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 이전 중국이 쓴 한국사 - 중국 24正史에 기록된 '솔직한' 한국사
이기훈 지음 / 주류성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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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제목 때문에 선택한 책인데 새해 벽두부터 이런 야사류를 읽다니...

제일 싫어하는 책이 이런 환빠스러운 비전공자의 뇌피셜 같은 책인데 끝까지 읽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은 완독했다.

저자 약력을 반드시 확인하고 책을 골라야겠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해당 분야에 대해 논문이 없는 사람이라면 말 그대로 아마추어 작가에 불과하므로 기존 역사학계의 정론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 읽을 때는 쉽게 쓰여 있고 고대 한반도의 기원에 대해 중국 역사서를 근거로 설명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발음 연관성에 근거를 둬서 설명할 때부터 이상하더니만 급기야는 자기만의 썰을 계속 풀어낸다.

기자조선의 실체부터 기존 통설과 맞지 않다.

상나라 멸망 후 기원전 11세기에 그 유민들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넘어와 단군조선을 몰아내고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단군조선은 말그대로 설화이므로 고고학적인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역사적으로 그나마 고조선의 증거가 나온 것은 기원전 7세기로 본다.

저자의 주장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상나라를 세운 동이족은 중원을 지배한 화하족과는 다른 종족으로 이들의 후예가 만주와 한반도, 일본까지 퍼졌다는 것이다.

가장 황당한 주장은 우리의 조상이 동이족이므로 그들이 이룬 고대 문화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처하는 역발상인가?

청나라도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제일 어이없었던 주장이, 모용선비족의 마지막 나라인 북연이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이 고구려로 넘어갔는데 장수왕이 이들을 내치자 한반도로 건너와 백제와 신라 왕실, 더 나아가 일본까지 장악했다는 것이다.

흉노가 신라 왕실의 조상이라는 주장은 들어봤어도 선비족 주장은 처음이라 황당함을 넘어 신선하기까지 했다.

법흥왕이 모용선비족의 일파였다는 것이다.

울진봉평비에 김씨가 아닌 모즉지라고 쓰여 있는 것을 근거로 든다.

학계에 따르면 신라에 성씨가 도입된 것은 진흥왕 때이다.

모즉지는 성이 모씨 이름이 즉 혹은 진이 아니라 그냥 이름이다.

아버지 지증왕의 이름도 냉수리비에 따르면 지도로이다.

흉노족인 김일제가 신나라 멸망 후 한반도로 이주한 게 바로 김알지라는 것도 역사적 근거가 없다.

문무왕 비문에서 우리 조상 운운한 것은 선조의 기원을 먼 옛날의 유명인으로부터 찾는 숭조 사업의 일환으로 본다.

그렇게 따지면 고려 왕건의 조상은 <편년통록>에 따라 당나라 황제 숙종인가?

개로왕이 고구려에 죽임을 당한 후 아들(혹은 형제)인 곤지왕이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이 되어 일본도 선비족에게 장악됐다고 주장한다.

그 아들인 동성왕이 백제로 귀국하여 자신들을 멸망시킨 북위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남조 사서에 나온 내용이지만 당시 정황으로 봤을 때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도 완전히 멸망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바다 건너 북위를 어떻게 공격하겠는가?

아마도 위로, 즉 위나라 오랑캐라고 칭한 것이 사실은 고구려인데, 남조측에서 북위로 잘못 알아들었을 거라는 해석이 그나마 납득이 된다.

근초고왕 때 요서 경략 얘기도 나오고 일본서기의 어떤 구절을 인용해 백제가 대만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에게 영향력을 끼쳤다는 주장도 펼친다.

369년에 목라근자 등이 일본측 장군들과 함께 한반도 남부 지역에 원정하여 복속시켰다고 <일본서기>에 나오지만, 고고학적으로는 여전히 영산강 유역에 재지세력들의 고분군이 등장해 학자들 사이에서 과연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복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이런 상황에서 전연이 확고하게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던 요서 지역을 어떻게 경략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저자는 전연에 의해 북부여가 망한 후 그 유민이 백제로 내려왔는데 그가 바로 근초고왕이고 자신의 땅을 되찾기 위해 요서를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단지 사료에 나온 몇 글자를 자기식으로 해석해서 말이다.

저자에게 사료비판을 하라고 얘기하고 싶다.

역사서에 나온 내용도 고고학적으로 입증이 돼야 비로소 정론으로 인정이 된다.

최근에 읽은 사학자들의 학술대회 발표글들과 너무나 비교된다.

아마추어 작가이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자료를 같이 비교하기 어려울 것 같기는 하다.

그렇다면 기존의 정론에 반대되는 이런 주장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명백히 역사서에 나온 내용인데도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아 학자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논쟁이 많은가.



<인상깊은 구절>

63p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이 중국 군현인 현도군, 대방군, 낙랑군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성장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고구려는 만주지역 현도군의 중심지 중 한 부분이었고, 백제는 시조가 경기도 지역에 있던 대방군 출신 사람이며, 신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평양지역 낙랑인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을 중국역사로 간주하고 한국역사에서 구분하면 안 될 것입니다.

68p

한국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풍습들이 한반도에 오랫동안 살던 사람들의 고유 풍습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에 살던 빗살무늬를 사용하던 원주민들은 농경보다는 주로 해변에서 채집 생활을 영위하며 살았고 그 수가 매우 적었습니다. 이에 비해 국가를 조직하고 청동기, 철기 문명을 이끌 만큼 문명화된 사람들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서서히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유물로 확인됩니다. 따라서 고대 한국의 발달된 문명은 한반도 원주민 고유의 풍습이라기보다는 청동기와 철기를 일찍부터 개발하고 사용한 발해만 유역 동이문명의 영향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됩니다.

109p

현도군은 중국에서 고조선을 정복하고 강제로 설치한 행정구역이었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긴 현지 사람들의 반발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반발하던 사람들 중 북쪽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현도군의 중심지인 고구려현을 한나라로부터 빼앗고 고구려의 시조가 됩니다. 고구려가 한나라 현도군을 몰아내고 건국해서 그런지 고구려는 한나라와 시종 원수처럼 싸우는데요, 결국 220년 한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백 년간 그 싸움이 이어지게 됩니다.

176p

"북적은 중국과 아주 가까워서 변방 침입이 예로부터 있어 왔다. 동이는 영해 밖에 떨어져 있어서 분경을 일으켰다는 것은 듣기 드문 일이다. 이는 형세상 그러할 뿐만 아니라 아마 타고난 성격도 그러한 듯 하다. 

 우리 태종 문황제가 친히 융차를 몰고 동으로 고구려를 정벌한 것도 성공은 하였으나 잃은 바가 또한 많았다. 개선하여 돌아오던 날에 좌우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짐에게 위징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이번의 정행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출사를 후회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찌하여서일까? 이적의 나라란 돌밭과 같아서 얻어도 보탬이 안되고, 잃어버린들 무엇이 손상될 것인가? 반드시 허명을 힘써 추구하므로 수고로움에나 쓸모가 있을 뿐이다. 다만 마땅히 문덕을 닦아서 이를 오게 하고, 성교를 입혀서 이를 복종시키며, 신실한 신하를 가려 이를 무마하고, 변경의 수비를 단속하여 방어해야 한다. 그리고 통역을 거쳐서 조정에 오게 하고, 바다를 건너서 들어와 조공을 바치게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동이의 사람과 북적의 풍속은 <주관>에 상고해 보면 바로 '만복(중국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 일컬었다. 얻지 않아도 괜찮은데, 얻어서는 무엇하겠는가? 그저 회유에 힘써야 할 뿐이니, 이것을 '기속(굴레로 묶어둠)'이라 한다."

(구당서에서 태종의 고구려 정벌에 대해 사관이 평한 부분이다. 어쩜 이렇게 현실적이고 냉철하게 판단하는지 놀랍다. 중국 사서는 그저 당위적인 좋은 말이나 늘어 놓은 줄 알았는데 이런 날카로운 비평이 정사의 힘인 듯하다. 중국이 이적들을 조공체제 안으로 포용하려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정말로 실리적인 민족이었던 듯하다. 한반도의 여러 왕조들 역시 거대한 중국 제국과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 정확히 잘 알고 있었고 사대 외교를 통해 국체를 보존했던 까닭을 알겠다. 역시 우리 조상들이 바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202p

진왕은 경상도 지역에 있던 진한의 왕을 항상 마한 사람에게 맡겼다고 하는데, 이는 진왕이 작은 진한의 왕이 아니라 삼한을 아우르는 진국의 왕으로서, 마한을 중심으로 한 '봉건국가 황제'의 위치에 있었음을 뜻한다고 봅니다.

-> 삼한은 국가 체제조차 정립되지 않은 일종의 연맹체 수준으로 보는데 봉건국가의 황제라니! 논리적 비약이 너무 심하다.

244p

5,6세기 백제는 활발한 해양국가로서 동남아시아 각 지역과 교류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백제는 일본이나 중국보다 동남아시아 지역 통제권이 더 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 기록처럼 대만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통제했다면 백제가 대만을 장악한 것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논리적 비약이 아마추어 사학자들의 특성인 것 같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사료의 몇 글자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심지어 대만을 장악했다니, 대만인들이 들으면 뒤로 넘어갈 것 같다)

272p

'왜'는 사실 여러 정황상 만주와 한반도에 폭넓게 살고 있던 한반도 원주민인 부여족(예족) 아닐까 추정됩니다. 기원전 3세기 이후 한반도는 중국의 대혼란으로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서 한반도와 만주로 이주 합니다. 대표적으로 기자조선을 비롯한 발해만 북부 세력이 직접적으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으로 밀려오는데요, 이들에 의해 점차 세력을 잃은 한반도 원주민인 부여(예)족 사람들 중 일부가 일본으로 간 것으 보입니다. 일본의 역사는 사실상 이 시기(기원전 3세기)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시황의 폭정과 혼란기에 한반도로 진나라 사람들이 대거 이주했고 그들이 진한을 세웠다는 학설은 들어본 적이 있다. 혹은 고조선 유민들이 내려와 세운 나라가 신라라고도 한다. 그런데 한반도 원주민을 부여족이라 하는 부분도 증거가 없고 특히 왜로 이주했다는 주장은 그저 "정황상"이라고만 할 뿐 아무런 근거를 밝히지 않아 신뢰할 수가 없다. 어떤 학자는 백제가 과연 부여와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라고 했다.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다는 것에 대항하여 백제도 부여 출자 의식을 강조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가 뒷받침 되어야 비로소 의미있는 학설이라 할 것이다.)

277p

왜에서 한반도 도래인의 영향이 점차 커지고 있을 때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압박을 크게 받습니다. 이로 인해 두 나라는 왜에 의지하여 고구려를 막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 인해 백제에서는 왕이 왜에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내고, 신라는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게 됩니다. 당시의 혼란한 국제성세를 '광개토대왕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상황 아래 왜왕은 자신들이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로부터 지켜주는 종주국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왜왕은 백제와 신라까지 포함하는 왕이라고 중국에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온대로 왜가 신라와 백제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인가? 저자는 한반도에서 넘어간 도래인이 일본을 지배했기 때문에 왜도 결국은 한반도인과 다름없다는 논리적 비약으로 넘어간다. 동북공정의 새로운 형태인가?)

288p

한반도 남부에 왜계 무덤과 부장품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5세기 말 왜를 정복한 백제계 선비세력(곤지 세력)이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왜에서 한반도 남부로 왜군을 파견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 시기 고구려에 멸망한 한성백제는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여 왜의 도움으로 국가를 회복하고 중국 북위를 공격하는데, 백제가 고구려가 아닌 북위를 공격하는 이유는 백제계 선비족들(모용계 북연세력)이 자신들을 멸망시킨 탁발선비의 나라 북위에 대한 보복을 하는 동시에, 고구려를 한반도 남부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공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곤지가 왜를 정복했다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곤지가 곧 모용 선비라고 한다. 왜 이런 논리적 비약을 일삼는 것일까? 저자는 백제 왕실이 왜를 지배했기 때문에 왜가 곧 백제이고 모국을 다시 세우기 위해 군사를 파견했다는 것인데, 뒤집어 보면 왜가 한반도 남부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임나일본부 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북위는 도대체 어떻게 공격을 했다는 것인지? 고구려를 넘어 북위까지 진출했다고?)


<오류>

138p

이이모 임금(고국천왕)은 아들이 없었는데, 권노부 지역의 여자와 몰래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고~

-> 권노부가 아니라 관나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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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20-01-02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 책을 고를때 작가, 출판사등을 고려해서 고르는데, 주류성 출판사는 한번씩 요런 요상한 책을 내더군요. 그래서 주류성 출판사의 도서는 조심스럽게 고를때가 많답니다. 읽을만한 책도 있기도 해서 아예 무시할 수도 없고...

고고학 연구도 내는 것 같은데....도대체 어떤 흐름의 출판 방향인 건지 감이 안오는 경우네요.-.-;;;

marine 2020-01-03 09:24   좋아요 0 | URL
신년에 인사드리네요. 한동안 너무 어려운 학술서 읽다가 표지 디자인도 예쁘고 주제도 좋아서 기대하고 읽었는데 시간 아까웠어요. 저자의 전작이 <동이 한국사>더라구요. 이 분은 상나라 유민이 세운 나라가 바로 고조선, 부여, 삼한, 일본이기 때문에 다 우리 문화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선비족도 동이족이므로 우리 민족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새로운 대처 방안인가 싶었어요.
 

하루에 200페이지씩 읽기, 주말에는 300페이지, 주 4권 목표!

(200페이지씩 읽기가 매우 힘들긴 하다 ㅜㅜ)

1주 평균 5권 읽었으니 목표 달성이다.

독서인의 기본 조건이 恒産 이라는 구절이 생각나는 시절이다.

근심 걱정 없이 책만 을 수 있는 시간은 죽어서 천국이나 가면 가능하려나?

왜 천국이 거대한 도서관일 거라 했을지 정말로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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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읽다 - 꽃의 인문학 ; 역사와 생태, 그 아름다움과 쓸모에 관하여
스티븐 부크먼 지음, 박인용 옮김 / 반니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표지가 참 예쁜 책이다.

과학적인 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고 인문학적인 꽃이 궁금했다.
인간은 왜 원예를 하게 되었나, 원예의 역사, 원예가 인간의 삶에 미친 영향, 뭐 이런 것들?
앞부분의 꽃이라는 식물의 탄생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어렵기도 하고 약간 지루해서 많이 건너 뛰었고 뒷쪽의 꽃 재배에 관한 이야기부터 흥미롭게 읽었다.
간단히 말해 꽃이 피는 이유는 스스로 종족번식을 못하기 때문에 수분을 매개해 줄 동물들을 유혹하기 위해서다.
꿀은 벌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꽃가루에 단백질이 풍부해 박쥐나 곤충, 새들도 꽃에서 많은 영양분을 섭취하고 꽃가루가가 다리에 묻어 수분을 시킨다고 한다.
꽃에 영양가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꽃은 보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데 금방 시들어 버려서 꽃꽃이를 못하겠다.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다고 할까?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본능은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있어 왔고 품종 개량을 통해 현대의 원예 산업은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꽃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우연히 안면도에서 열리는 꽃 박람회에 다녀온 후 그 아름다움에 시각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예술적 성향은 정말로 오래된 본능인 듯하다.
가지에서 꽃이 꺾였는데도 수일에 걸쳐 외국에서 배송돼서 소비자의 집까지 배달되는데도 여전히 싱싱한 걸 보면 오히려 꽃의 생명력이 길다고 해야 할까.
유전자조작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들이 많은데 사실 품종개량의 역사는 매우 오래 됐고 저자에 따르면 자연에서도 무수한 변종들이 일어나 진화홰 왔다고 한다.


<인상깊은 구절>

112p

우리는 필요나 호기심 때문에, 그리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가꾸려는 천성에 따라 식물육종의 경우 거의 신의 경지에 이르는 권능으로 수분을 매개하고 있다. 7000년 전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나라들에서 대추야자로부터 시작되고 곡물의 경우에는 그보다 더 오래된, 농작물의 꽃과 관련된 우리의 '뚜쟁이' 재능은 지금까지도 계승되고 있으며, 씨를 비축하는 농부들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118p

농경문화권 중에도 집단 전체가 배가 부르지 않으면 유원지를 만들지 않는 사회가 있다. 이 부족들은 아마도 하루 5000 칼로리나 먹었을 것이다. 오늘날 '이상적인' 섭취로 생각되는 하루 2000 칼로리를 소비하는 것은 대체로 소파에 앉아 감자칩을 먹는 사회-흉포한 대형 동물을 쫓아가 죽이는 등의 행위가 없는-가 바탕이 돼 있다. 사람들은 잘 먹고 곳간 가득한 경우가 아니면 아름답지만 불필요한 사치품(꽃)에 한정된 농경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비옥한 땅은 분재에 낭비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원이었다.

125p

아시아의 정원은 서양문명의 정원에 비해 사색적이며, 크고 두드러지는 꽃에 덜 의지해 꽃이나 열매가 없는 속씨식물도 아름답게 여기며 잎이나 줄기도 똑같이 관상의 대상이 된다. 그들이 꽃이 피지 않는 요소를 활용한다는 것은 특히 장식적인 암석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알 수 있다.

 란쑤 정원은 그 당시 한 부유한 가정의 정신적 이상향을 보여준다. 세부적인 데까지 능숙하게 설계된 이런 위안처가 있음으로써 가족은 일상생활의 근심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145p

현대에 들어서는 디자인이 더욱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많은 정원에서 원예 전문가를 다수 고용할 여력이 없다는 게 한 가지 이유이다. 또한 자신의 토지를 관리할 수 없는 '노인'을 위해 돈을 받고 잔디를 깎거나 가지치기를 해주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일벌레나 사커맘 등 집이나 정원을 비워두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

166p

20세기 장의사산업에 방부처리가 자리하기 전까지는 향기 짙은 흰 백합이나 오리엔탈백합을 교배한 잡종꽃들로 만든 화환과 부케가 시신의 부패로 인한 냄새를 가려주었다. 타오르는 촛불과 함께 꽃이 환기장치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빅토리아시대의 장례행렬은 장엄하면서 고비용의 사교행사였다. 

182p

최근까지 도시 거주자들에게 꽃은 대체로 사치스럽고 값비싼 물품이었다. 수명이 짧고 연약해 며칠씩 장거리 운송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꽃은 식품처럼 소중하게 여겨지지는 않아도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즐겁게 함으로써 우리의 자연과 생활환경에 부가가치를 더한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절화용 꽃재배나 실내장식용으로 화단에서 재배하는 일은 부유한 상인이나 왕족을 제외하고는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192p

식물육종 기법에 대체로 무지한 대중들은 좋은 취지의 환경단체들이 우리의 식품공급에 표명하는 우려에 겁을 먹는. 오늘날 가공식품 회사들은 공개토론, 가두집회, 과격한 항의 등이 불러일으킨 유전자조작생물과 관련된 악령을 자신들의 가공식품이나 상표에서 털어내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많은 사람이 식물의 유전체를 바꾸기 위해 새로운 방법(유전자조작생물이나 유전자총)과 과거의 방법(이종교해만 꽃의 잡종이나 돌연변이를 이용한 육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공포심은 정원용 화초의 잡종을 만든 루서 버뱅크에 대해 목사가 반대하면서 혐오감을 표명했던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196p

푸른색 꽃은 자연 속에 그리 흔하지 않으며, 대부분 정원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푸른색 때문에 제비고깔, 물망초, 제라늄, 초롱꽃, 나팔꽃 등이 마당에 피는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

200p

꽃집이나 묘목원에서 구입한 꽃들은 수분매개동물을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제대로 보상해주는지를 확인하는 게 어렵다. 인기 높은 여러 변종들은 향기가 줄어들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다. 절화수명을 늘리고자 품종을 개량할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향기인 경우가 많다. 향기분자를 만들어내려면 물질대사 측면에서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향기가 전혀 없거나 적은 꽃이 식물이든 절화든간에 더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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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큐레이터, 예술가를 말하다 - 큐레이터 캐서린 쿠가 사랑한 20세기 미술의 영웅들
캐서린 쿠 지음, 에이비스 버먼 엮음, 김영준 옮김 / 아트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400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분량이라 지루할까 걱정했는데 예술가 개인에 포커스를 맞춘 책이라 그런지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번역도 비교적 매끄럽고 본격적인 미학서가 아니라 그런지 훨씬 쉽게 다가온다.

사실 가까이서 예술가들을 바라본 저자의 가벼운 인상평이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그런데 정말 수준높고 밀도있는 평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맨 앞부분에 자서전을 미처 마무리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저자를 위해 그를 가까이서 본 후배가 그녀의 일생을 정리해 준 부분이 아주 매력적이다.

본인이 다 완성했다면 자신에 대한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전부 뺏을 것이다.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장애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거의 안 나온다.

어설픈 페미니즘에 관한 담론도 없고 정말 그녀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잘 아는 분야인 현대 미술이 온전히 예술계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최우선시 했던 듯하다.

예술가의 성별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16년 동안 큐레이터로 일했던 시카고 미술관 관장과의 부적절한 사이에 대한 후배의 조심스러운 언급은 꽤나 흥미로웠다.

애 딸린 이혼남 사업가와 결혼했으나 당연히 이렇게 야망이 넘치는 여인이 얌전하게 집안에서 현모양처로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가정적인 사람이 되는 데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다는 고백이 내 심리상태와 비슷해서 그런지 너무나 와닿았다.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가들과 어울리면서도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고 어찌 보면 너무나 겸손한 느낌마저 주는 저자의 문체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이렇게나 인터뷰이를 잘 이해하고 그가 가진 사상에 대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면서도 날카로운 비평을 가하는 평전을 근래에 잘 못 본 것 같다.

다시금 느낀 바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사회와 내적인 인정의 욕구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단순히 재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최고가 되기 위한 강렬한 욕망이 있었기에 그 어려운 일, 불멸의 명성을 얻은 듯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단순히 그들의 엄청난 재능에만 놀라는 게 아니라,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그 강렬한 욕망과 의지, 창작욕 같은 심리 상태에 훨씬 더 감동을 받았다.

저자가 이런 부분을 참 잘 묘사하고 있다.

은둔형 예술가도 있고 사회적 명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도 있고 참 인간의 특성은 다양한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강렬한 감동과 자극을 준다는 점에서, 또 그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모두 다 특별하고 위대하다.

오랜만에 정말 좋은 평전을 읽어 기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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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의 통신 - 금석문으로 한국 고대사 읽기
한국역사연구회고대사분과 엮음 / 푸른역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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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의 통신>이 무슨 내용인가 했더니만, 금석문을 통해 그려보는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내용이다.

<금석문으로 백제를 읽다>와 비슷한 포맷의 책이고, 비단 백제 뿐 아니라 고구려, 신라, 발해까지 범위를 넓혀서 여러 학자들이 한 챕터씩 설명한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나, 미륵사의 금제사리봉안기 등이 아직 발견되기 전에 나온 책이라 아쉽다.

흥미롭게 잘 읽었다.

모두루묘지나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 해인사 묘길상탑기 등은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안악 3호분인 동수묘의 주인공이 고국원왕인가 중국에서 귀화한 동수인가 하는 점에서 저자는 동수묘라고 분명하게 단언하여 궁금증이 좀 풀렸다.

다음 챕터에 바로 나온 유주자사 진 묘지에 쓰여 있는 수많은 관직명을, 실제로 그 구역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교치, 즉 행정구역의 주민들이 타지로 이동하면서 당시 군현명을 옮기는 관행으로 설명한 점이 신선했다.

반면 광개토왕릉비 편에서는 여전히 일본 변조설을 마치 정설인 양 설명해서 의아했다.

이미 일본인 탁본 이전에 원본 탁본이 확실히 나온 마당에 애매하게 변조설도 있다더라, 라고 무게를 실어주는 건 이해가 안 간다.

고구려적 세계관에 의거해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삼으려 했던 왜를 광개토왕이 물리쳤다고 업적을 과시하는 의미로 쓰여졌다는 주장이 합리적으로 들린다.

신라가 혼란에 휩싸인 9세 말에 해인사를 지키다 죽은 승병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묘길상탑을 세우고 최치원에게 그 과정을 쓰게 한 탑기에 관한 챕터도 흥미로웠다.

왜 절이 초적들의 공격 대상이었을까?

신라가 지방 반란에 의해 대농장 경영이 어려워지자 귀족들은 이름 높은 스님들이 있는 절에 시주를 많이 했고 초적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자 승병들이 절을 수호하는 과정에서 인명피해가 많았던 모양이다.

일본에서는 승병들이 난를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봤는데 우리 역사책에서는 처음 접한 얘기라 신기하다.




<인상깊은 구절>

49p

길림 방면의 북부여 지역에는 본래 부여가 자리잡고 있었다. 부여는 285년 모용부의 침공을 받은 이후 급격히 쇠약해졌지만, 그 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넓고 비옥한 평원을 배경으로 기원전부터 두각을 나타내, 기원전후에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고구려나 백제 왕실이 부여에서 유래하였다고 내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 3세기 중반 고구려 제천 행사의 명칭을 '동맹'이라 하여 부여 시조인 '동명'의 이름을 따온 데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왕실은 부여 방면에서 출자하였다.

 그렇지만 고구려와 부여는 2세기 초반에 이미 적대관계로 돌변해 있었다.

118p

안악3호분 벽화는 4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이 확실하지만, 당시 고구려 사회에서는 낯선 기법의 장의미술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덤 형태 역시 돌무덤이 중심인 고구려 고유의 묘제와는 거리가 있는 돌방무덤이며, 무덤 구조도 이후 고구려에서 유행하는 돌방무덤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회랑식이다. 더구나 안악 3호분은 고구려가 북쪽으로 올라오는 백제와 맞부딪쳐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시기에 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악 지역에 축조되었다. 낙랑, 대방 지역을 안정감 있게 점령지배하지 못하던 357년 전후에 고구려는 정말 대방의 옛 땅 한가운데에 왕릉을 만들었을까

140p

13군 75현으로 구성되었다는 유주 관련 묵서명의 내용도 사실이나 허구 가운데 하나로 단정짓기보다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교치'라는 형태로 흔히 나타나는 실제 영역과 관념의 영역을 조합시키는 태도를 염두에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남북 왕조들이 상대국 영역까지 포함해 반 허구, 반 실제를 바탕으로 행정체제를 짰던 사실도 참고할 수 있다.

155p

빈은 죽은 이를 추모하는 기간이다. 각처에서 조문을 받기도 하며, 후계자가 차기 국왕으로 등극하는 과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마도 선왕의 위엄을 빌어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기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254p

온조왕이 건국한 뒤부터 700여 년 동안 존속하였던 백제에서 큰 세력을 떨친 부여씨와 대성8족 성씨는 오늘날 별로 찾아볼 수 없고, 대신 신라 지배층이었던 김씨, 박씨와 조선 왕조 이씨가 한국인의 다수를 차지한다. 이는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의 옛 지배층이 통일신라의 최고 지배층으로 편입 성장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286p

백제에서 건너온 기술자만으로 사찰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에 있는 토착 토기 공인이나 석공 등도 직, 간접적으로 동원되었다는 것이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백제에서 박사 칭호는 특정한 기술을 가진 전문 장인에게 주는 것으로, 사비 시기에 기술공을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와박사는 6세기 후반에 기와를 전문으로 생산하던 기와 공인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600년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생산된 인각와는 이렇듯 기와를 전문으로 생산하던 집단이 분업화와 전문화, 분지화되면서 나타난 것이다.  국가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일정한 노동의 대가를 확보하거나 자신의 노동을 검증받기 위해서 집단 명칭이나 부호를 찍은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백제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기와만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기와 가마터가 발견되지 않아, 기와 생산이 전문화와 분업화되는 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321p

670년 웅진, 671년 사비를 장악하면서 자신을 얻은 신라는 673년 백제인을 회유하는 방책으로 그들에게 신라 경관과 외관의 관등을 수여하였다. 백제 지배층을 우대하여 백제 유민들이 갖고 있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였다. 674년 조성된 아미타불비상에 백제 유민들의 신라 관등이 나오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였다.

330p

발해가 고구려를 잇고 있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한국과 달리, 중국과 러시아는 발해를 고구려와 상관없는 말갈계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발해를 속말말갈족이 중심이 된 당나라의 지방 봉건 정권으로 잘라 말하고 있다.

 이렇게 발해사를 놓고 여러 나라가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것은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출신에 대한 애매한 기록 때문이기도 하다.

360p

왜 불교 사원이 도적들의 습격 대상이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약탈하거나 훔칠 물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의 최승로는 성종에게 올린 건의문에서 사원의 사치를 언급하던 중에 "신라 말기에 불경과 불상에 모두 금은을 쓰고 사치가 지나쳐서 끝내 멸망했으며, 장사치가 불상을 훔쳐와서 부수어 팔아먹으며 살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사원은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던 만큼, 굶주린 백성들이 도적이 되어 곡식을 얻을 목적으로 사원을 습격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신라 말의 금석문들에서 왕실이나 귀족, 또는 지방 부호들이 사원에 토지를 시주한 사실은 흔히 확인된다.

 농업 사회에서 부의 최대 원천이 토지였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9세기 후반에 해인사가 토지를 집중적으로 확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자료가 있다. <해인사전권>, 즉 해인사의 토지문서가 그것이다.

365p

해인사가 왕족, 귀족에서 사들인 토지들은 매매의 형식을 빈 사실상의 시주가 많지 않았나 짐작된다. 집권력의 약화와 도적의 봉기로 인하여 멀리 떨어진 지방의 대토지를 경영할 능력이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방의 사원들은 주변의 대토지를 경영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성주사의 낭혜화상처럼 종교적 신망을 얻고 있었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9세기 말로 접어들면 초적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신라 국가의 지배체제를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킨 이들이었다는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신라 중앙정부의 무기력함을 대신하여 일정한 지역을 거점으로 지배권을 확립한 자들 중 성주, 장군을 칭하며 더 많은 세력을 규합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우리가 흔히 '호족'이라 부르는 세력은 이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한편, 이들과 달리 처음에는 일정한 거점이 없이 여러 곳을 휩쓸고 다니며 세를 규합하던 무리들도 있었다. 궁예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런 무리들의 일부는 초적과 같은 수준에서 출발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직을 갖추고 활동 반경이 넓어질수록 이전과 같은 약탈자적 성격을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지방 사회에 토착한 부호들을 보호하는 역할까지 자처하지 않으면 장기적인 지지를 끌어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원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일정한 조직체계를 갖춘 뒤에는 사원의 권위를 배경으로 삼는 것이 안정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오류>

95p

천전리 암각화 아랫부분에는 훨씬 훗날 신라 화랑들이 쓴 낙서가 가득하다. 신라 법흥왕이 다녀갔다는 낙서도 보인다.

-> 법흥왕이 아니라 동생인 사부지 갈문왕이 다녀가고, 훗날 부인인 지소태후와 아들 진흥왕, 그리고 법흥왕의 왕비가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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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20-01-02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금석문으로 백제를 읽다>보다는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첫번째 꼭지의 내용은 지금의 상식으로는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