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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싸움 - 인류의 진보를 이끈 15가지 철학의 멋진 장면들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9월
평점 :
앎은 철학의 출발점이다
《생각의 싸움》에서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로 상징되는 철학의 시작과 함께 철학이 다다른 반대편의 극한으로 니체를 소개한다. 신화의 언어로 이루어진 고유명사로 만물을 설명하며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던 시대에서 보통명사로 자유롭게 비판하고 따져 묻기 시작하며 철학이 탄생되었다. 이런 변화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로부터 처음 확인할 수 있다. 고유명사로 세계를 설명하면서도 해소되지 않는 지적 갈증을 자각했다는 것, 그리고 ‘감히 알려고 시도한’ 순간이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였음을 알 수 있다.
책에서는 이렇게 발생한 철학이 이르게 된 곳의 경계를 니체의 철학으로 설정한다. 철학의 본령인 ‘자유로운 비판과 따져 묻기’의 대상을 모든 철학 자체에 적용하여 회의하고 질문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니체는 우리가 삶의 일부처럼 여겼던 ‘도덕이 애초부터 그 자체로 옳은 것이 아니며, 언제든 새 도덕이 만들어 질 수 있다’(62)고 주장한다. 도덕의 상대성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묻고 따지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니체는 여기에서 나아가 우리 각자가 도덕적 주체로서 ‘각자의 도덕을 만들고 자신의 윤리를 만들라’(63)고 주문하며, 이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함을 강조했다. 심지어 니체는 최초로 도덕을 발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도덕비판’의 임무를 부여하기도 했다.
니체는 이러한 도덕이,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 왔던 가치와 추구하던 의미의 진공상태를 니힐리즘으로 표현한다. 우리 손에 붙들고 있던 의미와 가치가 근거 없음을 ‘영원회귀’라는 새로운 각도에서 제시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동안의 도덕과 사회 규범 및 가치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목적지를 지정해주고 있었다면(예-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학), 니체는 이 목적지를 우리 각자가 정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칸트가 언급한 의무론적 윤리학의 맥락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곧 행동의 규칙만 제시하며, 규칙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에 니체는 각자가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택할 방식으로 행동하라’(72)라고 주문한다. 매 순간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삶을 살라는 의미일 것이다. 각자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이 어떠한 것이더라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신만의 윤리를 만들고 이에 따르는 삶이다.
이 지점에서 떠올린 소설의 한 대목이 있다.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뵐이 제2차 대전 직후 쓴 소설 《천사는 침묵했다》 의 한 대목이다. 이 소설은 연합국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도시 쾰른을 배경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쟁으로 각자 의지할 가족 없이 홀로 된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게 되고 서로 가까워진다. 폭격으로 삶의 터전이 사라져버린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뢰로 삶을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 지금 여기의 삶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삶을 받아들였고, 바로 이 자리에서 그의 삶이 집약되어 고통과 행복이 넘치는 짧은 순간의 영원을 경험했다.”(《천사는 침묵했다》, p158). 이 지점은 《생각의 싸움》에서 저자가 니체의 철학을 소개한 지점과 연결을 지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이 대목은 니체가 물었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작가 나름의 응답처럼 보였다. 삶의 기반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기존에 있던 삶의 규범과 도덕은 이제 필요가 없게 되었다. 두 남녀의 삶에 대한 의지만이 새로운 규범이며 도덕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정하는 주체는 바로 이 두 사람 자신들이었다.
《생각의 싸움》의 1장에서는 철학의 시작과 끝이라는 경계의 양 끝을 보여주었다면, 2장에서는 이 경계의 사이 어딘가에서, ‘이성’, 곧 로고스로 대변되는 앎의 과정이 어떻게 서양의 근대 철학을 시작한 철학자들에게 나타났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확실한 앎이란 가능한가, 그리고 이 앎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생각의 싸움’을 벌였던 이들이다. 이런 근대 철학과 공통적인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던 것은 중세를 지배해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근대 철학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합리적 의심을 기반으로 공고하던 기존의 철학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는 점일 것이다. 이 국면 역시 만물을 가능케 한 요소를 ‘물’이라고 본 탈레스에게 왜 그러한지 비판적으로 따져 물었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근대 철학자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으로 대변되는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따져 물었던’ 것이다.
2장의 처음에 소개된 베이컨은 영국 경험론의 전통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는 경험적 지식, 자연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며 귀납법의 전통을 세웠다. 세계에 대한 지식들로부터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규칙을 찾아내고 다시 이 규칙을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런 맥락에서 기존의 진리에 이르는 방법으로서의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은 베이컨과의 충돌이 불가피 했으며, 이 대결 구도에서 나온 것이 바로 《신기관》이었다.
베이컨은 지식을 얻는 과정을 방해하는 우상 네 가지를 언급했다. 이는 학문의 선입견이자 편견이기도 했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 종족의 본래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에 반해 동굴의 우상은 각각의 개인이 갇힌 틀에서 생겨나는 인식의 오류를 지칭하며, 시장의 우상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생겨나는 문제들을 설명해준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허구적인 권위에 기대는 인간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결국 베이컨은 이런 다양한 우상들을 극복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새롭고 유용한 앎을 얻고 이를 확장해나갈 수 있음을 믿었던 철학자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는 대륙의 합리론 전통을 마련한 철학자다. 베이컨(경험론)이 근대 철학의 방법론적 원리를 마련한 사람이라면, 데카르트(합리론)는 확실한 앎의 토대를 세운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데카르트는 이 목표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수학과 과학에 주목했다. 반면 감각을 통한 앎을 확실한 지식의 토대에서 배제했다. 이 부분은 앎에 이르는 과정에서 베이컨과 다른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대신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토대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 실마리를 ‘생각하는 나의 존재’로부터 찾는다. 곧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바로 이것이 첫 번째 확실한 앎이 된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확실한 나의 존재를 발명해내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의 흐름은 이후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흄은 데카르트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해 천착했지만, 방법론적으로는 경험론의 전통에 있다. 이를테면 추론이라는 실험적 방법을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시도에 적용한 것이다. 확실한 앎의 토대를 마련한 데카르트와 달리 흄은 세계에 대한 앎을 얻을 때 확실한 참이란 원리적으로 없다는 점을 증명했다. 이성의 우월성에 입각한 ‘확실한 앎’을 보장받고자 하는 것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이를 깨부수었기 때문에 흄은 ‘회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경험론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검은 스완의 사례처럼 ‘모든 스완은 하얗다’는 귀납추리의 진술이 잠정적, 확률적, 개연적으로만 참이며, 필연적으로 참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여, 세계 인식에 대한 귀납적 추론의 한계를 지적했다. 저자는 흄의 관심이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에서 시작하여, 어떤 토대 위에서 어떻게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공동체의 윤리로 나아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다만 이 책에서는 이런 내용을 소개하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 일부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했다.
데카르트와 흄의 철할 일부를 소개해 놓은 이 책에서도 앎에 대한 두 철학자의 상반된 입장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합리론(이성론)과 경험론이라는 근대 유럽의 두 흐름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이들의 철학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밀레토스 학파(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의 본령(비판의 자유와 따져 묻기)을 결합하여 그 결실을 맺기 시작한 사례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칸트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이성론과 합리론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종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칸트는 기본적으로 데카르트와 헤겔에 이르는 이성론의 계보에 있다. 따라서 칸트는 철학의 큰 두 흐름을 단순히 절충하는 입장이 아니라, 이성론의 입장에서 이성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합리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칸트가 두 근대 서양철학의 흐름을 통합했던 것은 무엇보다 인식론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인식의 기원’부터 고민했던 것이다.
이성론에서의 앎(지식)은 선험적 지식에 해당한다. 이러한 선험적 지식의 판단은 주어 안에 술어의 내용이 포함된 ‘분석 명제’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확실성은 보장받을 수 있으나 앎의 확장성에는 한계를 지닌다. 반면 경험론에서의 앎은 주어 안에 있지 않은 특성이나 성질이 첨가되어 술어에 나타나는 ‘종합 명제’로 제시된다. 이것은 감각 경험을 통한 수용으로 이루어진 앎이므로 확장성을 지니지만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흄은 앎을 얻을 때 확실한 참을 주장할 수 없으며(곧 확실한 앎은 원리상 불가능하다), 관념들의 다발인 상상에는 ‘그릇’이 없다고 언급했다. 반면 칸트는 앎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를 외부 세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각자 우리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각자의 인식이 있으며, 이 인식의 활동에는 흄과 달리 각자의 ‘틀’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 틀을 통해 들어온 것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칸트가 이야기하는 ‘틀’이란 ‘인식의 프리즘’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프리즘을 통한 가시광선의 색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칸트에 따르면 ‘(사)물자체’는 우리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지만 이 ‘틀’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인식이 내 안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의 틀이 모두 동일하지 않으면 앎의 확실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떠오른다. 칸트 역시 ‘아름다움’에 관한 인식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인정했다. 각자의 내부에 있는 저마다의 틀은 각자에게 다르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표상이 저마다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만 칸트의 ‘인식’은 보편 타당해야한다고 보았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이 개인 안에서 얻어지는 인식의 확실성에 대한 부분이 내 안에서 충돌하고 있지만 칸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갔을지가 궁금하다. 우리는 앎의 ‘확실성’을 어떻게 보장하며 이야기할 수 있을까.
(추가적인 감상과 정리)
이번 독서에서는 무엇보다 데카르트로 시작하여 흄, 칸트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철학이 낯설고 아직 그 철학의 지형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하다. 아직 이들의 삶 일부와 불과 몇 페이지에 소개된 철학을 맛보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다만 여러 철학자들의 면모를 좀 더 알게 되고, 내게 조금 더 익숙하거나 흥미를 가진 대상과 연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가령 흄의 도덕 철학에 대한 관심, 특히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의식은 스피노자의 문제의식과도 연결이 되며 견주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흄이 제시한 인상과 관념의 개념, 그리고 관념 연합의 작동 메커니즘은 칸트의 ‘표상’개념으로 이어지는데, 칸트가 언급한 ‘제시’와 ‘재현’에 대한 이해는 회화와 사진 예술로도 확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표상을 받아들이는 감성과 표상을 다듬고 이를 자발적으로 생산하는 지성의 요소는 현대의 시각 이미지에 대한 이해에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또한 저자는 칸트의 입장을 진화론적으로 해석하려는 생물학의 시도를 짧게나마 소개하는 대목에도 주목해보았다.
또 흄의 경우 자연주의자로서의 면모에 대한 설명은 아직 모호하게 다가왔다. 원리상 인간이 확실한 앎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 흄이 ‘자연 전체가 한결같다’고 주장한 앎은 어떻게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등등에 관한 내용은 추가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한편 저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소개하면서 영화 <매트릭스>를 언급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앎의 확실한 토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살펴본 진짜 삶과 우리가 (그렇다고) 확신하는 삶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우리는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흄이 제시한 관념 연합으로 이루어진 세계, 곧 상상의 세계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실체가 없는 ‘무대 없는 연극’같은 관념들의 이합집산이 이루어낸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어디까지 둘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도 제기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처럼 이번 독서에서는 철학이란 모든 앎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식으로서의 앎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모든 현상과 대상을 ‘이해’하는 앎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니체는 이 과정을 바로 네가 하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씨앗은 인식의 확실성이 외부 세계가 아닌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한 칸트의 인식론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밟고 있는 데카르트의 초상화 - 제2장에서 보여주는 이성에 입각하여 벌이는 '앎의 싸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