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남의 작은 도덕경》
노자 지음 | 오강남 풀이 | 현암사
매일 아침 꽉 들어찬 도시의 지하철 안에서기회가 될 때마다 <작은 도덕경>을 꺼내 보았다. 노자가 지었다고 알려진 <도덕경>은 많이 들어보았으나 실제로 단 한줄도 읽어보지는 못했던 차였다. 실제로 도덕경은 짤막한 아포리즘 또는 싯구와도 같은 문구가 81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매우 짧은 책이다. 이 책을 옮긴 오강남 교수의 언급대로 글자만을 따라가면 한 시간에도 읽어낼 수 있으나, 사람에 따라 평생을 읽을 수도 있다는 오묘한 책이다.
이 포켓판 <도덕경>은 한자 원문을 비롯하여 한글 번역본과 영문 번역 본을 모두 수독하되 ‘해석’을 집어넣지 않은 말그대로 원전의 텍스트만을 담았다. 나처럼 처음 도덕경을 읽은 사람들에게 처음 읽는 경우,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될 듯한 장은 아마 20%정도는 되지 않을까 한다. 나머지는
알쏭달쏭한 내용이 많다. 더구나 옮긴이의 ‘풀이’가 없기에,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우선 역자의 풀이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장점으로 꼽힌다. 대신 독자가 적극적으로 노자가 남긴 문구의 진의를 파악하기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노력을 해야하는 것 같다. 그래도 꽉 들어찬 아침 지하철에서 이따금 공감이 가는 <도덕경>의 문구를 만나게 되면 반갑다.
“너무 날카롭게 벼리고 갈면 쉬 무디어집니다.”(9장, 42면)
칼날을 너무 날카롭게 벼리면, 쉽게 무디어지는 약점을 가지거나 의도하지 않게 사람을 다치게 하기 쉽다. 무언가에 대한 집착을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해주고, 극단에의 집착을 경계하는 가르침이 아닐까 나는 지하철에서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중용’을 어떤 상황이나 ‘입장의 기계적인 가운데’를 의미한다고 피상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내가 생각해본 ‘중용’의 모습은 극단을 피하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중용의 모습이 어떤 이에게는 일종의 ‘기회주의자’로서의 면모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회주의자’의 자세와 ‘중용’의 자세는 사뭇 다르다. ‘기회주의’는 특정 주체에게 유리한 상황을 취하는 것이라면 ‘중용’의 자세는 상생을 위한 것이다. 흔들거리는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손에 든 <작은 도덕경> 은 풀이가 없기에 어쩌면 나만의 창조적인 ‘오독’을 허용한다. 내가 떠올린 ‘중용’의 덕은 어느 극단으로 부터 일종의 ‘거리두기’를 통해 어느 쪽이든 자신의 오롯한 비판능력으로 바라보는 자세를 의미하지 않을까. ‘상생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는 어느 쪽이든 양쪽을 차별없이 고려하여 보다 합리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하철에서 만난 풀이 없는 <도덕경>의 한 줄 문구는 나를 빈번히 옆갤로 새도록 한다. 창조적인 ‘오독’을 허용하고, 또다시 새로운 생각의 고리를 만들어준다. 어쩌면 내가 <도덕경>을 이전에 읽어본 적이 없어서 나만의 ‘소요(逍遙)하기’가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도덕경>의 저자가 바로 노자가 맞다고 한다면 노자는 대단한 자연관찰가로 보인다. 자연으로부터 ‘거침이 없는’ 지혜를 읽어내기 때문이다. 노자는 물이 아래로 향하는 특성에 ‘낮춤(겸손)의 지혜’를 이야기하고, 자연의 맑음과 고요를 추구한다. 자연의 지혜를 추구하므로 인간이 정해둔 인위적인 모든 것을 비판한다. 특히나 인위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또한 유가의 가르침인 듯하다. 유가의 가르침인 인(仁), 의(義), 효(孝) 등을 언급하며 비판하는 대목도 보인다.
“대도(大道)가 폐하면 인(仁)이니 의(義)니 하는 것이 나서고,
지략이니 지모니 하는 것이 설치면 엄청난 위선이 만연하게 됩니다.
가족 관계가 조화롭지 못하면 효(孝)니 자(慈)니 하는 것이 나서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충신이 생겨납니다.” - 18장(68면)
우리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인 인과 의, 효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렇지 못함을 반증한다. 지하철을 타면서 각 차량의 끝에 지정해둔 ‘교통약자 배려석’은 우리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규칙이다. 결국 과거와는 달리 우리 사회가 교통약자에 대한 배려가 그만큼 사라졌기에 인위적으로 만들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교통약자’를 배려할 정도로 성숙한 사회가 되었다고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양보와 배려의 미덕’이 사라지는 것이 그 이유라고 지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가끔씩 지하철에서 볼 수 있는 ‘교통약자’인 노인들이 ‘교통약자 배려석’에 앉은 젊은이들에게 폭언 심지어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노자는 우리 사회의 이러한 인위성을 바라보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풀이를 아직 읽어보진 못했으므로 분명히 상당한 정도의 오독이 이미 행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경>의 주석서가 중국에만 1500권이 있다는 사실도 그만큼의 다양한 ‘오독’이 이루어진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풍부한 오독의 가능성은 이 책에 나오는 ‘말의 아낌’에 더욱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비우므로서 더욱 풍성해지는 이치를 <도덕경> 스스로 증명해내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간결한 지혜의 보고인 <도덕경>이 서양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혹시 후기 현대사회의 ‘미니멀리즘’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스스로 자족할 줄 알고, 지나치지 않으며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의식하는 삶, 자연의 지혜를 배우는 노자의 가르침은 어쩌면 점점 비대해지고 극단으로 치우쳐가는 도시의 삶, 신자본주의 속에서 소진되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언제든 다시 되돌아 볼 수 있는 가르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장
한
장
넘기기
힘든
아침
지하철에서
이
조그만
책을
꺼내들고
읽어가는
동안
한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옆길로
새기를
반복한다.
어떨
때는
모호하여
전혀
와닿지도
않는
문장들이
다음
날
다시
되돌아가면
이해가될
듯도
하다.
한
페이지를
들고서도
출근
내내
이해가
안되는
경우도
있다.
그
땐
나도
물의
지혜를
떠올리고
나를
낮춘다.
모르면
돌아가기.
또
다시
<도덕경>을
펼치게
되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므로,
나의
무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편하게
읽게
된다.
천천히
책을
읽게
된
데에도
<도덕경>이
다시금
일러준
지혜다.
여러
번
읽어도
모든
문구나
내용이
내게
와닿거나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삶의
경험치가
하나
둘
쌓이면서
내게
와닿는
문장들이
하나
둘
늘어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그러면
나의
삶도
그만큼
산책하듯
더욱
깊어지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나는
다시
내일
출근용
가방에
<작은
도덕경>을
찾아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