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와 욕망 -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7
문성원 지음 / 현암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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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욕망>

: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

문성원 지음 | 현암사

 

 

 철학은 어렵다. 하지만 어려울 것일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것이다. 우리가 사용해본 없는 사고의 근육 써야하기에 서투른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체력이 달리는 것을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삶의 경험치가 늘어나면서 과거에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수긍할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 늘어난다. 철학도 마찬가지 것이다. 우리의 삶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나의 보잘것 없음을 느낌과 동시에 내게 익숙하지 않은 철학서를 만나도 조바심을 내지 않는 덤덤함이 생기는 것은 분명 나에게만 해당하는 점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읽게 <타자와 욕망> 다르지 않은 것같다. 책이 다루는 책은 나에게도 생소한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철학자의 1961 출간 서적이며 그의 번째 주저라고 불리는 <전체성과 무한>이다.  그리고 저자인 문성원 교수 또한 레비나스의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레비나스의 원전을 읽고 저자의 관점에서 이해한 레비나스 것이므로 <타자의 욕망> 또한 나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을 있겠다. 너무 기대와 조바심은 잠시 제쳐두고 레비나스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선 궁금해진다. 인간이란 무릇 어느 특정 장소와 시기에 살았던 배경이라는 맥락을 제외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선 레비나스의 삶을 간단히 따라가본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1906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집안(책방 운영)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10 후반인 1923년에 가족을 떠나 프랑스에서 철학공부(프랑스 철학, 후설의 현상학 ) 시작하게 되는데, 20세가 되는 1926 평생의 친구가 되는 작가이자 사상가인 모리스 블랑쇼를 만나게 된다. 70년에 가까운 지기를, 그것도 친구가 모두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거목을 오랜 친구로 지낸다는 것만 해도 크나큰 자산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후 레비나스는 1928 독일로 가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강의를 직접 듣게 된다. 철학의 거장은 레비나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라고 하며, 특히 하이데거는 레비나스에게 있어 거대한 존재이자 넘어야할 산이었다. 그만큼 평생을 하이데거의 영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유학시절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레비나스는 1933 프랑스 군인으로 2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한다. 포로가 되어 수용소 생활을 하게 레비나스는 이후 전쟁을 통해 살아남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리투아니아에 있던 남동생을 비롯한 가족이 나치에 의해 학살을 당하고 만다. 레비나스에게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고 지녀야만 했을 깊은 상처였을 것이다.

 

나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나치 공포에 대한 예감과 그에 대한 기억이 지배한다.”(29)

레비나스의 말을 살펴보더라도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충격과 두려움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에 응답해야 한다. 응답해야 함이 우리의 책임을 이룬다.”(28)

라는 그의 말은 어쩌면 우리에게, 나아가 인류에게 절실히 요청하는 레비나스의 강렬한 호소이자 부름이 아니었을까?

     레비나스의 저서에 대한 문성원 교수의 책만을 통독하고 레비나스의 철학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스스로 위험한 일인 것을 안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그의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은 또한 얼마나 다양한 오독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신중하면서도 결국 스스로 나아가야하기에 대상을 제한하여 시도해보려고 한다.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28)

     나는 문장이 레비나스 철학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전제가 되지 않을까 감히생각해본다. 내가 아닌 존재에 대한 인정과 인식은 평범한 인간에게 하나의 크나큰 사건일 있을 것이다. 결국 서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에서도 결국 이웃’, 타자 나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대상으로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레비나스는 그러한 서양 사상의 맥락에서 나와 타자의 접점(만남) 매개로 우리의 삶이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일게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 응답해야 한다. 응답해야 함이 우리의 책임을 이룬다.”(28)라는 레비나스의 언급은 어쩌면 우리에게, 나아가 인류에게 절실히 요청하는 레비나스의 호소이자 부름일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 나와 동일한 차원에 있지 않은 오히려 연약하고 헐벗은 ’(32)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성원 교수는 연약하고 헐벗은 원형으로서 예수를 언급하기도 한다. 바로 서양 사상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레비나스의 경우, 그는 20세기 초에 태어나 20세기 말에 사망하여, 20세기의 수많은 비극을 몸소 겪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에게 20세기 전반의 시기가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나치의 시대를 관통한 잔혹의 시기를 목도하고 경험한 레비나스가 타자 동일자 대해 우위와 우선성을 강조한 이유는 충분히 수긍할 있을 같다.

     동일자를 우선시하고 확장하고자 하는 경향이 동일자적 내부에서는 가혹한 경쟁을, 동일자 외부에 대해서는 동일화에 따른 복속 아니면 배제와 제거라는 폭압을 낳았다는 것이다.”(34)    

     우수한 아리안들만의 국가 건설하려했던 나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집단의 전체주의적 특성과 타자 유대인에 대한 학살도 설명해줄 있는 진술이다. 레비나스에겐 아마도 남동생을 포함한 자신의 가족이 나치에게 할살당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절실히 묻고 대답을 구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인 문성원 교수는 이에 레비나르스를 읽을 놓쳐서는 안될 초점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타인을 살해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가했던 20세기의 비극적 상황, 거기에 대해 하이데거의 철학을 위시한 당시까지의 철학이 무력하고 무책임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레비나스는 이유가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인간의 얼굴 대한 외면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53)

     레비나스는 인간의 얼굴을하고 호소하는 타자에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당면과제이자 책임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윤리 존재 우선하는 1원리로 삼는다고 이해해볼 있다. 달리말하면 문성원 교수의 표현대로 레비나스의 철학은 자아중심적 한계성(동일자의 확장 욕구) 벗어나 타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이해할 있겠다. 좀더 순화하여 표현해보면 우리는 어떻게 남과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윤리 레비나스는 중심 화두로 삼고 있다. 레비나스에게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며, 타자와의 관계는 모든 이해(理解) 해석에 우선하는원리가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비나스에게 윤리 시대적 명령이자 호소였을 것이다. ‘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비롯되고 의미를 가질 터인데, 이는 저자가 레비나스 철학의 고유한 특색으로 낯섦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 언급하는 근거가 된다고 있다. 이는 이성에 기반한 인식 이전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감성(감수성) 우위에 두는 인식이 먼저가 아니라 반응이 먼저다.”(28)라고 하는 표현에서도 재확인되고 있다.

 

 

영화 샤인 Shine’에서 보이는 타자’, ‘환대’, 그리고 동일자의 확장

    며칠 국내에 개봉한 20년이 영화 샤인 어느 극장에서 다시 보면서 레비나스 철학의 기본 개념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영화는 오스트리아의 어느 구역에 살았던 유대인 가족(헬프갓 가족)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다음에 일은 우승하는 일이다.라는 신념에 가까운 고집으로 아들 데이비드의 피아노를 가르치는 아버지 피터는 레비나스가 사용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동일자의 확장 꾀하는 존재이다. 피터의 이러한 고집은 영화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유럽에 사는 20세기 초의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그림자와 이로부터 생존한 정황을 암시하고 있다. 고집스러운 아버지의 신념과 절박한 생존본능 그리고 음악을 하지 못한 자신의 과거에 대한 오랜 결핍으로 인한 욕망을 아들에게 폭력적으로 투사하면서 문제는 생겨난다. 자신의 욕망을 아들에게 투사하며 유지되는 아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는 동일자를 우선시하는 역학관계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주인공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아들에게 결국 동일화에 대한 복속을 강요하며, 이에 따르지 않고 런던의 영국왕립음악원으로 유학을 가버린 아들에 대한 배제와 제거의 기작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틈날 때마다 자신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없음을 주지시키는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명목상 안정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안전지대 놓이지 못한 아들(타자)’에게 동일자의 폭력은 아들에게 있어 죄책감과 수치심을 평생토록 유발하며 트라우마를 남긴다. 우리 사회의 인간 관계, 특히 안락하게 보이는 가족이라는 제도와 테두리 속에서 유지되는 건강하지 못한 인간관계가 있는 파괴적인 결과의 모습을 찾아볼 있을것이다.

안정과 안락을 위해 쳐진 테두리들이 배타적인 것으로 공고해질 동일자의 폭력은 일반적인 것이 된다.”(36)     

   책의 저자인 문성원 교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 또는 예방할 있는 윤리로서 환대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환대에 대해 칸트가 사용한 조건적, 계산적 환대 비해 레비나스의 환대 무조건적 환대임을 구분하여 설명해주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타자가 이방인이고 헐벗은 자이기에 호소에 응답하여 타자를 환대할 따름이다.’(37)라는 것이다. 20세기의 가운데서 인간성의 극적인 스펙트럼을 목격한 철학자로서 레비나스의 생애를 책을 통해 이해하고나니, 이런 무조건적인 환대의 호소를 조금은 수긍하게 된다.

     영화 샤인에서 아버지라는 울타리로부터 배제된 주인공 데이비드는 정신병원에서 일정기간 보낸 병원에 방문한 과거 데이비드의 팬의 도움으로 병원을 나오게 된다. 어느 비를 맞으며 돌아다니다가 들어간 레스토랑으로부터 받은 환대 데이비드에게 새로운 삶을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라고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데이비드를 옆에서 돌봐주는 사람을 만나고, 데이비드의 재능을 알아보고 인간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이들은 어떤 점에서 보면 무조건적인 환대 행위를 실천한 사람들이 아닌가. 데이비드가 중년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되고, 다시 재기하여 연주무대에 서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감동을 주는 같다. 있을 법하지 않은 실화에 바탕을 타자에게 마음이 따뜻한 이들이 제공한 무조건적인 환대 새로운 사람의 삶을 꽃피게 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돌아볼 , 있을 법하지 않은 환대행위가 가능했다는 데에 더욱 감명을 받게 되었다. 

 

책을 덮으며

    문성원 교수의 <타자와 욕망> 읽으며 처음으로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에 조금 가까워진 같다. 책을 읽으며 순간 순간 들었던 느낌과 불안정한 나의 이해를 다시 돌이켜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자아중심적 한계성(동일자의 확장 욕구)’ 벗어나 타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이해할 있다. 달리 표현해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남과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윤리 고찰하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흔히 도덕이라고 하는 것과 구분지어 타자와의 관계에서 고려되는 윤리 전통적인 철학에서 중요시되는 존재론 앞선다는 것이다.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인데, 타자와의 관계는 모든 이해(理解) 해석에 우선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비나스에게 있어 윤리 시대적 명령이자 호소였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피할 없는 책임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달리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우리에게 호소한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라는 존재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비롯되고, 여기에서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다시 분명히 일깨워주는 철학이다. 내가 이해한 바가 틀리지 않다면 문성원 교수도 책에서 레비나스 철학의 고유한 특색으로서 낯섦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 언급하는 대목이 바로 점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믿는다.

     책을 다시 덮으며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 지나쳐버린 페이지의 문구를 다시 음미하면서 마무리하겠다. 우리의 삶이 신자유주의적인 맥락에서 더욱 공고히 파편화, 원자화되어가는 지금, 각자의 가슴에 심어볼 만한 씨앗으로서 레비나스의 호소를 기억해둘만하지 않을까.

 

우리가 알고 가진 것이

바깥의 무한과 닿아 있음을 깨닫고

타자성과 외재성에 귀를 기울이는 욕망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욕망의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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