 느낀다.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될 때, 지금 행복하다.” 만화 <피너츠>의 ‘철학하는’ 강아지 스누피 역시 이와 유사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내 인생엔 목표도, 방향도, 의미도 없어. 그런데도 난 행복해.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네. 내가 뭘 잘하고 있는 거지?”
사람들은 흔히 목적이 없으면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 행복하지 않은 것은 혹시 아닐까요?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1948~ )는 “현재보다 미래 목적이 왜 더 중요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합니다. 미래는 어쩌면 현재보다 추구할 가치가 적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삶이란 자연스러운 삶을 능숙하게 살아내는 것이다. 좋은 삶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지 않으며, 의지와 관련 없고,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목적이 없으면 무의미하다고 간주되는 시대에 목적없이 즐기며 사는 사람이 호모 루덴스(즐기는 인간)다. 좋은 삶이란 환경에 따라 사는 삶이다. 좋은 삶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삶을 의미하거나, 상식에 반드시 부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