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 - 빈에서 만난 황금빛 키스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3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의 다른 책도 그렇지만 이 책 역시 본격적인 클림트에 관한 미학서라기 보다는 가벼운 에세이 정도라 아쉽다.

대신 쉽고 빠르게 읽힌다.

아쉬운 점은 도판의 선명도가 떨어진다.

요즘 책들은 명화의 도판이 정말 선명한데 출판사의 노력이 아쉽다.

19세기 몰락해 가는 합스부크르 왕가의 마지막을 불꽃처럼 장식했던 클림트.

어찌 보면 퇴폐적이고 지나친 탐미주의 같기도 해 현대미술 보다는 과거의 느낌도 있는 화가인데 금세공업이라는 독특한 가풍 때문인지 자신만의 개성있는 미학을 완성한 것 같다.

평생 에밀리 플뢰케와 결혼하지 않고 연인 관계를 유지한 것도 신기하고 그녀가 당시 귀부인들과는 달리 유명 의상실을 운영한 디자이너였다는 점도 독특하다.

자신에 관한 글이나 인터뷰가 거의 없어 클림트의 연애관과 사생활을 엿볼 수 없어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210p

알마는 클림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그처럼 놀라운 재능으로 넘치는 사람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본 그는 남자로도, 또 화가로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사람이었다."

227p

클림트는 휴양지에서도, 그리고 빈에서도 일찍 일어나기 위해 저녁을 일찍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클림트는 성실한 화가였다.

264p

실레의 드로잉을 본 클림트는 이 소년의 넘치는 재능에 압도되고 말았다. 

"제가 재능이 있다고 보시나요?" 라는 실레의 물음에 클림트가 "재능이 너무 많아, 너무 많아"라고 대답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295p

클림트는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화려한 삶을 살지 않았다. 물론 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긴 했지만 그것은 당시 빈의 부르주아들에게 유난한 사건은 아니었다. 여자에 대한 집착을 제외하면 클림트는 오직 그림을 위해, 그림을 그리면서 간소한 삶을 살았다.


<오류>

43p

엘리자베트 황후는 아들의 자살 이후 1899년 스위스에서 무정부주의자의 칼에 찔려 죽었다.

->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후 엘리자베트는 1899년이 아니라 1898년에 암살당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 - 1888~1897
제임스 S. 게일 지음, 최재형 옮김 / 책비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19세기 말,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의 여행기를 몇 권 읽었는데 이 책도 시대적 차이 때문인지 문장이 확 들어오질 않고 흡입력이 다소 부족해 천천히 읽힌다.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 즉 근대화된 사회의 계몽인이 전통 사회인 극동 지역을 방문해 그들을 관찰하는 수필은 당시 사회를 알려주는 귀한 자료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지루하다.

전에는 서양인이 동양인을 본다는, 문화상대주의 관점에서 생각했는데 비슷한 포맷의 책을 몇 권 읽다 보니 오히려 근대인이 전통 사회를 보는 시대적 관점이 더 핵심인 것 같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근대화가 덜 된 아프리카의 전통 부족 지역을 방문해서 의료 선교 등을 펼치고 여행기를 쓴다면 이 책의 저자처럼 가치관이 전혀 다른 전통사회를 신기하게 한편으로는 미개함을 안타까워 하지 않을까?

예컨대 저자는 계몽주의 교육을 받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근대인이고, 그가 방문한 조선은 비록 시대는 같지만 사실은 훨씬 오래 전의 고대 사회와 비슷한, 전통주의 가치관을 가진 나라였으니 단순히 문화적 차이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매우 달랐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저자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당시 조상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

사극에 나온 것보다 훨씬 더 우리 조상들은 중국을 지성으로 섬겼고, 개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생산력이 매우 낮았으며, 조상숭배는 서구의 기독교와 같은 위상을 갖는 종교였으며, 미신은 일상화 되었고, 여성과 농민들은 남성과 양반들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철저한 신분제의 나라였던 듯 하다.

19세기 말의 조선과 21세기 대한민국은 전혀 같은 사회라 할 수 없는 매우 이질적인 나라인데, 아직도 우리가 조상들과 공유하고 있는 특성들도 보인다.

밥 한 번 먹자는 빈말이나,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체면 위주 문화, 차린 게 없다면서 한 상 푸짐하게 내오는 겸양의 말, 의례절차나 겉모습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자기 자신의 감정보다는 남의 이목을 훨씬 중시하는 점은 너무나 똑같다.

이런 점은 정말 한국인의 특성 같다.


<인상깊은 구절>

45p

조선의 고질병은 바로 일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앉아서 시간을 허비하고만 있는 이 나라. 그러므로 곽씨처럼 일로 굳은 살이 박인 손을 가진 사람을 본다는 것은 아주 기분 좋은 사건이었다.

55p

포졸 한 명이 돌아와서는 나리께서 준비가 되셨다며 우레와 같이 큰 소리로 고했는데, 서양식 사고를 하는 내게 동양의 이와 같은 예의 격식은 참으로 위압적인 것이었다. 아아! 애잔하도록 낡은 동방이여! 이러한 광경은 내게 타고난 재능으로 미래가 창창하던 사람이 음주와 불운 속에서 결국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마는 그런 장면을 떠올리게 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포졸의 균형 잡힌 자세와 행동에 배어 있는 무언가가 그를 여전히 신사답게 느끼도록 하였다.

76p

조선에서는 짐수레같이 바퀴 달린 운송 수단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가축조차 짐을 지고 갈 수 없는 길이 많아서 결국 나라의 모든 힘쓰는 일은 상놈의 두 어깨가 담당했다. 

80p

일생 동안 우리가 실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직접 듣는 것은 이보다도 훨씬 적다. 결국 이것은 앎이라는 삶의 기능을 얻기 위해 우리가 무엇보다 훨씬 더 책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81p

조선에서 '독립'이란 말은 새로운 개념이다. 단어 또한 그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 만든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한 번도 다른 존재로부터 분리된 오롯한 자신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서양 세계에선 넓은 국토에 집이 한 채 그렇게 서 있듯 개인도 자신의 책임 하에 홀로 살아가는 반면, 동방의 사람들은 함께 일하고 집도 마을을 이루면서 반드시 함께 들어선다. 또한 서양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확장과 분화 작용을 통해 안에서 밖으로 뻗어가는 큰 힘인 데 반해, 동양에선 삶을 한정하고 응축하면서 그 중심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이 과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놈들이 차지했다. 사실 이들 상놈들의 능력 또한 너무나 쪼그라들어 있어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절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친한 사람 하나 더 붙여주지 않는 한 아무리 간단한 걸 시켜도 절망한 채 넋 놓고 있을 뿐이었다. 

87p

벼슬아치들에게 이러한 증오를 표출하는 가운데, 임금을 향해 품고 있는 이들의 충성심은 대단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설사 실제로는 아주 사악한 폭군일지라도, 상놈들은 왕을 현명함과 자애로움의 결정체이자 절대 죄를 범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신의 아들 혹은 절대 선, 옥황상제 등으로 불렀다. 다만 대궐의 신하에서부터 지방 관리까지,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모든 벼슬아치들이 나라를 축내고 있는 날강도이며 무법자일뿐.

 상놈이 같은 인간을 두려워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그들의 적은 '작은 악마'라고 번역될 수 있는 도깨비나 귀신이었다. 이들은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안 좋은 상황을 이 '작은 악마'들 때문이라 여겼기 때문에, 도깨비나 귀신을 잡아 가두거나 깊은 땅속에 묻는 방법을 찾느라 얼마나 진지하고 열심인지 몰랐다.

89p

어떤 일에도 안절부절못하는 법 없이 삶을 저렇게 평온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에 파인 저 깊은 주름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궁금하곤 했다. 나는 그것이 이 상놈들을 평생 따라다니며 그들의 삶을 속박하는 그것, 바로 귀신에 대한 공포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놈이 돌아가신 조상님과 맺고 있는 관계는 내가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들이 진심으로 독실하게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과연 그 행위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이들이 4대조까지의 모든 무덤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이복형제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증조할아버지의 육촌형제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 있노라면 이들이 조상님을 얼마나 극진히 모시는지 알 수 있었다. 대체 그 조상님이 뭘 남겨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매년 돌아오는 제삿날엔 어떤 조상님도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

125p

장교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만주의 무슬림들이 코란에 대해 거의 혹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요지는 돼지고기를 안 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식이라면 내가 만주에 살았으면 나도 무슬림이었다.

203p

나는 이 동방 사람들을 보면서 그것이 어떤 것이든 너무 영적인 것에 집착하면 반드시 재앙으로 귀결된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물질적 번영뿐 아니라 영적 풍요도 필요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도 때도 없이 이를 들먹이거나 여기에 의존해선 안 된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각자 제자리를 지킬 때 가정은 번창하고 이름은 빛날 것이다. 

229p

서양에서 중요한 가치가 부여되는 개인의 독립성 또한 조선 사람들에게는 전혀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우리 미국의 영광스런 표어 '여럿이 모여 이루어내는 하나'는 이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완전히 정신 나간 생각일 뿐이었다. 왜 인간이 서로 경쟁하며 치열하게 생존해나가야 하는가? 이들은 그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조선 사람들에게 삶이만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개인의 독립성이라는 것은 불신이며 의심이고 인간의 기본 도리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치 아이들이 꼭 모여서 노는 것처럼, 이들은 혼자 있으면 두 배로 편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불편한 것을 감내해가며 반드시 함께 어우러졌다. 그것 때문에 일이 두 배로 어렵게 되기도 했지만, 이것은 그들이 혼자 있음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이들 사고방식 자체가 서양인들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230p

아무리 생각 없는 미국인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 깊은 곳에는 노동이란 존귀한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 교육을 할 때도 어린으들은 어떤 식으로든 노동의 존엄성에 대해 배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다. 조선말로 노동을 뜻하는 말은 일인데, 이 단어는 손실, 손상, 나쁜, 불길한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을 표현하는 데 쓴다. 게다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가 의심의 여지없이 고대로부터 귀한 신분이라는 것의 증명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의 존엄성에 대해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부족한 것 같다. 어떤 인터넷 게시판에서 딸을 고생시키지 않고 월세받는 건물 물려주고 전업주부로 살게 하고 싶다는 글에 대한 댓글들이 죄다 찬양 일색이었다. 맞벌이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소명 의식 보다는 남편의 부족한 월급을 메꾸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고, 맞벌이 강요한다고 분노하는 댓들들을 보면서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노동은 곧 하기 싫은 일이다는 걸 느꼈다)

244p

양반 생의 제일 큰 목적은 자신이 죽고 나면 제사를 지내줄 아들을 가지는 것이다. 이들은 당연히 그 아버지 말씀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했다. 아들이 이렇게 아버지를 전적으로 따르도록 키워지고 나면 결국 그도 아버지만큼이나 쓸모없거나 못난 사람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주변의 귀감이 되는 아들이라 할 수 있었다. 

246p

양반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는 조상님들께 제사를 올리고 모시는 것이었다. 그의 인생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르고, 그보다 조금 먼 어른이 돌아가시면 조금 짧은 기간 동안 상을 치르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계속되는 단식과 제사는 그에 맞는 복장과 금전 지출을 요구했는데, 살아있는 가족 전체가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이러한 예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자신의 종교를 저버린 타락한 무슬림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260p

도망치던 청군은 평양으로 향하는 동안 지나갔던 모든 곳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조선의 여인들은 산으로 도망쳤고, 천상의 제국에서 왔다는 이 무뢰한들에게 약탈과 강도를 당한 노인들은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확실히 두 나라의 병사들이 평양까지 진군한 모습은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는데, 만약 일본이 조선에서 한 번이라도 점수를 딴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들이 반도를 가로질러 진군하는 동안 지난 곳마다 돈을 냈고, 현지 주민의 삶과 재산을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청군은 평양으로 뒤죽박죽 몰려들었고, 이때 부대를 먹이기 위해 매일 이백 마리의 돼지를 잡았다고 한다.

267p

조선은 이제 확실히 일본의 손아귀 안으로 들어갔다. 고종은 하는 수 없이 조선의 독립을 천명했다. 고종을 포함해서, 중국을 아주 높이 받들어 온 선대 모든 왕들의 그 조선 문명을 들여다보면 사실 왕은 독립할 생각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게 중국은 '대국'으로 위대한 중심이 되는 왕국이었다. 반면 일본은 난쟁이들이 사는 허접한 땅, 왜국이었다.

289p

공자의 가르침의 목적은 효를 다 하면 은혜를 입어 이승에서의 번영이 있을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아직도 조선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숭상하긴 하지만, 이러한 사상 체계가 실패했다는 것이 요즘처럼 완벽하게 증명된 적은 없었다. 제사를 올리고 예를 그렇게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람들의 조상은 자손들을 결국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다. 

307p

예배당은 지금 지어지고 있지만 김씨는 이것을 보지 못했다. 부활을 기다리던 그의 몸이 이미 땅속에 잠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충실했고, 삶이 거의 끝나 힘이 빠져나가던 순간까지도 그 힘과 용기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죽음과 부활! 가장 똑똑한 자들이 지식을 총동원하여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헛되이 찾아 헤매다가 결국 포기하고 망각한 채 죽어갔던 그것. 아무 것도 모르는 가난하고 늙은 이교도 하나가 그 비밀을 찾았고, 승리 속에 잠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목의 성장
이내옥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의 약력만 보고 미술에 대한 에세이인 줄 알았다.

도서관에 신간 신청하고 받아 보니 수필집이다.

정말 오랜만에 읽어 보는 수필이다.

270여 페이지의 작은 분량이고 수필의 특성대로 두어 장의 짧은 글들이 실려 있어 편안한 마음으로 읽었다.

휴식 같은 느낌이다.

표지 디자인도 편안하고 글 역시 감정의 과잉이 적어 깔끔하다.

오랜 기간 동안 박물관에 재직한 저자의 품격이 느껴지는 수필집이다.

안목, 특히 예술품을 볼 줄 아는 안목이란 많은 미적 체험을 통해 얻어짐을 새삼 깨달았다.

나 역시 처음으로 미술에 관심이 생긴 계기가 대학교 때 유럽 여행을 가서였다.

그 전에는 미술 시간에 지겹게 외운 미술 사조와 유명 화가 이름이 전부라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림을 실제로 접할 기회가 없었고 당시만 해도 도판으로 보기도 어려웠던 시절이다.

런던에 있던 내셔널 갤러리에 가서 실제로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접했을 때 가슴이 터질 것 같던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미적 체험이란 많이 보면서 느끼는 가운데 생기는 것이고 그 후 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좋은 취미가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자주 가는 곳이다.

작년에 갔던 교토 여행도 일본의 미의식에 대해 느낄 수 있었던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글 중에 동의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다.

첫번째는 김대중에 대한 평가다.

정치적 견해는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저자의 긍정적 평가에 반대한다.

나도 전라도 사람이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 그 후 노무현까지 당선됐을 때 너무 감격해 눈물이 났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외지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투표를 하기 위해 광주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갔다.

그렇지만 오늘날 북한 핵 위기에 대해 가장 책임을 느껴야 할 사람이 바로 김대중이라고 생각한다.

두번째는 새마을 운동이 농촌을 파괴시켰다는 것이다.

역사적 평가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박정희의 근대화 업적을 단순한 감상으로 가볍게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앞머리에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과 예산 투자에 대해 강조했는데, 경제력이 우선 향상된 다음에 문화도 가능한 것이다.

박정희에 의한 근대화가 없었다면 오늘날 풍요로운 문화 정책도 불가능 했으리라 생각한다.

새마을 운동을 천민자본주의, 농촌 파괴라고 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인상깊은 구절>

69p

이런 명품 업체의 전시를 보면서 뭔가 허전함이 남는다. 상품을 아무리 작품으로 포장한다고 할지라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역사성과 품격에 비추어 본다면 세상의 진정한 명품들은 모두 박물관, 미술관에 있다.

92p

최고 수준의 유물이기에 이를 소재로 세계 최고의 도록을 만들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해졌다.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까지 런던의 안개는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유명한 언급을 되새겼다.

136p

선승과 무사 계급이 결합하여 이룩한 중세의 미의식은 이후 일본인들의 미적 정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뭔가 알 수 없지만 그로부터 일본적인 우아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료안지 방장에서 바라보는 정원이다.

(나도 이 곳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우아했다. 아침 일찍 방문했는데 겨울 아침의 차가운 공기와 더불어 잊혀지지 않는 감상을 남긴 곳이다)

166p

담백, 의취, 청일, 평담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逸氣의 전형이 <용슬재도>이다. 중국 회화는 궁극에 문인의 정신, 즉 흉중일기를 표현하는 추상의 단계까지 나아갔다. 예찬은 문인 정신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렸고, 그것을 <용슬재도>에 담았다. 먼 훗날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려 그에 핍진했을 뿐이다.

179p

그 곳 방파제에 뜻밖에도 왕유의 시를 새겨 놓았는데, 자못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어 옮겨 적었다.

"그대에게 술을 따라 권하노니, 마음 편히 지내시게

세상 인정 뒤집어지는 것, 출렁이는 파도와 같지

오래도록 사귀어 온 사이에도 경계심 여전하고

먼저 출세한 이는 그러지 못한 자 비웃는다네

풀잎의 푸른색 가랑비에 젖어 더욱 짙어지는데

꽃가지 움을 트려 하나 봄바람이 아직 차갑구나

세상사 뜬구름과 같거늘 물어 무엇하겠는가

조용히 지내며 맛있는 것 마음껏 먹느니만 못하다네"

201p

르네상스 시대 당시 기독교 내부에는 모든 물질에 영성이 편재한다는 사상적 흐름이 존재했다. 신플라톤주의의 범신론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인간의 육체 가운데 신성이 존재한다는 관념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의 육체에 존재하는 신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렇게 보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신성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찬양이라 할 수 있다. ... 프로테스탄트는 은총에 의한 타력 구원을 강조하면서 가톨릭의 이단 포용을 공격했다. 그러자 가톨릭에서도 자구 수단으로 이단을 배격하기에 이르렀다. ... 세력을 얻은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 미사나 고해성사와 같은 성전례까지 배격했다. 청교도의 도덕적 엄격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로 인해 육체적 가치가 부정되면서, 육체에 신성이 존재한다는 르네상스 시대의 관념이 이제 이단으로 치부되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측 모두로부터 탄압받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대, 한반도로 온 사람들 - 다양한 종족이 세력을 겨뤄온 고대 한반도 이야기
이희근 지음 / 따비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에 읽었던 저자의 전작 <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과 내용이 겹쳐 개정판인 줄 알았다.

좋은 책은 재발간 되어 다시 주목을 받으면 좋긴 한데, 이름만 바꿔 같은 내용을 또 출판하는 경우가 많아 처음에는 약간 실망스러웠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재밌고 고대사에 대한 기본적인 맥이 잡힌다.

230여 페이지에 불과한 얇은 책인데도 너무 알차고 무엇보다 저자의 논지와 근거가 확실해 중언부언 하지 않아서 이해하기가 무척 쉽다.

저자의 다른 책, <산척, 조선의 사냥꾼>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내가 혼란스러웠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저자의 주장은 서문에 나온다.

한반도는 한민족이라는 단일 민족이 아니라 많은 외부의 유이민들로 이루어진 이주민의 터전이었다.

이주민의 가장 큰 핵심은 바로 중국으로부터의 망명 세력이다.

한반도 북부에 예맥족이 살았다. 남쪽에는 韓人이 살았다.

고조선이 평양으로 밀려 내려왔다.

연나라 유민 위만이 고조선을 점령하자 준왕은 남부로 내려가 마한에 정착했다.

진시황 통일 이후 진나라 유민들이 한반도로 내려와 진한과 변한이 세워진다.

기존의 한은 이들과 구별되어 마한이 된다.

이들이 내려오기 전에 이미 왜인도 한반도에 정착하고 있었다.

이 부분이 제일 인상적인 주장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은 허구라고 알고 있었는데 저자는 3세기~6세기까지의 왜인들의 정체를 인정한다.

당연히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조 기사, 왜인이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를 공격했다는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만큼 왜 세력이 강성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대를 이끌고 원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왜는 그 세력을 잃고 처음에는 가야, 즉 임나를 지배하고 신라와 백제를 괴롭혔으나 5세기에는 금관가야에 정복되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일본부는, 결국 지배체가 아닌 외교기관 정도로 전락했다고 파악한다.

그렇다면 5세기 전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왜인들은 본토의 야마토 정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일까?

저자는 5세기 이후의 임나일본부는 그저 외교기관 정도에 불과하고 야마토 조정으로부터 어떤 지시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기구였다고 하면서도, 실제 지배권을 행사하던 그 이전 시대의 왜인들에 대해서는 일본 본토와의 관계를 명확히 서술하지 않아서 헷갈린다.

저자는 또 변진한이 진나라 유민들이 세운 나라인 것처럼, 부여 역시 이주민이 건국한 나라로 본다.

부여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데,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나, 예맥족의 터전으로 이주해 지린시 근처에 부여를 세웠고, 그들에게서 쫓겨난 예맥족 일파가 압록강 인근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결국 한반도 북부를 전부 통합했다고 본다.

이들 중 일부가 남부로 내려가 백제를 세운다. 

저자는 예맥이 곧 말갈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한반도의 원주민은 예맥과 한인 두 부류였고, 환웅 집단이 토착 예맥족과 세운 나라가 고조선이고, 고구려, 백제, 말갈 등이 이에 속하고, 한반도 남부는 원래 있던 마한과, 진나라 유민이 세운 변진한, 그리고 왜인들로 구성됐다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한반도라는 공간으로 보니 보다 명확하게 체계가 잡히는 느낌이다.

맨 마지막 장의 기자동래설 비판도 아주 흥미롭다.


<인상 깊은 구절>

66p

최근 중국에서 고대의 연대 체계를 세우려고 추진한 대형 학술 프로젝트인 '하상주단대공정'에서도 요의 시대는 아예 논의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통시대, 특히 송나라 시대 중국 학자들이 요 임금의 실존을 가정해 추정한 그의 즉위 연대를 수용하는 현대 중국 학자는 전혀 없다. 이러니 요의 즉위 연대를 토대로 도출된 단군의 개국 연대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128p

예맥족의 한 분파인 고구려족이, 초기에는 예맥족의 영역 내에 자리한 소왕국에 불과했지만 대체로 광개토왕 시절에 예맥족 전체를 통합해 그 생활공간마저 모두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 집단은 부여에서 나왔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부여족도 예맥족의 일원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 현재로서는 부여족의 원래 근거지는 알 수 없지만 부여족은 예맥족의 터전으로 이주해 와서 부여를 세웠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주몽으로 대표되는 계루부는 신화의 내용과는 달리, 부여족의 일파가 아니라 부여족에게 쭃겨난 예맥족 분파로 볼 수 있다. 부여가 건국된 뒤에도 부여의 영역 내에 예성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사실로 보아, 부여 일대의 예맥족이 모두 주몽을 따라간 것은 아니고 그 상당수는 부여의 영내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55p

기존 한국 학계는 일본 열도에만 분포하는 독특한 무덤 양식으로 간주된 전방후원분 등 왜 계통 고분이 한반도 남부 일대에도 산재해 있는 상황에 대해, 그 존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부정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왜가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65p

이처럼, 당시 한반도 남부의 왜는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맞서 싸운 강력한 정치체였다. 왜가 백제 및 신라와의 역학 구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정보가 <삼국사기>에도 등장하고 있으므로, <광개토왕릉비문>의 신묘년 기사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 학계의 일반 견해는 이들 침략의 주체인 왜인이 그저 물품이나 인간을 약탈하는 해적 집단이라고 치부해왔다. 광개토왕이 회군 때 원정의 전리품으로 포로를 끌고 오는 행위는 '대고구려'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왜의 이런 행위는 해적질이라고 폄하한 학계의 견해 역시 자국사 중심 역사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왜와 관련된 기사가 <삼국사기>에서 장기간 사라진 이유는, 이 무렵부터 왜가 한반도 내의 역학 구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물론 왜의 세력이 추락한 주된 원인은 고구려와 두 차례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현재 가야 영역으로 알려진 지역에서는, 애초에는 왜와 가야가 공존하다가 왜가 먼저 패권을 장악했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오히려 가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다고 판단된다. ... 현재 가야 영역으로 알려진 지역에서는, 애초에 왜와 가야가 공존하다가 왜가 먼저 패권을 장악했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오히려 가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다고 판단된다. 비록 가야의 통제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한반도 남부에 존속해온 왜라는 정치체는 어느 정도 독자성과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 마침내 송 왕조는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등을 관할하는 '도독 6국 제군사'라는 장군호를 왜 왕에게 수여해 한반도 남부의 연고권을 인정했다. 5세기 전후 고구려, 백제, 왜 등은 중원 왕조에 조공하면서 경쟁적으로 작호의 제수를 요청했다.

186p

<일본서기> 흠명기에 따르면, 임나일본부는 임나(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 집단이다. 그 실체는 기껏해야 가야 지역에 잔존했던 왜인 집단의 대변 기구에 불과하다.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 역시 모두 임나의 부흥 및 가야 제국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외교 활동뿐이었다. 가야 제국, 특히 안라국 역시 백제, 신라, 왜와의 외교 교섭에 일본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일본 열도의 야마토 조정과 원활한 관계를 맺어 백제와 신라에 대해 야마토 조정이 자신의 배후에 있는 양하여 양국의 침략을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이 기록대로 금관가야는 5세기 중엽 인근 지역의 왜를 정복했다. ... 한때 한반도 남부의 왜인 세력은 가야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라를 압도할 정도로 그 세력을 크게 떨쳤다. 이런 왜도 고구려와의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전쟁에서 패배해 큰 타격을 받아 크게 약화되었다. 마침내 452년 무렵, 한반도의 왜 세력은 한때 자신들이 지배했던 금관가야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그 이후 금관국은 이들을 통제할 기구가 필요했다. 가야가 이들 왜인을 직접 통치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면, 간접적으로 통제할 기구라도 필요했다고 판단된다. 가야의 왜 통제기구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부'가 아니었을까.

194p

12세기, 즉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고려의 지배층은 자국사가 단군조선이 아니라 기자조선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당연히 시조는 기자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역사관은 1055년 거란의 동경유수에게 보낸 외교 문서 중 "우리나라는 기자의 나라를 계승하여 압록강으로써 경계를 삼았다"라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이 정보에 따르면, 14세기 초반까지는 단군이 고려 전체의 시조가 아니라 그저 평양 지역의 선조에 불과했다. 고려 지배층에게 단군이 건국한 나라로 알려진 고조선은 자국사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 시조가 단군이라고 주장하며 인용한 <고기>, <단군본기> 등은 고려 지배층 전체가 아닌 평양 일대에 거주했던 고조선 계통 주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던 전승을 기록한 문헌 자료였을 가능성이 크다. 

201p

주나라에 의해 상나라가 멸망하자 기자가 그 일족을 데리고 피신한 지역이 바로 대릉하 유역이었다는 해석을, 이들 청동기가 가능하게 해준다. 기자 일족이 대릉하 연안 지역을 거쳐 정착한 곳은 산둥성 일대로 보인다. 그럼 왜 '기자산동설'이 아니고 '기자조선설', 즉 기자동래설이 퍼졌을까? 그것은 아마도 기자가 잠시 중국의 동북 지방, 즉 랴오닝성에 망명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 대로, 기자와 그 일족이 대릉하 연안 지역에 잠시 동안 거주한 뒤 동북 지방에는 기자가 망명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기자 일족의 주력은 산동 지방으로 이주했을지라도 그 일부는 고조선 지역으로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고조선 주민 가운데 기자의 후예를 자처한 집단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 사실 기자가 조선에 망명했다는 시기인 기원전 11세기에는 조선에 관한 정보가 중원에 전혀 없었다. 중국 문헌 자료 가운데 조선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는 최초의 문헌은 <관자>와 <산해경>이다. 이들 문헌에 담긴 고조선에 관한 정보는 한대의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한대의 문헌 자료에서 비로소 기자가 조선에 망명했다는 언급이 등장하는 것은 한대 지식인의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한나라 지식인들이 기자동래설을 조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 중원 왕조는 옛 조선 지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려면 무력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사대 명분론에 입각한 이념적 통치 방식을 모색하였다. 이에 따라, 상나라 멸망 후 기자의 막연한 행적에 착안해 조작해낸 논리가 바로 기자동래설이었다. ... 이렇게 조작된 기자동래설을, 고려 이래로 한반도의 소중화주의자들은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중국에서 일찍부터 성인으로 추앙받던 기자가 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해 문명국가로 만들었다는 전설의 내용을 자랑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중국이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고 있다고 인식한 소중화주의자들이, 자신의 나라도 중국식 모델을 받아들여 또 다른 중화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심지어 그들은 원 제국 역시 중화 제국으로 인식했다. ... 흔히 일연은 김부식과 달리 자주적 인물로 알고 있지만, 그 역시 소중화주의자에 불과했다. ... 일연과 이승휴는 평양 일대 고조선계 주민들의 전승을 기록한 <고기> 등을 가지고서 중국의 요 임금과 같은 시기에 선조들이 나라를 세워 중국 못지않게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는 역사상을 만들어냈다. 더구나 요와 순의 관계처럼 단군에게 선양받은 기자에 의해 선조들의 첫 나라가 중국과 같은 문명국가, 즉 소중화가 되었다는 자랑스러운 역사상을 창안해냈다. 앞서 말했듯이, 일연과 이승휴는 부여나 고구려에 흡수된 고조선 계통의 일부 유민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부루나 주몽을 단군의 후손으로 조작한 전승 기록을 토대로 부여와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역사 체계를 만들어냈다. ... 신화에 불과한 고조선 건국 연대를 정부가 나서서 역사적 사실로 강요하는 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 정체성 정립, 남북 동질성 회복, 나아가 남북 통일에 기여할 수 있다면서, 단기를 정부의 공용 연호로 채택해야 한다는 국수주의 연구자들의 주장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오류>

164p

신라의 실성왕이 내물왕의 아들이자 자신의 동생인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고서야 왜와 화친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성왕이 미사흔을 보낸 것은 맞는데, 내물왕의 아들이자 미사흔의 형은 눌지왕이다.

저자는 혹시 실성왕을 내물왕의 아들로 생각하는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재미난 이야기 역사책
정기문 지음 / 책과함께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정말 오랜만에 보는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도서관에 신간 신청을 하고 막상 받아보니 너무 크기가 작아 가벼운 역사 에피소드 나열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정말 흥미진진하고 전근대 사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저자의 전작 "역자학자 정기문의 식사"도 예상 외로 재밌게 읽었고, 이 책은 더 재밌다.

역사적 에피소드들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역사학자답게 그 사건들이 갖는 의의와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설명해 준다.

전근대인은 집단으로 존재했고 우리처럼 시각에 민감하지 않았으며 수명이 짧았고 무엇보다 자연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부족했다.

지금 생각하면 중세의 마녀 재판이 황당하지만 왜 갑자기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휩쓸고 갔는지를 모르는 14세기 사람들로서는 무엇인가 원인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너무너무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 죄다 옮겨 적고 났더니 시간이 꽤 걸렸다.

다만 두가지 부분에 동의하지 못했다.

첫째는 남녀의 기계적 평등 부분이다.

저자는 오랜 역사 속에서 억압되어 온 여성들의 편을 들어 그녀들이 남성에 비해 얼마나 훌륭한 자질을 가졌는지 강조하고 각 분야에 여성 비율이 높아지도록 할당제를 실시하자고까지 주장했다.

그렇지만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여성들이 특별히 사고방식이 유연하고 언어 능력이 뛰어난 만큼 육체적으로는 남성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논리로 좀더 나아가면, 각자의 특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라고 오히려 제약을 두는 게 합리적일 수도 있게 된다.

의사나 판검사를 여성 할당제로 뽑지 않듯 군인이나 경찰 등도 결국은 같은 조건에서 채용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정말 체력적으로 부족하다면 특정 분야에서 특정 성이 우위를 차지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초등 교사 역시 임용고시에 주로 여성들이 합격하면 여교사가 많아지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사립 여학교를 다녀서였는지 중고교 때 여교사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사춘기 아이들이 주로 남교사에 의해 교육받는 건 별 문제가 없고 꼭 초등생은 남녀 교사가 함께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두번째는, 출애굽을 역사적 현실로 가정하고 글을 쓴 부분이다.

특정 종교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 되려면 보다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경:고고학인가 전설인가"를 읽은 후부터 나는 그 책의 저자 주장에 동의하여 최소설을 지지하게 됐고 출애굽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출애굽을 이집트 역사에 끼워 맞춘 부분은 전제가 틀렸으니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 외 부분들은 정말 재밌게 읽었고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제목이 너무 길어 눈에 확 들어오지 않아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43p

'시각적 후진성'을 갖고 있었던 전근대인들은 거울을 보는 데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한 초상화나 영정도 개성보다는 신분에 따른 전형적인 헝태로 그려지곤 했다. 12세기 말 어느 수녀원장이 남긴 수녀 60여 명의 초상화는 밑에 새겨진 이름을 보지 않고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과 표정이 똑같다. ...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세밀하게 살펴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외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 근대 초기인 16~17세기에도 화가는 원래 모습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은 대로, 혹은 기억나는 대로 초상화를 그리곤 했다. ... 전근대인들은 가족과 친족을 행동과 판단의 중요한 준거로 생각했다. 물론 이는 전근대인들의 삶이 친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80p

유대인들은 어차피 '지옥 불에 떨어질 존재'여서 고리대금이라는 또 하나의 죄를 보탠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고리대금이라는 말 자체를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중세에는 아무리 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더라도 고리대금이었다. 중세에는 돈을 빌려주는 일에 위험이 많이 수반되었기 때문에 이자율이 낮기 어려웠다. 특히 정치가나 귀족들은 상황이 어려울 때 돈을 빌리고, 나중에 지위를 이용해서 돈을 갚지 않으려고 했다.

83p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후에 클뤼니 수도원장 피에르는 유대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사라센보다 수천 배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은 죄가 많은 불신자들을 우리 곂에 놔둔 채, 사라센과 싸우기 위해 인명과 돈을 그렇게도 잃어가면서 세상 끝까지 가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111p

그리스 로마의 부자들은 이렇게 공공 행사나 건축, 시민들을 위한 축제에 돈을 기부함으로써 자신들이 평범한 시민과 다른 존재임을 확인시켰고, 이를 통해 신분을 유지했다. 이는 동료의 질시를 막는 방법이기도 했다. 고대 국가에서는 국가의 공권력이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 시민들의 미움을 샀다가는 언제 어떻게 해를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 그런데 그리스나 로마의 부자들은 외부인에게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즉 그들은 시민권을 가진 자만을 자기와 같은 인간이라고 여겼으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정복 전쟁을 벌여 외국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부리는 것을 정당하게 여겼던 사회에서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스나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의 시민이었기 때문에 부자들의 보살핌을 받았던 것이다.

114p

성경에는 병을 고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병자들이 병을 고치고 싶어 했던 이유는 단순히 온전한 육체를 얻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병을 고쳐야만 성전에 들어갈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당시의 믿음 때문이었다. 예수도 병은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 가난과 자선을 예찬함으로써 예수는 가난한 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 로마 시대의 교회는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니라 수많은 빈자와 장애인을 거느린 구호 집단이었다. 이 때문에 로마 시대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의 종교'라는 별명을 얻었다.

"무신론(기독교)이 갈수록 팽창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낯선 자에게 호의를 베풀고, 죽은 자의 무덤을 돌봐주고, 경건한 생활을 하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도 구걸하러 다니지 않고 저 불경스러운 갈릴리인들(기독교도들)이 자기들 종파의 가난한 자들뿐 아니라 (다른 종파의)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우리들이 서로 돕지 않고 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이 말은 비시민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로마인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율리아누스는 기독교가 이 점에서 자기들의 관습, 제도와 다른,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 중세 기독교는 이렇듯 예수와 빈민들을 일치시키면서 빈민들에게 베푸는 자선이 단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원과 직결된 문제라고 가르쳤다. ... 12세기 이전에 지어진 성당들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아담은 추운 겨울에 속옷만 입고 맨발로, 언 땅에 삽질을 하는 사람으로 그려졌다. 반면 13세기 이후에 아담은 따뜻한 봄날에 좋은 옷을 입고 쟁기를 끌거나 포도밭을 경작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노동이 죗값을 치르는 참회의 수단에서 숭고한 행위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모든 기독교인은 노동을 해야 하고 그 노동을 하는 모든 직업은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 성직자, 놀고 먹는 지배자, 부자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정신에 따라 서양인들은 자기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높아졌다. 이러한 심성 변화가 농업과 수공업 발전을 가져왔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생산양식을 추동해냈을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너무너무 동의한다. 나 역시 재산 여부와 관계없이 노동이야말로 소중한 것이고 직업이 곧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직업 대신 건물주 부모와 돈많은 남편감을 찾는 세태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161p

왜 아담은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때 그 '악행'에 동참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이 하와가 자신을 버릴까 봐 두려워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즉 하와의 길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처벌을 받는 것보다, 하느님의 길을 가서 혼자가 되는 게 더 두려웠을 거라는 말이다.

165p

오웰은 2개월간 광부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느낀 점을 그대로 표현하면서, 사회주의 지식인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자본가가 주도하는 현재의 문명을 전복하려 하면서도 노동자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며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이게 바로 강남 좌파 아닌가?) ... 이때 오웰은 절대 권력과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절절히 체험하고 (공산주의 사회 체제는 우리가 혐오하는 파시즘과 너무나 닮아 있다) ... 그는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이상으로 꿈꾸고 있지만, 현실사회주의 체제, 특히 중앙집권화된 경제체제가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부패한 권력이 되기 쉽다는 것을 지적했을 뿐이다.

201p

여기에는 티스로 대변되는 민중과, 재판관들로 대변되는 엘리트의 갈등과 대립이 나타나 있다. 원래 민중은 태곳적부터 여러 민간신앙을 갖고 있었다. 고대 말에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민중은 그런 신앙을 '기독교화'했다. 즉 자신들의 원래 신앙에 기독교의 색채를 입히고는 그것이 하느님이 허용한 신성한 관습이라고 주장했다. ...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인은 이 관습을 버리지 않고 조금 수정해서 유지했다. 그들은 음주를 약간 줄임으로써 그 관습을 하느님이 허락했다고 생각했다. ... 중세 지식인들은 이런 민간신앙을 크게 제어하지 않았지만,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신교 지도자들은 중세 가톨릭 내에 존재하는 이런 민간신앙을 '미신'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뿌리 뽑으려 했다. 가톨릭 지도자들도 신교의 이런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을 받아들였으며 중세 민간신앙 가운데 존재하는 '미신'을 철폐하려고 했다. 물론 근대 초에 벌어진 이 민간신앙과 엘리트 신앙의 전투에서 승자는 지배층이었다. 엘리트들은 민간신앙을 천박하고, 사악하며, 근거 없는 미신으로 규정해버렸다. 그리하여 민간신앙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색채를 띠게 되었다.

233p

중세에 책은 이렇게 귀하고 어렵게 얻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세 책에 담겨 있는 화려한 그림들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비싼 필기 재료에 고가의 채색비가 더해지고, 거기에 필사하는 사람들의 수고비가 더해졌다. 그 모든 것이 비쌌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성경 한 권의 값은 보통 크기의 장원에서 얻을 수 있는 1년 치 수입에 해당했다. 지금으로 설명하자면 작은 기업의 1년 치 수입이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248p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온갖 나쁜 짓을 해가며 선한 사람을 괴롭히고, 억울하면 결투를 신청하라고 말한다. 이길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는 이렇게 나쁜 제도를 인정했고, 결투로 인해 사람을 죽이더라도 죄로 처벌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신이 결투의 승부를 결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51p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존하던 사고방식은 17세기에 이르러 극복되기 시작한다. 17세기 서양에서는 천재들이 연달아 등장하여 우주를 새롭게 설명했다. 과학혁명은 과학기술상의 몇 가지 발명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이었다. 갈릴레이와 뉴턴은 우주가 신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구성되고 운동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람들은 비가 오거나 안 오는 현상이 단순한 자연현상임을 알게 되었다. 자연의 움직임에는 인간이 이성의 힘으로 알아낼 수 있는 고유한 법칙이 있다.

(근본적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성리학자였다는 것과 매우 비교된다)

266p

사람 안에 '신적 존재'가 내재해 있다고 생각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육체를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이 신적 존재를 해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철저한 금욕주의를 주창했다. 인간은 신적인 요소를 갖고 있으므로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다시 천사, 혹은 천사보다 더 높은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사실 이것이 기독교 신자들이 원하는 바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최후의 날에 신자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구원을 받으면 천사처럼 영적인 몸을 입게 되고, 하느님의 자식으로 인정받아 천사보다 더 높은 존재가 된다. 그런 날이 과연 올까?

272p

부르주아는 재산이 넉넉해서 하녀 여러 명을 두고 집안일을 시켰다. 그 덕분에 그들의 아내는 집안일은 물론 육아에서도 해방되었으며, 그 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따. 어떤 면에서 그들의 사치와 낭비는 남편들이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내를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만들수록 자신들의 부와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내에게 성적 매력이 넘치도록 최대한 미모를 가꿀 것을 요구했다.

279p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근대 초 서양인의 종교적 열정은 약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해졌다. 종교개혁을 전후해서 서양인들은 교리에 따르지 않는 삶에 대해 엄격한 통제를 가했다. 16~17세기는 진정 '신앙의 시대'였다. 청교도혁명, 30년 전쟁 등을 생각해보면 이 시기 서양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혁명을 일으키고 전쟁도 불사했다는 사실이 분명히 와닿을 것이다.

299p

서양에서는 가부장제와 기독교가 함께 발달하면서, 동양에서는 유교가 생활 속에 침투하면서 여자의 삶이 더욱더 고통스러워졌다. 남자들은 바람을 피우고 사창가를 들락거려도 별 문제가 도지 않았지만, 여자는 강간을 당해도 사회적인 멸시를 면할 수 없었다.

329p

이렇게 기하급수적인 인구 증가를 감당할 수 있는 사회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전근대의 모든 사회는 자체적인 인구 조절 시스템을 갖춰야 했고 이 시스템에서 많이 이용된 방법이 유아 살해, 특히 여아 살해였다. 이렇듯 고대인들이 유아을 살해했던 것은 인구 조절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그들을 잔인하거나 무지한 사람들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유아 살해를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고대인들은 결혼할 때면 아이를 많이 낳기를 빌었고 고대의 통치자들은 끊임없이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장려했다. 이런 모순적인 일이 왜 일어났을까? 고대인들이 인구 과잉에 시달리는 한편으로 인구 부족에 대한 우려를 씻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대사회는 현대의 가장 미개하고 못사는 나라보다도 죽음 앞에 무기력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 따라서 끊임없이 후손을 생산하지 않는다면 고대사회는 심각한 인구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대인들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자손을 낳고 그중 가장 튼튼한 놈이 살아남는 자연의 법칙을 수행했던 것이다. 물론 고대인들이 아이를 많이 낳고 싶어했던 것이 단순히 생물학적 욕구와 필요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등 종교와 부활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던 동양인들은 후손에게서 자손이 계속 이어진다고 믿었다. 즉 후손은 또 다른 자신이고 대를 잇는 것은 자신이 소멸하지 않고 영원이 사는 것이었다. 기독교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서양인들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339p

배나 체리를 훔쳤던 청소년들은 또래 집단이었고, 그런 '사소한' 범죄 행위는 집단의 유대감을 공고히 하는 수단이었다. 그들은 같이 어울려서 사회가 금지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즉 범죄나 일탈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들이 공동 운명체이며, 다른 누구보다도 친한 존재임을 확인한다. 청소년들은 간절히 친구를 원하고, 혹시나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친구의 관심을 얻기 위해 그리고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청소년기에 친구가 갖는 의미를 인정하지 않거나 과소평가하곤 한다. ... 어른들은 이런 청소년의 심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대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보다 자신들이 소중한 존재임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러나 가족의 정과 친구의 정은 다르다.

356p

전근대에는 시각의 비중이 근대보다 훨씬 작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문맹이었고, 영상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인은 때때로 시각을 경시하면서 시각을 잃은 것을 곧 신비한 능력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예언자나 주술자 가운데 시각 장애인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전근대에는 근대보다 청각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근대인은 책을 읽었지만 전근대인은 시장이나 마을 공터에서 떠돌이 이야기꾼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364p

세계의 주요 종교는 모두 고대에 만들어졌고, 고대인은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을 담고 있다. 창시자, 계승자, 사제는 모두 남성이고, 여성을 종교 생활에서 종속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여성들은 이런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교회, 성당, 절에 가면 신자들 대부분이 여성이다. 여성들이 스스로 주요 종교를 찾아 자신을 비하하는 설교를 반복해서 듣고 있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ee33fr 2022-05-12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검색하는 책 리뷰에서 몇번 마주친 후, 책에 진심인 분인것 같고 어느새 marine님의 리뷰가 책 고르는 기준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폭넓은 독서를 통해 남긴, 백여개가 넘는 리뷰를 골라 읽는것 또한 즐거움입니다^^

marine 2022-05-13 11:13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요즘은 먹고 사는데 바빠 책을 못 읽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