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정독해야 할 책이다

이런 철학적이고 직관적인 책을 겨우 25세의 어린 나이에 썼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대체 나는 25세 때 뭘 하고 있었을까?

사랑이라는 이름이 가려주는 유치하고 치졸한 감정에 휩싸여 정체성을 잃고 방황했을 뿐이다

저자가 철학을 전공하고, 또 가르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경력보다는 오히려 그의 성향과 관계있는 것 같다

사랑의 실체를 파헤치는 그의 철학적 소설을 읽으면, 우리 안에 숨겨진 위악성과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강한 이기주의, 혹은 나르시즘을 보는 기분이 든다

은희경 소설을 읽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소설의 형식을 빌려 사랑과 철학에 대해 쉽고 간결하게, 그리고 탁월하게 멋진 해석을 제공한다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 "나"는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클로이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나"는 그녀가 데이트 신청을 받아 줄지 어떨지에 관한 심각한 고민의 시간을 보낸 후, 마침내 정식으로 사귀게 된다

유럽 사람들은 성에 대해 참 솔직하고 화끈하다

겨우 24에 불과한 처녀가 첫 데이트 후 상대가 마음에 들자 자기 집 침대로 데리고 간다

가벼운 굿바이 키스를 남기고 점잖게 돌아서려는 남자에게 클로이는 멋진 한 마디를 날리며 그를 붙잡는다

"우린 더 이상 어리지 않잖아"

섹스를 통한 사랑이 가능한 나이라는 뜻이다

 

아직도 처녀막 재생술이 성행하고 동거 커플을 백안시 하며 (당장 TV 드라마만 봐도 동거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옥탑방 고양이"를 두고 동거를 일반화 시켰다고 비판하는 신문 기사나, 동거했던 과거 때문에 마음 졸이는 한가인이 나오는 "애정의 조건"을 보라!!)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처녀성 신화가 넘쳐나는 대한민국에 사는 젊은 여자들에게, 클로이의 한 마디는 쇼킹할 수 밖에 없다

모든 문화권에는 나름의 터부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성에 대한 이중 잣대는 사라져야 마땅할 덕목이 아닌가 싶다

또 주인공 "나"는 클로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좋아하는데, 다른 여자는 피워도 상관없지만 내 여자 친구는 안 된다는 한국 남자들의 이중성과 분명한 대비를 이룬다

심지어 여자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는가의 논쟁이 붙을 정도니,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다

 

클로이와 "나"는 서로의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동거에 들어간다

같은 공간에 사는 것을 동거라 정의한다면, 확실한 동거는 아니다

사실 어찌 보면 이게 더 편안한 관계인지도 모른다

동거나 결혼이나 법적 구속력만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정도의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모텔 대신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관계라면, 좀 더 친밀하고 안정된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나"는 클로이의 모든 면에 반한다

그러나 함께 살다 보면, 혹은 상대에 대해 좀 파악하고 나면 자신의 얼마나 근거없는 환상에 시달렸는지 금방 알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에게 부족한 면을 상대에게서 발견하고자 한다

실제 상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이상화 시킨 뒤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상대의 본모습을 알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상대는 그저 일관된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나의 환상이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하고, 또 실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는 클로이의 구두에 화를 내지만, 정작 같은 구두를 신은 우유 가게 주인에게는 아무런 적대감도 느끼지 않는다

사랑에 빠지면 그의 취향까지도 내 스타일로 만들고 싶은 어처구니 없는 소유욕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연인의 사소한 일상까지 규제하려고 드는 독재적인 태도에 대한 단 하나의 근거는,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렇지만 그런 소유욕이 없다면,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분석도 빼놓지 않는다

 

"나"는 결국 클로이에게 버림받는데, 이별을 극복하는 과정은 흡사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것과 같은 길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클로이를 사랑하면서 그녀가 자기 삶의 일부가 됐다는 얘기는, 그녀가 떠나면 자신의 일부도 무너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클로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의 새로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앤서니 라빈스가 말한 바로 그 신경회로를 끊는 과정일 것이다 클로이에게 길들여진 신경회로를 말이다)

저자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내리는데, 누구와 함께 있든 혹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 변하지 않는 내적 안정감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처음 클로이와 데이트 할 때 그녀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서스럼없이 거짓말을 하며 불안해 한다

모든 신경이 오로지 클로이에게 쏠려, 정작 자기 자신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나의 취향을 드러내기는 커녕 그녀에게 맞춰 급조해 내는 것이다

어떤 자리에서든, 누구와 함께든 나 자신에 대한 변함없는 안정감과 평화를 가질 수 있다면 아마 그는 도를 터득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클로이게 버림받은 후 자살을 시도하는데, 여기에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

클로이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그러므로써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 위해 스스로를 죽이려 들지만 정작 그녀가 돌아온다 해도 이미 나는 세상에 없다

그녀의 뉘우침을 받아들이려면 나란 존재가 숨쉬고 있어야 하는데, 자살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고 반면 그녀를 돌아오게 하려면 내가 죽어야 한다

결국 "나"는 비타민제를 몽땅 털어 넣었다가 뱉어내는 어리석은 과정을 통해 이 모순을 깨닫고 다른 전략을 택한다

 

그것은 "예수 컴플렉스"라 명명할 수 있는데, 클로이를 나쁜 여자로 나는 선량한 희생자로 만드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내가 부족하고 못나서 모든 게 완벽한 클로이가 자신을 떠났다고 믿었지만, 이 컴플렉스를 적용하면 "나"는 어리석은 클로이에게 배신당한 가엾은 순교자가 된다

예수를 못박아 죽인 유태인들처럼, 클로이는 "나"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내 친구인 윌에게 가 버린 것이다

기독교가 번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 순교 정신에 있다고 한다

옳은 것을 이야기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핍박해 죽임으로써, 거룩한 순교자가 되어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는 것이다

(좀 불경스럽지만) 만약 예수가 나사렛에서 책상을 만들다가 죽기 전 진리에 대한 책 한 권을 썼다면, 과연 사람들이 그의 사상에 열광했겠냐는 얘기다

 

사실 이런 식의 아전인수 격 논리는, 이별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친구와 바람나 미국으로 떠나 버린 애인을 두고 자기 비하에 빠지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나쁜 여자로 만들고 나는 희생자라 위로하는 게 정신 건강에 훨씬 이로울 것이다

그녀는 떠나갔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나"는 끊임없이 자신이 부족한 인간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스스로를 학대한다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떠나간 파트너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를 되새기는 게 현명한 처사다

(소설에서 "나"는 클로이가 없는 쓸쓸한 크리스마스를 지내기 위해 책을 몽땅 싸 들고 호텔로 들어가는데, 기회가 되면 나도 한 번 시도해 보고 싶다)

 

저자는 이런 "나"의 심리에 내제된 이기적인 심리를 잊지 않고 지적해 준다

칸트는 도덕적 명령을 수행하는데 있어, 결과보다 중요한 것이 동기라고 했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 정당화 되는 공리주의와는 달리, 칸트는 그 행동을 취한 내적 동기가 불순하면 결과가 좋더라도 칭찬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나" 역시, 나 자신의 감정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클로이를 사랑한 것이므로 그녀가 "나"를 배신하고 떠났다 해도 그녀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처지가 못 된다

"나"나 클로이는 각자의 감정 욕구에 가장 충실히 부합되는 파트너를 찾았을 뿐이다

그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했다고 자부하는 "나"의 동기가 실은 클로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라면, 특별히 내가 클로이 보다 도덕적으로 나을 것은 없다는 얘기다

 

어쨌든 "나"는 남녀간의 사랑 자체를 무의미하게 여기는 금욕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사랑이란 어린 시절 부모에게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채우기 위한 과정이라 믿는 낭만적 실증주의에 경도되기도 하지만, 결국 이런 이론들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금욕주의는 사랑이 주는 고통을 현명하게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피할 따름이고, 낭만적 실증주의 역시 원인을 찾는다고 해서 해결책까지 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성간의 사랑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대신, 새로운 연인을 찾으므로써 다시 용감하게 사랑에 대항한다

"나"가 이번에는 보다 현명하게 처신할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법이니까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목은, 연인의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유머가 필수라는 문장이다

이거야 말로 연인 사이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 생각되는데,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나르시즘에 빠져 사는 동물이라면 아무리 사랑이란 이름을 포장한다 해도 나보다 열등해 보이는 상대의 단점들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차이점을 나보다 못하다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중요하지 않은 결점들을 참고 넘어가려면 문제를 심각하게 의식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가 클로이의 구두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자 그녀는 창 밖으로 구두를 던져 버리는데, 그 후 그들은 상대의 취향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마다 "날 창 밖으로 던지지는 말아 줘"라고 애교를 부린다

연인 사이에 유머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면, 실상 심각하게 고민할 일들은 아주 적어질 것 같다

 

이 소설의 진정한 매력은 연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생각과 감정들을 철학적으로 끌어냈다는데 있다

그 흔한 남녀간의 사랑을 얘기하면서도 저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칸트 같은 대철학자들의 이론을 쉽게 인용한다

동화를 통해 철학을 쉽게 설명하는 기분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인간에 대한, 혹은 "우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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