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빈센트 - 행복한 책꽂이 03
박홍규 지음 / 소나무 / 199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빈센트 반 고흐라면 그 강렬한 색체와 더불어 광기서린 삶으로 더욱 유명한 화가다

그 만큼 유명한 화가로는 겨우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피카소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가 이렇게 유명해진 것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살아 생전에는 단 한 장의 그림 밖에 못 팔았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는데 죽고 난 후 엄청난 평가를 받았다는 극적인 과정에 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예술가의 광기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다

평생 가난했고 인정받지 못했으며 자신의 귀를 자를 정도로 광기에 휩싸였고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결국은 권총으로 삶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800여통의 편지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의 삶은 더욱 소상히 알려질 수 있었다

 

박홍규는 평전을 쓸 때 주류의 인식과 다른 관점을 갖는데, 상당히 신선한 면이 있다

무엇보다 위인들을 신격화 시키거나 지나친 의미 부여를 경계하는 태도가 마음에 든다

"까뮈를 위한 변명"에서 보여 준 것처럼 그는 고흐 역시 우리 가까운 곳으로 데려 오고 싶어 한다

고흐는 절대 광기에 휩싸인 삶을 산 게 아니었으며, 다만 열심히 살려고 애썼을 뿐이다

고흐를 "내 친구"라고 명명한 것은 고흐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신비주의를 걷어 버린 저자의 서술 방식이 마음에 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지나치게 주류 인식에 대해 반발한다는 느낌도 없지는 않다

 

고흐의 삶을 살펴 보면 의외로 성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해 16세부터 숙부의 화랑에서 근무한다

학교 성적이 꽤 좋은 편이었으나, 자기 자신에게 침잠하길 좋아했던 고흐의 적성에는 잘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평생 독서를 열심히 한다

저자는 고흐의 독서 목록을 여러 차례 인용하는데, 의외로 수준있는 책들이 많아서 놀랬다

그리는 일 말고 별다른 일이 없었던 고흐는 독서와 그림 그리는 일을 매일 규칙적으로 행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가 글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직업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고흐가 정말 그림을 직업으로 생각했다면, 좌절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붓을 꺽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관찰하는 자연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느낌을 그림으로 남기고자 했다

그래서 추상은 분명하게 거부했다

그런 이유로 가장 존경했던 화가도 다름아닌 농부의 화가 밀레였다

 

제일 인상적인 부분은 노동자 계층에 대한 그의 애정이다

전도사가 되어 광산촌으로 파견된 얘기는 널리 알려졌다

거기서 처음 습작을 시작했고 "감자 먹는 사람들" 등을 그렸다

고흐는 이 하층민들에 대한 애정을 평생 유지했는데, 문제는 주변 사람들이 그의 애정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고흐는 다소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비사교적이라 남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유전성 간질 때문에 가끔 발작을 하기도 했으며 외모가 특이해 호감을 사기 어려웠다

(자화상을 보면 그렇게 특이한 것도 아닌 듯 한데...)

그는 얼마 안 되는 월급까지 광부들을 위해 썼지만, 결국 아무런 감정적 공감도 얻지 못한 채 쓸쓸하게 광산촌을 떠나야 했다

기독교의 권위주의와 교조주의를 비판했던 고흐는 전도사직에서 곧 해임됐다

 

고흐의 일생 중 제일 유명한 사건은 고갱과의 공동 생활일 것이다

저자는 고갱을 거짓말 잘 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정의했는데, 고흐가 미쳤다는 강력한 증거가 바로 고흐의 자서전이라면서 그 부당함을 얘기한다

고갱 전기 작가들은 뭐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주식 중계인이었다는 전적에 비춰 보면 고흐보다는 세속적 이익에 더 밝았을 것 같기는 하다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고흐는 고갱의 입주를 학수고대 한다

그는 여러 화가들에게 의사타진을 했는데 그림 한 점 못 파는 이 내성적인 화가의 청에 응할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고갱이 오겠다고 승낙했으므로 고흐는 꿈에 부푼다

당시 고흐는 아를에 정착한 후 커피와 압셍트에 완전히 중독되어 무절제한 삶을 살고 있었다

고흐는 고갱이 자기 삶을 바로잡아 줄 거라 믿었다

 

저자는 꼭 고갱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고흐와 함께 지낸다는 건 어려운 일일 거라 말한다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던 동생 테오마저 고흐와 함께 산 2년 동안 몹시 괴로워했다

그들이 평생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800여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애착 관계를 유지했다고 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고흐와 고갱의 공동체 생활비를 테오가 지불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는 고갱도 다소 뻔뻔한 것 같다

테오는 화가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가엾은 형을 위해 고갱에게까지 생활비를 대 준 것일까?

어쨌든 형에 대한 테오의 헌신은 놀랍기 그지 없다

화상이었던 테오는 당시 비주류였던 인상파 그림들을 사 모아 고객에게 팔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는 형의 예술에 대한 확신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생 동안 형의 생활비를 댔다고 하니, 참 대단하다

더구나 자신이 결혼한 후에도 형의 생계를 책임질 정도였다

 

고흐는 평생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한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 눈물나는 사연이 있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다

내가 여자보다 그림을 더 사랑하긴 하지만, 서른 다섯이나 먹어 가족도 없이 혼자 외롭게 산다는 게 얼마나 서글프고 쓸쓸한지 모르겠다...

아무리 고립을 좋아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주고 받는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고흐는, 생계를 꾸려 나갈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배척받는다

화가에게는 영감을 주는 뮤즈가 있기 마련인데, 고흐는 평생 제대로 된 여자 모델 하나 없이 작업했다

평생을 여자들에게 둘러 싸였던 피카소를 생각하면 더욱 비교가 된다

유일하게 함께 살았던 여자는 하필 애가 다섯이나 딸린 창녀였다

심지어 처음 만났을 때조차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피임약이 없던 시절이라 창녀들은 끊임없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야 했다

고흐는 그녀에게 애정을 보였으나, 테오는 그녀와 계속 동거한다면 생활비를 끊겠다고 위협하고 그녀 역시 돈이 궁해지자 다시 창녀 생활로 돌아가길 원해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진다

고흐는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창녀가 아니면 사랑을 나눌 수가 없었다

그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저자는 고흐의 죽음을 자살로 보지 않는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죽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미친 상태에서 자살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증거는 부족하다고 본다

진짜 사인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그림이 미친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보는 것에는 동의한다

특히 죽기 직전에 그린 "까마귀 나는 밀밭"의 경우 그림에 광기가 서려 있다고 해석하는데, 저자는 단호히 주류 해석을 거부한다

고흐는 정신 분열병이 아니었고, 단지 유전적 간질을 앓았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테오도 이 병으로 6개월 후 사망하고 그의 여동생도 죽었기 때문에 집안 내력일 뿐 특별히 고흐가 미쳤던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고흐는 정상적이 삶을 살았다는 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그렇다면 고흐는 더욱 불행했을 것이다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속적인 즐거움도 원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림도 인정받았으면 좋겠고, 생계 걱정도 안 하고 살면 좋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었다

저자는 이 가엾은 화가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전해 "내 친구"라고 명명한다

고흐의 그림에서 상징성 대신 관람자의 느낌을 중시한 해석은 마음에 든다

"빈 의자" 등의 그림에서 어려운 상징을 뽑아 내기 보다는, 고갱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렸을 것이라는 소박한 해석이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당대에는 형편없는 평가를 받다가 사후에 갑자기 유명해진 화가는 아주 드물다

(반대의 경우는 흔히 있다 생전에 높이 받들였으나 죽고 나서 가치가 하락한 경우 말이다)

르네상스의 대가들만 봐도 그림은 신분 상승의 기회였다

루벤스 같은 경우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가지고 유럽 왕실을 돌아 다니며 외교관 역할을 했을 정도다

고흐처럼 생전에는 철저히 무시되다가 사후에 갑자기 부각되는 건 아주 드문 경우다

그렇다면 결국 예술가 역시 살아 생전의 행복을 누리길 원할 것이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술적 세계와 (즉 사회적 성공) 개인의 삶이 아름답게 조화되길 바란다

 

고흐의 가치가 잊혀지지 않는 것은 테오의 아내 수산나의 공이 크다

그는 1년 밖에 못 산 가엾은 남편 테오를 위해 고흐가 보낸 편지들과 그림을 수집한다

남편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고 싶었던 모양이다(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즉 수산나가 괴팍한 시아주버니의 예술 세계를 이해했던 건 아니라는 얘기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좀 삐딱하다)

수산나는 테오에게 보낸 800여통의 편지를 시간 순으로 정리하는 놀라운 집념을 보이고, 흩어진 고흐의 그림들을 열심히 수집해 아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준다

(고흐가 죽었을 당시 가족들은 그림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테오가 모두 상속했다)

아들은 세계 각 미술관에 전시되야 한다는 어머니의 의견을 무시하고 한 데 모은 후 국가에 기증해 오늘날 반 고흐 미술관이 탄생했다

(상속세 문제 때문에 기부했다고 한다)

현명한 제수와 조카 덕에 우리는 편하게 앉아 이 위대한 화가의 일생을 살펴 볼 수 있다

적어도 가족 관계 측면에서는 고흐가 행복했음이 분명하다

살아 생전에는 동생의 지원을 받고, 죽어서는 동생 가족 덕분에 위대한 화가로 거듭났으니 말이다

 

광기 서린 예술혼이라는 부담스런 수식어 대신, 그림을 사랑하고 자연과 인간을 관찰하기 좋아했던 소박한 화가를 만나고 싶다면 권하고 싶은 책이다

종이도 갱지를 사용해 좀 어둡긴 하지만 가벼워서 보기 편하다

대신 칼라 그림이 없어 약간 아쉽다

고흐의 훌륭한 그림들은 큰 도판으로 구해 보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리대왕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
윌리엄 골딩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뉴욕 3부작"에서 폴 오스터가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The Fly"라는 영화의 원작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결론은 나의 완전한 착각이었다

책을 몇 장 읽을 때는 정말 괴로웠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데, 도대체 진지한 맛이 없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을 때처럼 어린애들 난파당한 얘기를 그저 가볍게 스케치 하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애들 이야기라서 그런지 사건 전개나 문장들이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힘들게 읽어 나가다가 해설을 먼저 봤는데, 역시 내 이해력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역자의 해설이 없었다면 (그런데 이 역자는 "호밀밭의 파수꾼"도 번역했다 나는 이 사람이 번역한 책을 읽었는데 솔직히 번역 자체는 아주 매끄럽지만은 않다), 나는 이 위대한 우화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만 이해를 못하는 게 아니라, 윌리엄 골딩이 영미 문학권의 가장 중요한 작가임은 분명하나, 그것은 지식인 계층에 한정되어 있을 만큼 일반인에게는 난해하다고 한다

문장이나 작품 구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가 비유로 사용하는 장치들의 상징성을 일반 독자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여기 등장하는 소라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패각 민주 정치를 의미한다고 한다

어설프게 대의 민주주의를 표명한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평론가들의 해설이 없으면 정확한 의미 파악은 힘들다

 

이 소설은 골딩의 첫 데뷔작인데 (원래 그는 고대 영시를 연구했다고 한다) 처녀작이 노벨상 수상작으로 결정될 만큼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학교 교사였던 골딩은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가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자연 상태로 돌아가면 자유를 만끽하며 착한 인간의 본성대로 살 것이라 믿었던 루소나, 어린 아이의 마음은 백지와 같다던 로크의 말과는 달리, 인간의 본성은 사실 폭력적이고 악하다는 것이다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잔혹성에 치를 떨 것이다

또한 원래 인간은 도덕적이고 착한 존재라는 당위성에도 의혹을 품는 게 당연하다

골딩은 인간이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며 합리적인 존재라는 신화를 깨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산호섬"이라는 소설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산호섬"의 대강의 줄거리를 살펴 보면, 영국 소년들이 어떤 섬에 표류되는데 식인종들에게 민주주의를 심어 주고 기독교를 전파해 그들을 문명인으로 교화시킬 만큼 훌륭하게 대영제국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내용이다

사실 이 대영제국 국민이라는 타이틀 만큼 편견 가득한 것도 드물 것이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토착인들을 개화시킨다는 환상에 찬 영국인들은, 자신들을 합리적인 근대인으로 보고 토착인들을 야만인으로 생각했다

영국인이었던 골딩은 이 어리석은 환상에 일침을 가한다

그는 "산호섬"에서 멋지게 민주주의를 구현했던 잭과 랠프라는 인물을 똑같이 자기 소설에도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야만인으로 변해 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인도에 처음 표류했을 때, 잭은 당당하게 "우리는 영국 시민들이야, 우리는 잘 해낼 수 있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조될 무렵, 형편없는 야만인으로 변해 있는 그들을 보고 해군 장교는 한심하단 듯 되뇌인다

"너희가 영국 소년들이라면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줬어야 하는데..."

이 말이야 말로 영국 시민의 합리성에 찬사를 보내는 "산호섬"의 저자에게 보내는 일갈일 것이다

 

이 소설의 두 축은 폭력적 권위주의와 합리적 민주주의로 대변되는 잭과 랠프이다

소라를 발견한 뒤 그것을 불어 섬에 표류된 아이들을 불러 모은 랠프는 대장으로 선출된다

말하자면 합법적인 우두머리가 된 셈이다

그러나 성가대의 대장이었던 잭은 투표로 뽑힌 랠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표류되기 전부터 성가대원들을 지휘했었고, 호전적인 성격으로 섬에 표류된 이후에는 그들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성가대원이 다수가 아닌 상황에서 선거로 뽑힌 랠프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며 랠프의 지도력을 흔든다

표류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봉화를 피워 구조를 받는 일이다

랠프는 봉화 피우는 일에 아이들의 역량을 집중하려고 한다

반면 잭은 자기가 잘 하는 멧돼지 사냥을 우선 순위에 둔다

사실 잭의 행동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랠프의 말대로 아무리 멧돼지 고기를 배터지게 먹는다고 해도, 구조되지 않으면 평생 섬에 갇혀 살아야 할 것이다

잭 역시 봉화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랠프의 지휘를 받아야 하고 또 자기가 잘 하는 것은 멧돼지 사냥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일에 매짆고 싶었을 것이다

랠프는 봉화를, 잭은 사냥을 외치며 결국 둘은 분열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독특한 캐릭터가 새끼 돼지다

새끼 돼지는 천식을 앓고 있는 뚱뚱이로, 외모 때문에 이름 대신 "새끼 돼지"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줄 아는 이성과 좋은 머리를 지녔다

더군다나 그의 안경은 봉화를 피울 수 있는 발화점을 제공한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문명 세계가 아닌 자연 상태에서, 체력이 약한 새끼 돼지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놀림을 당한다

결국 그는 잭의 패거리에게 둘러싸여 로저라는 잔인한 아이가 굴린 바위에 맞아 끔찍한 죽음을 당한다

만약 그가 문명 사회에서 살았다면 머리가 좋기 때문에 출세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의 치명적인 약점인 천식이나 심한 근시 등도 살아가는데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자연 상태의 인간이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발언권을 얻고 싶으면 소라를 집어 들고, 소라를 들고 있는 한 그 말을 제지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누구보다 신봉했던 새끼 돼지는, 자신의 안경을 강탈해 간 잭의 무리에게 소라를 들고 찾아갔다가 소라처럼 처참하게 으깨진다

이거야 말로 민주주의의 참담한 파괴가 아닌가

 

"넌 소라에 미쳤구나 누구에게나 발언권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발상인 줄 알아? 이제 힘있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는 게 옳다는 사실을 너도 깨닫지 않았니? 이 따위 소라는 필요없다고!!"

잭은 민주주의의 비능률적임을 지적하고, 소수에 의한 다스림을 주장한다

사실 그가 능력있는 사람이란 합리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려운 상황이 되면 호전적인 사람이 주도권을 잡듯, 거칠고 폭력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그가 이 상황을 타개할 인물이며, 무리를 지배해야 한다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잭의 폭력성을 지도력이라 착각하고 구조되기 위한 봉화는 버려둔 채, 그가 제공하는 멧돼지에 열광한다

잭과 그의 패거리들은 온 몸에 진흙을 바르므로써 부끄러움을 잊고 폭력성과 잔인함을 떳떳하게 드러낸다

광기에 휩싸인 춤을 추는 동안, 그들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가엾은 동료 사이먼을 짐승으로 착각해 죽이고 만다

그가 동료임을 곧 알아차렸으나, 한 번 광기에 빠진 이들은 계속 피를 원하고 결국 멧돼지 사냥하듯 끔찍하게 때려 죽이고 만다

 

이 사이먼이야 말로 작가의 주제 정신이 응집된 인물이다

섬세한 감성을 지녔으나 새끼 돼지처럼 합리적인 사이먼은, 아이들을 공격할 짐승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착각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혼자 숲으로 들어간다

(잭은 짐승의 실체를 믿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을 겁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역시나 짐승의 실체는 낙하하다 바위에 걸려 죽은 조종사의 시체였다

그는 이 사실을 알려 주려 잭의 무리에게 달려 갔다가 어이없이 짐승으로 오인되어 죽은 것이다

사이먼은 잭이 사냥한 멧돼지의 시체에 달라붙은 파리떼를 본다

파리떼의 대왕은 사이먼에게 속삭인다

"너희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나 때문이다, 나는 너희의 일부다"

"나"라는 것은 인간의 파괴적이고 잔인한 본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일반적인 표류기라면, 특출난 능력을 지닌 착하고 합리적인 지도자가 선출되어 그 사람을 중심으로 고난을 헤쳐 나가기 마련인데, "파리대왕"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우리의 숨겨진 본성을 그려낸다

랠프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지도자로 나오지만, 그는 힘이 없고 또 천성적인 도덕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폭력 세력을 제압할 능력도 없고, 무리에게 고기를 제공할 수도 없으며, 그의 핵심 브레인이던 새끼 돼지를 같이 놀리는 평범한 소년일 뿐이다

랠프의 캐릭터만 봐도 이 소설의 치밀함을 금방 알 수 있다

우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소설은 절대 어렵거나 복잡하게 말하지 않는다

야만 상태에서 인간의 합리성과 민주주의 원칙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소년들 수준에서 쉽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상징성을 제대로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아무리 훌륭한 주제를 담은 우화라 할지라도 그 묘사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권선징악식의 진부한 양식을 벗어날 수 없다는 역자의 날카로운 지적에 동의하는 바다

 

이문열의 단편 중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원시 시대의 평등한 부족 사회에서 권력 구조가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그린 소설이다

그 때도 고개를 끄덕이며 작가의 관찰력에 감탄했는데, 이 소설과 비교해 보면 지나치게 많은 것을 독자에게 가르치려 하므로써 해석의 여지가 적다는 느낌이 든다

역자는 본질적인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배제시키고 일부러 현실과 가장 먼 설정을 따르는 골딩의 치열한 작가 정신을 높이 샀는데, 노벨 문학상을 안겨 준 탁월함이 바로 그런 데서 나와지 않나 싶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날마다 부딪치는 주변의 현실에만 골몰하는 우리나라 작가들에 대한 역자의 아쉬움을 이해하는 바다

인간 내부에 숨어 있는 잔인함과 폭력성의 실체에 대한 위대한 작품을 읽고 싶다면, 꼭 한 번 일독하라 권하고 싶다

더불어 역자의 작품평도 나 같은 평범한 독자의 이해력을 높히는데 훌륭한 기여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정일의 독서일기 2 - 1994.11 - 1995.11
장정일 지음 / 미학사 / 1995년 12월
평점 :
절판


나를 슬프게 한 책이다

한 번 집은 책은 끝까지 읽는 편인데  (마음에 안 드는 책은 욕하려고라도 읽는다), 절반 읽고 손을 놔 버렸다

내가 거의 읽지 않은 책들이야 공감할 수가 없었다

다른 책 에세이들은 감상문 외에도 책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들이 많이 추가되어 공감할 때가 많았는데, 장정일은 평범한 독자에게는 불친절 하다

읽다가 그만 둔, 내 독서 역사에 아주 드문 케이스가 되고 말았다

의미없이 읽어가는 문장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의 사색적인 감상문들이 좀처럼 감동을 주지 않았다

대신 꽤나 책을 많이 읽는다는 생각은 했다

1년간 쓴 감상문을 세어 보니 영화 몇 편까지 합해서 대략 일주일에 세 권 정도 읽은 것 같다

사실 이 정도면 직업이 글 쓰는 사람이라면 아주 많이 읽는 건 아니다

예전에 일본의 한 평론가가 하루에 1권 꼴로 한 달이면 30권을 읽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글 쓰는 게 직업이라면, 즉 직장을 따로 나가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독서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주 어려운 책은 예외겠지만, 글쓰기를 직업으로 한다면 자기 일을 위해서라도 이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다

스티븐 킹이 쓴 "유혹하는 글쓰기"를 보면 글재주를 타고 난 위대한 작가들이 아닌 이상 우리 모두는 글을 잘 쓰기 위해 끊임없이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심지어 차에서는 오디오북을 듣고 헬스 클럽에서도 책을 읽는다고 한다

책 읽는데 이 정도의 시간 투자는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일 주일에 세 권은 읽는다

직장에서 10시간을 근무하고 남는 시간에 이렇게 읽는다

장정일처럼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독서에 더욱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사실 하루 종일 책을 읽을 수 있는 그의 처지가 부럽기도 했다

물론 창작이라는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밥을 먹는다는 사실은 싫지만,  솔직히 독서하는 게 직업인 사람은 부럽다

그래서 도서관 사서가 제일 좋아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덤벨 다이어트
스즈키 마사시게 지음, 이근아 옮김 / 넥서스BOOKS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생각보다 운동 효과가 좋습니다

꽤 땀을 흘리게 되요

좀 힘든 자세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할 만 합니다

직장에서 시간날 때 하기 좋아요

살 빠지는 건 몰라도, 어쨌든 운동은 꽤 될 것 같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정독해야 할 책이다

이런 철학적이고 직관적인 책을 겨우 25세의 어린 나이에 썼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대체 나는 25세 때 뭘 하고 있었을까?

사랑이라는 이름이 가려주는 유치하고 치졸한 감정에 휩싸여 정체성을 잃고 방황했을 뿐이다

저자가 철학을 전공하고, 또 가르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경력보다는 오히려 그의 성향과 관계있는 것 같다

사랑의 실체를 파헤치는 그의 철학적 소설을 읽으면, 우리 안에 숨겨진 위악성과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강한 이기주의, 혹은 나르시즘을 보는 기분이 든다

은희경 소설을 읽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소설의 형식을 빌려 사랑과 철학에 대해 쉽고 간결하게, 그리고 탁월하게 멋진 해석을 제공한다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 "나"는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클로이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나"는 그녀가 데이트 신청을 받아 줄지 어떨지에 관한 심각한 고민의 시간을 보낸 후, 마침내 정식으로 사귀게 된다

유럽 사람들은 성에 대해 참 솔직하고 화끈하다

겨우 24에 불과한 처녀가 첫 데이트 후 상대가 마음에 들자 자기 집 침대로 데리고 간다

가벼운 굿바이 키스를 남기고 점잖게 돌아서려는 남자에게 클로이는 멋진 한 마디를 날리며 그를 붙잡는다

"우린 더 이상 어리지 않잖아"

섹스를 통한 사랑이 가능한 나이라는 뜻이다

 

아직도 처녀막 재생술이 성행하고 동거 커플을 백안시 하며 (당장 TV 드라마만 봐도 동거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옥탑방 고양이"를 두고 동거를 일반화 시켰다고 비판하는 신문 기사나, 동거했던 과거 때문에 마음 졸이는 한가인이 나오는 "애정의 조건"을 보라!!)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처녀성 신화가 넘쳐나는 대한민국에 사는 젊은 여자들에게, 클로이의 한 마디는 쇼킹할 수 밖에 없다

모든 문화권에는 나름의 터부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성에 대한 이중 잣대는 사라져야 마땅할 덕목이 아닌가 싶다

또 주인공 "나"는 클로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좋아하는데, 다른 여자는 피워도 상관없지만 내 여자 친구는 안 된다는 한국 남자들의 이중성과 분명한 대비를 이룬다

심지어 여자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는가의 논쟁이 붙을 정도니,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다

 

클로이와 "나"는 서로의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동거에 들어간다

같은 공간에 사는 것을 동거라 정의한다면, 확실한 동거는 아니다

사실 어찌 보면 이게 더 편안한 관계인지도 모른다

동거나 결혼이나 법적 구속력만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정도의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모텔 대신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관계라면, 좀 더 친밀하고 안정된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나"는 클로이의 모든 면에 반한다

그러나 함께 살다 보면, 혹은 상대에 대해 좀 파악하고 나면 자신의 얼마나 근거없는 환상에 시달렸는지 금방 알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에게 부족한 면을 상대에게서 발견하고자 한다

실제 상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이상화 시킨 뒤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상대의 본모습을 알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상대는 그저 일관된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나의 환상이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하고, 또 실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는 클로이의 구두에 화를 내지만, 정작 같은 구두를 신은 우유 가게 주인에게는 아무런 적대감도 느끼지 않는다

사랑에 빠지면 그의 취향까지도 내 스타일로 만들고 싶은 어처구니 없는 소유욕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연인의 사소한 일상까지 규제하려고 드는 독재적인 태도에 대한 단 하나의 근거는,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렇지만 그런 소유욕이 없다면,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분석도 빼놓지 않는다

 

"나"는 결국 클로이에게 버림받는데, 이별을 극복하는 과정은 흡사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것과 같은 길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클로이를 사랑하면서 그녀가 자기 삶의 일부가 됐다는 얘기는, 그녀가 떠나면 자신의 일부도 무너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클로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의 새로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앤서니 라빈스가 말한 바로 그 신경회로를 끊는 과정일 것이다 클로이에게 길들여진 신경회로를 말이다)

저자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내리는데, 누구와 함께 있든 혹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 변하지 않는 내적 안정감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처음 클로이와 데이트 할 때 그녀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서스럼없이 거짓말을 하며 불안해 한다

모든 신경이 오로지 클로이에게 쏠려, 정작 자기 자신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나의 취향을 드러내기는 커녕 그녀에게 맞춰 급조해 내는 것이다

어떤 자리에서든, 누구와 함께든 나 자신에 대한 변함없는 안정감과 평화를 가질 수 있다면 아마 그는 도를 터득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클로이게 버림받은 후 자살을 시도하는데, 여기에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

클로이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그러므로써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 위해 스스로를 죽이려 들지만 정작 그녀가 돌아온다 해도 이미 나는 세상에 없다

그녀의 뉘우침을 받아들이려면 나란 존재가 숨쉬고 있어야 하는데, 자살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고 반면 그녀를 돌아오게 하려면 내가 죽어야 한다

결국 "나"는 비타민제를 몽땅 털어 넣었다가 뱉어내는 어리석은 과정을 통해 이 모순을 깨닫고 다른 전략을 택한다

 

그것은 "예수 컴플렉스"라 명명할 수 있는데, 클로이를 나쁜 여자로 나는 선량한 희생자로 만드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내가 부족하고 못나서 모든 게 완벽한 클로이가 자신을 떠났다고 믿었지만, 이 컴플렉스를 적용하면 "나"는 어리석은 클로이에게 배신당한 가엾은 순교자가 된다

예수를 못박아 죽인 유태인들처럼, 클로이는 "나"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내 친구인 윌에게 가 버린 것이다

기독교가 번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 순교 정신에 있다고 한다

옳은 것을 이야기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핍박해 죽임으로써, 거룩한 순교자가 되어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는 것이다

(좀 불경스럽지만) 만약 예수가 나사렛에서 책상을 만들다가 죽기 전 진리에 대한 책 한 권을 썼다면, 과연 사람들이 그의 사상에 열광했겠냐는 얘기다

 

사실 이런 식의 아전인수 격 논리는, 이별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친구와 바람나 미국으로 떠나 버린 애인을 두고 자기 비하에 빠지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나쁜 여자로 만들고 나는 희생자라 위로하는 게 정신 건강에 훨씬 이로울 것이다

그녀는 떠나갔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나"는 끊임없이 자신이 부족한 인간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스스로를 학대한다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떠나간 파트너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를 되새기는 게 현명한 처사다

(소설에서 "나"는 클로이가 없는 쓸쓸한 크리스마스를 지내기 위해 책을 몽땅 싸 들고 호텔로 들어가는데, 기회가 되면 나도 한 번 시도해 보고 싶다)

 

저자는 이런 "나"의 심리에 내제된 이기적인 심리를 잊지 않고 지적해 준다

칸트는 도덕적 명령을 수행하는데 있어, 결과보다 중요한 것이 동기라고 했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 정당화 되는 공리주의와는 달리, 칸트는 그 행동을 취한 내적 동기가 불순하면 결과가 좋더라도 칭찬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나" 역시, 나 자신의 감정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클로이를 사랑한 것이므로 그녀가 "나"를 배신하고 떠났다 해도 그녀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처지가 못 된다

"나"나 클로이는 각자의 감정 욕구에 가장 충실히 부합되는 파트너를 찾았을 뿐이다

그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했다고 자부하는 "나"의 동기가 실은 클로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라면, 특별히 내가 클로이 보다 도덕적으로 나을 것은 없다는 얘기다

 

어쨌든 "나"는 남녀간의 사랑 자체를 무의미하게 여기는 금욕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사랑이란 어린 시절 부모에게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채우기 위한 과정이라 믿는 낭만적 실증주의에 경도되기도 하지만, 결국 이런 이론들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금욕주의는 사랑이 주는 고통을 현명하게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피할 따름이고, 낭만적 실증주의 역시 원인을 찾는다고 해서 해결책까지 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성간의 사랑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대신, 새로운 연인을 찾으므로써 다시 용감하게 사랑에 대항한다

"나"가 이번에는 보다 현명하게 처신할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법이니까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목은, 연인의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유머가 필수라는 문장이다

이거야 말로 연인 사이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 생각되는데,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나르시즘에 빠져 사는 동물이라면 아무리 사랑이란 이름을 포장한다 해도 나보다 열등해 보이는 상대의 단점들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차이점을 나보다 못하다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중요하지 않은 결점들을 참고 넘어가려면 문제를 심각하게 의식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가 클로이의 구두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자 그녀는 창 밖으로 구두를 던져 버리는데, 그 후 그들은 상대의 취향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마다 "날 창 밖으로 던지지는 말아 줘"라고 애교를 부린다

연인 사이에 유머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면, 실상 심각하게 고민할 일들은 아주 적어질 것 같다

 

이 소설의 진정한 매력은 연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생각과 감정들을 철학적으로 끌어냈다는데 있다

그 흔한 남녀간의 사랑을 얘기하면서도 저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칸트 같은 대철학자들의 이론을 쉽게 인용한다

동화를 통해 철학을 쉽게 설명하는 기분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인간에 대한, 혹은 "우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