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는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최선의 사회 체제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선거란 시민의 권리인 동시에 약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인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커다란 착각이다. 그들은 의회 의원을 뽑는 동안에만 자유로울 뿐이다. 의원들이 선출되는 즉시 시민들은 곧바로 노예가 되어버린다.” 
















선거는 민주주의에 대한 보장책으로서 너무 과대평가되어 있습니다. 사회운동가 엠마 골드만(1869~1940)은 여성들에게 여성참정권 운동에 대해 연설하면서, 여성이 선거에 참여하는 일에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과도한 기대는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보통선거권이란 현대의 미신입니다.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면 지금까지 남성들이 실패해 온 일들을 여성들이 이뤄낼 거라는 황당한 생각에 맹목적으로 동조할 수는 없습니다. 남성들의 정치사가 증명해 주는 바에 따르면, 지금까지 성취는 정치활동을 통해 이룩된 적은 결코 한 번도 없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성취한 모든 권리는 지속적인 투쟁, 자기주장을 위한 중단 없는 투쟁을 통해 얻어진 것이지, 참정권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선거 결과는 다수의 의견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의견’이란 무엇일까요? 유권자가 정보를 충분히 얻거나 비판적으로 성찰하거나 서로 토론할 기회도 없이 그냥 투표하는 일은 단순히 ‘견해’일 뿐입니다. 그러한 견해는 유권자가 특정 시점에 일시적으로 내리는 판단일 뿐, 사정이 달라지면 또 다른 의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선거 과정은 거의 최면술과 같아서 선거 전략으로 인해 투표자의 사고력은 둔화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투표한 후보자가 선출된 경우에도 나중 그 인물의 행위를 보고 실망하는 사람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1883~1950)는 정치가들의 영향력 때문에 유권자가 독립된 정치 의지를 가질 수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정치 과정을 분석하여 우리가 알게 된 결과는 유권자가 진정한 자기 의지가 아니라 ’가공된 의지’(manufactured will)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개인이 정치가들 제안에 영향받지 않은 나름대로의 자기 의지가 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에서 대중이 무엇인가를 선호하는 일은 정치가들이 우리가 그 무엇인가를 선호하도록 만든 행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로버트 위브(1930~2000)는 대중의 참정권은 시민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토대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는 듯 보이게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보통 선거권과 다수결이라는 규칙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이 국가를 형성한다는 이미지를 사람들 상상력 속에 불어넣었다.” 결국 ‘자유로운 인간이 자기가 살아갈 정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투표장에 가는 장엄한 모습’은 그저 환상에 불과합니다. 
















민주주의 선거에서 이용되는 ‘다수결’ 원칙은 간단하고 깔끔하고 공정한 기법으로 느껴지지만, 단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결정할 때만 최선의 기법입니다. 선택지가 둘을 넘어서면, 다수결 선호에 모순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케네스 애로(1921~2017)는 민주주의가 전제로 하는 다수결 원리가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냈습니다. 개인 다수 선호도가 사회 전체 선호도로 이행될 수 없습니다. 이를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라고 합니다.
















유권자 3분의 1은 A > B > C 순으로 후보를 선호하고, 다른 3분의 1은 B > C > A 순으로 선호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C > A > B 순으로 선호한다고 가정해 보죠. 그런데 전체로 보면 A는 B를 이기고, B는 C를 이기고, C는 A를 이긴다는 이상한 예상 결과가 나옵니다. 그것도 모두 3분의 2의 확률로 동일합니다. 그래서 유권자 모두 자신이 선호한 후보자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합니다. 하지만 유권자 3분의 2가 원치 않는 후보자가 당선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선거의 역설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36.64%), 김영삼(28.03%), 김대중(27.04%) 세 후보 중 유권자 60퍼센트가 원치 않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투표를 두 단계로 나누어 진행하더라도 여전히 모순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A보다 B 선호도가 높고, B보다 C 선호도가 높다면, A보다 C 선호도가 높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이보다 더 복잡할 수 있다. B가 빠진 두 번째 투표 상황에서 A와 C만 투표할 경우 C보다 A 선호도가 더 높게 나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신중하게 처신하지 않으면 모든 유권자가 C가 낫다고 생각하는데도 A를 뽑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선호도가 가장 낮은 A는 B나 C 결정에 무관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A는 상대적 순위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권자가 모든 후보자를 놓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위를 매기도록 한 뒤 각 후보자가 얻은 순위를 합산해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얻는 후보자를 선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방식도 다른 종류의 결함이 있습니다. 아주 소수 투표자가 아주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어떤 후보자를 딱 한 단계만 높이거나 낮추어도 결과가 완전히 뒤집힐 수 있습니다. 1등에 근접했던 후보자가 별안간 꼴등으로 떨어지거나 그 반대 상황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사실 결함이 없는 투표제는 불가능합니다. 사회가 다수결 투표라는 민주적인 방법에 따라 바람직한 결정을 내린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모든 투표제는 전략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바로 무관해 보이는 대안에 영향을 미쳐 전략적으로 선거 결과를 조작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선택은 ‘무관한’ 대안이 새로 추가될 경우 바뀔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인들 모두 이 모순을 알고 이용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대다수 유권자가 다수결 투표가 진정 공정하다고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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