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느릿 느릿 읽기 [2]
청년 레빈은 여전히 키티에게 청혼을 주저하고 있다. 1부에 보면 레빈이 키티를 만나기위해 스케이트장에 가는 장면이 있다.
“네시에 레빈은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 동물원 입구에서 세낸 썰매를 세우고
스케이트장으로 가는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입구에서
쉬체르바쓰키네의 사륜 여행마차를 보았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틀림없이 그녀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 그는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환희와 두려움으로 그녀가 거기 있음을 알아챘던
것이다. 그녀는 한 부인과 이야기를 하면서 스케이트장 건너편 끝에 서 있었다. 그녀의 복장이나 자세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레빈에게는 이러한 군중
속에서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 쐐기풀 속에서 장미를 찾아내는 것처럼 손쉬웠다. 모든 것이 그녀로 인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의 온갖 것을 환하게 밝히는 미소와 같았다.” (제1권 62-63면)
흔히 ‘내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으로부터 ‘빛’같은 아우라가 퍼져나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130년도 전에 톨스토이는 우리가 이야기하듯 그런 ‘빛이나는’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키티의 사촌오빠가 레빈을 알아보고 ‘러시아 제일의 스케이터!’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대목을 통해 레빈은 스케이트를 매우 잘 타는 것으로 나온다.
역시나 오늘은 처음부터 삼천포로 빠지자면, 나는 이 대목을 읽고 문득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렸다. 크리스마스 즈음 기숙학교에서 쫒겨난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여자 친구 샐리를 만나기전 뉴욕 맨하탄을 배회하면서 스케이트장에 이르는
장면이 나왔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사건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도 찾아낼 길은 없지만,
<샐린저 평전>(케니스 슬라웬스키 지음)을 보면 꽤 젊은 나이에 단편 소설로 데뷔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1941년
12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폭격한 이후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군 복무 중(1943년 즈음으로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책을 열심히 읽어댔다(104면)’라고 적힌 대목이 보인다. 샐린저는 실제로 맨하탄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실제로도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 콜필드가 “나도 어렸을 때 똑같은 장소에서 스케이트 타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라고
혼자 생각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혹은 무의식 중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레빈이 스케이트장에서
키티를 만나는 장면이 <호밀밭의 파수꾼>과 연결되었을 뿐이다.
“딸의 운명은 부모가 결정지어주어야 한다는 프랑스의 관습은 배척당하고 비난받았다. 딸에게 완전한 자유를 줘야 한다는 영국의 관습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러시아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중매쟁이를 고용한다는 러시아식 관습은 뭔가 상스러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남들처럼 부인 자신도 그것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시집을 가야 하고 시집을 보내야 하는가는
아무도 몰랐다. 부인이 이 문제에 대해 상의했던 사람들은 모두 부인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생각해봐요, 이제는 그 낡은 관십을 버려야 할 때예요. 결혼하는 건 젊은 사람들이지 부모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당사자들이 알아서 하게끔 내버려둬야 해요.” 딸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부인으로서는 딸이 사내들을 가까이하면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그것도 결혼할 의사가 없는 사내나 혹은 남편감이 되지 못하는 사내를 연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95-6면)
결혼 적령기가 된 키티의 어머니인 ‘부인’의 입장에서 톨스토이가 써내려나간 이 대목을 보면
작가가 인식하는 당시 결혼 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톨스토이의 표현에 의하면 프랑스의 결혼은 과거 우리처럼 부모가 정해준 결혼이 대세였을 듯하고, 영국은 ‘자유연애’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반면 러시아의 결혼문화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배우자를
선택하기도하는(물론 자유연애와 부모의 주선에의한 결혼도 혼재해있지만) 현재 우리의 모습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아울러 러시아의 문화는 특히나 프랑스 문화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교계 모임에서 러시아어 대신 프랑스어를 쓰기도하고, 하인이 있는 자리에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나 껄끄러운 이야기를 할 때 프랑스어를 쓰는 장면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롤리타>의 작가)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연애소설로 꼽은 이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특정 한 사람이 주요 인물이 아니고 바로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사랑과 운명을 대립시키고 있다. 한 쪽은 유부녀인 안나 카레니나와 사랑을 하게되는 브론스키 백작(알렉세이 키릴로비치 브론스키)이 있고, 그 대척점에 키티(카테리나 알렉산드로브나)와 레빈(콘스탄틴 드리트리치 레빈)이 있다.
따라서 이 두 커플이 조우하고 고백을 하는 시점이 비슷하게 나오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레빈이 키티에게 처음 고백하고 청혼을 했을 때 처음에는 키티에게 거절당하게 되는데, 반면
브론스키와 안나는 기차역에서 서로 첫 눈에 반하게 된다. 이 두 커플의 시작은 이후 이들이 맞게되는 운명과
반대로 레빈은 청혼을 거절당하는 쓰라림으로 시작하며, 브론스키는 무난하고 좋은 분위기로 두 사람사이의 관계가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브론스키와 안나가 처음 만나는 곳이 ‘기차역’이라는 것, 그리고 이들이 처음 만난 날 기차역에서 한 남자가 열차에 치여 죽는 사건을 맞게 되는데, 안나가
“불길한 징조예요.”라고 하는 말은 아무 의미없이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기차역’은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불행을 잉태하는 장소로서 톨스토이가 사용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톨스토이가 말년에 집을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영면한 곳도 어느 기차역이었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에게 있어 ‘기차역’은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지도 모르겠다. 삶과 죽음을 기억하라는 톨스토이 말년의 잠언집을 읽다보면 인생이 갖는
은유적 의미(‘지나가는 곳’으로서의 인생)또한 떠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에게는 기차역과 부합하는 인생의 의미가 아닐까한다.
여기서 잠깐 안나 카레니나와 사랑에 빠지는 인물인 브론스키 백작에대해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브론스키는 좋은 집안 배경 출신이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서 성장하는데,
초반에는 마마보이처럼 보이는 착한 아들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어머니와의 관계가 썩
좋지는 않으며,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 나온다. 브론스키는 유부녀인
안나 카레니나와 첫 눈에 반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열정적인 사랑을향해 나아가지만 사교계의 냉담한 시선과 사회의 관습에 고통을 받는다.
좋은 집안에 학식은 있지만 20세 연상인 남자(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카레닌)와 결혼 후 무덤덤한 결혼생활을 하던 안나는 브론스키를 만나
새로운 삶에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든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촛불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사랑하는 아들마저도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지는 못한 듯하다. 이런 사건을 내 주변에서 마주하게 된다면 언제나 타인의
행동을 비난하기는 쉬운일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내게도 일어났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타인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까? 안나의 남편인 카레닌의
입장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타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퍼부으며 복수와 응징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합리적’ 대안을 선택할 수 있을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이런 문제에 대해 당시(약 130여년 전)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사회의 분문율에 톨스토이는 소설에서 질문을 던지고 편견에 도전하고 있다. 안나는 단순히 자신의 ‘쾌락’을 쫒는 여자일까?
그리고 어쩌면 ‘쾌락’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쾌락’을 구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일일까하는 의문을 던져볼 수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갖고있는 ‘도덕적인 기준’이야말로 모호하고 자의적이며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도덕적인 문제에 있어 ‘정답’이란 없는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문제는 생각해볼 일이다.
"인생의 온갖 변화와 매력과 아름다움은 모두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는 거니까." (91면)
"All the variety, all the charm, all the beauty of life are made up of light and shade." (펭귄 북스, 4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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