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가 어떻게 다른 제자백가의 학파를 압도하고 승리를 얻었는가? 유교는 역시 학문 그 자체에 우세해질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교의 으뜸가는 강점은 그것이 역사학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장은 무위자연을 존중해 인위(人爲)를 배척하므로 역사학이 없다. 묵자의 학술은 <서경>이 있을 뿐 <춘추>가 없다. 말하자면 고대사가 있고 중세사 이하는 없다. 전국시대 종횡가의 학술은 근세사만 있고 고대사가 없다.
그런데 유학은 옛날로는 하, 은, 주 삼대의 전성기가 있고, 내려와 <춘추>가 그것을 이어받으니 <춘추>의 종말은 공자의 시대이며 그 이하는 맹자, 순자 등의 학자가 계승해 현대사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일관된 역사 체계를 갖고 있는 것은 유교뿐이다. 바꿔 말하면 유교만이 중국이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할지를 가르치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p. 175. - P175

한나라 건국 초기 이래 대체로 평화가 계속되었고 조정도 절약에 힘쓴 결과 한무제 무렵에는 조정의 재정에 여유가 생기고 창고에는 해묵은 쌀이 넘치며 동전이 쌓여 녹이 스는 형편이었다. 이처럼 재물이 사장되면 그것이 세상을 불경기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면 소비가 활발해지고 유통계로부터 숨겨져 모습을 감추고 있던 화폐나 물자가 세상에 나와 경제가 활황으로 끓어오르며, 그것이 또 생산을 자극하고 고용을 왕성하게 해서 실업자를 구제하게도 된다. 그래서 한무제는 흉노와의 전면전을 시작했다. pp. 177-178.
한나라 국고도 해를 이은 전쟁으로 지출이 급격히 증가해 그토록 풍부함을 자랑하던 재정도 바닥을 드러냈고 곧 궁핍을 고하게 되었다. 한편 전쟁은 자산가에게 일확천금의 기회를 주었고, 특히 제철업자는 무기 제조를 통해 큰 이익을 얻었다. 그래서 한무제는 악화되는 재정을 회복시키는 한편 괘씸한 대상공업자를 억누른다는 명목으로 당시의 대표적 상품인 소금과 철을 정부에서 전매하게 했다.
소금과 철의 전매 이익만으로는 어려운 재정을 되살리기가 불가능해지자 한무제는 상품의 통과세란 명목으로 배와 수레에 세금을 매기고 술도 전매품 안에 포함시키며, 다시 제후들에게 헌금을 시켜 그 황금이 만일 품질이 나쁘면 그 영토를 몰수하는 등 갖은 수단을 다해 재정 수입의 증가를 꾀했다.
그 밖에 주목해야 할 것은 균수법을 시행해 물가 변동을 막고자 했고 또 처음으로 은을 화폐로 사용하려고 시도했다. 이들 신정책은 대개 실패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후세에 송의 왕인석은 균수법의 재생을 꾀한 적이 있고 은을 화폐로 쓰는 것은 그 후 차츰 유행해서 명대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본위화폐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pp. 182-183.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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