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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릭 게코스키 지음, 차익종 옮김 / 르네상스 / 2007년 12월
평점 :
책을 읽는 동안 적잖이 행복했다. 소설이 아닌 책을 읽으며 이런 식으로 가슴을 두근거려 보기는 참 오랜만이다. 릭 게코스키. 이 저자를 나는 이 책으로 처음 알았다. 내용을 보면 책 수집가(혹은 책 사냥꾼, 혹은 희귀본 거래업자)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사람인 듯하지만, 아무래도 바다 건너의 일이어서일지, 혹은 나의 엽렵치 못함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처음 만난 저자이고, 그런데 그의 책은 그야말로 흥미로운 교양의 물결이었다.
20세기 문제작, 대작, 걸작과 그 작가들에 얽힌 이야기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지니고 차례차례 소개되고 있는데, 그 기막힌 우연이나 사연들은 그야말로 한 편의 소설이다. 특히 <호밀밭의 파수꾼>의 샐린저는 지독한 은둔병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람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릭과의 인연도 송사까지 가는 지독한 것이었다. 결국 책에 사인해 달라는 요구를 끝까지 거절해 버린 당찬 샐린저. 멋있었다.
역시 관심 가졌던 책 <파리대왕>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다. 도대체 처음 이 책의 제목이 <내부의 낯선 자들>, <악몽의 섬>일 뻔 했다니! 게다가 출판하기 위해 그처럼 칼질을 당했다니!
그나저나 초판본이라든지, 작가의 헌사가 적힌 책, 친필원고 등 특별한 책들이 사고 팔리고 하는 과정은 매우 색다른 느낌이었다. 아! 이런 비즈니스가 이처럼 숨가쁘게 이루어지고 있구나 하는.. 갑자기 올해 이런저런 행사로 만나 뵌 작가들, 그들에게서 받은 사인본들이 매우 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저 세계적인 작가들의 번역본보다 우리 작가들의 책에 그들의 헌사가 적혀 있다면 그 또한 못지 않게 가치로울 수 있겠구나 싶었고, 황석영, 은희경, 백가흠, 한강 등의 작가들이 내 이름을 써 준 책들을 새삼스럽게 꺼내 보았다. 참, 외국인이지만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사인이 된 <오래된 미래>도 있구나. 내친 김에 김훈 작가의 100만부 판매 기념 <칼의 노래> 소장본을 질러버렸다. 이거야말로 나중에 숨가쁜 그 비즈니스의 대상이 될 지도 모른다고 외치면서.
얼마 전 일 때문에 너무 오래 되어 글자마저 희미해지기 시작하는 영국판 <플랜더스의 개>를 들춰 본 일이 있었는데, 그때 묘하게 설랬던 느낌이 바로 이 책을 만나기 위한 복선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우 흥미로워 할 재미있는 책이다. 책의 제목에서 '아주 특별한'이란 말이 '책'을 꾸미는 것일까 '이력서'를 꾸미는 것일까 읽기 전에 고민했었는데, 둘 다를 꾸민다고 해야 할 듯하다. 그만큼 특별한 책들, 특별한 이력서들이 실려 있다. 릭 게코스키가 책에 대한 진지함과 비례해서 매우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난 수완가라는 점이 이 책을 살짝 가볍게도 하지만 그래서 재미는 더해진 것 같다.
작품에 대해 혹평을 듣거나 거절당하기 일쑤인 많은 작가들이 이 책을 읽고 힘을 냈으면 좋겠다. 대작, 걸작, 문제작도 수 없이 그런 취급을 당하다가 어느 날 짠 하고 뜨는 일이 많았더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