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빈센트 - 행복한 책꽂이 03
박홍규 지음 / 소나무 / 199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빈센트 반 고흐라면 그 강렬한 색체와 더불어 광기서린 삶으로 더욱 유명한 화가다

그 만큼 유명한 화가로는 겨우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피카소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가 이렇게 유명해진 것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살아 생전에는 단 한 장의 그림 밖에 못 팔았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는데 죽고 난 후 엄청난 평가를 받았다는 극적인 과정에 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예술가의 광기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다

평생 가난했고 인정받지 못했으며 자신의 귀를 자를 정도로 광기에 휩싸였고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결국은 권총으로 삶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800여통의 편지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의 삶은 더욱 소상히 알려질 수 있었다

 

박홍규는 평전을 쓸 때 주류의 인식과 다른 관점을 갖는데, 상당히 신선한 면이 있다

무엇보다 위인들을 신격화 시키거나 지나친 의미 부여를 경계하는 태도가 마음에 든다

"까뮈를 위한 변명"에서 보여 준 것처럼 그는 고흐 역시 우리 가까운 곳으로 데려 오고 싶어 한다

고흐는 절대 광기에 휩싸인 삶을 산 게 아니었으며, 다만 열심히 살려고 애썼을 뿐이다

고흐를 "내 친구"라고 명명한 것은 고흐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신비주의를 걷어 버린 저자의 서술 방식이 마음에 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지나치게 주류 인식에 대해 반발한다는 느낌도 없지는 않다

 

고흐의 삶을 살펴 보면 의외로 성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해 16세부터 숙부의 화랑에서 근무한다

학교 성적이 꽤 좋은 편이었으나, 자기 자신에게 침잠하길 좋아했던 고흐의 적성에는 잘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평생 독서를 열심히 한다

저자는 고흐의 독서 목록을 여러 차례 인용하는데, 의외로 수준있는 책들이 많아서 놀랬다

그리는 일 말고 별다른 일이 없었던 고흐는 독서와 그림 그리는 일을 매일 규칙적으로 행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가 글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직업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고흐가 정말 그림을 직업으로 생각했다면, 좌절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붓을 꺽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관찰하는 자연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느낌을 그림으로 남기고자 했다

그래서 추상은 분명하게 거부했다

그런 이유로 가장 존경했던 화가도 다름아닌 농부의 화가 밀레였다

 

제일 인상적인 부분은 노동자 계층에 대한 그의 애정이다

전도사가 되어 광산촌으로 파견된 얘기는 널리 알려졌다

거기서 처음 습작을 시작했고 "감자 먹는 사람들" 등을 그렸다

고흐는 이 하층민들에 대한 애정을 평생 유지했는데, 문제는 주변 사람들이 그의 애정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고흐는 다소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비사교적이라 남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유전성 간질 때문에 가끔 발작을 하기도 했으며 외모가 특이해 호감을 사기 어려웠다

(자화상을 보면 그렇게 특이한 것도 아닌 듯 한데...)

그는 얼마 안 되는 월급까지 광부들을 위해 썼지만, 결국 아무런 감정적 공감도 얻지 못한 채 쓸쓸하게 광산촌을 떠나야 했다

기독교의 권위주의와 교조주의를 비판했던 고흐는 전도사직에서 곧 해임됐다

 

고흐의 일생 중 제일 유명한 사건은 고갱과의 공동 생활일 것이다

저자는 고갱을 거짓말 잘 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정의했는데, 고흐가 미쳤다는 강력한 증거가 바로 고흐의 자서전이라면서 그 부당함을 얘기한다

고갱 전기 작가들은 뭐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주식 중계인이었다는 전적에 비춰 보면 고흐보다는 세속적 이익에 더 밝았을 것 같기는 하다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고흐는 고갱의 입주를 학수고대 한다

그는 여러 화가들에게 의사타진을 했는데 그림 한 점 못 파는 이 내성적인 화가의 청에 응할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고갱이 오겠다고 승낙했으므로 고흐는 꿈에 부푼다

당시 고흐는 아를에 정착한 후 커피와 압셍트에 완전히 중독되어 무절제한 삶을 살고 있었다

고흐는 고갱이 자기 삶을 바로잡아 줄 거라 믿었다

 

저자는 꼭 고갱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고흐와 함께 지낸다는 건 어려운 일일 거라 말한다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던 동생 테오마저 고흐와 함께 산 2년 동안 몹시 괴로워했다

그들이 평생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800여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애착 관계를 유지했다고 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고흐와 고갱의 공동체 생활비를 테오가 지불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는 고갱도 다소 뻔뻔한 것 같다

테오는 화가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가엾은 형을 위해 고갱에게까지 생활비를 대 준 것일까?

어쨌든 형에 대한 테오의 헌신은 놀랍기 그지 없다

화상이었던 테오는 당시 비주류였던 인상파 그림들을 사 모아 고객에게 팔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는 형의 예술에 대한 확신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생 동안 형의 생활비를 댔다고 하니, 참 대단하다

더구나 자신이 결혼한 후에도 형의 생계를 책임질 정도였다

 

고흐는 평생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한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 눈물나는 사연이 있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다

내가 여자보다 그림을 더 사랑하긴 하지만, 서른 다섯이나 먹어 가족도 없이 혼자 외롭게 산다는 게 얼마나 서글프고 쓸쓸한지 모르겠다...

아무리 고립을 좋아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주고 받는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고흐는, 생계를 꾸려 나갈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배척받는다

화가에게는 영감을 주는 뮤즈가 있기 마련인데, 고흐는 평생 제대로 된 여자 모델 하나 없이 작업했다

평생을 여자들에게 둘러 싸였던 피카소를 생각하면 더욱 비교가 된다

유일하게 함께 살았던 여자는 하필 애가 다섯이나 딸린 창녀였다

심지어 처음 만났을 때조차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피임약이 없던 시절이라 창녀들은 끊임없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야 했다

고흐는 그녀에게 애정을 보였으나, 테오는 그녀와 계속 동거한다면 생활비를 끊겠다고 위협하고 그녀 역시 돈이 궁해지자 다시 창녀 생활로 돌아가길 원해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진다

고흐는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창녀가 아니면 사랑을 나눌 수가 없었다

그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저자는 고흐의 죽음을 자살로 보지 않는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죽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미친 상태에서 자살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증거는 부족하다고 본다

진짜 사인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그림이 미친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보는 것에는 동의한다

특히 죽기 직전에 그린 "까마귀 나는 밀밭"의 경우 그림에 광기가 서려 있다고 해석하는데, 저자는 단호히 주류 해석을 거부한다

고흐는 정신 분열병이 아니었고, 단지 유전적 간질을 앓았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테오도 이 병으로 6개월 후 사망하고 그의 여동생도 죽었기 때문에 집안 내력일 뿐 특별히 고흐가 미쳤던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고흐는 정상적이 삶을 살았다는 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그렇다면 고흐는 더욱 불행했을 것이다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속적인 즐거움도 원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림도 인정받았으면 좋겠고, 생계 걱정도 안 하고 살면 좋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었다

저자는 이 가엾은 화가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전해 "내 친구"라고 명명한다

고흐의 그림에서 상징성 대신 관람자의 느낌을 중시한 해석은 마음에 든다

"빈 의자" 등의 그림에서 어려운 상징을 뽑아 내기 보다는, 고갱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렸을 것이라는 소박한 해석이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당대에는 형편없는 평가를 받다가 사후에 갑자기 유명해진 화가는 아주 드물다

(반대의 경우는 흔히 있다 생전에 높이 받들였으나 죽고 나서 가치가 하락한 경우 말이다)

르네상스의 대가들만 봐도 그림은 신분 상승의 기회였다

루벤스 같은 경우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가지고 유럽 왕실을 돌아 다니며 외교관 역할을 했을 정도다

고흐처럼 생전에는 철저히 무시되다가 사후에 갑자기 부각되는 건 아주 드문 경우다

그렇다면 결국 예술가 역시 살아 생전의 행복을 누리길 원할 것이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술적 세계와 (즉 사회적 성공) 개인의 삶이 아름답게 조화되길 바란다

 

고흐의 가치가 잊혀지지 않는 것은 테오의 아내 수산나의 공이 크다

그는 1년 밖에 못 산 가엾은 남편 테오를 위해 고흐가 보낸 편지들과 그림을 수집한다

남편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고 싶었던 모양이다(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즉 수산나가 괴팍한 시아주버니의 예술 세계를 이해했던 건 아니라는 얘기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좀 삐딱하다)

수산나는 테오에게 보낸 800여통의 편지를 시간 순으로 정리하는 놀라운 집념을 보이고, 흩어진 고흐의 그림들을 열심히 수집해 아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준다

(고흐가 죽었을 당시 가족들은 그림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테오가 모두 상속했다)

아들은 세계 각 미술관에 전시되야 한다는 어머니의 의견을 무시하고 한 데 모은 후 국가에 기증해 오늘날 반 고흐 미술관이 탄생했다

(상속세 문제 때문에 기부했다고 한다)

현명한 제수와 조카 덕에 우리는 편하게 앉아 이 위대한 화가의 일생을 살펴 볼 수 있다

적어도 가족 관계 측면에서는 고흐가 행복했음이 분명하다

살아 생전에는 동생의 지원을 받고, 죽어서는 동생 가족 덕분에 위대한 화가로 거듭났으니 말이다

 

광기 서린 예술혼이라는 부담스런 수식어 대신, 그림을 사랑하고 자연과 인간을 관찰하기 좋아했던 소박한 화가를 만나고 싶다면 권하고 싶은 책이다

종이도 갱지를 사용해 좀 어둡긴 하지만 가벼워서 보기 편하다

대신 칼라 그림이 없어 약간 아쉽다

고흐의 훌륭한 그림들은 큰 도판으로 구해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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