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부터의 통신 - 금석문으로 한국 고대사 읽기
한국역사연구회고대사분과 엮음 / 푸른역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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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의 통신>이 무슨 내용인가 했더니만, 금석문을 통해 그려보는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내용이다.

<금석문으로 백제를 읽다>와 비슷한 포맷의 책이고, 비단 백제 뿐 아니라 고구려, 신라, 발해까지 범위를 넓혀서 여러 학자들이 한 챕터씩 설명한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나, 미륵사의 금제사리봉안기 등이 아직 발견되기 전에 나온 책이라 아쉽다.

흥미롭게 잘 읽었다.

모두루묘지나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 해인사 묘길상탑기 등은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안악 3호분인 동수묘의 주인공이 고국원왕인가 중국에서 귀화한 동수인가 하는 점에서 저자는 동수묘라고 분명하게 단언하여 궁금증이 좀 풀렸다.

다음 챕터에 바로 나온 유주자사 진 묘지에 쓰여 있는 수많은 관직명을, 실제로 그 구역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교치, 즉 행정구역의 주민들이 타지로 이동하면서 당시 군현명을 옮기는 관행으로 설명한 점이 신선했다.

반면 광개토왕릉비 편에서는 여전히 일본 변조설을 마치 정설인 양 설명해서 의아했다.

이미 일본인 탁본 이전에 원본 탁본이 확실히 나온 마당에 애매하게 변조설도 있다더라, 라고 무게를 실어주는 건 이해가 안 간다.

고구려적 세계관에 의거해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삼으려 했던 왜를 광개토왕이 물리쳤다고 업적을 과시하는 의미로 쓰여졌다는 주장이 합리적으로 들린다.

신라가 혼란에 휩싸인 9세 말에 해인사를 지키다 죽은 승병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묘길상탑을 세우고 최치원에게 그 과정을 쓰게 한 탑기에 관한 챕터도 흥미로웠다.

왜 절이 초적들의 공격 대상이었을까?

신라가 지방 반란에 의해 대농장 경영이 어려워지자 귀족들은 이름 높은 스님들이 있는 절에 시주를 많이 했고 초적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자 승병들이 절을 수호하는 과정에서 인명피해가 많았던 모양이다.

일본에서는 승병들이 난를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봤는데 우리 역사책에서는 처음 접한 얘기라 신기하다.




<인상깊은 구절>

49p

길림 방면의 북부여 지역에는 본래 부여가 자리잡고 있었다. 부여는 285년 모용부의 침공을 받은 이후 급격히 쇠약해졌지만, 그 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넓고 비옥한 평원을 배경으로 기원전부터 두각을 나타내, 기원전후에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고구려나 백제 왕실이 부여에서 유래하였다고 내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 3세기 중반 고구려 제천 행사의 명칭을 '동맹'이라 하여 부여 시조인 '동명'의 이름을 따온 데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왕실은 부여 방면에서 출자하였다.

 그렇지만 고구려와 부여는 2세기 초반에 이미 적대관계로 돌변해 있었다.

118p

안악3호분 벽화는 4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이 확실하지만, 당시 고구려 사회에서는 낯선 기법의 장의미술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덤 형태 역시 돌무덤이 중심인 고구려 고유의 묘제와는 거리가 있는 돌방무덤이며, 무덤 구조도 이후 고구려에서 유행하는 돌방무덤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회랑식이다. 더구나 안악 3호분은 고구려가 북쪽으로 올라오는 백제와 맞부딪쳐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시기에 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악 지역에 축조되었다. 낙랑, 대방 지역을 안정감 있게 점령지배하지 못하던 357년 전후에 고구려는 정말 대방의 옛 땅 한가운데에 왕릉을 만들었을까

140p

13군 75현으로 구성되었다는 유주 관련 묵서명의 내용도 사실이나 허구 가운데 하나로 단정짓기보다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교치'라는 형태로 흔히 나타나는 실제 영역과 관념의 영역을 조합시키는 태도를 염두에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남북 왕조들이 상대국 영역까지 포함해 반 허구, 반 실제를 바탕으로 행정체제를 짰던 사실도 참고할 수 있다.

155p

빈은 죽은 이를 추모하는 기간이다. 각처에서 조문을 받기도 하며, 후계자가 차기 국왕으로 등극하는 과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마도 선왕의 위엄을 빌어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기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254p

온조왕이 건국한 뒤부터 700여 년 동안 존속하였던 백제에서 큰 세력을 떨친 부여씨와 대성8족 성씨는 오늘날 별로 찾아볼 수 없고, 대신 신라 지배층이었던 김씨, 박씨와 조선 왕조 이씨가 한국인의 다수를 차지한다. 이는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의 옛 지배층이 통일신라의 최고 지배층으로 편입 성장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286p

백제에서 건너온 기술자만으로 사찰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에 있는 토착 토기 공인이나 석공 등도 직, 간접적으로 동원되었다는 것이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백제에서 박사 칭호는 특정한 기술을 가진 전문 장인에게 주는 것으로, 사비 시기에 기술공을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와박사는 6세기 후반에 기와를 전문으로 생산하던 기와 공인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600년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생산된 인각와는 이렇듯 기와를 전문으로 생산하던 집단이 분업화와 전문화, 분지화되면서 나타난 것이다.  국가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일정한 노동의 대가를 확보하거나 자신의 노동을 검증받기 위해서 집단 명칭이나 부호를 찍은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백제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기와만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기와 가마터가 발견되지 않아, 기와 생산이 전문화와 분업화되는 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321p

670년 웅진, 671년 사비를 장악하면서 자신을 얻은 신라는 673년 백제인을 회유하는 방책으로 그들에게 신라 경관과 외관의 관등을 수여하였다. 백제 지배층을 우대하여 백제 유민들이 갖고 있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였다. 674년 조성된 아미타불비상에 백제 유민들의 신라 관등이 나오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였다.

330p

발해가 고구려를 잇고 있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한국과 달리, 중국과 러시아는 발해를 고구려와 상관없는 말갈계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발해를 속말말갈족이 중심이 된 당나라의 지방 봉건 정권으로 잘라 말하고 있다.

 이렇게 발해사를 놓고 여러 나라가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것은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출신에 대한 애매한 기록 때문이기도 하다.

360p

왜 불교 사원이 도적들의 습격 대상이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약탈하거나 훔칠 물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의 최승로는 성종에게 올린 건의문에서 사원의 사치를 언급하던 중에 "신라 말기에 불경과 불상에 모두 금은을 쓰고 사치가 지나쳐서 끝내 멸망했으며, 장사치가 불상을 훔쳐와서 부수어 팔아먹으며 살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사원은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던 만큼, 굶주린 백성들이 도적이 되어 곡식을 얻을 목적으로 사원을 습격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신라 말의 금석문들에서 왕실이나 귀족, 또는 지방 부호들이 사원에 토지를 시주한 사실은 흔히 확인된다.

 농업 사회에서 부의 최대 원천이 토지였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9세기 후반에 해인사가 토지를 집중적으로 확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자료가 있다. <해인사전권>, 즉 해인사의 토지문서가 그것이다.

365p

해인사가 왕족, 귀족에서 사들인 토지들은 매매의 형식을 빈 사실상의 시주가 많지 않았나 짐작된다. 집권력의 약화와 도적의 봉기로 인하여 멀리 떨어진 지방의 대토지를 경영할 능력이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방의 사원들은 주변의 대토지를 경영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성주사의 낭혜화상처럼 종교적 신망을 얻고 있었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9세기 말로 접어들면 초적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신라 국가의 지배체제를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킨 이들이었다는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신라 중앙정부의 무기력함을 대신하여 일정한 지역을 거점으로 지배권을 확립한 자들 중 성주, 장군을 칭하며 더 많은 세력을 규합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우리가 흔히 '호족'이라 부르는 세력은 이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한편, 이들과 달리 처음에는 일정한 거점이 없이 여러 곳을 휩쓸고 다니며 세를 규합하던 무리들도 있었다. 궁예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런 무리들의 일부는 초적과 같은 수준에서 출발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직을 갖추고 활동 반경이 넓어질수록 이전과 같은 약탈자적 성격을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지방 사회에 토착한 부호들을 보호하는 역할까지 자처하지 않으면 장기적인 지지를 끌어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원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일정한 조직체계를 갖춘 뒤에는 사원의 권위를 배경으로 삼는 것이 안정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오류>

95p

천전리 암각화 아랫부분에는 훨씬 훗날 신라 화랑들이 쓴 낙서가 가득하다. 신라 법흥왕이 다녀갔다는 낙서도 보인다.

-> 법흥왕이 아니라 동생인 사부지 갈문왕이 다녀가고, 훗날 부인인 지소태후와 아들 진흥왕, 그리고 법흥왕의 왕비가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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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20-01-02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금석문으로 백제를 읽다>보다는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첫번째 꼭지의 내용은 지금의 상식으로는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