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으로 본 제주 - 제주를 그린 거의 모든 그림 옛 그림으로 본 시리즈
최열 지음 / 혜화1117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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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재미가 별로 없다.

제주도에 관한 옛 자료가 별로 없는 탓일까?

주제는 참 좋은데 내용이 빈약한 느낌이라 아쉽다.

책을 풀어내는 저자의 글솜씨도 맛깔나지 않아 지루하다.

제주를 표현한 옛 지도들을 상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점은 좋았다.

제주도의 풍속들을 미신이라고 없애 버린 조선 후기의 목사 이형상의 행동이, 지금 눈으로 보면 교조주의적으로 보여도 어쨌든 그가 남기고 의뢰한 저서와 그림 덕분에 제주도의 역사가 기록될 수 있었으니 아이러니하다.

나는 언제부터 제주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순전히 남편 때문이다.

여행이 좋은 점은, 전혀 관심이 없던 곳도 다녀오고 나면 흥미가 생기고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궁금해진다.

관광지로만 알았던 제주도 역시 몇 번 다녀오고 나서는 인문 지리에 지대한 관심이 생겨 관련 책들을 찾아 보는데 기본적으로 사료 자체가 적어서 그런지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다.

4.3 사태 같은 현대사에 관심이 적어서 더 그런가?

늘 좋아하던 유홍준씨의 제주 답사기도 인상적이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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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와 중국 고대사
심재훈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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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좋은 책들을 많이 읽고 있어서 참 기쁘다.

어렵고 지루해 보이는 제목 때문에 신간 신청을 해 놓고서도 계속 미뤄 뒀던 책인데 큰 맘 먹고 빌리게 됐다.

600 페이지 정도로 두껍지만 청동예기에 새겨진 명문의 자세한 고찰 부분을 건너 뛰면 힘들지 않게 금방 읽을 수 있다.

저자가 번역했던 "고고학 증거로 본 공자시대 중국사회"를 어렵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다시 읽으면 훨씬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문헌 자료의 의존도가 크고, 그마저도 고려 중기의 삼국사기가 가장 이른 시기의 역사서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국은 선진시대 자료도 풍부하지만 무엇보다 땅에 묻혀 있는 고고학 증거들이 많아 출토 자료만 가지고 중국 고대사를 구성하는 학자도 있다고 한다.

마치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국가들 연구하는 것처럼 땅 속에 이렇게도 많은 고고학 자료들이 숨어 있었다니 정말로 놀랍고 흥미롭다.

상이 하남성과 산동 지역 일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반면 주나라는 섬서성부터 산동까지, 즉 동서 융합의 문화적 일체감을 이루어냈는데 바로 이 책의 주제인 청동예기를 통해서라고 한다.

마치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세우고 거대한 장제전을 지었던 것처럼 고대 중국인들도 청동예기를 만들어 신분차를 드러내는 예치 사회를 건국했던 것이다.

주나라는 진과 같은 거대한 통일 제국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최상류층의 문화적으로 동일한 정체성을 가졌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청동 예기라 할 수 있다.

또 강력한 일원적 군사체제는 아니었다 해도 주 왕실을 필두로 연합군을 구성해 이족을 정벌하는 통치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주 왕실의 청동예기 문화에 동참하려는 욕구가 화이사상을 만들어 그 소속감으로부터 벗어난 이들은 이민족이 되고 그것을 모방하는 이는 중화민족 안에 편입됐다고 본다.

또 주가 융적의 침입을 받아 동쪽으로 왕실을 옮긴 후 진정으로 동서융합이 일어나 중화라는 세계가 완성됐다고 한다.

마치 남북조 시대가 혼란기이면서도 중국인들이 양자강 이남으로 그 세력을 넓혀갔던 것처럼 말이다.

서주 왕실의 정체성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형성, 그리고 청동예기의 역할과 화이사상에 대해 알 수 있는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다.

기자조선 전설의 주인공인 기족에 관한 이야기도 나와 흥미로웠다.

대릉하 유역과 산동 지방에서 발견되는 기족의 청동 명문을 근거로, 저자는 이들이 은나라가 망한 후 주 왕실에 의해 사민되었는데 친분이 있던 연나라, 즉 대릉하 일대로 이주했고 동방 정벌 때 산동으로까지 옮겨 갔으리라 본다.

훗날 한나라 사람들이 기족의 동천에 대해 당시 동북아 대표 세력인 조선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흥미로운 해석 같다.

결국 은나라 사람 기자는 한민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인가?

오늘날 중국의 패권주의는 정말로 싫지만, 중국 역사는 마치 화수분처럼 끝없는 호기심과 즐거움을 주는 것 같다.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게 저자가 정말로 글을 잘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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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버지 - 21세기 인간의 진화론
칩 월터 지음, 이시은 옮김 / 어마마마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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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들어 좋은 책들을 많이 읽고 있어 정말 기쁘다.

좋은 책이 주는 정서적 만족감은 굉장히 큰데 비해 금전적인 노력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오직 약간의 집중력과 시간만 있으면 되는 셈이니, 독서는 마치 공짜로 얻는 삶의 큰 기쁨 같다,

인간의 기원이나 진화에 대한 문제는 흥미로우면서도 모호한 느낌이라 확실하게 정리가 잘 안 되는 분야다.

워낙 발굴되는 화석도 적고 계속 새로운 증거들이 추가되다 보니 역사 분야처럼 고정되지 않는 것 같다.

이 책에 따르면 인간과 침팬지는 700만 년 전에 분기되어 그들과 함께 살던 열대 숲을 떠나 확 트인 초원으로 나가면서 서서 걷게 되고 무리를 지어 사냥하고 도구와 불을 사용하며 언어까지 발전시키는 뇌의 진화를 겪게 됐다.

자연환경 변화에 잘 맞춰 적응해 갔던 셈이다.

어려서 읽었던 책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시작해 (이게 그 유명한 루시였던 모양이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로 단선 진화했다는데, 요즘에는 심지어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에렉투스가 같이 공존했고 실제적인 조상 관계도 아니라고 한다. 

하긴 우리 인류에게 멸종된 네안테르탈인의 DNA가 5%까지 발견된다고 하니 책에 나온 상상처럼 히말라야의 거대한 설인은 마치 노아의 홍수 전설처럼 우리 조상들이 오래 간직한 사촌들에 대한 기억일까?

인류의 기원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자아에 관한 해설이 아주 흥미로웠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이 자의식일 것 같은데, 앞서 읽은 <인간은 왜 잔인해지는가>에서도 밝힌 바대로, 동물은 현재만을 의식하기 때문에 생존 이외의 고민이 없는 반면, 인간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고민하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얻기 힘들다고 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는 "나" 즉 두뇌가 만들어낸 일종의 환영인 "나"를 자아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인간을 "상상하는" 생존 기계라고 표현할 정도로 인간의 두뇌가 만들어낸 자의식, 창의력이 언어 능력과 합해져 거대한 사회를 이루고 문화를 창조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보통 인류학에 관한 책은 복잡하고 어려운 반면 이 책은 참 쉽게 잘 쓰여졌다 싶었는데 저자가 학자가 아닌 저술가여서 대중의 눈높이를 잘 맞춘 듯하다.

인간의 기원과 정신성에 관해 알게 된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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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주변 - 중국의 확대와 고대 중국인의 세계 인식
홍승현 지음 / 혜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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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기로 이 책을 읽게 됐는지 기억이 안 난다.

오래 전부터 읽을 책 목록에 올려놓고 계속 미루다가 드디어 서고에 가 있는 오래 된 책을 읽게 됐다.

아, 정말 논문이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건가?

언제나 모호하기만 했던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기원과 확장 과정에 대해 화이사상과 조공-책봉 제도를 중심으로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는 느낌이다. (좋은 책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 저렴한 표현일까?)

늘 궁금했던 부분이, 유럽은 로마 제국 멸망 이후 다시는 제국이 탄생하지 않았던 데 비해, 중국은 어떻게 이 거대한 나라를 5천 년 이상 유지해 왔는지였다.

중국 역시 로마가 게르만의 침략으로 무너졌듯, 5호 16국으로 대표되는 유목민족의 침략을 숱하게 받아 왔는데도 하나의 문화적 정치적 공동체로서 통일성을 이어온 게 너무 신기했다.

유럽에 기독교가 있다면 동아시아에는 유교와 한자문화권에 덧붙여 바로 이 화이사상과 조공-책봉 제도가 있지 않나 싶다.

중국의 시작은 황하 주변에서 유목민과 농경민이 잡거하던 시절부터 시작해 주나라가 성립되면서 왕이 다스리는 직할지가 예치라는 제도를 통해 점점 확대되어 나갔는데 높은 농경 생산력 덕분에 정치체제와 문화가 발달하면서 이른바 이적과는 분리가 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분리를 위한 구별이었으나 진시황으로 대표되는 황제권이 성장하면서 주변의 이족들을 문화적 포용을 넘어 직접 지배하는 세력권으로 포함시키기 위해 차별하는 화이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이 항상 군사적 우위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다원적인 권력체가 존재한다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조공-책봉제가 시행되었다.

중국으로서는 문화적 우월성을 내세워 이적들을 책봉하지만 내정은 자율에 맡겨 권위를 세우고 이적들 역시 중국의 책봉을 받음으로써 자국에서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윈윈 관계였던 셈이다.

물론 중국의 힘이 커지고 북중국의 혼란으로 점차 남하하게 되면서 주변국들은 중국의 직접 지배 체제로 편입되어 간다.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하면 그저 혼란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중국의 세력권이 매우 확장된 시기였고, 특히 북중국을 지배한 전진의 부견이 중국인 황제 모델을 실제적으로 구현하려 했다는 점이 신기하다.

정말 부견이 비수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동진을 멸망시켰다면 오늘날 한족의 중국은 없었을까? 흥미로운 대목이다.

책 전체가 다 재밌지만 특히 낙랑군에 대한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아직도 한4군은 중국 대륙에 있었고 평양의 낙랑군을 부정하는 이른바 재야 사학자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낙랑군의 중국 지배를 보여 주고 있다.

이족 지배에 대한 열망이 컸던 한 무제가 거의 유일하게 성공적인 중국식 군현 체제를 이식시킨 곳이 바로 낙랑이라는 것이다.

한나라의 힘이 약해지면서 낙랑은 점차 간접지배 형식으로 바뀌었으나 조위가 등장하면서 요동을 안정화 시키는 과정에서 낙랑군에 다시 한 번 지배력을 강화시켜 낙랑은 무려 400년 동안이나 안정적인 중국의 군현으로 남았고 그 후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으나 그 유민들은 고구려에 복속하지 않고 요동으로 넘어가 모용외에게 투항하게 된다.

그들은 왜 연으로 망명했을까?

저자는 낙랑을 일종의 무역거점으로 이해해, 낙랑의 지배층들은 중국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유지하면서 얻는 무역 이득이 컸기 때문에 안정적인 중국식 통치가 가능했고 고구려가 들어오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중국 쪽을 택했다고 설명한다.

요동으로 망명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낙랑이라는 지명을 유지했던 걸 보면 확실히 중국의 낙랑 지배는 다른 이적들의 변군과는 달랐던 것 같기도 하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책인데 아주 만족스럽고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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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22-01-14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 전에 읽었던 책인데,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흥미롭게 읽었던 책들을 marine님도 재미읽으셨다 하면 기분이 좋네요. ㅎㅎ

올해에는 다시 책을 열심히 읽어 보려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marine 2022-01-17 14:31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생각해 보니 가넷님 리뷰를 보고 알게 된 책이네요.
늘 감사드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간은 왜 잔인해지는가 - 타인을 대상화하는 인간
존 M. 렉터 지음, 양미래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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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정말 의미있는 좋은 책을 읽었다.

별 4개 주는 강추하는 책.

400 페이지의 두께감이 꽤 있는 책이고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얘기들이 많이 나와 한번에 읽기가 다소 힘들었다.

그렇지만 읽을수록 저자의 논지 전개에 빠져들고 번역도 매끄러워 정말 많이 공감하면서 읽었다.

우리는 왜 잔인해지는가?

우리 안의 폭력성, 특히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이른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범죄, 오랜 역사를 가진 노예제 같은 비인간적 제도 등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런 끔찍한 폭력성과 잔인함을 우리 사회에서 제거할 수 있을까?

과연 없앨 수는 있는 것일까?

오래 전에 읽은 <빈곤의 종말>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옛 말도 있지만, 미국 교수인 제프리 삭스는 선진국이 지금보다 더 많은 원조를 하면 전 세계의 극빈층은 충분히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요즘처럼 곡물의 생산성이 극도로 높아진 시대라면, 또 고밀도 에너지, 이를테면 원자력 등을 이용한다면 유니세프 광고에 나오는 가엾은 아이들은 절대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생겼다.

한국은 이미 절대 빈곤이 아닌 상대적 빈곤 (그래서 더더욱 서로를 미워하고 있지만) 상태라 어쩌면 영원히 가난은 존재하겠지만, 그 책의 저자가 말하는 "절대 빈곤"은 충분히 효율적인 원조와 정책을 통해 없어질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기분좋은 얘기인가.

이 책의 논지도 크게 보면 그렇다.

인간은 오랜 역사를 통해 플라톤의 동굴에서 벽면만 보다가 조금씩 빛이 들어오는 입구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과거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도덕적으로 진보했다는 것이다.

노예제가 없어진 것만 봐도 확실히 그렇다.

저자는 인간의 폭력성의 기원에 대해 인간을 대상화하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안 보고 사물로 대상화 시키는 것이다.

이 대상화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가장 약한 단계인 일상적 무관심.

사실 주변에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대부분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모른 척 지나간다.

두 번째 단계는 유도체화.

사실 이 단어가 직관적으로 와 닿지가 않았다.

간단히 말해 내 맘대로 조정하고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끔찍한 비인간화.

이 단계에서는 이미 인간 취급을 안 하고 심지어는 박멸해야 하는 해충으로 간주해서 이른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범죄가 집단적으로 일어난다.

노예제도도 인간이 아닌 사고 파는 물건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인가?

당연히 1단계는 타인에 대한 일상적인 관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불우이웃돕기가 이런 경우일 것이다.

2단계는 타인이나 타민족이 나와 우리 집단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호의존성을 깨닫는 것이다.

당연히 타문화도 관대하게 수용하고 전쟁이 아닌 교류와 무역 등을 통해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올림픽 같은 지구촌 축제도 이런 경우에 해당될 것 같다.

가장 높은 3단계는 합일의식을 갖는 것이다.

저자는 이 합일의식에 이르는 방법으로 종교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알타미라 동굴에 들소를 그리고 죽은 동료를 매장하는 등의 행위는 예술적이면서도 종교적이다.

이런 종교적 속성이 넓게 보면 자기를 초월해 타인과 하나가 되는 합일의식의 발로라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초월감, 혹은 자아가 사라지고 나와 타인이 경계가 없어지는 충만감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의 합일, 곧 구원,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플라톤의 동굴에서 빛을 찾아 입구로 나가기 위해 깨달음의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말로 우리는 좀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혹은 우리 사회는 과거보다 더 인간적이고 높은 수준의 정신적 각성을 가진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어쩐지 희망이 보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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