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촉, 오 삼국시대 이후 화폐 부족 때문에 불경기가 심각해지자 화폐는 점점 더 사장되고 그 결과 불경기가 더욱 가속화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그래서 포백이나 곡물이 화폐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고, 사회는 일변하여 자연경제로 되돌아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기교를 부리지 않는 자연의 섭리, 하늘의 구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농업의 중요성이 재인식되고 농업이나 양잠을 위해 지력(地力)의 개발이 요구되어 널리 개간이 행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p. 216. - P216
보통 서양 중세에 관해서는 이른바 민족 대이동을 중세의 개막으로 삼는데, 그것은 로마제국 말기에 라인강, 다뉴브강에 연한 장성선(長城線)을 넘어 내지로 이주한 게르만 민족이 군벌로서 발전해 내지를 교란시켰을 때, 또다시 새로운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일어나 라인강의 수비를 넘어 내지로 들어가 도처에 독립 왕국을 건설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도 완전히 이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후한은 건국 초기부터 북방 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광무제가 군웅을 평정할 즈음에 오환족의 기마병, 이른바 돌기의 무력에 크게 의지했다. 천하 통일 후 한의 국력이 강성해지는 시기에 흉노의 남선우가 북선우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한에 들어와 살기를 요청하므로, 광무제는 그 8부의 부락을 산서성 북부의 병주 땅에 거주하게 했다. 그들은 한의 군헌과는 별개의 계통을 이루어 선우 아래에 통솔되며 한의 감독을 받고 있었는데 전쟁 때마다 징집되어 군역에 종사했다. 후한 말 동탁이 대군을 일으켜 입경할 때 그 부하에 서방과 북방의 이민족이 많았다. 이어서 원소가 지금의 하북성 기주 땅에 웅거했을 때도 그 근린의 이민족을 자신의 군에 편입시켰다. 조조는 동탁의 군을 인계받은 여포를 죽이고 원소를 격파해 기주를 평정했으므로 그때마다 적군을 수용, 개편한 결과 그의 군 안에는 자연히 이민족 출신의 전사가 많았다. 그 군대가 병호(兵戶)라고 불리며 보통 농민 이하의 반 노예적 대우를 받게 된 데는 이러한 점에도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조조가 원소의 조카 고간을 토벌해 병주를 평정했을 때 남성우의 흉노 부락도 역시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 충분히 중국화되어 있지 않은 용맹한 흉노족에 대해 조조는 분할통치의 술책을 썼다. 그는 흉노 무리를 5부로 나누고 각각의 부락에 부수(部帥)를 두어 지배하게 하고, 그 위에 흉노의 중랑장이란 관리를 파견해 감독했다. 바꿔 말하면 위는 이민족 출신자를 군대에 많이 수용해 사역시키고 그 군대의 힘으로 이민족을 통치했던 것이다. p. 224. - P224
전기의 당나라는 북주로부터 시작해 수가 이어받은 무천진 군벌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수도, 당도 한인 출신이라고 일컫지만 실은 그 전의 북주 우문씨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이민족 기질을 농후하게 받은 이른바 한(漢)과 호(胡)의 혼합 혈통이었으며, 혹은 이민족 그 자체는 아니었는지 의심하는 말조차 있다. 예컨대 수 양제가 부친의 첩과 사통하고, 당 고종이 부친의 첩인 무씨를 황후로 세운 따위 일은 이를 순수한 중국적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사람 눈을 경악케 하는 불륜 행위인데, 북방 유목 민족 간에서는 극히 보통으로 행해지는 습속에 지나지 않는다. p. 263. - P263
송나라 시대가 되면 상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지금(地金) 화폐 외에 유가증권이 화폐의 용도를 갖게 되었다. 처음 사천성 지방에서 부호들이 사적으로 교자(交子)라는 현금보관증을 발행해 그것을 가진 자에게는 누구를 불문하고 초면에 지불에 응했다. 최초에는 맡긴 금액만큼의 교자밖에 발행하지 못했으므로 교자는 세인들에게 절대적 신뢰를 받고 지폐처럼 민간에 유통되었다. 이에 자신을 얻은 교자포(交子舖)는 한도 이상의 교자를 발행해 세간에 내놓았으며, 이로써 얻은 현금을 유용해 투기를 시도하고 이중의 이익을 얻으려 했다. 이 투기 사업이 실패하면 자기가 발행한 몫은 물론 손님에게서 의뢰받은 몫의 교자에 대해서도 현금을 태환할 수가 없어 결국 어음을 부도낸 결과가 되고, 사람들의 환불 요구에 직면해 파산하는 자도 생겨 공황을 아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민간 자본가의 교자 발행을 정지시키고 정부의 책임으로 스스로 교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1023). 이것이 세계 최초의 지폐인데, 이 경우에 정부의 교자 운영의 방법을 보면 그 발행고는 결코 준비금의 범위를 지킨 것은 아니고 다액의 한도 이상의 발생을 감행하고 있었다. p. 301. - P301
주자학이 자주 비난을 불러온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하면, 그것은 첫째 몹시 관념론적이라는 것, 둘째로 그 관념론을 바로 실행 가능한 듯이 믿어 타인에게 강요하는 데 있었던 것 같다. 만일 관념론이란 점을 말한다면 주자학에만 한정되지 않고 송대의 학문은 모두 관념론이다. 하지만 왕안석 학파는 한편으로는 객관을 중시하므로 실제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거시서 현실과 지나치게 타협한다는 비난도 생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주자학파는 떄로는 그것이 선종(禪宗)에 가까워 유교의 형태를 취한 불교라 할 수 있을 만큼 주관적이고 또 독단적이라는 결점이 확실히 있었다. 주자의 학문의 근본은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기초하는데, 이것은 원래 도가(道家)의 손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 태극도에 대한 설명이며, 주자는 또다시 여기에다 해석을 붙였다. 이는 우주의 생성을 논하지만 물리학도, 천문학도, 생물학도 아니다. 억지로 말하자면 선험적인 우주론인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인성론이 도출된다. 당시 학문에서는 무엇이든 그것으로써 설명이 잘 되면 그것은 진리였던 것이다. 주자의 우주론에 있어 정신적 원리인 리(理)와 물질적 원리인 기(氣)의 이원론에서는, 궁극적으로는 운동이 없는 절대 정지(靜止)라는 태극의 장에 이르면 기는 리에 내포된다는 점이 특색이었다. 마찬가지로 인성론에서도 천연의 성(性)인 양심과 기질의 성인 욕망이 대립되면서도 역시 절대 정지인 경(敬)의 장에서는 기질의 성은 천연의 성에 내포되며, 그런 까닭에 성선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자학의 태도가 현실의 정치와 외교에 적용되면 거기에 현상의 분석을 소홀히 하고 공론(空論)이 폭주할 위험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 p. 364. - P3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