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삶의 철학
엠리스 웨스타콧 지음, 노윤기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단순한 삶의 철학

(원제: The Wisdom of Frugality)

엠리스 웨스타콧(Emrys Westacott) 지음 | 노윤기 옮김 | [책세상]

 

 

이번에 읽게된 <단순한 삶의 철학> 대한 글은 기존의 독후감과 유사한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고 보다 간결하게, 내가 받은 인상을 책은 어떤 책이다라는 방식으로 정리해보려한다.

 

 

<단순한 삶의 철학> 생각의 출발점이 되는 책이다.

책의 저자 엠리스 웨스타콧에 대해 출판사에서 제시한 자료를 보면 미국 뉴욕 소재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서 본인 자신은 지독한 구두쇠로 스스로 인정하고 있으나 책에서는 독자에게 검소한 삶만이 길이다라고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책의 처음부터 소박하고 단순한 선배 철학자들이 주장했고, 이를 찬양했다고 하여 우리도 여기에 따라야하는가를 묻는다. 책의 원제(검소함의 지혜) 고려하면 결국 저자의 입장은 소박하고 검소한 손을 들어주고 있긴 하지만, 이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을 공개하듯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는인상을 받는다. 일상생활에서 당연한 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에 대해 의심하기, 일상에서 철학하기를 우리에게 책전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저자의 견해에 동조하든 반대하든 선택은 각자의 논리와 철학에 달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저자가 제시하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하나하나 따라가며 자신의 견해와 비교해보면 것이고,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들을 풍부하게 제시한다.

 

 

<단순한 삶의 철학> 천천히 읽는 책이다.

저자가 어떤 관점에 대해 소개할 , 다양한 견해를 제시해준다고 말했다. 동전의 양면을 모두 면밀히 살펴보듯, 해당 관점에 대해 저자는 반론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뚜렷한 주장이 없이 저자의 논점이 없어보이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반론의 모습을 따라가는 것은 긴장의 이완이 없이 지속적으로 긴장상태에 있는 같아 속도감있게 진행되지 않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책은 소박하고 검소한 삶과 우리의 행복한 , 의미있는 삶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소개해주는데, 고대의 철학자 뿐만 아니라 알랭 보통과 같은 동시대의 저술가도 소환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제시하는 문장의 의미는 저자가 정리한 고대 철학자나 동시대 철학자의 저서에 대한 서평이기도 하다. 책은 독자의 수준에 따라 저자가 제시해주는 견해들을 이미 알고있다면 빠르게 읽어나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천천히 읽을만한 책이다. 어떤 점에서는 <단순한 삶의 철학>  검소한 삶의 미덕으로 가기 위해 저자가 오랜 시간 함께해온 책들과 삶의 철학이 함께 녹아든 독서에세이라고 수도 있겠다. 저자의 폭넓은 독서 경험과 검소한 삶의 미덕 대해 생각해온 저자의 고민이 들어있는 만큼 천천히 읽으며 독자 자신의 생각을 부추기는 책이기도 하다.

 

 

<단순한 삶의 철학> 유연한 윤리학을 보여준다.

윤리학/철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우선 자신이 책을 읽으며 받은 인상은 책이 북미의 실용주의 윤리학의 전통을 잇는 실천윤리학적 맥락을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 실천윤리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피터 싱어의 철학과 생각하기의 방식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치에 대해 우리의 일상의 실례를 다양하게 고찰하고, 다양한 관점을 모두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서양철학사 2000년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는 영국 철학자 화이트 헤드(White Head) 말을 떠올려본다. 플라톤 철학의 전통은 이데아 철학임을 인정한다면, 이데아 영원불변의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다. 여기서 플라톤을 갑자기 꺼내는 이유는 <단순한 삶의 철학> 원제가 의미하듯 소박한 삶의 지혜라는 (저자의) 기준을 가진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전통을 잇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길에 이르기 위한 과정은 상당히 유연하고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 또한 우리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어떤 가치 대해 다시 들여다보기를 실천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경제를 북돋우기 위해 지역 농산물만을 구매하여 섭취하는 것이 좋다라는 주장을 놓고 , 피터 싱어가 그의 <죽음의 밥상>에서 다양한 입장을 모두 고찰하던 모습을 책의 저자 엠리스 웨스타콧도 유사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 측히 후기 자본주의로 대두되는 지구촌에서 물질적 풍요와 소비의 향유는 성공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풍요속의 빈곤, 공허감을 이야기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책은 결국 이러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검소한 사람 가치를 다시 들여다보게 해주고, 우리의 일상에서 각자가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로 실천의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책이 아닐까 한다. 

 

 

<단순한 삶의 철학> 읽고 옆길로 흔적 단상들

저자는 고대 철학자, 사상가들의 시대와 현대 시대는 분명 삶의 양태가 다르다는 점을 분명이 인식하고 제시한다. 가진 것이 부족하고, 소수의 특권 귀족 계층만이 부를 누리던 고대 사회에서는 귀족 계층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서 금욕주의 칭송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금욕주의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다’(49)라고 저자도 주장하고 있듯이, 저자는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에 대한 고려를 놓치지 않는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역시 2년에 가까운 속에서의 생활에 기반하여 <월든>이라는 책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역시 전세계가 긴밀히 인터넷과 전화 등의 통신망으로 연결되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소로의 실험적인 삶은 사실 접근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2018 현재, 자본주의적인 경제구조가 지구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잡리잡을 있었던 이유 하나는 서구의 자본주의가 지구촌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개성이란 개념을 발명(?)하고 주입시킨데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나 욕구 가지고 있다. 생물체로서,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말이다. 자본주의는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라는 점으로 우리에게 안심시키며, 우리가 자신들의 욕망 충족하기 위해 자유의지 갖고 이를 추구하도록 독려한다. 저자도 누누이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가 무엇을 욕망한다는 것은 그른 일일까를 반문해보면서도, 보다 중요한 것은 욕망 모습이 어떤 양태를 가지며,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따져보라는 것이 저자 엠리스 웨스타콧 교수의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간결히 말하면,  어떤 가치 주장에 대해 단순히 수긍하기 전에 각자가 따져보라 것이다. 그리고 판단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모양이다. 저자는 끝없이 의심하고 소소한 반론을 제기한다. 저자는 심지어 끝없는 욕망이 불행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127)라고 까지 주장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높고 강렬하고 광범위한 행복의 동력이 되는 경우도 있다’(127) 점이다.

 

그러나 책의 후반에서 다루고 있듯 우리 현대인들은 개성 표출, ‘욕망 충족을 위해 많은 시간을  일해야만하는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4차혁명이라는 화두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인공지능에 기반한 삶의 혁명은 우리의 삶의 질을 보다 높여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당장은 우리의 삶을 좀더 편하고 일처리를 빠르게 해주는 자동화 과정에서 현대 기술은 인간의 생산성을 더욱 압박하는 양상도 무시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자동화 설비를 통해 일주일하던 임무를 하루만에 해냄으로써 기존의 작업방식을 혁명적으로 개선했지만, 이는 또다시 노동자로하여금 일주일 내에 일곱배의 일을 완수하도록 강요하는 메카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현대인들, 특히 노동자들의 삶은 노동시간이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 내에 많은 일을 하도록, 높은 생산성을 요구하는 모순을 가져왔다는 점도 고려해야한다. 저자가 소박한 사람또는 검소한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노동시간을 언급하는 것도 분명 검소한 에는 삶의 대한 고려도 분명 포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있었다.  

 

저자가 보여주는, 혹은 저자가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검소한 모습을 글로 모두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를 글로 표현하고 타인에게 주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책의 가치는 저자가 독자들을 각자 나름의 고유한 점과 보편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인정하고,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한번 면밀히 들여다보라고 권유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각자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낯설게 보라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책은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성찰하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라는 주장에 대한 실천적 가능성이라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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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나라 -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토르디스 엘바.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용서의 나라

(원제: South of Forgiveness)

토르디스 엘바/ 스트레인져 지음 | 권가비 옮김 | [책세상]

 

과거를 대면하고 치유의 길로 이어주는 마법’ – 피해자와 가해자가 용서와 자유에 이르는 여정

 

 

 

 

잃어버린 기억, 잃어버린 시절

기억에서 기어 나오며 나는 잃어버린 세월의 황량함에 몸을 떨었다. (…) 사랑의 나라로 처음 뛰어내렸는데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았다는 . 피처럼 붉은 대문자들이 나의 추락을 그림처럼 선명하게 묘사해 넣었다.”(146)

 

성폭력 피해자이자 <용서의 나라> 저자인 30대의 토르디스 엘바가 열여덟 생일날 아침에 시를 다시 들여다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은 폭력은 십수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들의 세포 하나 하나에 선명히 각인되어 끊임없이 피해자들을 따라다닌다. 

 

<용서의 나라> 저자는 때의 연인이자, 성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대면하는 일은 피해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와 고통을 있는 일이기에, 특히 피해자에 대한 보호와 보살핌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상당히 우려스러운 상황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람을 대면하게 해줄 있게 해준 매개체는 책의 제목에도 드러나듯, ‘용서라는 화두로 가능했다. 책은 흔히 합의라는 이름의 경제적 보상으로 폭력사건의 가해자가 면죄부를 받고 새사람으로 변신할 있는 대한민국 사회를 떠올려볼 , 진정한 용서 어떻게 이루어져야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제시해주며 우리가 눈여겨볼만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책에 등장하는 저자이자 성폭력 피해자인 토르디스 엘바는 아이슬란드에서 태어난 여성이며, 다른 저자이자 성폭력 가해자인 스트레인져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남성이다. 사람은 각각 10 후반이자 20 초반이었던 16 사람 사이에 있었던 성폭력 사건의 기억을 다시 소환하고 이와 직접 대면하기위한 준비를 한다. 특별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장소로 남아공의 케이프 타운을 선택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케이프 타운은 소수의 백인 남성이 주도했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폭풍을 겪은 곳이면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정치적 이유로 반평생을 감옥에서 갇힌 풀려나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무엇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성폭력이 발생하고 있는 곳이기에, 케이프타운에서 이루어진 사람의 만남은 서로의 화해와 용서를 위한 출발점으로서 매우 상징적이고,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육체적으로는 성숙했을지 모르지만 성적으로나 삶의 경험으로나 아직 미숙하던 10 후반, 20 초의 저자들은 사건직후, 가해자 피해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정 반응을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할 있다. 토르디스는 자신이 겪은 절대적 신뢰의 대상이었던 연인에게서 당한 일이었음을 믿지 않으려 했다. 한편 톰의 경우, 토드디스와 절교하고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끝나게 되어 아이슬란드를 떠나며 상황을 회피하였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덮으려는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톰에게는 회피기작으로 인해 어떤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토르디스가 톰에게   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톰의 가해 사실을 전달할 때까지는 말이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성폭력은 우리 주변, 특히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많이 자행된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최근 국내에서 발생한 여러 성폭력 관련 사건을 살펴봐도 그렇다. 무작위로 성폭행을 저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토르디스가 책의 초반에 말문을 열며 언급하는 대목도 정확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대부분의 강간사건은 우리가 피하라고 교육받는 그런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강간 사건은 대부분 가정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믿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친척, 배우자, 친구 등에 의해서 일어난다.”(33)

특히 톰의 경우 성폭력 가해자가 되리라고 짐작해볼만한 단서를 찾기힘들다. 우리가 성폭력을 가하는 사람은 이미 정해져있다라고 믿는한 그렇다. 그러나 톰은 사랑이 넘치고 풍요로운 자연환경에서 충만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교육도 충분히 받았고, 부모로부터 사랑도 많이 받았다. 여성을 혐오할만한 부정적인 경험을 적도 없어보이며, 오히려 성장과정에서 톰에게 긍정적인 여성상도 많았다. 경우를 보면 누군든 성폭력 가해자가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점에서, 성폭력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준다. 아울러 성폭력은 어디에나 존재할 있음을 사례는 다시금 분명히 보여준다.

 

토르디스는 남자가 여자를 범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사회구조에서 찾을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 사회구조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 부분은 책의 후반에 사람이 남아공의 강간위기센터를 방문했을 , 곳의 담당자였던 시릴라가 남아공의 현실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시말하면 남아공은 소수 백인(남자)들이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놓은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 영향과 상처를 아직 치료중이라는 것인데, 시릴라는 아파르트헤이트가 가부장제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고 지적하였다. 여성 인권이 극히 취약하면서 동시에 세계 최고 수준의 성폭력 발생률을 보이는 남아공-케이프타운의 현실을 고려해본다면, 본질적으로 현상(아파르트헤이트와 높은 성폭력 발생률) 서로 모종의 연관을 갖는다는 점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시릴라의 말대로라면 강간은 힘과 지배 문제이기에, 성폭력 문제는 결국 개개인의 가해자에 대한 교화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되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구조적이고 총체적인 접근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배울 있다.

 

 

 

 

수인(囚人)으로서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

있고난 직후 토르디스와 톰에게 일어난 반응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현실에 대한 부정 혹은 현실 회피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피해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이런 폭력을 당할 있는가? 그리고 가해자는 아마도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은연중에 내리며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이 겪은 일의 후폭풍은 사람 모두가 스스로를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토르디스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고,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우울증, 스스로 강간을 자초했다는 자괴감 뿐만 아니라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 등으로 장기간 고통을 받았다. 가해자입장이었던 톰도 이후 쉽지 않은 세월을 보내게  된다. 수치심, 그리고 끊임없이 몸에 새겨져 스스로를 갉아먹는 죄책감의 감정과 떳떳하지 못한 인간으로서 두려움 속에서 살게되어 스스로를 수인(囚人)으로 만들어 버렸다. 피해자를 무의식중에 회피하고 살아가더라도, 묻혀있던 죄책감은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어 가해자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할지 모른다. 결국 심리적,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타인과의 관계가 원할하기 힘들게 됨은 미루어 짐작할 있다. 스스로를 돌볼 여유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상대방을 위하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있겠는가. 토르디스가 과거를 마주대하는 것이 편하지는 않은 입장임에도, 톰이 동안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지를 짐작하는 대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토르디스는 톰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자기를 혐오하며 주변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밀쳐내다 보면 누군가를 보살피거나 거꾸로 보살핌 받기가 힘들어진다.”(223)

 

결국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피하고, 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톰처럼 진심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원활한 대인관계를 맺고 타인을 위하는 마음가짐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결국 수치심을 너머 가해자였던 이들에게도 평생의 짐을 지우고,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피해자를 만드는 결과가 된다는 점을 토르디스는 이미 스스로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며 깨닫고 있었다.

 

 

 

 

피해자가 다른 가해자가 되는 프레임 -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무자비한 인종주의를 고발하는 사진을 수백 보고 나니 사람에게 딱지를 붙인다는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이 이상 사람이 아닐 백인혹은 흑인 되고, ‘박해자혹은 피해자 되는 것이다.”(115)

 

아파르트헤이트의 참상을 고발하는 박물관에 들른 사람은 케이프타운에서 벌어진 인간의 다른 폭력의 역사를 접한다. 여기에 피해자 새로운 가해자 수도 있는 구조를 보여준다. 바로 딱지표 붙인다는 , 달리 이야기하면 누군가의 행동으로 상대방 자체에 공고한 낙인 찍어버리는 행위의 위험성을 다시금 생각할 있다. 젊은 시절 때의 실수 혹은 잘못으로 평생을 도덕적 비난의 대상을 들어야한다면, 과연 언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준비할 있을까. 토르디스는 과거의 가해자에 대해 영구적인 딱지표 붙이는 대신 이런 역사적/관습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용서라는 것이 필요함을 오랜 숙고와 과거의 자신과 대면을 통해 확신하게 된다. 성경에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마리아 여인이 과거에 어떤 행동을 하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는 놀라운 가르침을 전해준다. 평범한 우리들이 타인에 대해 비난하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종종 우리의 허물과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망각하곤 한다. 타인에 대한 비난과 마녀사냥 결국 하나의 폭력일 뿐이다. 분노와 두려움이 억눌린 감정이 내부로 향하면 토르디스와 톰과 같이 죄책감과 자책, 심지어는 자해로 이어질 있을 것이며, 감정들이 외부로 향하게 되면 결국 타인에 대한 비난과 딱지표 붙이기와 같은 행위를 초래하게 것이다. 결국 피해자마저도 가해자가 있는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내포한다.

 

<용서의 나라>에서는  과거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오랜 시간의 대화와 고통스러운 상처 되돌아보기 과정을 통해 각자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보살피고 있다. 일종의 의식과 같은 만남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풀어내고 궁극적인 용서와 화해 여정으로 있었다. 놀랍게도 토르디스는 불완전한 인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성숙한 여유의 경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16년이 걸리긴 했지만.

 

나는 너를 강간범이라고, 적어도 나를 강간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 그렇지만 말이 너를 말하는 아니야. (…) 사람은 평생 살면서 좋은 일도하고 나쁜 일도 . 요지는 나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딱지가 아니고. 나라는 사람이 그날 일어났던 일로 축소될 수는 없어.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177)

 

 인간은 누구나 실수 혹은 잘못을 저지를 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 그리고 상대방의 인간 분리해낼 있는 이런 분별력과 심리적 여유는 오랜 시간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고, 스스로를 돌보기 시작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토르디스는 용서 여정을 위해 과정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필요한 과정인지를 숙고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용서의 핵심은 짐을 덜되 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 것이야. 짐이 원래 사람의 몫이라하더라도 말이야. 돌을 소유한 사람이 바뀐다 해도 악순환이 계속되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70)

 

토르디스와 톰이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과거의 상처를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는 과정은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나로서도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만큼, 사람에게는 민감하고 쉽지 않은 과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회에서 이런 성폭력이 근절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일방적 용서 완전한 해결책은 결코 아님을 또한 일깨워 준다. 결국 토르디스의 깨달음과 확신은 성폭력을 극복하려면 공동체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자라야 하고, 잘못된 생각을 다듬어내야 하고, 노력을 합쳐야 한다.”(352) 결론에 도달한다. 함께 노력해야한다는 이다. 그것도 가해자, 피해자의 노력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사회의 구조를 새롭게 그리고 건강하게 만들어나갈 있도록 말이다.

 

 

 

 

나가며 소리내어 말하고, 웃어 넘기고, 그리고 그냥 다시 살아가기

토르디스에게 있어 용서 길은 험난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 자해, 자존감 상실 등의 심신이 무너지는 과정을 겪어내야했다. 또한 자책과 죄책감, 그리고 사회 생활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스스로 옭아매던 과정을 겪었다. 사람은 각자 익숙한 고향을 떠나 낯선 케이프타운에서 과거를 대면하고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사람 모두 진정한 자유 얻었다. 사람이 만나 노력한 대화와 화해, 용서의 과정은 매우 낯선 과정이다. 낯선 , 낯선 방식으로 서로가 진심으로 만나는 지점을 찾아가는 노력은 사람에게 용기와 주변 가족의 도움 지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다시 상기하지만 과정은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함께 노력하고 참여한 결과라고도 있다.

 

책을 덮으니 바로 떠오르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바로 토르디스가 톰으로부터 받아 반평생을 속에 넣고 다니던 돌하나를 톰의 손바닥에 쥐어주는 장면이다.

 

그가 침을 삼켰다. 그와 마주친 시선을 떼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아 돌을 쥐어주었다. 그가 짧게 숨을 들이쉬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손이 그의 주먹 손을 감쌌다. 그가 남은 손으로 위를 덮어 우리의 힘들었던 과거를 감싸 쥐었다.”(343)

 

16년의 세월동안 사람이 고통의 시간과 이메일로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그리고 최종적으로 케이프타운에서 직접만나 이르게 여정의 마지막에서 사람은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 있기 이전의 톰이 토르디스에게 쥐어주던 돌은 성폭행 사건 이후 토르디스에게는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로 무게감있게 자리를 잡았다. 몸에서 떨어지지 않던 마음의 짐을 몸에 새기듯 16년을 짊어지던 토르디스는 다시 돌을 톰의 손에 되돌려주며 진심어린 용서를 하고 스스로 짊어지던 마음의 짊도 내려놓았다. 이어서 톰은 돌을 거꾸로 나무 불리었던 바오밥나무 옹이에 남겨둠으로써 톰이 지니고 다니던 죄책감과 두려움을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아주 상징적이지만, 낯선 의식은 사람에게 무엇보다 의미를 갖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상처는 남지만, 사람의 기이한 만남과 용서의 여정은 진정한 용서 어떤 모습일 있는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책의 여러 군데에서 사람이 대화하는 과정에서 토르디스가 제안한 지혜는 결국 케이프 타운에서 사람의 모토가 된다.

 

 소리내어 말하고, 웃어 넘기고, 그리고 그냥 다시 살아가는 거라니까.”(224)

 

감정적으로 서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은 모토를 다시금 기억하며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고 있다. ‘소리내어 말함으로써 우리 내면에 숨겨져있는 상처와 불완전한 감정들을 대면하고 이를 인정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용서로의 여정 시작된다. 이후 이들은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고 웃어 넘김으로써 자신들에게 짊어지워진 죄책감 혹은 두려움을 벗고 스스로를 가볍게 하게 된다. ‘그냥 다시 살아가기 시작함으로써 이들은 비로소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으로서 평범한삶을 살아갈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평범한 삶의 위대함 다시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유사한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지지하고 도움을 있을 것인지 고민하는 계기로 삼을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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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
이현우 지음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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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의 철학

이현우(로쟈) 지음 | [책세상]

 

 

 

언제나 느끼지만 문학은 우리에게 가지를 제시해주는 같다. 하나는 우리 삶의 전형으로서 사례(또는 에피소드, 인생의 국면) 제시한는 것이다. 작가가 설정하여 글로 표현한 사례로부터 독자는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편성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작가가 제시하는 사례에 공감을 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저자가 여기에 하나의 전형/사례를 보여주었으니 삶은 어떠한가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저주는 같다. 문학은 우리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해주고, 우리에게 인생의 질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문학은 삶의 철학을 구현하는 장으로서 기능을 하는 것일테다.

 

 

<문학 속의 철학> 저자인 로쟈 이현우가 강연을 엮은 책이면서, 철학자였던 박이문 선생이 저술한 동일한 제목의 <문학 속의 철학> 다시금 떠올리며 문학과 철학의 조우를 조명하며 문학을 다시 읽는 시도로 보인다. 책을 읽고 나서 다시금 책에 언급되어있는 저자의 폭넓은 이해와 지식이 좀더 나에게 와닿는 글은 분명 내가 이전에 읽었던 책이다. 저자가 강연한 문학작품 내가 읽은 책이 별로 없어서 저자의 지적 세례에 혜택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언젠가 읽어보았던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떠올리며 최소한 작품에 대해 새롭게 바라볼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는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작품에 국한하여 저자의 강연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우선 <캉디드>

저자에 따르면 볼테르는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이하 <캉디드>)에서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를 직접 겨냥하여 완성한 철학적 콩트가 소설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주인공 캉디드 스승인 팡글로스가 바로 라이프니츠의 생각을 대변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인물로 나온다. 오늘날에 견주어보면 신자유주의적인 질서에서 강요하는 무한긍정의 대변인이 팡글로스인 셈이다. 세계가 그냥 존재할 있는 최선의 세계라고 믿는 팡글로스는 라이프니츠가 빙의된 인물로도 읽혀진다. 또한 우리가 속해있는 우주의 질서는 신의 예정조화에 있다라고 주장한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인물이 팡글로스이다. 하지만 세계는 그리 녹녹치 않았다. 캉디드를 비롯하여, 캉디드가 사모하던 여인 퀴네공드, 팡글로스가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겪은 잔혹사는 저자가 언급하듯 세계에 악의 존재를 인정하게끔 만드는 장치일 있다.

 

 

우리도 최근에 경주나 포항에 지진이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놀란 상태이지만, 가까운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원전사고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저자는 1755 1101일에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을 사례로 언급한다. 불과 5 동안의 지진에 3 명정도가 희생당했다고 한다. 당시에 희생된 사람들은 종교인/비종교인, 어른/아이를 구별하지 않고 희생당했다. 재앙적인 자연재해 앞에서 사람들은 과연 신은 어디에 있었던가를 묻지 않을 없었을 것이다. 다른 예로 중세 시대가 끝나갈 무렵 유럽에 창궐했던 흑사병을 떠올려 있다. 혹자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정도가 사망한 역사적인 사건은 절대신이 지배하던 중세를 끝내고 인본주의로 돌아간 새로운 시대를 앞당겼다고 보기도 것이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병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던 생존자들은 신에대한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기독교적인 유일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런 문제는 충격이자 모순이었을 것이다. 과연 악이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할 없게된다. 반면 저자가 예를 배화교는 선한 신과 악한 , 종류의 신을 상정하기에 악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므로 이런 거대한 모순을 피해갈 있다고 지적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볼테르와 루소 vs. 리차드 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

 저자는 볼테르가 루소와 여러 면에서 앙숙이었음을 언급한다. 루소가 과격한 혁명을 주장하고, 사람의 본성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 입장을 지지했다면, 볼테르는 온건한 개혁파의 입장이고, 성선설을 비판한다. 물론 성악설 또한 거부하고, 말하자면 인간의 본성은 백지와 같다는 생각을 고수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관점은 한편 루소가 <고백> 통해 우리 안의 내적자아의 발견 주목하고 있다면, 볼테르는 문화상대주의적인 관점을 통해 상대성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며 타자의 차이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고 저자는 정리해준다. 달리말하면 루소의 시선은 보다 내부로 향하고 있고, 볼테르의 시선은 외부를 향하고 있다라고도 정리해볼 있지 않을까. 

 

 

볼테르와 루소의 대결구도를 저자는 확장하여 도킨스와 굴드의 대결구도로 연결시킨다. 매개가된 계기가 볼테르의 인간관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볼테르는 인간이 애초에 악하게 태어난다는 성악설을 반대하면서도, 루소가 말하듯 성선설에도 동조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은 백지상태와 같이 태어나 후천적으로 영향을 받아 악하게도 선하게도 행동할 있다는 입장에 가깝다. 선과 악을 결정할 있는 인자가 문화적 인자이자 전달자인 meme이라고 보며, 저자는 개념을 통해 도킨스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화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갖는 도킨스와 굴드의 대결구도를 볼테르와 루소의 구도에 비교하고 있는 점이었다. 도킨스는 진화가 오랜 시간을 두코 천천히,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연속적 진화설 대변한다면, 굴드는 진화란 계단식으로 어떤 계기가 마련되어 단속적으로 진행된다는 진화의 단속 평형설 대변하는 입장이다. 구도는 볼테르가 온건한 개혁을 주장한 입장을 떠올려볼 도킨스에 비견되며, 루소의 과격한 혁명에 대한 지지는 굴드의 단속 평형설과 연관시키고 있다. 단순히 문학에서 어떤 교훈/주제와 관련된 이야기에 주목하던 문학읽기 습관을 새롭게 생각해보게 해준 기회라할 있겠다.

 

 

 

나가며 상대주의적 태도의 발견

<캉디드>에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여행과정은 모두 생략되어 있지만, 소설 속의 배경은 전세계에 걸쳐있다. 소설 속에서 저자 이현우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볼테르가 제시하는 문화상대주의적인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여행을 통해 보고 배울 있는 점일텐데, 공교롭게도 <캉디드>에서 주인공들이 전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와 관련하여 <캉디드> 등장하는 에피소드 중의 백미는 캉디드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에서 나체 여인을 따라가며 여인의 엉덩이를 깨무는 원숭이를 총으로 쏘아죽이는 장면이다. 결국 여인과 원숭이는 연인들로 밝혀지는데, 하인 카캄보가 캉디드를 나무라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러한 문화상대주의적인 태도는 앞서 <수상록> 집필했던 몽테뉴의 태도와도 다르지 않다. 식인종들을 만나 이들과 대화하고, 자신이 믿지 않는 종교의 수장들을 찾아가 종교에 대해 대화하는 일과 같은 태도, 문화적 밈은 소수 지식인들의 밈으로 전해져 내려온 듯하다.

 

 

저자의 <캉디드> 강의를 읽고나니 주인공 캉디드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겪은 고생과 잔혹사는 결국 누구나 우리 삶에서 어느 정도 걸쳐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면에서 허무맹랑한 이야기같은 <캉디드>  담을 있는 진실성을 새롭게 발견할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악의 근원 어디에 있는지를 자문했을 , 유일신의 전통이 아닌 배화교적인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면 어떻게 재판을 바라보았을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하게 된다. 그만큼 우리가 성장할 영향을 주는 종교적 관념, 인생관은 평생에 걸쳐 삶을 제한하기도 것이다. 물론 <캉디드> 무엇보다 우리 삶의 모든 면이 신이 예정해놓은 최선의 상태가 아니라 악이 공존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에피소드라고 있다. 여기에서 소설이 끝나면 무언가 채워지지 않을 텅빈 공간과 같은 느낌만을 받을 같은데, 볼테르는 가지 파문을 일으키는 말을 남기면서 소설을 끝낸다. 스승 팡글로스가 라이프니츠적인 예정조화설로 그동안 일행이 겪은 모든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에 대해 캉디드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122, <캉디드>에서 재인용)

 

내게 말은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한 믿음과 동시에 책임을 일깨워주는 말이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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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특이점이 온다 - 제4차 산업혁명, 경제의 모든 것이 바뀐다
케일럼 체이스 지음, 신동숙 옮김 / 비즈페이퍼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경제의 특이점이 온다

(원제: The Economic Singularity)

캐일럼 체이스 지음 | 신동숙 옮김 | [비즈페이퍼]

 

 

들어가며-개인적인 기억

아마 3 어느 겨울이었을 것이다. 동물원에 가서 실내 우리에 들어와 있는 대형 초식동물을 구경하던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용한 실내에서 관리 업무를 하며 앉아계시던 어느 할아버지께서 책을 보고 계셨는데, 문득 나를 보시더니 여보세요, 핀테크(FinTech) 도대체 뭐에요?”라고 질문 하셨던 것이다. 뉴스에서 많이 들어본 단어이긴 했으나, 젊은이로 보였을 내가 핀테크가 뭔지 대답을 못하니 아쉬워하셨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주변에 물어볼만한 사람이 없어서 고민을 하셨던 모양인데, 아마 오래전에 은퇴를 하고 일거리를 찾아 동물원에서 일하고 계신 듯했다. 겨울의 동물원 건물 실내에서 관람객이 없으니 잠시 틈을 내어 책을 부지런히 읽고 계셨던 것으로 보였다.

내가 장면을 특히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터이다. 할아버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수명이 길어지는 현대사회에서 현재 은퇴 연령 기준에 따라 은퇴를 하게 되었을 , 은퇴 이후 나의 삶의 모습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금융관련 사업과 기술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사회에 적응하기 바쁜나로서도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달라지게 참으로 막연하고 머리가 빙빙돌 지경이다. 이번에 읽게된 <경제의 특이점이 온다> 요즘 신문과 뉴스에 매일 같이 등장하는 4 혁명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이 빈번히 등장하는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는 시대에 뒤쳐져 있으면서도 궁금했던 여러 개념들을 처음 접할 있었던 책이기도 하였다. 내가 동물원의 할아버님처럼 연령대가 되었을 ,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아마 나도 손자뻘 세대들에게 용기를 내어 이번에 나온 인공지능 제품은 어떻게 다른가?”라고 묻거나 공용 자율주행차를 있는 승강장과 사용법좀 알려줘요라고 말하게 날이 올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번에 읽은 저자 케일럼 체이스의 저서는 익숙하지 않은 개념들이 많이 나와 다소 더디게 읽었지만, 나름 특별한 호기심을 갖고 읽었다.

 

특이점에 관해

책의 제목과 관련하여 요새 흔히 만나게 되는 특이점이라는 단어는 원래 수학·물리학에서 사용하던 용어였다. 무한히 많은 값을 가질 있는 어떤 지점 또는 값을 의미하곤 한다. 거시적으로는 블랙홀, 미시적으로는 원자의 위치에서 대상의 존재를 암시하는 무한히 발산하는 값을 갖는 지점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비선형 물리학에서 등장하는 프랙탈 모형의 분기점(threshold) 의미하기도 한다. 책의 저자인 케일럼 체이스는 특이점이라는 용어는 1950 컴퓨터 개발에 역할을 했던 노이만이 사회현상에 적용하면서 알려진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특히 최근 래이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라는  책에서 특이점(singularity)라는 용어를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순간 기술의 특이점으로 변용하여 사용하면서부터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는 특히나 삼성전자 사장과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했던 진대제 씨가 번역서의 감수를 맡게 되면서 더욱 널리 알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는 하나의 특이점개념이 등장하는데, 책의 제목에서도 등장하듯 경제의 특이점 대한 부분이다. 저자 케일럼 체이스가 설명하는 경제의 특이점(economic singularity) 인간이 이상 노동으로 돈을 없는 기술적 실업의 시대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케일럼은 책에서 경제의 특이점 초점을 맞추되, 경제의 특이점에 맞물려 있는 이해관계가 그렇게 크지 않다고 판단하고 기술의 특이점 먼저 다룬 경제의 특이점 다루고 있다(358). 특이점 개념을 들여다보면, 수학·과학분야에서 사용되던 좁은 의미(발산하는 지점, 무한한 값을 갖는 지점 등의 분기점 개념에 가까운)보다는 문턱(threshold)’ 의미에 보다 가까운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있다. 어떤 국면에서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어떤 장벽, 경계로서의 의미에 가까워 보인다. 경계 내지는 장벽이 존재하는 지점을 인공지능이 지능을 뛰어넘는 시기' 것인지 아니면 기술의 인력 대체로 인한 실업의 국면으로 것인지에 따라 특이점 개념을 다르게 부른 것일 뿐이다. 그리고 특이점의 개념은 앞에서 내가 회상했던 동물원에서의 기억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다. 기술의 발달과 우리 삶의 양상을 다르게 만들어가고 있는 핀테크 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의 우리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에 대한 고민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번 독서에서 특히 주목해본 부분은 인공지능 개발의 초보단계에 있는 현재 국내에서 많이 언급하고 있는 자동화 사물인터넷(IoT) 같은 개념들은 인공지능분야와 연결시키기에는 지극히 부분적이고 초기적인 형태의 기술이라는 점이다. 특히 산술급수와 기하급수의 개념을 이용하여 기계학습내지는 딥러닝기술과 관련하여 설명한 부분에서는 현재 지지부진해보이는 기술개발이라도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순식간에 진보할 있는 가능성도 살펴보았다. 책에서 저자가 취하고 있는 기본적인 입장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기술적 실업은 불가피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혹자는 전통적인 업무가 기계의 자동화로 인하여 대체되고 실업이 발생한다고 해도, 역사를 들여다볼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생겨날 것이라는 점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저자는 새로 형성된 일자리도 결국 언젠가는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것이므로 보다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기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모든 것이 인터넷과 같은 네트워크 상에서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고, 구글이나 페이스북 또는 스타트업 회사들이 개발한 잠재적 고객의 빅데이터를 이용하는 마케팅 기술들은 개인정보나 사생활 침해와 관련한 문제점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도 우려할만한 점이다. <카오스 멍키> 저자 안토니오 G. 마르티네즈가 책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장바구니에 상품을 담는 마우스의 움직임마저 마케팅 소프트웨어로 인하여 기록되고, 나의 행적 자체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가볍게 농담삼아 넘길만한 주제는 분명히 아닐 것이다. 이미 페이스북에서는 내가 메일 계정에 등록되어 있는 사람들의 정보와 연계되어 등록할만한 친구목록을 끊임없이 노출하고, 무언의 강요를 하고 있는 상황아닌가. 이를 기억한다면, 인터넷을 사용하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리의 행적이 노출될 소지가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저자 케일럼 또한 사물인터넷 인공지능의 자기학습 알고리듬의 결합으로 시스템이 마비되거나 사생활이 실시간 침해받게 있다’(154) 점을 경고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 <이글아이 Eagle Eye>에서 민간인들을 실시간 감시하는 디지털 세계의 빅브라더 같은 존재는 이미 디지털 세계를 다루는 세력에 의해 이러한 상황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단지 법적인 규제와 제제가 막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생각이다. 실제로 미국 CIA에서는 현재 개인들이 소지하고 있는 스마트폰을 역으로 도청장치로서 사용할 있는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의료분야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기술실업의 대상이 될만한 점들을 설명하는 대목을 보면, 인간 의사만이 있다고 믿어지는 진단분야 또한 장래에는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 의사를 대체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휴대폰에 연동된 센서 등의 기기로 신체 상태를 수집하고, 날숨을 감지하는 센터를 통해 개인의 신체 정보가 디지털 정보로 변환되어 개인의 의료 파일에 기록되어 건강을 관리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정보들로부터 , 심장질환 가능성의 진단/피부암 진단 감정상태, 파킨병의 진단 등이 가능해질 것이라 말하고 있다(197). 패턴인식 기술을 통한 정교한 알고리즘으로 전세계 환자의 데이터와 비교하면 보다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문제는 수많은 환자들의 비교용 데이터를 어디서 얻을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은 실존하는 인간들의 개인정보를 이용하는 문제에 맞닥드리게 되는데, 개개인의 빅데티어가 유전정보와 결합되고, 나아가 우생학적인 행정처리 방식에 따라 보험을 비롯한 시민으로서의 차별과 불이익을 받거나,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위협하는 상황이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에는 반드시 주목해봐야할 것같다.  

저자는 사생활 침해를 비롯한 개인정보 노출 등의 보안 문제는 공동감시시스템의 도입으로 이러한 위험가능성을 막을 있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공동감시시스템이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위험성이 상존하는 상태는 위험성을 내포하는 대상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와는 전혀 다른 국면을 의미한다. 물론   책은 기술적 문제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 아니므로 책에서 새롭게 배운 기술적 위험 가능성에 대한 문제점과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계속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보려고 한다. 저자는 인공지능을 둘러싼 여러 부분의 기술적 현황과 전망을 폭넓게 제시하고 있으나 책의 주요 논점은 이러한 기술로 맞게될 실업문제에 있다.  

 

기술적 실업을 넘어

실존적 인간으로서 우리는 매우 발달한 산업사회를 살고 있고, 우리의 직업이 우리의 정체성의 일부를 분명히 이루고 있다. 실업은 분명 저자가 언급하듯이 우리에게 실존적 위협을 주는 계기이며, 기술의 발달로 미루어보아 불가피한 진행과정이다. 문제는 우리가 기술적 실업을 겪어야하는 상황에서 인간다움을 어떻게 회복하고, 존엄을 유지할 있을까에 있지 않을까한다.

저자는 우선 30여년 기업생태계에서 컨설턴트, CEO등으로 재직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게,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며, 친기업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기술적 실업에 대한 보완책으로서의 보편적 기본소득 대해 지지를 표하는 입장이다. 물론 영미권의 기업환경에 비추어 경영인들이 동의를 할만한 여지가 있다고 보인다. 반면 사회주의 대한 저항감을 드러내는 미국과 같은 경우 이러한 개념을 적용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어려움을 예상하고 있기도하다.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저자 케일럼은 전세계적으로 인공지능 연구를 중단시키기로 합의하지 않은 이상, 관련 기술은 발달하게 되어 있으며, 이에 따른 노동현장의 인력 대체는 불가피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언급하는 보편적 기본소득 특정 방향에 대한 인식이라기 보다는 기술적 실업문제에 대한 보다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노력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점이라고 보인다. 달리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인 각자도생 길로 던져두기보다는 정부와 사회의 공동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에 주목해야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기술적 실업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와 제안을 저자가 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경제의 특이점이 온다> 보다 생각해볼만한 주제, 토론해볼만한 주제들을 많이 던져주고 있는 책이라는 것이 책을 읽은 후의 인상이다. 저자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비관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인 세계에 대한 언급을 이어나가기 보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모두의 가능성에 대해 논의거리를 던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책이 어떤 주제로 완결되는 인상이라기 보다는 앞으로의 중요한 임무는 Y세대인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에게 달려있다라는 열린 결말을 지향한다.

 

 

(339면)
"일반인들이 억만장자나 일류 영화배우의 삶을 접하면, 어쩐지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처럼 느끼곤 한다. 그러나 이런 괴리감은, 앞으로 사유재산 제도가 유지되는 상태에서 경제의 특이점이 나타날 경우 인공지능을 소유한 최상위 계층과 일자리가 없는 대다수 군중들을 갈라놓을 어마어마한 격차에서 비롯될 괴리감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20 면) 저자의 기본 논조

"이 책에서 나는 기술적 실업이 수십 년 내에 진행될 것이며, 우리가 이를 미리 대비하고 변화를 성공적으로 관리해나간다면 아주 좋은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논하고자 한다."

(282 면) 저자의 ‘보편적 기본소득‘제도에 대한 입장

"만일 기계지능이 많은 사람들을 영구적인 실업자로 내몰게 된다면, 보편적 기본소득 관련제도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318 면) 자본주의에 대한 저자의 입장

"나는 전업 작가이자 강연가가 되기 전 30 여 년 동안 경영계에 몸담았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복지의 안전망을 갖춘 규제 시장 경제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여전히 확신한다. 나는 인간이 일을 하는 사회에서는 자본주의가 알려진 것들 중 최고의 경제 체제라고 생각한다."

335 면) 프로토피아 Protopia 개념에 대해
케빈 켈리, 작가이자 잡지 <와이어드>의 수석 편집장이 제안한 아이디어의 재인용

"나는 유토피아를 꿈꾸기 보다는 프로토피아를 꿈꾼다. 나는 매년 그 전년보다는 조금 나아지지만 그 차이가 아주 급격하지는 않은 점진적인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기술 덕분에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 유토피아가 존재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모든 신기술은 그 기술이 해결해내는 것 못지않게 많은 문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신기술은 결정적으로, "전에 없던 선택지를 제공하고, 좋고 유용한 것들의 총합을 서서히 아주 조금씩 채워나간다."

(340 면)저자의 블록체인에 대한 기대감

"만약에, 혹시라도 경제의 특이점을 무사히 넘기고 사회 분열을 피하기 위해 사유재산 제도를 종식시킬 수밖에 없다면, 엄청나게 강력한 국가와 중앙에 집중된 결정권을 포용해야 하는 달갑지 않은 상황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어쩌면 블록체인이 답이 될지도 모른다."

곧 저자는 ‘블록체인이 인공지능을 비롯해 사회가 공동으로 소유한 재산을 관리할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358 면)
"한편 만일 경제의 특이점이 정말로 현실이 된다면, 기술의 특이점에 앞서서 나타날 것이다.’ (기술적으로) 인공일반지능을 구축하는데 상당한 시간(수십 년 이상)이 필요할 듯 보이지만, 경제의 특이점은 20-30 년 뒤에는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 이 시점에서는 아마도 자산의 가격이 붕괴하기 시작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비교해 설명하자면 경제의 특이점은 덜 중요하지만 더 긴급하고, 기술의 특이점은 더 중요하지만 덜 긴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365 면)
"지금은 현재 우리가 누리는 기술적 혜택과 미래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묘사하는 강력한 새 문화 요소, 즉 밈이 필요한 시점이다. 선두 IT 기업들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다. 설사 자기 보호를 위한 목적일지언정, 이들이 멋지고 아름다운 새로운 세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를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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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글 인용

“<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한마디로 ‘학교 폭력’에 대한 책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폭력 학교’에 대한 책이다. 흔히 학교에서 발생하는 폭력사건을 ‘학교 폭력’이라 하지만, 학교 자체가 폭력기구라는 점에서 나는 ‘폭력 학교’라는 말늘 쓴다. 폭력은 학교에서 발생하는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학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다. 온갖 폭력과 인권침해가 난무하는 학교는 민주적 사회에 남아 있는 비민주적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민주적이라고 믿고 있는 사회의 원형이 비민주적인 학교에서 나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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