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탄생의 과학 - 하나의 세포가 인간이 되기까지 편견을 뒤집는 발생학 강의
최영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발생학연구를 통해 세포의 놀라운 잠재성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러한 지식은 우리의 편견을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학문적인 연구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여기에는 연구수행자의 인식의 한계, 편견이 개입될 수도 있다. 책의 처음에 언급된 수정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저자는 ‘수동적인 난자, 무기력한 난자’의 편견을 지적해주었다. 난자는 10대1일이 넘는 치열한 경쟁을 거치며, 수정을 유도하기 위해 나름 화학 신호를 열심히 내보낸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분명히 남성 위주의 현상 해석은 과학적인 사실을 계속해서 알아내고, 끊임없이 나누는 과정을 통해 그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책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저자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의 문제를 언급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저자에 따르면 배아 발달과정 초기에 인간은 남녀 생식기 어느 쪽으로도 발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곧 ‘인간에게는 모두 남성 및 여성 결정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SRY유전자’라고 하는 유전자가 성별을 결정하게 되는데, 세포가 SRY유전자를 ‘읽게’되면, 남성 결정유전자들이 차례로 활성화되고, 반대로 여성 결정 유전자들은 발현이 억제된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몸이 각자의 결정된 성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동안 세포들이 노력한다는 점이다. 쥐 실험을 통해, 성결정 유전자를 제거하니, 암컷의 난소 세포가 고환으로 변했다는 연구결과는, 이 점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와 같은 백과사전적인 책에는 남자로 살다가 어느 시기에 여성화되어버린 사람의 사례를 본 적이 잇는데, 이것이 마법이나 신의 저주가 아니라 실제로 드물지만 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식을 통해 성소수자들의 생물학적인 특징을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플라톤의 《향연》에는인간의 세 가지 형태의 원형들(남-남, 남-여, 여-여)이 등장한다. 원형 인간이 신들의 노여움 때문에 둘로 나뉘어 지금의 남자와 여자로 되었다는 이야기말이다. 그런데 생물학을 이해하면 이 신화적이고 은유적인 이야기가 단순히 상상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본다. 저자는 우리 인간은 남녀 모두의 잠재성이 있다는 것, 우리의 몸이 결정된 성을 유지하도록 평생 노력한다는 것, 그리고 내 안의 다른 성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럼 우리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물을 때, 이런 생물학적인 지식도 철학적 성찰에 분명히 영향을 줄 수 있다. 우리 인간은 두 가지 성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고 수십 억의 인간이 각자 동일한 성의 잠재성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므로 그만큼 다양한 성적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분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과연 정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생명을 어느 단계에서부터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처럼 정답이 없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점은 100% 정상 남자이거나, 100% 정상 여자라는 개념은 환상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정상 남자’와 ‘정상 여자’ 사이에 무수히 많은 다양한 양상의 성을 지닌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남성성과 여성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어느 쪽이 좀더 우세한지에 따라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말이다. 따라서 성의 문제에 있어서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는 종교의 문제도, 정책입안자의 문제도 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환상은 생물학 지식을 통해 그 부조리함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우리의 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포들이 평생 노력한다는 위의 연구는 성의 정의, 성의 유동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79면)라고 한 언급에서 나는 ‘성소수자’가 된 것이 본인들의 의지나 도덕적 타락 등의 문제가 아니며, 생명체의 다양성 메커니즘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런 다양한 ‘성소수자’의 모습들은 생명체가 다양성을 위해 마련한 기작의 한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 좀 더 있었다면하는 아쉬움은 있었으나, 기고문의 성격상 제약은 있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내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생물학적인 사실은 흥미로웠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몸의 세포들은 유전자의 정보에 따라 내 성의 발현 특징을 유지하기 위해 쉼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아가 언제는 내 몸에 어떤 이상으로 인해 성결정 유전자에 변형이 발생하면, 내가 여성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철학적인 시각에서 ‘인간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과정에도 분명히 생물학 연구의 결과를 고려해야할 것 같다. 플라톤과 같은 고대의 철학자들은 지금과 같은 생물학 지식이 없었을지라도 상당히 예민하고 명민한 관찰자였음이 분명하다. 은유적이나마 인간의 특징을 파악하고 분류하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발생학을 비롯한 생물학의 연구를 통해 우리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하게 되면 인간이 인간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편견이 영향력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형성되고 사회에 영향을 미쳐왔음을 역사기록에서 흔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편견을 바로잡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노력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도 발생학은 사람들의 편견을 바로잡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그래야한다고 믿는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하나의 세포에서 수백 조 개의 세포로 구성된 온전한 개체로 변화되어가는 현상은 우리 몸이 하나의 ‘소우주’라는 표현이 결코 진부한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사람의 세포 내에 있는 2만여 개의 유전자들이 만들어내는 소우주인 우리는 모두 경이로운 존재인 것이다. 유전자에 기록된 정보에 따라 하나의 세포가 수많은 세포로 되면서 다양한 기능이 분화하고 복잡한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배아의 분화과정에서 초기 대칭성이 어느 순간 깨어지고, 몸의 좌우 비대칭이 형성되는 기작은 상당히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특히 발생학 분야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발생 과정은 다른 동물들의 발생 과정과 크게 다를바 없으며 큰 공통점을 지닌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그러면 인간이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가. 아울러 우리가 거대한 자연이라는 우주 속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하는데 큰 기여를 하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포가 지닌 다양한 발달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생명체의 몸이 지금 이 모습대로 이루어진 것, 그리고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은 생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이 책 《탄생의 과학》은 발생학자의 지식을 일반 독자들과 나누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다만 인간 혹은 생명체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인 견해를 더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았을 것같다. 이제 과학분야의 기본 지식 없이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한다는 것은 분명 한계가 존재하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탄생의 과학》은 나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일반 독자로서 더욱 주목하게 되는 책이다.
"과학의 목표란 점진적으로 편견을 없애는 것" - 닐스 보어 - P31
"하지만 난자도 경쟁을 합니다. 그것도 아주 치열하게 말입니다. 이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경쟁이 배란 전에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 P26
"사실 우리 세포에는 성별에 관계없이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만드는 데 필요한 유전자들이 모두 존재합니다." - P77
"중요한 것은 이런 성 결정 기작이 ‘평생‘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우리 몸은 선택된 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성별에 따라 생식기 구조와 호르몬 수치가 정해진 이후에도 내 안의 다른 성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 P78
"다만 2018년, 중국에서 탄생한 세계 최초의 복제 원숭이는 인간 복제 배아의 탄생이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예고합니다." - P109
"몸 속 각종 기관들의 위치를 잡아주는 머리와 꼬리, 배와 등,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비대칭 덕분에 지금 여기, 내가 존재합니다." - P166
"두 세포가 만나 하나의 세포가 되고, 다시 이 세포가 하나의 인간으로 발달하는 과정. 셀 수 없이 많은 물질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구조들, 이곳에서 저곳으로 바쁘게 움직이거나 듬직하니 한 곳에서 지표가 되어주는 세포들, 이 모두가 정해진 규칙과 정해지지 않은 환경에 반응하여 쉴새없이 자기 몫을 해내는 시간. 이렇게 기억에 없는 기적, 내가 빚어집니다." - P1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