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의 인문학 - 실수투성이 인간에 대한 유쾌한 고찰
캐서린 슐츠 지음, 안은주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자신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보에는 덜 노출된다. 우리는 이미 자신이 가진 견해를 고수하는 데 완전히 만족한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믿음에 대해 공부해 볼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전혀 다른 믿음 체계를 가진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별로 없다. 게다가 그런 사람과 시간을 보내더라도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해 토론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날씨에 대해서는 얘기를 나누지만 기후 변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최근의 여행은 얘기하지만 사회의 낙태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행동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다. 그런 행동이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선호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예절 바른 행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에티켓 전문가는 ‘타인이 기분 좋아할 만한 일과 말만 하려고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pp. 182-183. - P182

1990년 아프가니스탄인 압둘 라만은 기독교로 개종했다. 국민 99퍼센트가 이슬람교도인 아프가니스탄에서 개종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하만은 아프간 난민들에게 의료용품을 원조하는 가톨릭 자선단체에서 일하다가 동료들의 종교를 믿게 된 것이다. 라만이 개종하면서 그의 삶은 모두 달라졌다. 그는 배신자라는 이유로 독실한 이슬람신자인 부인에게 이혼당했다. 두 딸에 대한 양육권 소송에서도 같은 이유로 패했다. 라만의 부모는 ‘우리 집안에서는 이슬람에서 다른 종료로 개종한 자식은 필요 없다’면서 그와 연을 끊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가혹한 형벌이지만, 2006년 라만은 배교 혐의로 아프간 경찰에 체포당해 투옥되었다. 교리에 따라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다. 검사는 ‘무슬림 사회에서 차단되어 사라져야 하며, 죽음을 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프간 변호사협회 역시 그 견해를 지지하면서 그의 교수형을 촉구했다. 국제 사회가 강력하게 압력을 행사한 후에야 비로소 라만은 석방되었다. 법정 사형은 면했으나 법정 밖에서의 신변 위협으로 그는 이탈리아로 도망치듯 망명했다. 기독교로 개종해 가족에게서 쫓겨나고 사랑하는 이들과 격리된 채 이국에서 떠도는 운명에 처하게 된 이슬람 압둘 라만은 본질적으로 방랑 유대인이 된 셈이다.
이 사례는 한 사람의 불순분자가 공동체 전체의 일관성을 파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의심과 반대는 확산되어 공동체를 파괴할 수도 있는 전염병과도 같다. 따라서 많은 공동체가 반대론자를 치료하거나 격리하거나 추방하려는(극단적인 경우에는 제거하려는) 조치를 재빨리 취한다. 어떤 하나의 믿음에 대해 서열을 깨는 한 사람이 전체 공동체의 일관성을 위협한다고 본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더욱 심하게, 믿는 행위의 본질에 위협이 될 수 있다. 국경을 넘을 때(또는 가톨릭 신자인 국제 원조 요원을 만날 때) 믿음이 변할 수 있다면 진리란 단지 지역 관점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진리라는 개념의 요점은 보편성에 있으므로 믿음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곤란하다. 라만의 사형 언도를 지지했던 한 이슬람 언론가는 그 문제를 간단히 설명했다. ‘누군가가 한 순간에는 진리를 긍정하다가 그 다음 순간에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한다면 진리의 전체 패러다임이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p. 188-189. - P188

미국 의학협회에 따르면, 미국에서 매년 환자 69만 명이 의료 과실로 희생되며, 그들 중 4만 4천 명이 사망한다. 의료 과실은 미국에서 여덟 번째 사망 원인으로 유방암이나 에이즈, 오토바이 사고보다 그 순위가 높다. 미국 항공업계가 의료 과실과 동일한 사망자 수를 내려면 항공권이 매진된 747기가 사흘에 한 번 꼴로 추락해서 탑승객 전원이 사망해야 한다. p. 368. - P368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소유했다는 생각은 굉장히 중요한 심리적 목적에 기여한다. 우리에게 본질적이고 불변하는 정체성이 있다면 우리가 가진 믿음, 우리가 하는 선택, 우리가 될 사람 중 어느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 삶의 모든 궤적은 필연적인 것이 되고,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결국은 드러날 것이라는 확신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이 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오류를 범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우리의 거짓 자아는 미리 운명지어져 있으며, 겉으로 보기에 오류처럼 보이는 것도 엄격히 말하면 더 큰 진리에 복무하기 위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신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종교적 주장, 즉 삶의 시행착오나 오점으로 보이는 것조차도 신의 더 큰 계획의 일부라는 주장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렇듯 진정한 자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이야기들은 목적론이다. 우리는 결국 운명이 미리 정해 놓은 바로 그 자리에 도착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 본질론적 자아론의 매력인 동시에 약점이 있다. 우리의 인생은 결정론적이며 그 자체의 지적, 감정적, 영혼적 강점 때문에 선택했다고 생각했던 어제의 신념은 단지 미리 결정된 미래의 자아를 위해 우리를 유인한 함정에 불과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때 과거가 그 자체로 가지고 있었을 의미와 가치는 손쉽게 지워져 버린다.
더 큰 문제는, 진정한 자아라는 개념이 우리가 절대로 어떤 중요한 대변동도 경험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큰 변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진정한 자신, 늘 그러했던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한 후에는, 우리에게 더 이상의 변신은 불가능하다. 자아가 계속 변한다면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고, 계속 새로운 누군가가 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각자에게 고정된 본질이 있다면 우리는 그 본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과거에 그 본질적 자아로부터 벗어났던 것은 단지 설명할 수 없는 한 번의 의도일 뿐이며 배신이나 죄로 규정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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