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상인 집단은 사회에 새로운 자본주의 시각을 어떻게든 확산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상인 친화적인 경제체제를 구축하려면 빈곤한 노동자나 소작농 등 당시 적대적인 사람들이 상인 집단의 사고방식을 따르도록 변화시켜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상인 집단은 적대적인 사람들을 강하게 대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난한 자들을 강제로 일하도록 해야 하며, 대부분 사회복지는 그들 게으름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으므로 철폐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점차 자본가는 자신 스스로에게 적용한 근면이나 성실의 규율을 ‘게으른’ 노동자들에게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본가 미덕은 ‘비생산적이고 게을러터진’ 노동자를 가차 없이 대할 수 있는 권리나 의무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가치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자본가가 노동에서 ‘의미’를 찾아 낸 것은 노동자에게 노동을 강제하고 노동자의 계급투쟁을 막고자 함이었습니다.
노동자는 점차 길들여졌습니다. 심지어 일자리를 잃게 되면 괴로움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일자리를 잃는 일은 단지 수입원이 사라진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실업은 사회적인 죽음이 되었습니다. 일터에서 함께 했던 동료들과 더 이상 교제하지 못하고, 동시에 오랜 기간 일터에서 누렸던 역할과 지위를 상실합니다. 소위 ‘퇴직의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노동자는 몇 년간 우리 속에 갇혀 있다가 도망쳤으나 갑자기 많아진 자유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우리 주위를 빙빙 돌며 우리 속 ‘지옥’을 그리워하는 가축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일은 절대 고통스럽지 않으며, 노동자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베버의 ‘소명의식’에서 시작해 지금의 ‘인간중심 경영’ 이론이나 ‘소비주의’에 이르기까지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더 세련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회사는 노동자가 행복한 ‘한 가족’으로 느끼도록 ‘인간중심 경영’ 운동을 전개합니다. 회사는 ‘한 가족’이라는 생각에 따라 우리는 직장에서 상당 수 친구를 사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일상은 직장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하루 대화 3분의 2 이상을 직장에서 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많은 사람이 직장에서 동료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 연구 결과를 보면, 노동자들에게 제일 친한 친구 10명 이름을 적어보라고 요청할 경우 동료 직원 이름을 단 한 명이라도 적은 사람은 절반 이하로 나타났습니다. 평균적으로 이웃 주민이 동료보다 명단에 더 많이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중요한 일이 닥치면 누구와 상의하느냐는 질문에 동료를 단 한 명이라도 적은 사람은 절반 이하였습니다. 동료와 친밀한 유대를 맺고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
많은 기업이 직원들 자율성이나 완화된 위계질서, 업적과 성취에 따른 보수 체계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성과를 거두어야 월급이 오르고 고용 안정도 보장된다는 현실은, 단순한 암시일지라도, 동료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유발합니다. 생계를 놓고 동료와 은밀히 경쟁할 때 친밀함이 형성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회사는 노동자의 여가시간까지 빼앗아가며 저녁 회식이나 맥주 파티, 체육대회, 산악회, 친목행사 같은 여러 명목으로 노동자 불만이나 소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일의 의미를 만들어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경영진은 노동자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일에 몰입(engagement)하도록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심지어 노동자가 스스로 회사나 직장 상사처럼 힘 있고 부유한 존재로 여기도록 동료애나 가족 같은 회사, 이윤 나누기(profit sharing), 애사심, 주인의식(ownership)과 같은 ‘인간중심 경영’으로 노동자를 속이고 있습니다.
‘인간중심 경영’은 심리학자 엘튼 메이오(1880~1949)가 노동자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노동조합 결성을 막고자 기업가 록펠러(1839~1937)에게 제안해서 만든 연구입니다. 록펠러 재단은 메이오 연구에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대환영이었습니다. 그들이 메이오 심리학 연구를 후원한 이유는 노동자에게 돈을 덜 주면서도 그들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이오 이론은 노동자가 실제 착취당하지만 대우를 잘 받은 듯 믿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메이오는 노동자가 관리자 조작에 쉽게 흔들리는 단순한 감정 덩어리라고 가정했습니다.
인간중심 경영을 계기로 종업원에게 보내는 따뜻한 미소가 급여 인상보다 훨씬 더 돈이 남는 장사라는 교훈을 전 세계 경영진이 즉시 깨달았습니다. 인간중심 경영은 노동자에게 좋은 듯 들리지만, 아름다운 말로 실질적인 노사 협상을 대신합니다.
경쟁에 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힘든 노동자는 불안과 고독, 소외 같은 감정을 느낍니다. 소외된 노동자는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해야 했기 때문에 했어'라고 말합니다. '바로 내가 원해서 그것을 했어'라는 말이 중요한 데, 그렇게 하지 말하지 않는 사람에겐 복종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실제로 관리직 숫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자신 삶 모든 것을 바쳐 자발적으로 제대로 일하지 않으니 위협하거나 혼내줄 관리자가 더 많이 필요한 것입니다.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지 아예 잊고 살게 됩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노동자에게 자본주의는 계속 일하도록 동기 부여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건 바로 ‘소비주의’입니다. 소비주의란 소득과 지출이 더 늘수록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자네가 일하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자네가 노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월급으로 받은 돈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네. 집에 가면 자네가 주문한 싸구려 소비재가 잔뜩 뒹굴고 있을 거야. 자네가 그렇게 갈망했던 행복은 그것으로 얻게 될 거야. 직장에서 일하면서 느낀 비참한 시간을 소비재가 전부 보상해줄 걸세.’ 노동자는 기계화된 노동 과정과 소외된 현실의 삶을 감당하기 위해 소비를 통해 잠시 현실에서 벗어납니다.
소비주의는 더 많고 더 비싼 상품을 사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환상을 낳습니다. 심지어 싸구려일지라도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면 ‘소확행’이라는 소소한 행복으로 노동의 고통을 잊게 된다고 우리는 믿게 되었습니다. 소비는 현실 고통을 한순간 잊게 만들고,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 마취제이자 아편 역할을 합니다.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1931~1989)는 소비하는 삶을 '코미디'라고 불렀습니다. 나날의 단조로움을 피하려는 소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소비, 문제를 잊기 위한 소비는 결국 우리 삶을 코미디로 만들어 버립니다.
소비주의의 본질은 현실 문제를 능동적으로 사유하고 비판적으로 반성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현실 고통을 한순간 잊게 만들고, 체념하게 만드는 고통의 완화제일 따름입니다. 소비주의는 현실의 모순을 심리적 차원으로 환원시켜, 어떻게든 자본주의 본질만 건드리지 않으면서 뭔가를 해소해보라는 놀라운 전략입니다. 결국 기존 지배 체제와 질서에 순응하게 되고 이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소비주의가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유와 실천을 제약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노동자는 많은 상품을 소비하지만, 여전히 불행과 불안을 느낍니다. 그러면 노동자는 자신 소득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곤 합니다. 불행의 근본 원인을 이렇게 잘못 판단하면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필요하다는 감정에 점점 괴롭게 됩니다. 현재도 열심히 일하지만 장차 더 열심히 일해 더 빨리 승진하고 돈도 더 많이 벌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물질적인 것을 손에 넣으면 일시적으로 만족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점점 커지는 소비 규모 때문에 일과 소비의 악순환만 반복됩니다. 행복을 향한 ‘손쉬운 방법’으로 소비를 선택하게 되면 빚 때문에 망하거나 최대 수입만 는 고갈된 영혼만이 남습니다.
자본의 술책은 임금노동자를 빚 속에 빠뜨려 빚이 청산되지 않도록 하면서 빚의 상환에 전념하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임금노동자의 빚은 과거 노예제도와 유사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빚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게 없기에 빚에 의존해 살게 되는데, 과거 노예주나 식민지 지배자들이 그랬듯이 현대사회의 지배계층도 부채를 통해 임금노동자를 통제하려듭니다. 현대인도 융자나 주택대출 같은 부채를 갚아야하기에 부채가 없을 때보다 더 고분고분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더 기진맥진한 삶을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