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의 여름 휴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오유리 옮김 / 양철북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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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을 읽으며 매우 공감했던 작가 시게마츠 기요시의 작품을 두 번째로 접한다. 이 작가의 작중 화자는 대체로 선생님이다. 그리고 선생님으로 교단에 서면서 느끼는 매우 섬세한 감정의 변화를 정확히 묘사해 낸다. 아마 선생님을 했었거나, 선생님을 가족으로 두었거나 했을 터,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고등학교 고문선생님인 유스케나 초등 선생님인 고타니는 모두 소위 말하는 좋은 선생님이다. 아이들 편에서 바라보고, 아이들을 이해하고, 강압보다는 말로 이해시키려는 선생님. 더러 옆자리의 선생님으로부터 비아냥을 듣기도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방식이다. 

  요즘 아이들 앞에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선다는 것, 많은 감정이 오가는 일임에 틀림없다. 좋은 선생님 소리 들으려면 '참아야 해.'라는 소리를 연이어 속으로 뇌까려야 하고, 때로 비겁하다 싶은 생각 들게 웃거나 동감임을 꾸며 보여야 하고, 그렇지만 그것이 거짓은 아니다. 아이들 편에 서려 노력하는 것이 압제적인 선생님보다는 낫다는 신념 또한 정직한 마음이다. 그러나 그러다보면 어느새 허수아비가 되어 있기도 한다. 

  허수아비. 이 말이 책 속에 등장하는 순간 가슴이 지긋이 저려왔다. 소위 좋은 사람들은 어느 집단에서나 허수아비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새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허수아비,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선생님, 자식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부모, 친구들에게 바보로 낙인찍혀 버리는 아이. 그런 사람들은 대개 착하다. 악독한 이는 적어도, 허수아비는 되지 않으므로.

  저마다 치열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허수아비가 되어 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가득한 책이다. 책 뒤표지에 '삶의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는 이들에게 바치는 따스한 위로와 휴식 같은 소설'이라고 되어 있는데, 읽고 나니 공감되는 말이다.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야지 하고 생각한다. 내게는 공감의 울림이 크다. 같은 시대를 살아와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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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code 2nd - Brown : 베이직코드 세컨드 -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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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분위기 좋고요. 아주 조금만 더 컸으면 어땠을까. 첫날은 냄새가 심했으나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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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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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작가들, 특히 몇몇 여성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 소름이 쪽쪽 돋을 때가 더러 있다. 이분이 간밤에 내 일기장을 훔쳐보았나 싶기도 하고, 이 책에 씌어 있는 대로, 같은 식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동질감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하고, 그렇다.

  공지영이라는 작가를 뒤로 밀쳐두고 그저 작중 등장인물인 작가만 두고 이야기한다면, 기막히게 40대의 우리를 나타내는 여자이다. 남보다 더 섬세하고, 조울증 기미조차 엿보이게 하는 발랄함과 침울함, 주저하고 갈등하면서도 과감한 결단을 내려버리는 삶의 태도 등은 정도의 문제만 있을 뿐 오롯이 우리 그대로이다.

  숱한 이데올로기와 편견 속에서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너무나 남과 다른 유일한 존재이기에 부딪히는 그 많은 삶의 편린들이 손에 잡힐 듯 전해져온다. 맞아, 맞아 손뼉을 치게도 되고, 인정할 수 밖에 없으나 얄밉기도 한 말들이 책 전체에서 물씬 물씬 우러나온다.

  애늙은이 같은 고등학생 딸아이의 입을 빌어 다양한 우리 삶을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조렇게 들쑤시는 작가의 역량에 놀라기도 하고, 반면에 너무 지당한 이야기들, 사건들이어서 새롭지 않아, 라는 말도 뇌까려가면서 그러나 끌리듯이 책을 다 읽었다.

  오늘따라 책을 다시 들추어 정확한 문장을 찾는 일이 별로 의미로워보이지 않아 매우 부정확하게 인용하자면 이런 말이 나온다. '악마에게는 과거와 미래만 있고, 천사에게는 현재만 있다.' 그러고보면 많은 시간을 우리는, 나는,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고, 이랬으면 좋았을 걸, 저랬더라면 최소한 어떻지는 않았을 걸 하며 보낸다. 그런 과거 속에서 미래를 떠올리면 참으로 암담하다. 그게 문제였던가 싶은 생각을 문득 해보았다.

  또 매우 부정확하나 이런 말도 나온다. 어느 만나기 힘든 스님을 만나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까'라고 물으니 스님 왈 '갈 때 가고, 앉을 때 앉아라.'라고 했다던가. 대부분 앉으며 설 일을 생각하고, 걸으며 다다르는 일을 생각한다고 하면서. 그렇구나 하고도 생각했다.

  책의 많은 부분은 세 번이나 이혼하고 세 번의 결혼에서 각각 성이 다른 아이를 낳은 작가의 가족을 둘러싼 상처와 치유의 과정이 차지하고 있으나 내게는 그저 그야말로 가족 이야기로 읽혔다. 이 책에서 나오듯이 가족이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가는 엄마의 행불행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니, 이혼이든 무엇이 됐든 엄마라는 사람, 그 피와 살을 나눠 가지며 태어난 이들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이야기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 애증이기 십상인 가족의 관계를 오늘 어떻게 풀어나가며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 친근감이 가장 진하게 드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제재로 삼아서 그런지, 좀 미화한 느낌도 있고, 마무리는 상투적이나, 오랜만에 친구 만나 맥주 기울이며 수다 실컷 떤 듯한 개운한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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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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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을 보며 한참 생각했다. 'a thousand splendid suns'. 

   태양은 하나라서 정관사 the를 붙이니 천 개의 해라고 하는 이 말은 우주에 널린 숱한 다른 항성들을 뜻하는 말인가? 책의 말미에 문제의 어구가 나오고, 책 소개에도 따로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제목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소개에 따르면 이 말은 17세기 유명한 페르시아 시인인 사이브에타브리지(saib-e-tabrizi)가 카불에 대해 노래한 시에서 따온 것으로 해당 시구는 다음과 같다.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었고 /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었네.”  

  그렇구나. 달도 여러 개, 해도 여러 개. 그럼 이 말은 어쩌면 각각이 우주일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가리키는 것일 지 모르겠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의 삶. 여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 책을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이 책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그저 남자의 반대쪽, 여자의 삶을 살아갈 때는 태양과 같은 찬란함은 사실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여자가 어머니가 되면 그 삶은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어머니란, 단순히 배에 씨를 품고 세상에 낳고 보듬어 키우는 일로만 되는 자리는 아니다. 미리암은 자신의 아이를 낳아 길러보지 못했으나 그 누구보다 어머니였다. 남편을 공유하는 딸 나이뻘의 라일라와 그 자식에 대해 미리암처럼 어머니다운 태도를 보인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의미다 어머니란. 고향 없는 마른 영혼들에게 쉴 곳을 제공해주는 여성 속에 숨은 거대한 힘. 마치 매일 새로 태어나는 저 찬란한 태양처럼 고루 내리쬐는 빛. 그러므로 미리암이 죽인 라시드는 남편인 한 남자를 죽인 것이 아니라, 세상에 편재하는 폭력에 내린 어머니의 분노였다.  

  읽는 내내 전쟁 속에 내몰리는 아프간의 역사와, 겹겹이 중첩되는 크고 작은 압제, 폭력. 그 여러 겹의 폭력과 압제 맨 밑바닥에 놓인 여자와 어린아이의 고단한 삶에 대해 마음이 아프면서, 한편으로는 그야말로 소설을 읽는 느낌의 무감각함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무감각함이야말로 가장 큰 장벽일 거라는 생각을 헀다. '어린아이는, 여자는, 아프간은, 중동은, 제3세계는...그래도 돼'라는 식의 온갖 형태의 폭력에 대한 무감각함. 나는 그 수많은 폭력 시스템의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아시아의 가난한 여성인 나는. 

  이 책은 진실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피와 살을 내어 자식을 보듬고 세상을 치유하는 어머니. 가슴이 복받치는 감동을 기대했으나 그보다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드는 생각. 어머니는 강하고, 강하다. 어머니가 존재하는 한 태양은 매일 재생되면서 수천 개, 수만 개로 찬란히 빛날 것이다. 그래서 지구에도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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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어요 2007-12-02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시아의 가난한 여성이라는 표현이 와닿네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여성의 마음 속에 있다는 말이겠지요.

파란흙 2007-12-02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게 이해되더군요. 두꺼운 편인데도 비교적 잘 읽힙니다. 기회 되시면 한번^^

내이름 알아내서 뭐할꺼냐... 2008-11-07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쎄요....빨리 흙에 뭍히고 싶단 생각뿐....아무 위로조차 안되는군요....


파란흙 2008-11-07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셨나...봅니다.
 
밥 말리 - 노래로 태어나 신으로 죽다
스티븐 데이비스 지음, 이경하 옮김 / 여름언덕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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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게가 도대체 뭔지, 혹은 드레드락스 헤어를 왜 하고 다니는지 일절 알지 못하는 채로 이 책을 집어들었고, 때로 지루해하며, 때로는 빨려들어가는 느낌으로, 또 때로는 밥 말리에 대한 호기심에 안달하며 507쪽을 읽어내려갔다.

  '노래로 태어나 신으로 죽다.'라고 하는 이 책의 부제에 대해 뭔지 흥! 하는 느낌으로 시작했으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나는 신이라는 단어에 대해 많은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는데, 이 인물이 신으로 죽었다는 표현에 대한 알 수 없는 공감 때문이다.

  사실 아무런 주석 없이 온갖 음악적 단어와 인물과 사건들을 남발하는 이 책은 명징하게 와 닿는 무엇은 없고, 며칠 악전고투하며 다 읽은 지금도 모르기는 매일반이다. 무슨 놈의 책이! 이런 느낌마저 들었다. 밥 말리를 경외하지 않는 일반 독자는 읽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듯한 흐름과 어조, 설명하지 않는 불친절함! 그건 마치 밥 말리가 그랬던 것과도 같다. 모호하고, 호와 불호가 뒤얽힌 상반된 감정으로 읽히며 경멸하다가 존경하다가, 끝내 사랑하게 되는...

  밥 말리는 레게의 시조라 할 만한 뮤지션이다. 불행한 역사를 지닌 가난한 자메이카, 그곳의 흑인 소녀와 중년의 백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것을 필두로 여러 번 어머니에게 버림받으며 음울하고 저항으로 가득한 음악 세계를 완성해 나간다. (어떤 의미로 아무도 그를 버리지 않았고,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이기는 해도 어린 시절을 홀로 버텨야 하는 삶은 버림받음에 다름 아니었다.)

  그의 음악은 에티오피아를 고향으로 여기는 흑인의식, 그곳 황제를 살아있는 신으로 떠받드는 라스타파리 종교, 그리고 신체발부를 훼손하지 않는 드레드락스 헤어, 심신을 고양시키는 허브(마리화나를 포함한), 삶의 즐거움에 몰입하는 현세적 가치관(그에게는 여러 여인과 자식들이 존재한다)이 응집된 일종의 영혼의 맹세이다. 물론 라스타들은 실제로 매우 금욕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고기, 소금, 어패류 같은 금기식품이나 가공식품에 오염되면 안 되는 일종의 신성하면서도 굳건한 성전처럼 생각했다.

  군살 없는 그가 고요히 무대에 서거나, 노랫말을 웅얼거리거나, 길다란 머리를 휘저으며 포효할 때면 관중들은 일시에 집단최면에 걸려 버린다. 모두가, 흑인이거나 인디언이거나 혹은 가난한 백인이거나 심지어 부유한 백인까지도 모두가 압제를 증오하고 자유를 갈망하며 세상의 부조리를 노려보게 된다. 밥 말리라는 인물 자체가 하나의 엄숙한 메시지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돌연 닥쳐온 뇌종양. 그의 죽음은 그에게 기대어 살던 그의 음악 동반자인 웨일러들은 물론 숱한 음악 향유자들에게, 세상의 모든 약자들에게 일종의 악몽이었다.

  지독히 불완전한 존재이기도 했던 밥 말리. 폭력과 광기에 휩싸이는가 하면, 더없는 자비로움으로 주변을 감싸안았고, 공포스러울 만큼 완벽한 음악의 구현에 집착했는가 하면, 신비롭기까지 한 웃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 주었던 이.

  도대체 그에 대해 뭐라 말해야 할까. 이 혼란스러운 느낌. 책 중간 중간 실린 그의 흑백사진을 몇 번이고 다시 쳐다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의 공연을 한 번만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레게며, 모든 음악에 대해 문외한이고, 밥 말리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는데 어쩐지 그에게 끌린다.

  인터넷을 뒤져 그의 노래 No Woman No Cry를 찾아서 듣는다. 그리고 concrete jungle을 블로그에 걸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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