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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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정을 버리고도, 회사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이 말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박민규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 하던 독백이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가장들은 가정을 버리면, 회사에서 살아남는다라는 구호아래 열심히 일했다.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하나로 오랜 시간동안 공부하고 좋은 대학을 진학하여 나라의 훌륭한 일군이 되는 것이 마치 신성한 의무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들은 가정보다 회사가 더 우선이었으며 평생 회사에 충성하여 가정을 지탱하고, 아이들을 교육시켜 대학까지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의무였다. 하지만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그 이전의 사회와 질적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회사에 모든 것을 걸고 일만했던 가장들은 가정으로부터 이미 소외되어가고 있었고, 가족은 점점 더 낯선 사람들로 변해갔다.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가장들은 결국 사회에서, 가정에서 버림받은 존재로 느껴졌을 것이다. <시간의 향기>를 읽으며 생각나는 소설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었다. 소설에서 일류대를 나와 열심히 일해온 주인공은 외환위기로 회사로부터 정리해고 당하고, 곧이어 부인과 이혼하게 된다. 실직 후 온 몸으로 시간을 인식하게된 주인공이 프로로서의 삶의 본질을 독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시간의 향기>는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근대에서 후근대로 이행되는 과정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산업사회 이후 생산성과 효율의 극대화가 절대화되면서 인간이 인지하는 시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되었다. 근대의 전형적 현상인 가속화로 인해 역사는 종언을 맞았고 의미를 상실했다는 보드리야르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앞에서 언급한 소설과 현재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충분히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사람의 손으로 혹은 손에 쥐는 도구로 일주일동안 하던 일을, 이제는 한 시간 이내에 도구 혹은 장비를 이용하여 끝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고, 여가시간이 고차원적인 활동에 쓰인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인간의 한가로움을 위해 쓰이지도 않았다. 사색적인 안식과는 무관하게 그 단축한 여가시간은 끊임없이 다음 일을 위해 쓰여지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여가시간이란 다음에 하게될 미션을 위해 필요한 육체적인 원기 회복의 시간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사색적 삶을 위한 한가로움으로부터 소외된 인간. 그 결과 조급성의 사회가 만들어버린 향기없는 삶이 우리에게는 고향이자 자연이 되어버리고 말았고 급기야는 우리 존재에대한 망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하이데거는 전반적인 조급함의 원인을 정적, 긴 것, 느린 것에 귀기울이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찾았다. 우리가 만성적인 시간부족의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나타나는 징후는 곧 권태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깊은 권태로서의 징후. 깊은 권태는 총체적인 의미의 공허로 경험되며 이는 시간의 공허에서 비롯된다.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해 소속으로부터 이탈한 경우, 많은 이들은 새롭게 주어진 시간에 머무름의 능력을 상실하여 권태에 빠지고, 불안해하고 심지어는 우울증과 자살에도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느긋함을 즐기고 시간의 향기를 지각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과도하게 고양된 주체성이야말로 깊은 권태가 생겨난 주원인이다. 더 많은 자기 생각보다 더 많은 세상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은 행동보다 더 많은 머무름이 권태의 저주를 깨뜨릴 수 있다.라고 말하고있다. 아울러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활동적 삶을 비판하고 있다. 아렌트의 활동적 삶에는 혁명적 행동에 그 무게를 두는 삶으로 진정한 머무름, 사색적 삶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머무름의 모습은 앞서 언급한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결성한 주인공은 대기업 야구동호회 회원들과 야구시합을 하게된다. 이 경기에서 이 팬클럽 회원들이 보이는 행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스포츠맨쉽을 가진 이들은 아니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억지로 잡지 않는다가 이들의 모토이며, 경기 중 팬클럽 회원 하나는 공을 잡으러 가다 주저앉아 무언가를 보기 시작한다. 공을 잡으러 풀밭으러 갔다가 들꽃이 예뻐서 멈추고 꽃을 보고 있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이 팬클럽의 회원들은 바로 시간의 주체로서 시간의 향기를 듬뿍 맡을 줄 아는 이들이었다.       

  저자는 극단적으로 고립되고 원자화된 시간을 사는 우리들이 조급성의 사회로부터 우리자신을 찾는 길은 사색적 삶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근대의 행진과 같이 목적지향적인 걸음걸이가 아니라 산책유랑과 같은 무목적의 걸음걸이로 머물고 사색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러한 사색적 삶은 사실 저자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의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한 모양이다. 키케로의 말로 마무리를 하며 사색하는 삶, 머무르는 삶을 다시 생각해본다.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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