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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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독은 남용되었으나, 이 벽으로부터 탈출할 길은 없다

- 대성당 읽으며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집 대성당을 읽는다. 특히 마지막에 실린 단편 대성당 Cathedral을 읽을 때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이다. 많지는 않지만 부부, 혹은 부부로 보이는 커플이 나오는 그림말이다. 호퍼의 그림이라하면 도시인의 고독을 그려낸 화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도시의 어딘가에 혼자 앉아 있는 여인들을 그린 작품들을 우선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버의 단편 대성당의 경우는, 대도시 보다는 중소도시 외곽의 전원 속에 살고 있을 법한 중년 부부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이 단편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와 아내는 곧 아내의 지인인 맹인 남자를 며칠간 접대하기로 되어 있다. 맹인 남자는 최근 아내와 사별하고 친척을 방문하던 중이었고, 화자의 아내는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락해온 맹인의 마음을 다독거려 주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소설의 시작부터 화자는 외간 남자인 맹인을 집 안에 며칠만이라도 들이는 것이 탐탁지 않은 것이다. 아내의 전 애인의 일을 떠올리기도 하다가 심지어는 아내가 맹인과 불륜은 아닐까하는 의심까지도 해보는 것이다.


 

카버의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 못하여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의 소설쓰기 방식은 작가의 내면에 떠오르는 생각들, 스쳐가는 의식들을 구구절절 기록해대는 스타일은 아닌 듯하다. 간결하게 상황만을 보여주는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소설에 묘사된 화자의 행동 양식이나 아내와의 대화로 미루어보면, 이 중년 남자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중소도시의 옹졸하고 편견에 치우친 중년 아저씨인 것이다. 어쩌면 그의 문장들이 너무나 평이해 보여 행간의 떠도는 단서들, 이미지들을 내가 놓치고 있지나 않은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미국 최고의 단편 소설 작가라는 찬사와 언 듯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이 맞나 의심이 드는 것이다. 그만큼 카버의 묘사는 군더더기 없이 최소한의 정황만으로 읽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해석에 참여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만 그런 것일까?

 


중년으로 보이는 화자는 평범한 아재들과도 다르게 친구도 많지 않은 듯하다. 그저 시간 여유가 있으면 하루 종일 TV앞에 앉아 위스키를 홀짝거릴만한 스타일인 남자다. 그러니 맹인과의 대화에서도 상대를 주시하고 처지에 공감하기 보다는 철없는 질문도 하며 아내의 구박을 받기도 일쑤인 남자다. 이 철부지 중년 아재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아내는 며칠간 맹인 남자(로버트)를 집에서 접대하고 돌보면서도 내심 불안하고 신경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확실히 화자는 아내와의 소통도 최소한의 것만 간신히 유지하고, 함께 정기적으로 어울리는 남자 패거리도 없는, 말하자면 지역사회에서도 고립된 아웃사이더 스타일에 가까운 것 같다.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여러 그림들 중에서 그가 그린 도시의 건물들에는 창문 하나가 열려 있는 장면도 여럿 있지만, 카버의 단편 대성당을 읽으며 떠올리는 화자와 부인의 모습은 <Cape Cod Evening>(1939)에 가깝다고 느꼈다. 이 그림에는 우선 집의 문과 창문이 모두 굳게 닫혀 있다. 마치 입을 꼭 다물고, 팔짱을 끼고 있는 부인의 무표정한 표정처럼, 여기에 소통은 부재해 보이는 것이다.

 


그림에서 콜리 종으로 보이는 강아지는 집 앞의 누렇게 변한 풀밭 속에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반면 뒤의 두 사람의 시선은 강아지가 아니라 커플 앞의 허공 어딘가에서 정해진 곳 없이 부유하는 듯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며 말없이 생각에 잠긴 듯 보이기도 한다. 청록색 드레스를 입고 팔짱을 낀 여인은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말하기 적당한 순간을 기다리며 첫 마디를 벼리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편안한(?) 복장으로 앉아 있는 남자는 부인의 시선을 외면한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의 소통이 부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빛바랜 보석처럼 옅은 광택을 띠는 부인의 청록색 드레스는, 부인의 은폐되고 억눌린 희망을, 이루어지지 못한 소망을 말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따뜻함의 감정보다는 서늘한 단절의 기운을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 커플 사이에는, 어쩌면 늘 그래왔듯,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것 같이 보인다. 대성당에 등장하는 부부처럼 말이다. 물론 화자의 부인은 공감력이란 제로에 가까운 철부지 남편을 한심하게 생각할지언정, 타인에 대한 친절함과 공감력은 갖춘 사람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소설에서는 부인보다는 화자의 말과 행동에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호퍼의 그림에서도 무표정해보이는 부인의 모습보다는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듯 아래를 향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에 더 관심이 간다. 카버의 단편에 나오는 화자의 모습과 상당히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견고한 일상이라는 벽에 유폐되어 살아가는 남자(화자)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화자는 자신의 제한적인 경험치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 전무해보이는 남자인 것이다. 공감력이란 애초에 가능성의 영역에 있지도 않을 법한 남자. 어쩌면 학창시절의 내 모습 같기도 하다.


 

여기에 더하여 호퍼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두 사람의 단절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듯한 결정적인 시각적 단서가 있다. 어쩌면 집 앞에 전혀 길이 나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이상한 것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반복적으로 지나다니는 공간에 길이 만들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집 주변으로 아무런 길이 나 있지 않다는 점이야말로 내게는 언캐니한 상황이다. 이 그림에서 내게 가장 궁금증을 일으키는 지점이다. 두 사람은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뿐만 아니라, 주변 세계로부터도 철저히 고립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더해준다. 이를 거창하게 고독이라는 벽에 갇힌 현대인의 모습이라고까지는 해석하지는 않으려 한다. 하지만 호퍼의 그림에서 감상자에게 주는 어떤 정서는 인간이란 존재가 본래 지니고 있던 어떤 인간다움의 특질로부터 소외된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일 테다.


 

우연히 영국의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 The Lonely City를 펼쳐보았다가, 처음부터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랭의 글을 더 따라가 보았다. 이 책은 저자가 미국인 연인과 약속하고 뉴욕에서 살기로 충동적으로 합의(?)한 후, 10년 동안 살던 영국의 거주지를 정리하고 뉴욕 맨해튼에 왔다가 바람맞은 상황에 처했던 경험에서 시작된 글쓰기다. 의도하지 않은 외로움을 낯선 장소, 이국의 대도시에서 절실하게 느끼며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노력한 글쓰기라고 보이기도 한다. 이 책에서 저자 올리비아 랭은 수많은 매체와 비평가가 호퍼에 대한 그림을, ‘현대인의 고독을 담았다고 소개하지만, 정작 호퍼 자신은 고독이라는 건 남용되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고 말한다. 장가의 창작 순간은 작가의 고독 속에서 태어나는 만큼, 호퍼의 정서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도시인 혹은 현대인의 고독을 표현하고자 작업을 했다는, 다분히 목적지향주의적인 해석은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또 한 가지 혼란스러운 점은,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단어 ‘lone, 혹은 lonely'라는 단어를 번역자가 외로운의 의미로 번역하며 시작했는데, 정작 본문에서는 고독이라는 단어와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통은 외로움고독의 감정은 조금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저자 올리비아 랭이 이 두 가지 다른 뉘앙스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해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면 번역자가 이 두 다른 뉘앙스를 가진 표현을 혼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올리비아 랭이 마주하며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감싸고 다독거리던 이 감정은 우울의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섞여 있기에, ‘외로움이란 표현을 일관되게 유지했으면 어떨까 싶었다.

 


아무튼 카버의 단편을 읽다가 또 이야기가 본론에서 많이 벗어나버린 것 같다. 내가 단편 소설을 빨리 읽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짧고 강렬한 메시지를 주기도 하는 장르이지만, 빨리 읽고 소설이 끝나도 내게 해결되지 않은 감정, 혹은 나의 말로 형용되지 못한 감정이 갈 곳을 잃고 부유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고 세계로부터 단절되어버린 화자의 세계를, 그 행간으로부터 다시 발견해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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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퀘그의 진짜 서명은 뭘까?


- 모비 딕》  9종 판본 비교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을 읽다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소설의 화자인 이슈메일은 동료인 작살잡이 퀴퀘그와 함께 탈 포경선을 알아보다가 피쿼드호에 승선하기로 합니다. 이때 포경선이 만선하여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받게 되는 배당금을 포함한 계약을 하게 됩니다. 배당금은 선원의 경험치와 실력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는데요, 문맹이었던 퀴퀘그가 자신의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제는 출판사 판본마다 퀴퀘그의 서명(사인)이 다르게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제가 소장하고 있는 9종의 모비 딕판본을 비교해보았더니, 퀴퀘그의 서명을 크게 3종류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 영문 X자 모양

(2) 한자의 열십자() 모양

(3) 수학 기호 무한대() 모양, 으로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이번에 정리한 9종의 판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비 딕 판본들 - 18장에 나오는 퀴퀘그의 서명

 

[1] 작가정신(개정판) 모비 딕영문 X자 모양

[2] 작가정신(아셰트 클래식) 모비 딕영문 X자 모양

[3] Penguin classics Moby-Dick (Ch.18 His Mark) 열십자() 모양

[4] 문학동네 일러스트 모비 딕무한대() 모양

[5] 문학동네 그래픽노블 모비 딕 무한대() 모양

[6] 현대지성 모비 딕무한대() 모양

[7] 열린책들 모비 딕 () 열십자() 모양

[8] 미메시스 그래픽 모비 딕무한대() 모양

[9] 쿠텐베르크 프로젝트 영문판 모비 딕(무료 전자책) 영문 X자 모양

 


이렇게 판본마다 작살잡이 퀴퀘그의 서명이 다른 이유는 뭘까를 생각해보았는데요, 어쩌면 출판사마다 번역 또는 출간을 위해 기반으로 한 오리지널 판본 자체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건 각 출판사가 번역본이든 영문판이든 기본 텍스트를 어떤 판본을 썼을까의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요...

 


모비 딕 초판의 판매가 부실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초판을 보관해두었던 창고에 화재가 나서 모비 딕 (초판본) 재고가 모두 소실되었다고 하지요. 이후에 멜빌의 탄생 100주년인 1919년에야 비로소 평론가들에 의해 모비 딕이 재조명 받게 됩니다. 이때 모비 딕이 다시 출간되었을 것이고, 그의 원고를 편집자가 다시 검토하고 제작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원래 멜빌이 의도했던 퀴퀘그의 서명이, 어떠한 이유로 변형되었던 것은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마치 유전자가 여러 번 분열을 거듭하고 복제되는 과정에서 유전자 배열에 발생하는 돌연변이처럼 말이지요. 마치 귀를 막고 특정 단어를 입모양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게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정리하면, 출판사마다 퀴퀘그의 서명이 다르게 나타나는 까닭은 초판을 기반으로 하는 판본과 달리, 1919년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되면서 복간되는 판본 작업에서 나타난 작은 실수가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의 상상놀이에 기반 한 가설입니다. (이걸 뭐라고 부를까요? 텍스트 돌연변이 가설? ㅎㅎ)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읽다보면 성경을 비롯한 그리스 고전 등을 필사하는 필경사 사제들이 나옵니다. 한 권의 책을 필사하는 데 8명이 한 팀을 이루어 필사한다는 설명을 본 것 같습니다. 반드시 8명 일리는 없겠으나, 중요한 것은 혼자 모든 과정을 도맡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지요. 그러니까 한 사제가 구술하며 읽어나가면, 다른 사제는 이를 면밀히 듣고 필사를 해나가는 방식이었던 거지요. 또 다른 사제는 이를 검토하는 역할을 하며 검증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에서 필경사들의 미묘한 실수가 발생하곤 한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작은 실수로 글자는 비슷하지만 다른 뜻을 갖는 단어로 변경되어 남게 되는 일도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일이라 종종 실수가 발생할 수밖에요.

 


유전자 복제 과정도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포가 분열할 때, 각 세포에 들어 있던 유전 정보도 둘로 나뉘어 각 세포에 정확히 복제된 유전 정보가 전달되어야 합니다. 물론 복제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기도 하는데요, 잘못 복제된 유전자는 자체적으로 수정·복구되는 기능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복제되는 횟수가 워낙 많다보니 확률적으로 어느 정도의 복제 오류가 발생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거지요. 그렇다면 텍스트라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필사 과정에서 실수가 더 많이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어찌되었든, 출판사마다 퀴퀘그의 서명이 왜 다르게 되었을까하는 궁금증에서 시작한 조사 작업이고, 저의 상상에 기반한 추정이긴 합니다만, 각 출판사에서 어떤 판본을 기반으로 하여 작업했을까 궁금해지긴 합니다. 문학동네와 현대지성은 퀴퀘그의 서명이 무한대 형태인 것으로 보아 같은 판본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을 해보게 되고, 열린책들 판본은 펭귄 출판사가 사용한 판본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은 겁니다. 아무튼 여기까지가 오늘 조사해볼 수 있는 한계인 것 같습니다. ^^;

 


각 출판사 편집자님들(작가정신/문학동네/현대지성/열린책들/미메시스)께서 이렇게 출판사의 판본마다 퀴퀘그의 서명이 달라진 이유를 알려주신다면 책 읽는 기쁨이 배가될 듯합니다. ^^

 









































#모비딕 #퀴퀘그의진짜서명을찾아라 #MobyDick #퀴퀘그의서명 #HisMark #작가정신 #문학동네 #현대지성 #열린책들 #미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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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강 - 이미지의 시대를 연 사진가 머이브리지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창비] (2020)

 



요세미티에서는 물과 바위가 머이브리지의 주된 소재였다. 물이 변화와 지나가는 순간을 대변한다면, 바위는 견딞과 지질학적인 무한대를 암시했다.

(...)

강은 언제나 눈앞에 있지만, 그 안의 강물은 영원히 움직이고, 영원히 변화하고, 영원히 새로워지는 어떤 것, 종종 시간에 대한 비유로도 쓰이는 영원한 순간성을 상징했다.”(130)

 


사진 속 남자들은 마치 막 풍경을 발견한 것처럼 사진 전면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정복하여 문명을 만들어갈 것처럼 역동적으로 그 풍경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야생 속으로 질주하던 지치지 않는 진보는 머이브리지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의 인물들은 그 풍경을 처음 본 것도 아니고, 그것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며, 대중을 위해, 미국과 이성적인 정신을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모호하고, 서로 이어져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실용적인 목적과도 관련이 없다. 그리고 바로 그 모호함에는 미국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했던 이민자 머이브리지와 미국인 동료 사진가들 사이의 간극이 숨어 있었다.”(136)


 

그들(미국인들)은 인류사에서만큼은 캘리포니아가 완전히 새로운 곳이 되기를 원했고, 따라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왔던 이들, 즉 원주민이나 스페인 정착민의 역사는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새로움은 미국의 정체성에서 아주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스스로를 에덴동산 같은 갓 태어난 풍경 속에서, 무한한 자원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이제 막 시작하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의 새로움이었다.”(141)


그런 새로움에 대한 환상의 초기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의 존재는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이었고, 보통은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야 할 짐승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그 땅이 그대로 지켜지기를 바랐던 쪽은 오히려 원주민들이었고, 도끼를 휘둘렀던 아담들은 개발에 장애물이 된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을 몰아냈다. 그다음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들은 말 그대로 삭제되었다.”(142)





 








솔닛의 글을 읽다보면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대자연의 풍광을 담은 사진들에서 서구 백인들의 정치적 시선을 읽어낼 수 있다. 그들(백인)이 원래 살던 터전으로부터 밀어내어 요세미티의 숲 속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원주민들에 대한 무시와 폄하를, 솔닛은 서부의 광대한 자연 풍경 사진으로부터 읽어 낸다. 자연에서 원시성, 새로움을 찾으려는 백인들의 열망은 원주민들과 관련한 이슈들과 오버랩되는 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서부의 풍경사진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백인들은 애초에 이 땅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우리들이 찾아내 차지한 땅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이런 시선이 요세미티를 비롯한 미국 서부의 자연 풍광을 담아내고 선별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이지만 강력한 프리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자연보호라는 명목으로 요세미티를 비롯한 지역이 국립공원이 된 배경에는 아메리카원주민에 대한 무시와 역사 지우기 행적을 덮어주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 리베카 솔닛이 캘리포니아 자연의 새로움과 원시성을, '타락하고 쇠퇴해가는 유럽의 분위기'와 비교하며, 미국인들이 느끼는 '문화적 열등감'이 아니라 우월한 '도덕적 가치'를 상징하는 지표로 활용했다고 지적하는 지점도 인상 깊다. 이런 주제를, 한 사진가의 삶을 다루는 글에서 자연스럽고도 치밀하게 녹여 낸 솔닛의 탁월한 글쓰기에 또한번 반하게 된다.

 

머이브리지는 사진의 역사에서 단순히 연속촬영과 영화 매체를 견인한 기술적 선구자에 머물지 않는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국내에서 리베카 솔닛의 페미니즘적인 시선만 크게 부각되어버린 듯한데, 역사학자이자 사진연구가, 사진 비평가로서의 면모와 놀라운 통찰, 예리한 안목을 잘 보여주는 책이 바로 이 그림자의 강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철도 건설을 중심으로 서구 백인이 자행한 원주민 학살과 동물 학살에 대한 주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시선과 부조리한 관계, 식민주의/제국주의의 문제 등이 하나의 큰 강처럼 이어지고 흘러가는 듯하다. 소수자/타자에 대한 서구 사회의 지배와 폭력적 시선이 한 인간과 사진의 역사와 더불어 층층이 교차하고 있는 글로 읽었다.



"요세미티에서는 물과 바위가 머이브리지의 주된 소재였다. 물이 변화와 지나가는 순간을 대변한다면, 바위는 견딞과 지질학적인 무한대를 암시했다.

(...)

강은 언제나 눈앞에 있지만, 그 안의 강물은 영원히 움직이고, 영원히 변화하고, 영원히 새로워지는 어떤 것, 종종 시간에 대한 비유로도 쓰이는 영원한 순간성을 상징했다."(130)

"사진 속 남자들은 마치 막 풍경을 발견한 것처럼 사진 전면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정복하여 문명을 만들어갈 것처럼 역동적으로 그 풍경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야생 속으로 질주하던 지치지 않는 진보는 머이브리지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의 인물들은 그 풍경을 처음 본 것도 아니고, 그것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며, 대중을 위해, 미국과 이성적인 정신을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모호하고, 서로 이어져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실용적인 목적과도 관련이 없다. 그리고 바로 그 모호함에는 미국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했던 이민자 머이브리지와 미국인 동료 사진가들 사이의 간극이 숨어 있었다."(136)

"그들(미국인들)은 인류사에서만큼은 캘리포니아가 완전히 새로운 곳이 되기를 원했고, 따라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왔던 이들, 즉 원주민이나 스페인 정착민의 역사는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새로움은 미국의 정체성에서 아주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스스로를 에덴동산 같은 갓 태어난 풍경 속에서, 무한한 자원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이제 막 시작하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의 새로움이었다."(141)

"그런 새로움에 대한 환상의 초기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의 존재는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이었고, 보통은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야 할 짐승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그 땅이 그대로 지켜지기를 바랐던 쪽은 오히려 원주민들이었고, 도끼를 휘둘렀던 아담들은 개발에 장애물이 된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을 몰아냈다. 그다음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들은 말 그대로 삭제되었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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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Seasons
블렉스볼렉스 지음, 명혜권 옮김 / 파라텍스트(paratext)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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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종이에 인쇄된 산뜻한 색감의 실크스크린 작업. 간결하고 때론 섬세한 표현이 텍스트와 함께 배치되어 있는 방식도 흥미롭네요. 번역 그림책의 한글 폰트는 마음에 안드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 차라리 원서를 사곤 합니다. 이 번역본의 한글폰트는 마음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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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 -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
브라이언 키팅 지음, 마크 에드워즈 그림, 이한음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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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도 사람의 일, 사회적 기술의 중요성

-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


: ,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

브라이언 키팅 지음 | 이한음 옮김 | [다산초당] | (2024)



 

나는 자기계발서를 가능한 한 멀리 하는 편이다. 다만 자기계발이라는 역할을 좀 더 너그럽게바라보았을 때, 모든 책읽기의 행위는 어느 정도 자기계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를 처음 보았을 때, 잠시 주저했던 것도 책 제목에서 감지되는 자기계발서의 아우라(?)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흥미를 끌었던 나름의 이유는 저자의 서문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성공한 과학자들이 재능이나 운에 공로를 돌리는 결과주의적인 관점이 아니라, 현실적인 역경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통과했는지를 이야기해주려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책을 읽고 다시 책 제목을 보았을 때, 책의 원제인 불가능 속으로(Into the Impossible)’를 그대로 사용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이 표현은 SF작가 아서 클라크의 말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책의 제목이 우리 문화의 맥락 속에서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출판사의 고민도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이 책은 전도유망한 과학자이기도 한 브라이언 키팅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9명과 만나 나눈 대화가 모티브가 되었다. 과학적 발견과 성공 스토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과학자들(무엇보다 저자가 존경하고 스승으로 삼을만한 선별된 인물들)의 삶 이면의 분투와 삶의 태도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학창 시절에 이 책을 읽어보았다면, 막연하지만 좀 더 용기를 얻고 새로운 다짐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아마 저자가 여러 과학자들과 나눈 대화 중에서 독자가 가장 많이 만나게 될 조언은 호기심을 따르라는 말일 테다. 호기심은 누구나 마주하게 될 역경을 견디고 나아가 이를 돌파할 힘을 줄 수 있다. 이들의 조언에 따르면 이런 삶과 커리어의 역경과 마주하여 돌파하는 사람은 더 높은 성취로 나아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이 과학자들은 우리를 붙들어주고 이끌어주는 동앗줄로 호기심을 들고 있었다.


 

사실 자신의 호기심을 따르라라는 조언은 이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실천적인 가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좀 더 보수적이고 폐쇄적일 수도 있는 학계에서 이 가치는 여전히, 그리고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닐까. 하나의 큰 주제를 40년 넘게 붙들고 노력을 경주해온 과학자는 어느 순간 회의에 빠져 손을 놓아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가 길을 잃지 않고 다시 본 궤도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바로 재미와 호기심이라는 기준이 아닐까. , 이 호기심을 따르려는 마음이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문제 상황이 충돌하거나 대립할 때, 이 둘을 어떻게 균형 잡아야 할지, 혹은 이 호기심을 추구할 상상력을 어떻게 발휘하는지의 문제가 결코 호락호락하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실패와 회의, 그리고 성공 그 사이에 어딘가에서 과학자들은 숱하게 길을잃고 방황하며 분투해왔을 것이다. 게다가 모든 과학자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얻어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일반 독자인 우리들에게 이런 상황은 생각보다 무게감 있는 딜레마를 안겨준다.

 


이 책은 과학자들의 호기심이라는 가치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다만 나는 과학자들의 마음가짐으로 저자가 주목한 또 다른 가치에 눈길이 갔다. 바로 협력하는 마음가짐이다. 일전에 한 학원에서 과학을 가르쳤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수업 가운데 아이들이 팀을 이루어 결과물을 산출하는 공동 프로젝트 과학 수업을 할 때가 있었다. 이 때만 되면 아이들도, 선생도 높은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아이들은 협력하여 하나의 산출물을 내는 과정이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혼자 원하는 것을 아쉬움 없이 받아온 아이들은 무언가를 공유하거나, 타인의 생각을 경청하고 이를 수용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치며 타인을 설득하는 일에 매번 서툰 모습을 보였다. 이건 어른들도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내심 어린 시절부터 경험을 하도록 했으면 하는 조바심에, 지금 생각하면 학생들과 교사 모두 공동 프로젝트 수업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부실한 나의 교수법을 탓하고, 나의 교수법을 향상시키는 연구를 더 하겠지만 말이다. 당시에는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도 함께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안타깝기만 했던 것이다. 나의 학창 시절이야 한 반에 50명이 넘었으니 교사가 학생들을 일일이 다 챙겨줄 수도 없었던 시절이기에 그렇다 치자. 공부 잘하는 학생만 대접받던 시절이었으니, 나머지 아이들에게 무언가 함께하는 경험을 기대하기는 역부족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한 반의 인원이 절반 이하로 줄은 데다, 수행평가나 다양한 경험을 하는 학생들이 많아진 지금, 무언가를 함께 하며, 결과물을 만드는 것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아이들이 꽤나 있다는 사실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 기억을 떠올리니 노벨상 수상자가 이야기하는 사회적 기술의 중요성이 정말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사회적 기술은 사람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과 정서 지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2006년에 우주배경복사 연구를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던 존 메더의 지혜를 살펴보자.


 

내가 모르는 걸 아는 사람을 보면 이기려 애쓰기보다 함께 연구하려고 힘쓰는 게 좋아요.”(219)

 


이 태도를 달리 말하면, 협력과 연대의 마음가짐이다. 다른 과학자들은 누구든 자신의 경쟁상대가 될 테지만, 이들이야말로 우린 결국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존 메더의 말에 크게 수긍하게 된다. 내가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누누이 말했던 가치가 바로 이 점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아이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1979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셸던 글래쇼 역시 협력이 물리학 연구의 핵심이란 사실을 깨달았죠.”(95)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과학자들에게 이 협력의 가치는 각자가 기여하여 더 큰 일,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을 가능으로 바꾸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우리의 교육은 어떤가도 생각해본다. 우리는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고 있는 것일까? 역시 개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제고하는 수업 목표에 더하여, 함께 발전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을 어떻게 키울지가 관건이 아닐까. 당연히 교사들은 이런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다만 교육 현장에서 이런 본질적인 문제가 반영이 될 수 있도록 실천적인 고민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정말 실력 있고 훌륭한 과학자들이 많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보면, 대한민국 사회가 노벨상이라는 권위에 미쳐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물론 대단한 상이기에 저자가 이야기하듯 가면증후군증세를 보인 수상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호기심하면 노벨상 수상자들 못지않다. 하지만 재미와 호기심이란 기준 만으로 연구비를 타고 이를 수십 년 넘게 지켜보고 격려해줄 사회적 장치와 안목은 아직 부족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좁은 시선일까 싶다. 특히 권위 있는 학자들에 도전적으로 질문하기도 하고, 큰 질문에 답하려고 과감히 뛰어들어 인내심 있게 답을 찾을 수 있는 분위기도 우리 사회에 먼저 이루어져야할 일이라고 본다.


 

저자가 자신이 존경하는 노벨상 수상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남긴 이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은, 과학도 결국은 인간의 일이라는 점이다. 다만 다른 인간의 활동 분야와 다르게 과학은 동료들 간의 경쟁도 치열하고, 언제나 동료들로부터, 지식인 사회로부터 검증을 받아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이 더 있을 뿐이다. 성공한 과학자들의 성공 비결은, 가장 기본이 되는 재능(호기심과 노력)이외에 우리의 능력 너머의 운과 더불어 사회적 기술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특히 이 동료, 타인에 대한 공감력, 정서적 지능과 이들의 말을 경청하며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은 한 과학자의 성취가 공동체에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물리학자에게 재능과 운은 커리어의 주 궤도에 오르게 해주는 요소들이지만, ‘사회적 기술은 물리학자를 완성하게 해주는 요소다. 이 책에 등장하는 조언들은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들이 전하는 지혜이지만, 과학 분야에만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 전반의 성숙도를 높이는 데에도 경청할만한 지혜들이기 때문이다.






[덧]

(117) 물리학자 '칼 위먼(Carl Wieman)' => '칼 와이먼'이라고 발음하는 것으로 안다. 


독일의 물리학자 '볼프강 케테를레(Wolfgang Ketterle)' => 어떤 기준으로 이렇게 표기를 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으나, 과거에 읽은 글에서 '볼프강 케털리'라고 했던 것 같다. 확인을 요한다.


(149) '에스허르 M. C. Escher' =>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면 모르겠지만, 네덜란드의 그래픽 예술가 에셔의 이름을 이렇게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국내에서는 '에셔'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지 않나?







[1] "첫 번째 원칙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속이기 쉬운 상대다."(39)
-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의 말

[2] "모든 실험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학습이다."(61)
"우린 어차피 실패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절박한 질문은 어떻게 실패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실패를 다룰 것인가, 혹은 실패 끝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63)

[3] "과학계에서도 어떤 연구가 실험실 너머의 성과로 이어지려면 일반상대성 이론 방정식을 계산하고 초고감도 검출기를 만드는 것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사람들과 상호작용하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그들을 설득하고 이끄는 법을 알아야 한다."(66)

[4] "가능성의 한계를 발견할 방법은 그 한계를 좀 더 지나서 불가능 속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없다."(76)
- SF작가 아서 클라크의 말

[5] "궁극적인 목표를 잊지 않는 것. 나를 지나치게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셸던의 태도를 따라 할 수 있다면 어떤 길을 걷든 좀처럼 헤매지 않을 것 같다."(91)

[6] "협력이 물리학 연구의 핵심이란 사실을 깨달았죠."
"재미는 과학에서 대단히 중요해요. 난 늘 재미와 즐거움을 좇았습니다."(95)
- 물리학자 셸던 글래쇼의 말

[7] "난 오랫동안 ‘(노벨상)이후의 삶’을 생각했어요. 노벨상을 받은 많은 이를 존경하며, 그들이 상을 받은 뒤 어떻게 살아가는지 살펴봤어요. 남보다 더 잘 살아가는 사람도 있어요. 내게는 수상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서 논문을 계속 쓴 리처드 파인먼, 양전닝, 리정다오 같은 이가 성공 사례로 보였죠."(186)
- 물리학자 프랭크 윌첵의 말

[8] "과학은 전문가가 무지하다고 믿는 것이다."(213)
-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의 말

[9] "내가 모르는 걸 아는 사람을 보면 이기려 애쓰기보다 함께 연구하려고 힘쓰는 게 좋아요."(219)
- 물리학자 존 메더의 말
"그(존 메더)는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위축되거나 이기려 들지 않고 그들과 협력하고 도움을 받길 선택한다."(219)

[10] "내가 보기에 우린 결국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경쟁자이긴 해도요. 당신이 어떤 연구 프로젝트를 하고 잇고, 나도 같은 걸 측정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각자 다른 답을 얻는다면 아주 주요한 과제가 생긴 거죠. 우리 일은 이기고 지는 게 아니라 증거를 구하는 겁니다."(225)
- 물리학자 존 메더의 말

[11] "호기심은 어떤 주제든 더 많이 배울 수 있도록 해주는 입장권이나 다름없다."(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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