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과 이야기 - 에세이와 회고록, 자전적 글쓰기에 관하여
비비언 고닉 지음, 이영아 옮김 / 마농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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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소리, 나의 진실에 가 닿는 글쓰기


<상황과 이야기>

: 에세이와 회고록, 자전적 글쓰기에 관하여

(원제: The Situation and the Story)
 

비비언 고닉(Vivian Gornick) 지음
이영아 옮김 [마농지] (2023)

 

 


 

최근에 비비언 고닉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이번에 읽게 된 상황과 이야기외에 멀리 오래 보기라는 비평집도 최근에 나온 계기로 주목하게 되었다. '작가들의 작가'로 불린다는 작가 소개를 보니, 유도라 웰티, 마거릿 애트우드, 어슐러 K. 르 귄 등등 내가 더 읽고 알고 싶은 대가들처럼, 그녀 역시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지금도 그런 작가인 듯하다. 이번에 읽은 책 상황과 이야기에서는 자신을 꺼내어 보여주는 글쓰기, 곧 에세이나 회고록 등의 자전적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고닉은 흥미로운 회고록 작가로 영국인인 애컬리(J.R. Ackerley)를 꼽는다. 그는 아버지의 사후,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의 비밀스러운과거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딴살림을 차리고 이중생활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젊은 시절 아버지가 남창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동성애 작가로서 아버지의 삶에 호기심을 느꼈던 걸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고닉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그것만은 아니었으리라 깨닫게 된다

 

애컬리는 아버지에 관한, 그리고 부자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회고록 아버지와 나 My Father and Myself에 담았다. 하지만 그는 이 이야기를 오랜 세월이 지나 들려주는데, 그동안 아버지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보다 결국 자신이 아버지를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음을 말한다. 나아가 그가 회피해왔던 진실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다는 점을, '작가 중의 작가' 고닉이 독자들에게 차근차근 일러주는 것이다.


 

고닉은 여기에서 상황이야기의 차이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애컬리는 이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왜 30년이나 걸렸을까? 3년이 아니라.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들려준 것은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황'이기 때문이다. 꺼내 놓는 데 30년이 걸린 것은 이야기였다."(25)


 

처음엔 곧바로 다가오지 않는 말이었지만, 이는 작가가 자신의 진실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1896년에 태어났고 내 부모님은 1919년에 결혼했다." 이런 문장을 말하는 목소리라면 어떤 주제든 품위 있고 허심탄회하게 이여기할 것이다. 이 목소리로부터 짙은 감정과 선명한 지성, 독창적인 표현과 놀라운 솔직함이 흘러나올 것이다.(25-26)


 

자신과 부모님에 대해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도 이렇게 간결한 문장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폭발하게 만드는 문장이라니. 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위해 30년을 기다린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선전포고문이다. 고닉 역시 이야기를 소재삼아 독자가 자신의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당연히 애컬리의 책 역시 읽고 싶어진다.

 


아버지와 나의 서술자 애컬리는 아주 호감 가는 사람이다. 그가 세련된 정직함을 내보였기 때문이 아니다. 감상적인 자존심의 매끄러운 표면 아래 있는 단단한 진실에 닿을 때까지 불안을 벗겨내고 또 벗겨내며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그를 독자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26)


 

에세이라는 장르를 그동안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던 이유는, 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고난과 상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솔직함이라고 여긴 듯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강박적인 피해의식까지 덤으로 독자에게 얹어주거나 작가의 솔직함을 강요하는 느낌을 받곤 했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의 소설은 아주 마음에 들어 감탄하기도 하지만, 막상 같은 작가의 에세이는 읽기 부담스러운 경우도 있었다고닉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런 에세이들은 아직 자신의 내면 깊숙이 묻혀 있는 자신의 고갱이, 진실에 가 닿는 노력을 다 하기도 전에 출간부터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에세이든 회고록이든 화자와 이야기 사이에도 독자가 숨 쉴 여지가 필요하다. 자전적 글쓰기 작가라면 과거의 자신과 거리를 두는 훈련이 중요할 것 같다. 적어도 읽는 독자로서 나는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는 점, 아울러 그만큼 어려운 지점이라 생각한다. '작가들의 작가' 비비언 고닉은 대가답게 바로 이 지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고닉은 자전적 에세이나 회고록이 청승맞거나 피해의식으로 범벅된 글이 아니라, 단단한 껍질 속에 감추어져 있던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매력적인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러니 이 책을 펼쳐 고닉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1] "애컬리는 이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왜 30년이나 걸렸을까? 3년이 아니라.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들려준 것은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황‘이기 때문이다. 꺼내 놓는 데 30년이 걸린 것은 ‘이야기’였다."(25)

[2] "나는 1896년에 태어났고 내 부모님은 1919년에 결혼했다." 이런 문장을 말하는 목소리라면 어떤 주제든 품위 있고 허심탄회하게 이여기할 것이다. 이 목소리로부터 짙은 감정과 선명한 지성, 독창적인 표현과 놀라운 솔직함이 흘러나올 것이다.(25-26)

[3] "<아버지와 나>의 서술자 애컬리는 아주 호감 가는 사람이다. 그가 세련된 정직함을 내보였기 때문이 아니다. 감상적인 자존심의 매끄러운 표면 아래 있는 단단한 진실에 닿을 때까지 불안을 벗겨내고 또 벗겨내며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그를 독자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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