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기독교 (양장) 믿음의 글들 18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외 옮김 / 홍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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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해, 루이스는 아주 쉽게 실천 방법을 가르쳐 준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억지로 생기게 애쓸 것이 아니라, 일단 사랑한다고 가정하고 행동하다 보면 자연스레 감정도 생길 거라고 말한다

유태인들을 미워해서 학대했으나, 학대하다 보니 더욱 미워지는 악순환을 역으로 이용하라는 것이다

선과 악의 감정은 모두 복리로 증가한다고 한다

정말 그 말이 맞다

미워하면 할수록 더욱 미워지고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좋아진다

감정이 계속 증폭된다고 해야 할까?

기독교적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한다

사랑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또 남을 사랑하라고 해서 그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다 잘했다고 칭찬하라는 말도 아니다

잘잘못을 따지지 말라는 게 아니라, 나란 인간이 실수투성이고 단점이 많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듯, 남에게도 마치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베풀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가 잘 되길 바라라고 한다

이를테면 유영철 같은 놈이 잡혔다,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고 욕한다

그러나 그가 자기 죄를 뉘우치고 좋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게 바로 사랑이다

유영철에 대해 자기가 평소 갖고 있던 온갖 스트레스까지 다 퍼부으며 마치 그를 단죄하는 것이 정의인 양 행동하는 것은 기독교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다


 

루이스는 교만을 가장 큰 죄라고 규정한다

교만은 남보다 우월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생긴다

사실 이것만큼 우리를 괴롭히는 감정도 없을 것이다

이런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는 것도 사실이다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위해 돈을 벌고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니라, 남보다 더 잘 살기 위해 애를 쓴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라고 해야 할까?

언젠가 읽은 우화집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피정을 갔는데 다른 사람들이 저녁 기도도 안 드리고 자 버리자, 기도를 드리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남들 흉을 본다

피정 왔으면서 저녁 기도도 안 드리고 자 버리냐고, 진실한 교인들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자 아버지가 슬픈 목소리로 말한다

아들아, 차라리 오늘 네가 기도를 안 드리고 자는 게 나을 뻔 했구나

이 아버지가 걱정하는 것이 바로 루이스가 말한 교만이었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보다 낫다고 여긴다면 그 마음이 바로 교만이다

교만의 함정에 빠지기란 얼마나 쉬운지!!

굳이 기독교적 계명이 아니라 할지라도, 남과 비교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사람을 불행하게 이끈다

비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비교를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운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지속적으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만히 내러벼 두는데도 정신 속에 살아남을 수 있는 신념은 없습니다 신념은 계속 붇돋워 주어야 합니다 사실상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 100명 중 정직한 논쟁을 거쳐 추론한 결과 믿음을 버리는 사람이 과연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성경읽기와 기도, 그리고 교회에 계속 나가야 함을 역설한 말이다

물론 나 역시 동의하는 바다

그렇지만 성경읽기와 기도까지는 그렇다 쳐도, 교회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많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사람들은 혼자 성장할 수 없다고 한다

교류를 통해 믿음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교류라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분위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부 교회는 종말론에 초점을 맞춘다

세상이 망하고 휴거가 일어나고 천년왕국이 세워진다는 말은, 상징적인 의미로 나는 믿는다

또 몇 년 내에 그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나는 구원받았고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대체 왜 그 종말에 그렇게도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세상의 종말을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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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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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설국을 읽었다

항상 읽어야겠다는 부담감만 가진 책이었는데, 오늘 다 읽었다

150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소설이다

연작식으로 드문드문 발표한 글들을 모은 거라고 한다

그래서 글의 흐름이 이어지지가 않고 끊기는 느낌이었나 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엄청난 타이틀 때문에 상당히 쫄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 재미는 없다

이런 소설은,즉 문장력이 빛나는 소설은 원서로 직접 읽어야 맛이 날텐데 번역서로 읽다 보니 아무래도 진수를 느끼기가 힘들다

저자는 성심성의껏 번역한 듯 하지만, 왠지 겉도는 것 같은 문장들이 많다

소리를 내고 밑줄을 그으면서 여러 차례 읽어야 하는 그런 문장 말이다

 

[금각사]가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치중한 반면 [설국]은 풍경 묘사에 주력한다

[금각사]가 1인칭 시점이라 당연히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또 [설국]은 3인칭 시점이라 아무래도 심리 변화에 덜 주력할 수 밖에 없겠으나, 어쨌든 두 소설은 기법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렇지만 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미시마 유키오를 아꼈는지 충분히 알 것 같다

미시마는 그가 딱 총애할만한 제자였을 것이다

난 [설국] 보다 [금각사]가 더 마음에 든다

왜냐면 금각사는, 설국보다 훨씬 읽기가 쉽다

풍경 묘사로 한 권의 책을 써 내려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설국이 높게 평가되는 것 같다

탁월한 문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보면 이렇게 멋진 풍경이 있구나, 정도로 떠벌이는 것으로 끝나는데, (즉 소설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아니라 그냥 배경 묘사 정도로) 이 소설에서는 눈덮힌 겨울 풍경이 주인공에게 끼치는 심리 변화의 추이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가와바타는 천편일률적인 풍경 묘사에 질려, 본인이 직접 여행 행장을 꾸리고 눈덮힌 니카타 현의 온천장에 머물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작가 자신이 매우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인 셈이다

일본도 눈이 참 많이 오나 보다

문득 이문열이 쓴 단편 소설이 생각난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주인공은 젊은 시절 절대미를 찾아 눈덮힌 강원도로 무전 여행을 떠난다

눈에 발이 푹푹 빠져 걷기도 힘들 정도의 눈보라 속에서 주인공은 절대미를 발견하고 감격에 겨워한다

이문열 특유의 화려한 미문체가 길게 이어진다

어쩌면 이문열은 금각사나 설국을 통해 절대미의 세계를 그리겠다는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왠지 그도 일본 소설, 이런 탐미주의 계열을 좋아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와 감성이 맞아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문열이 탐미주의 작가란 얘기는 아니고, 모티브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시마무라는 직접 보지도 않은 서양 무용에 대한 글을 쓰면서 살아가는 고급 실업자다

도쿄 서민가에서 태어나 가부키와 같은 전통 문화에 취해 살다가, 언제부터인가 서양 무용에 관한 책을 탐독하더니 여기저기 평론을 발표하게 됐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빈둥빈둥 지내며 너무 무기력해지지 않기 위해 산을 타고 온천장에서 며칠 묵어 가곤 한다

그는 이미 결혼도 했고 도쿄에서 산다

이 소설이 발표된 시점이 1935년이니, 일본 사람들 역시 서양인이 직접 하는 발레 공연을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마무라는 독학으로 선진 예술을 접하고, 실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감상에 취해 마치 천국의 시를 쓰듯 몽환적인 얘기들을 잡지에 발표하고 그것이 먹혀 들어간다

하긴 1930년대에는 글자만 알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였으니까, 시마무라 같은 고급 지식인들이 충분히 놀면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온천장에서 만난 고마코는 게이샤다

게이샤나 기생이라고 하면 왠지 예술도 좀 아는 나름대로 풍류를 즐기는 신분 같은데, 따지고 보면 결국 창녀 아닌가?

화대를 받고 몸을 파는 창녀 말이다

시마무라는 외국 책을 번역하고 자비 출판까지 하는, 더구나 무용에 대한 글까지 발표하는 고급 지식인이다 (유명하진 않지만)

더구나 그는 아내까지 있고 도쿄에 산다

우리로 치자면 서울 사는 평론가가 잠시 강원도 산골에 머물면서 창녀를 불러다가 섹스는 않하고 말상대를 하는, 그런 장면일 것이다

 

눈 때문인지,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순백의 미를 가진 여자라 생각하고 함부로 다루질 않는다

시마무라는 일종의 탐미주의자 같다

어쩌면 고마코에게 우정 비슷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하긴 이제 겨우 열 아홉살의 어린애나 다름없는데, 그녀를 상대로 성욕을 풀기는 좀 그랬을 것이다

(물론 그 다음에 섹스를 위해 부른 게이샤는 겨우 열 일곱이었고 오히려 어린 애가 더 편하다는 말도 했지만)

더구나 처음 고마코를 만났을 때만 해도 일본 전통 무용을 배우고 샤이센을 연주하면서 연회에 불려 나가는 일종의 무용수 내지는 음악가 신분이었기 때문에 (즉 창녀로서의 생활이 익숙치 않은) 무용 평론가였던 시마무라는 아내와 함께 올 때 말동무 삼을 생각마저 한다

 

고마코가 시마무라에게 빠져드는 건 당연하다

일단 그녀는 나이가 어리고 자신을 성적으로 대하지 않고 점잖게 말동무로만 여기는 도쿄 남자에게 어느 정도 기대고 싶었을 것이다

시마무라 역시 먼 곳으로 여행와서 눈처럼 상쾌하고 깨끗한 어린 여자를 만나 특히 시골에서 보기 드문 실력의 샤이센 연주를 듣고 고마코에게 빠져든다

그런데 둘이 사랑에 빠지면 이건 영락없는 통속 소설에 지나지 않게 된다

아마 가와바타는 둘 간의 사랑에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시마무라는 그저 고마코에게 애틋한 연민의 감정 정도만 느낀다

둘이 한 방에 있는 게 여러 차례 나왔지만 끝까지 섹스를 하진 않는다

오히려 고마코는 손님들에게 불려 나간 날 꼭 혼자 묵고 있는 시마무라에게 다녀간다

여관에서는 고마코를 시마무라의 단골 손님 정도로 알았을 것이다

 

만약 내 남편이 여행지에서 창녀와 혹은 그 마을 여자와 친구 비슷한 관계를 맺게 된다면 난 어떤 기분일까?

반대로 내가 여행지에서 야릇한 감정을 주고받는 남자가 생긴다면 남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걸 바람피운다고 해야 할까?

둘은 분명히 죽고 못 사는 사이도 아니고 섹스를 한 것도 아니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것도 아니고 다만 1년에 한 두 번 여관에 묵고 갈 뿐이다

이 정도 관계라면 눈감아 줘도 되지 않을까?

[바람난 가족]에서도 황정민과 문소리는 서로 다른 파트너를 가지고 있고 그 사실에 그다지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소리는, 다행이네 당신이 말할 상대가 있어서, 라고 가볍게 반응한다

그나마 영화에서는 섹스 파트너였지만 이 소설에서 두 사람은 성관계도 갖지 않는다

뭐 이 정도라면 눈감아 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섹스를 안 했다고 해서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순결하다고 할 수 있을까?

루이스는 이런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섹스는 안 하고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라면 결혼했더라도 이성 친구가 괜찮다는 얘길까?

 

이 소설에서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헛수고" 라는 단어였다

도쿄 생활을 할 때 고마코는 화려한 가구를 쓰고 열심히 일기를 쓰면서 나름대로 교양있는 문화인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

그러나 결국 산골 온천장에 게이샤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도 어떤 남자의 요양비를 벌어 주기 위해서 말이다

나름대로 소설도 읽고 부지런히 샤이센 연습도 하지만 결국 다 그녀에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느낀 시마무라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뭔가 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가치없는 일이 되버린 느낌 말이다

시마무라 역시 무위도식하는 삶을 보낸다

고마코와도 언젠가는 헤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 역시 이제 가라고 그를 애써 보내려고 한다

여행지에서 잠시 인연을 맺고 마음을 줘 봤자 그 때뿐이고 마음을 준 사람만 상처입기 마련이란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자신은 창녀가 아닌가?

적극적이지도 않는 시마무라에게 고마코는 매달리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그가 온천장으로 내려오면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달려간다

 

요코의 존재는 뭘까?

고마코가 요양비를 댔던 유키오를 몹시 사랑했던 모양이다

여관의 하녀 일을 하는 걸로 봐서 신분도 매우 낮고 가난한 것 같다

그녀는 유키오가 고마코를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또 고마코가 게이샤 생활을 해서 요양비를 대고 있는 걸 뻔히 보면서, 유키오에게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못한 채 그 옆에서 정성스레 간호만 할 뿐이다

그가 죽고 나자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매일 괴로워 하다가 결국 고치창고에 불이 났을 때 2층에서 뛰어내려 죽고 만다

어차피 잘 됐다 싶은 심정으로 탈출할 생각을 안 하고 그냥 뛰어내린 것 같다

고마코 보다 더 불쌍한 여자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고마코는 요코보다 나이도 많고 게이샤 생활을 하면서 돈도 꽤 모은 것 같은데 요코는 하녀일을 할 정도로 더 가난하다

또 고마코가 유키오의 임종을 지키지 않을 정도로 그에 대한 마음을 털어 버린 반면, 요코는 미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들을 만큼 유키오의 죽음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순진한 여자애다

그러니까 요코가 제일 순진하고 고마코는 그녀보다는 낫지만 역시 시마무라에게 마음을 줘 버리고, 시마무라는 이 셋 중에서는 그래도 제일 냉정한 편이다

아마 나이가 많고 남자이며 돈이 더 많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장 강자가 바로 시마무라고 제일 약자가 요코인 셈이다

역시 요코는 가장 약자답게 자살로 생을 마친다

 

시마무라는 아름다운 요코에게도 마음을 뺏긴다

유키오에게 마음을 줘 버린 요코는 그를 사랑하나는 고마코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녀에게 잘 해 주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정작 시마무라는 이 두 여자를 가지고 마음 속의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고마코는 더 어리고 아름다운 요코에게 시마무라가 마음을 뺏길까 봐 초조해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한다

그녀에게 가라는 식으로 말이다

정작 도쿄의 집에 있는 시마무라의 아내는 시골에서 벌어지는 이 일을 알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여간 배우자가 밖으로 돌면 꼭 의심해 봐야 한다

 

온천장의 고치창고에 불이 나고 요코가 2층에서 떨어지는 걸로 소설이 끝나버려 좀 허무하다

어차피 결론이 없는 소설이긴 하지만 말이다

일본어로 직접 읽으면 훨씬 감명깊지 않았을까 싶다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면서, 혹은 여러 번역본을 읽어 봐야 할 것 같다

이런 문장 위주의 소설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걸 보면, 영어 번역을 엄청 잘한 것 같다

해설을 보니까 일본어 운율에 맞춰 아주 잘 써진 글이라고 하고, 또 가와바타의 노벨상 수상은 전문 번역가가 워낙 성실하게 영어 번역을 잘 한 탓이라고 한 걸 보면, 역시 성공하려면 작품의 질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알리냐도 아주 중요한 문제 같다

이문열이 상당히 미문체라 호흡이 길고 다소 관념적이고 수식적인 글들이 많지만, 영어 번역을 잘 하면 꽤 인기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황석영 작품들이 불어로 많이 번역된다고 하니까 한 번 읽어 봐야겠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이 과연 우리 문학을 그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내가 외국소설을 읽는 것도 절반 정도 밖에, 그냥 분위기 파악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가와바타는 제자 미시마처럼 자살로 생을 마친다

헤밍웨이가 권총 자살한 건 문학적인 죽음 어쩌고 하면서 일본인이 죽으면 꼭 군국주의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거 너무 도식적이라 싫다

가스를 틀어 놓고 74세의 나이로 자살했다고 하는데, 어떤 생각으로 죽었는지 궁금하다

탐미주의자였던 것 만큼 관념적이고 아름다운 죽음의 절대미, 뭐 이런 것에 끌려 죽지 않았을까?

미시마의 경우 일본 자위대의 재결성을 주장하면서 할복 자살했다고 하는데, 금각사가 너무 아름다워 영원히 남기를 바라며 오히려 거기에 불을 지른 주인공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 작가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

비단 일본 군국주의 작가여서가 아니라, 그는 다른 나라에 태어났더라도 자살로 생을 마쳤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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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라스 세계사 - 역사읽기, 이제는 지도다! 아틀라스 역사 시리즈 2
지오프리 파커 엮음, 김성환 옮김 / 사계절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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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사 놓고 내용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내버려 뒀다가 이번에 다시 읽었다

처음에는 지도도 열심히 보고 재밌었는데, 현대사로 올수록 복잡하고 모르는 내용들이 너무 많아 좀 지루했다

천천히 인터넷 찾아가면서 읽어야 하는데, 빨리 읽을 욕심에 대충 넘어갔더니 뒷부분은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특히 2차 대전 이후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발전 상황은 하도 복잡해 머리가 흔들린다

이 지역에 대한 우리 관심이 그만큼 적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자꾸 지도를 보니까 어디 부근인지 감은 온다

이를테면 크림 반도가 흑해 옆에 있고, 발트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러시아 사이에 있으며, 알바니아가 이탈리아 건너편에 있는 것도 확실히 인지했다

또 오스트리아 제국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1차대전의 서부 전선은 뭘 의미하는지도 알겠다

조선시대 왕과 비교해 가면서 읽는 재미도 있었다

제일 놀랐던 건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3대의 통치기간이 루이 14세의 통지 기간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루이 14세는 칠십 몇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70년 이상을 다스렸다

정말 대단한 왕이다

영조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영조도 겨우 52년 동안 재위했을 뿐이다!!

 

시대구분은 확실히 된다

5세기부터 15세기는 중세 천년, 로마가 4세기 후반에 무너지고, 1세기 만에 게르만 민족들이 유럽 곳곳에 나라를 세웠다

비잔틴 제국은 6세기 이후부터 15세기까지 존재했고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대략 200년 동안 네 차례 시행됐고, 소아시아는 오늘날 터키 땅이며, 몽골은 13세기, 이슬람은 7세기, 불교는 기원전 6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이 동남아시아로 불교 전파시켰고 2세기에 중국, 4세기 한국, 6세기 일본으로 전파됐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가 1차 대전인데,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의 대립이었다

미국 참전으로 전세 역전됨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보불전쟁으로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

경제공황 1929년

1941년 태평양 전쟁

1962년에 알제리 독립

1492년 콜롬버스 신대륙 발견

 

멕시코가 아즈텍 문명, 페루는 잉카 문명이고 안데스 산맥을 따라 길게 뻗어있음

아르헨티나가 남아메리카 밑에 붙어있고 베네수엘라는 윗쪽, 페루는 길게 늘어짐

 

궁금한 점은 다음과 같다

 

1. 1차 대전 당시 1917년 혁명이 일어난 유럽의 가난한 나라 러시아가 어떻게 급속한 성장을 이루고 주변 지역을 점령했을까?

소비에트 공화국은 대공황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했는데 땅덩어리가 워낙 커서 자급자족이 가능했단 얘길까?

 

2. 미국은 어떤 과정을 통해 엄청난 영토를 갖게 됐는가?

미국사에 관한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3. 캐나다의 독립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4. 독일은 1차 대전에서 패한 후 히틀러가 집권해 프랑스와 러시아를 양 옆에 두고 전쟁을 벌이는데, 과연 이 정도로 군사력이 뛰어났을까?

어떻게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을 같이 유지할 수 있었는지, 당시 독일의 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하다

 

5. 유럽인이 대항해를 시작하기 전 아프리카의 모습은?

그리고 왜 아시아 보다 아프리카 노예들이 월등히 많았을까?

 

6. 일본의 근대화 성공 요인은?

고종이 즉위할 무렵 쿠테타로 옹립된 메이지 천황은 아무래도 입헌 군주였던 것 같다

일본은 왜 그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을까?

우리도 흥선대원군이 강력하게 개방정책을 폈으면 성공했을까?

일본의 단시간내 강대국 진입은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전체적으로 아주 유용한 책이었다

간략한 설명과 함께 지도가 매 페이지마다 제공되어 이해하기 쉬웠다

틈나는대로 여러 번 봐서 기본 개념을 익힌 후 다른 개론서에 도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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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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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문제와 계급 문제 어떤 게 더 먼저인가?

김규항은 페미니즘을 부르주아 여성들의 신선놀음 따위로 격하시켰다고 저자는 흥분하지만, 어떤 문제에 있어 우선순위는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여러 가지가 얽혀 있다면 먼저와 나중은 어쩔 수 없이 구분될 수 밖에 없는 거 아닐까?

만약 전문직 여성이 페미니즘을 주장한다면 그건 돈많고 시간많은 여자들의 말장난에 불과한 것인가?

정희진의 말마따나 "대다수의 여성들은 가사 노동과 임금 노동 두 영역에서 남성보다 두 배로 일한다"

팔자좋은 부르주아 여성이 아니라면 요즘은 대부분 맞벌이를 하고 있고 서민층, 그러니까 노동자 계층의 여성들은 훨씬 적은 임금으로 훨씬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김규항은 윗쪽을 보고 있고 정희진은 아래쪽을 보고 있지만, 둘 다 틀린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교수 같은 지식인 계층의 여성 페미니스트들 얘기를, 과연 식당일 같은 막노동을 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긴 하다

결국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매우 이질적인 다양한 계층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 이런 식의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전체로 뭉뚱거리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얘기 아닐까?


 

이 부분은 인정한다

가정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한다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경실이 남편에게 구타당했을 때, 남편보다 잘 나가는 아내에 대한 컴플렉스라고 동정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아내에게 치여 사는 남편을 동정하는 분위기였다

한국 사회에서만 용납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가해자가 피해 여성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기 때문에 남편이 더 큰 피해자라는 황당한,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바로 여성에게는 다른 어떤 사회적 권력 보다도 성별 권력이 더 압도적으로 작용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성별을 독자적인 사회 모순, 정치 제도로 인정하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문제를 하나하나 따지고 들자면 너무 복잡하고 힘들어진다

정희진 말대로 집에서 설거지 안 하기는 마르크시스트든 파시스트든 마찬가지다

남성 중심 논리로 여성을 억압하기는 둘 다 똑같다는 얘기다

그렇게 따지면 아빠 말대로 진보라는 것 역시 권력을 잡기 위한 명분에 불과한 게 된다

만약 정희진의 비난대로 진보 세력을 규정한다면, 대체 진보라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너희도 똑같다는 말 밖에 더 되는가?


 

1. 가정폭력은 개인의 일이 아니다

공적 영역으로 끌어내서 가정이란 말을 빼고, 폭력이라는 관점으로 볼 때 해결책이 나온다

 

2. 정신대 문제는 여성의 인권 침해라는 것이 핵심이다

일본 남자들에 의한 성폭력은 문제가 되고, 한국 남자들에 의한 성폭력은 괜찮다는 인식을 버리자

정신대 문제를 민족주의로 환원시켜 버리면 여성 폭력이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우리도 일본 여자들을 강간하자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또 국가 위주의 과거 청산 대신 민간 차원의 과거 청산이 필요하다

 

결국 아빠가 말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서정주나 이완용 같은 일부 몇 사람에게 친일 혐의를 씌운다고 해서 친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IMF 때 많은 직장인들이 실직되면서 여성 근로자를 우선적으로 내보낸 이유가, 남자들은 가장이라는 명분 때문이었다

즉 여자는 직장 그만둬도 남편이 있기 때문에 더 낫지 않냐는 것이다

마치 히틀러가 독일 여성들에게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함으로써 (가족주의와 모성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가장인 여성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한 부모 가정도 많고 이혼률도 높은 상황에서, 여성이 가장인 경우도 드물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남편이 실업자인 경우도 많고 독신 여성도 많다

여성이 가장인 경우는 회사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는가?

결국 이런 논리는 남편이 가장으로써 직업 활동을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정상적 범주에 들지 않는 모든 경우는 다 비정상으로 간주되어 차별의 근거가 된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라는 국가주의와 다를 게 없다

개인의 선택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또 모든 인간을 집단으로 범주화 시킨다

그 범주 내에 들어가지 않는 개인은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가 없다


 

"일상의 폭력이 인권의 문제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차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많은 이들의 일상을 규율하고 있는 외모, 학벌, 나이, 서울 중심주의 등으로 인한 차별 사안도 인권 침해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일상 폭력을 인권 문제로 제기한다?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서울 중심주의는 대다수의 지방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TV를 보면 의례껏 서울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대한민국의 5천만 시청자들이 서울 지리와 문화를 다 알고 있을 것을 전제한다

드라마야 그저 잠깐 즐기는 것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현실에서도 이런 일들이 너무나 비일비재 하다는 것이다

서울에 대한 지방의 소외 문제는, 학벌 문제 만큼이나 심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모든 권력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즉 모든 담론과 사건들이 다 서울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지방민들은 끼어들 자리조차 없다

지방 대학 교수조차도 이름만 걸어 놀 뿐, 활동 무대는 서울이다

진짜 지방에 거주하는 교수들은 중앙 무대에서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논객들이 교수 타이틀을 얻기 위해 이름만 지방 대학에 걸어 놓는 식이다

서울 중심주의는 문제 제기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정희진은 성매매의 완전 근절을 외치는 것인가?

성매매 여성들이 자신들도 노동자라면서 노조 설립을 주장했을 때, 인권위원회 같은 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반대했다

성매매를 노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남자들에게 자신의 성을 파는 행위를 통해 먹고 산다

그런데 만약 성매매가 불법화 되고 처벌의 대상이 된다면 간단히 말해서 밥그릇을 뺏는 행위가 되고, 또 도덕적 비난도 계속 감수해야 할 것이다

성매매의 완전 근절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어떤 의미로든 섹스는 본능적인 것이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제도라 할지라도, 식욕만큼 강렬한 게 바로 성욕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즉 이성과의 합의를 통해 성욕을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은 돈을 주고서라도 자신의 성욕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돈을 주고 살 수 없다면 최악의 해결책, 폭력을 통해 성을 사는 강간을 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여성의 권리, 이런 시각 말고 좀 더 보편적인 개념으로 성 문제를 보면 안 될까?

인신매매 같은 강제적인 과정을 통해 성매매를 하는 것 말고, 자발적으로 성판매를 하는 경우는 정당한 노동의 행위로 인정하면 안 될까?

아무리 관념적이고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도 성매매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과연 모든 남녀가 가정 안에서만 혹은 파트너 하고만 섹스를 할 수 있을까?

파트너를 만들 능력이 없는 사람은 평생 성욕을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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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존 버거 지음, 박홍규 옮김 / 아트북스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피카소도 마찬가지로 그의 독립성을 유지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사람과 섞일 수도 있어다. 그의 상업적 성공은 그런 협력의 증거다. 또한 그가 출연한 영화, 포즈를 취해준 사진, 응한 인터뷰도 마찬가지 증거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아무리 순수했다고 해도, 그의 정력에는 매우 약삭빠른 사업가 기질이라는 얼룩이 배어 있다.

 이는 피카소가 위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성공 때문에, 그가 브란쿠시보다 덜 진지한 미술가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실패는 그 자체가 도덕적이라고 보는 낭만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세속에서의 실패는 그 자체로 하나의 불행일 뿐이다. 피카소는 브란쿠시와 다른 기질을 가졌고, 그의 기질이 그의 천재성을 보존하면서도 성공하게 만들었다.

 

 왜 그는 스스로를 이상화했는가?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왜 그는 자신의 천재성이 지닌 원시적인 성향을 그토록 신중히 보존하여 그것이 고상한 야만인의 수호자로 봉사할 수 있도록 했는가? 그것은 이기심이나 허영심의 결과는 아니었다 자신의 고상한 야만인을 이상화함으로써 그는 루소처럼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비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평생 혁명가였다는 진지한 믿음의 근거였다 또한 그 자신을 혁명가라고 믿게한 것이기도 하다 비록 동시대 유럽인 중에서 피카소만큼 현대 정치와 직접 접촉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가 스페인으로 돌아갔다러다면 의심할 바 없이 그는 달리 발전했으리라. 스페인에서라면 그는 더이상 자신을 야만인으로 의식하지 않았으리라 이러한 의식은 피카소 자신과 그를 둘러싼 낯선 환경의 차이가 낳은 결과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 차이는 피카소를 이국적으로 보게 만들었고 어느 정도로는 그가 이것을 조장했다 왜냐하면 그가 이국적이 되면 될수록 그는 자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상한 야만인에 더욱 가까워졌다 또한 자신을 이국적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좀더 강력히 비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공에 대한 피카소의 태도 속에 숨어 있는 역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피카소의 근본적인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철저히 위장되어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어려움이다 그의 조국에서 추방당한, 다른 세기에 속하는, 자신이 사는 부패한 사회를 비난하기 위해 그 자신의 천재성이 지닌 원시적 성격을 이상화하는, 그래서 자기만조겡 빠진,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끝없이 일해야 하는 미술가를 상상해보라 그의 어려움은 어떤 것일까? 인간적으로 너무나도 외롭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외로움이 그의 예술에서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무엇을 그릴지 모른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그가 주제를 모두 소진했음을 뜻할 것이다. 그는 정서나 감정 또는 감흥을 소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것을 담아낼 주제를 소진했다는 뜻이리라. 이것이 피카소의 어려움이었다. 자신에게 무엇을 그릴까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그 질문에 혼자 답해야 한다는 것.


 

존 버거가 피카소를 비판하는 핵심이 담긴 글들이다

간단히 말해 그는 천재라는 자기확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 자체를 불필요하게 느꼈고 연구를 통한 회화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자기 내부에 있는 고상한 야만인의 정서를 계속 키우면 그만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는 주제가 없다고 했다

 

"벨리니의 누드, 브뤼겔의 마을, 호가스의 감옥, 고야의 고문, 제리코의 정신병원, 쿠르베의 노동자들, 이 모든 것들은 미술가가 이전에는 무시되거나 버려진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한 결과였다"

 

말하자면 피카소는 이런 주제가 없었다

깊이 연구하고 천착할 주제가 없었고, 다만 자신의 천재성에서 기인한 감정이나 정서 등을 그림에 쏟아내면 그만이었다

뭐든 그리기만 하면 환호를 받았으니 더더욱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신뢰하고 유일한 믿음의 근거로 삼았을 만 하다

 

피카소가 스페인으로 돌아갔더라면 절대 고상한 야만인 정신을 계속 유지하지 않았을 거라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프랑스는 이미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는 가장 발전한 사회였고 반대로 그의 고향 스페인은 봉건 제도 하에 있는 전근대적 사회였다

그러니까 스페인에서는 고상한 야만인 그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고상한" 이라는 형용사가 붙으려면, 반드시 현대적인 모순이 가득한 사회, 기술 발전과 진보에 따라 민주주의와 기본적인 자유를 누리는 근대적인 사회에 살고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스페인은 아직도 고상한 "야만인" 상태였으니, 현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굳이 고상한 야만인 개념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는 야만 그 상태였다

그러니 피카소가 고상한 야만인 운운하는 것은 전혀 혁명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진보와 발전을 외쳐야만 현 사회에 대한 혁명이 가능했으리라

 

놀라운 것은 망명자가 어떻게 가장 현대적인 사회에서 그토록 열렬하게 완벽하게 받아들여졌나 하는 것이다

망명자라고 하면 고국에서 추방당해 이방인으로써 외국의 주류 사회 언저리를 헤매는 불쌍하고 처량한 정서를 생각하기 쉬운데, 피카소는 정반대로 이국에서 가장 열렬하게 환영받았고, 오히려 그 사회의 모순을 비판함으로서 혁명가 이미지까지 얻어서 더욱 투쟁적인 지식인으로 떠받들여졌다

그러니까 혁명가이면서도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는 가장 부유한 화가였으니 매우 이중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야 할까?

존 버거는 최고의 부를 누리면서도 스스로를 혁명가라고 느꼈던 근거가 바로 고상한 야만인 정서라고 했다

그것은 자신의 천재성에 근거한, 내면의 본능 같은 거라고 했다

그 본능에 기대어 그림을 그리면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 혁명가가 되어 더욱 많은 관중들이 환호하고 엄청난 부가 동반되는 상황이니, 그가 굳이 연구를 할 필요성을 못 느꼈으리라

주제가 없을 수 밖에 없었으리라

 

존 버거는 피카소의 이중성을 철저하게 파헤쳤다

물론 그가 위선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만약 존 버거가 피카소에게 진정한 혁명가의 기질이 없었고 자본주의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위선자라고 말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가장 교조적인 비난이고 예술을 논할 필요도 없는 유치하고 수준낮은 짓이리라

과학도 그렇지만 예술 역시 어떤 이데올로기에 끼워 맞춰 비평이란 걸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나는 과학만큼이나 예술도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시대를 뛰어넘어 감동하는 게 아니겠는가?

만약 이데올로기에 의해 평판이 좌지우지 된다면 굳이 예술을 위대하다고 할 것도 없을 것이다

결국 공산주의가 망한 것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서, 휴머니즘을 무시하고 예술을 이데올로기에 종속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어쨌든 이 천재 예술가의 속마음을, 혹은 정신 세계를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까발린 평론가는 흔치 않을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그림 자체가 아닌 화가의 일상 생활이 하나의 평론이 되서 돌아다닐 정도로 엄청나게 추앙받는 우리 시대 최고의 천재 피카소의 이중성을 분석하려면, 엄청난 내공이 아니고서는 불가능 할 것 같다

사실 나도 약간 의문이긴 했다

공산주의에 가담한 화가가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토록 열렬히 숭배되고 최고의 부를 누렸을지 굉장히 궁금했고 모순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세계 대전이, 피카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는 저자의 말에 깊히 동의한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는 전쟁이나 사회 변화 이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평생을 자신의 천재성에 기대어 산 사람이다

또 사회 변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면 우리가 굳이 그를 천재로 떠받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말년에 감소되는 육체적 능력을 슬퍼하면서 그린 소묘 연작들을 보면 묘한 감동이 온다

특히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누드를 그리고 그 앞에 가면을 쓴 난쟁이 노인을 마주 배치한 소묘들은, 피카소의 속마음을 들여다 보는 기분이 든다

이 화가는 확실히 솔직하고 자기 생각을 밝히는데 거침이 없다

어쩜 난쟁이 노인과 젊은 여자라는 아주 노골적인 배치를 했을까?

더구나 그 노인은 젊은이의 가면을 쓰고 있다

정말 대단한 발상이 아닌가?

나는 이렇게 성적으로 위축되고 늙었지만 (그래서 난쟁이로 표현한다) 여자에게는 젊은 얼굴로 대쉬하고 싶은 속마음!!

그러나 결국 그녀는 그 가면쓴 난쟁이 노인 대신 차라리 원숭이를 택하고 만다

한 달 간 그린 소묘의 마지막 그림에서 노인은 사라지고 원숭이와 여자만 남았다

오, 정말 대단한 피카소가 아닌가!!

 

그러고 보면 성적 욕망이란 예술의 매우 중요한 소재가 되는 것 같다

또 그 욕망을 자연스럽게 표현해야만 위대한 예술이 될 것 같다

억누르고 고상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가짜가 되버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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