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대, 한반도로 온 사람들 - 다양한 종족이 세력을 겨뤄온 고대 한반도 이야기
이희근 지음 / 따비 / 2018년 5월
평점 :
오래 전에 읽었던 저자의 전작 <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과 내용이 겹쳐 개정판인 줄 알았다.
좋은 책은 재발간 되어 다시 주목을 받으면 좋긴 한데, 이름만 바꿔 같은 내용을 또 출판하는 경우가 많아 처음에는 약간 실망스러웠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재밌고 고대사에 대한 기본적인 맥이 잡힌다.
230여 페이지에 불과한 얇은 책인데도 너무 알차고 무엇보다 저자의 논지와 근거가 확실해 중언부언 하지 않아서 이해하기가 무척 쉽다.
저자의 다른 책, <산척, 조선의 사냥꾼>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내가 혼란스러웠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저자의 주장은 서문에 나온다.
한반도는 한민족이라는 단일 민족이 아니라 많은 외부의 유이민들로 이루어진 이주민의 터전이었다.
이주민의 가장 큰 핵심은 바로 중국으로부터의 망명 세력이다.
한반도 북부에 예맥족이 살았다. 남쪽에는 韓人이 살았다.
고조선이 평양으로 밀려 내려왔다.
연나라 유민 위만이 고조선을 점령하자 준왕은 남부로 내려가 마한에 정착했다.
진시황 통일 이후 진나라 유민들이 한반도로 내려와 진한과 변한이 세워진다.
기존의 한은 이들과 구별되어 마한이 된다.
이들이 내려오기 전에 이미 왜인도 한반도에 정착하고 있었다.
이 부분이 제일 인상적인 주장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은 허구라고 알고 있었는데 저자는 3세기~6세기까지의 왜인들의 정체를 인정한다.
당연히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조 기사, 왜인이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를 공격했다는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만큼 왜 세력이 강성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대를 이끌고 원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왜는 그 세력을 잃고 처음에는 가야, 즉 임나를 지배하고 신라와 백제를 괴롭혔으나 5세기에는 금관가야에 정복되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일본부는, 결국 지배체가 아닌 외교기관 정도로 전락했다고 파악한다.
그렇다면 5세기 전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왜인들은 본토의 야마토 정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일까?
저자는 5세기 이후의 임나일본부는 그저 외교기관 정도에 불과하고 야마토 조정으로부터 어떤 지시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기구였다고 하면서도, 실제 지배권을 행사하던 그 이전 시대의 왜인들에 대해서는 일본 본토와의 관계를 명확히 서술하지 않아서 헷갈린다.
저자는 또 변진한이 진나라 유민들이 세운 나라인 것처럼, 부여 역시 이주민이 건국한 나라로 본다.
부여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데,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나, 예맥족의 터전으로 이주해 지린시 근처에 부여를 세웠고, 그들에게서 쫓겨난 예맥족 일파가 압록강 인근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결국 한반도 북부를 전부 통합했다고 본다.
이들 중 일부가 남부로 내려가 백제를 세운다.
저자는 예맥이 곧 말갈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한반도의 원주민은 예맥과 한인 두 부류였고, 환웅 집단이 토착 예맥족과 세운 나라가 고조선이고, 고구려, 백제, 말갈 등이 이에 속하고, 한반도 남부는 원래 있던 마한과, 진나라 유민이 세운 변진한, 그리고 왜인들로 구성됐다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한반도라는 공간으로 보니 보다 명확하게 체계가 잡히는 느낌이다.
맨 마지막 장의 기자동래설 비판도 아주 흥미롭다.
<인상 깊은 구절>
66p
최근 중국에서 고대의 연대 체계를 세우려고 추진한 대형 학술 프로젝트인 '하상주단대공정'에서도 요의 시대는 아예 논의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통시대, 특히 송나라 시대 중국 학자들이 요 임금의 실존을 가정해 추정한 그의 즉위 연대를 수용하는 현대 중국 학자는 전혀 없다. 이러니 요의 즉위 연대를 토대로 도출된 단군의 개국 연대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128p
예맥족의 한 분파인 고구려족이, 초기에는 예맥족의 영역 내에 자리한 소왕국에 불과했지만 대체로 광개토왕 시절에 예맥족 전체를 통합해 그 생활공간마저 모두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 집단은 부여에서 나왔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부여족도 예맥족의 일원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 현재로서는 부여족의 원래 근거지는 알 수 없지만 부여족은 예맥족의 터전으로 이주해 와서 부여를 세웠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주몽으로 대표되는 계루부는 신화의 내용과는 달리, 부여족의 일파가 아니라 부여족에게 쭃겨난 예맥족 분파로 볼 수 있다. 부여가 건국된 뒤에도 부여의 영역 내에 예성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사실로 보아, 부여 일대의 예맥족이 모두 주몽을 따라간 것은 아니고 그 상당수는 부여의 영내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55p
기존 한국 학계는 일본 열도에만 분포하는 독특한 무덤 양식으로 간주된 전방후원분 등 왜 계통 고분이 한반도 남부 일대에도 산재해 있는 상황에 대해, 그 존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부정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왜가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65p
이처럼, 당시 한반도 남부의 왜는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맞서 싸운 강력한 정치체였다. 왜가 백제 및 신라와의 역학 구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정보가 <삼국사기>에도 등장하고 있으므로, <광개토왕릉비문>의 신묘년 기사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 학계의 일반 견해는 이들 침략의 주체인 왜인이 그저 물품이나 인간을 약탈하는 해적 집단이라고 치부해왔다. 광개토왕이 회군 때 원정의 전리품으로 포로를 끌고 오는 행위는 '대고구려'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왜의 이런 행위는 해적질이라고 폄하한 학계의 견해 역시 자국사 중심 역사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왜와 관련된 기사가 <삼국사기>에서 장기간 사라진 이유는, 이 무렵부터 왜가 한반도 내의 역학 구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물론 왜의 세력이 추락한 주된 원인은 고구려와 두 차례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현재 가야 영역으로 알려진 지역에서는, 애초에는 왜와 가야가 공존하다가 왜가 먼저 패권을 장악했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오히려 가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다고 판단된다. ... 현재 가야 영역으로 알려진 지역에서는, 애초에 왜와 가야가 공존하다가 왜가 먼저 패권을 장악했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오히려 가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다고 판단된다. 비록 가야의 통제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한반도 남부에 존속해온 왜라는 정치체는 어느 정도 독자성과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 마침내 송 왕조는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등을 관할하는 '도독 6국 제군사'라는 장군호를 왜 왕에게 수여해 한반도 남부의 연고권을 인정했다. 5세기 전후 고구려, 백제, 왜 등은 중원 왕조에 조공하면서 경쟁적으로 작호의 제수를 요청했다.
186p
<일본서기> 흠명기에 따르면, 임나일본부는 임나(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 집단이다. 그 실체는 기껏해야 가야 지역에 잔존했던 왜인 집단의 대변 기구에 불과하다.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 역시 모두 임나의 부흥 및 가야 제국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외교 활동뿐이었다. 가야 제국, 특히 안라국 역시 백제, 신라, 왜와의 외교 교섭에 일본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일본 열도의 야마토 조정과 원활한 관계를 맺어 백제와 신라에 대해 야마토 조정이 자신의 배후에 있는 양하여 양국의 침략을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이 기록대로 금관가야는 5세기 중엽 인근 지역의 왜를 정복했다. ... 한때 한반도 남부의 왜인 세력은 가야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라를 압도할 정도로 그 세력을 크게 떨쳤다. 이런 왜도 고구려와의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전쟁에서 패배해 큰 타격을 받아 크게 약화되었다. 마침내 452년 무렵, 한반도의 왜 세력은 한때 자신들이 지배했던 금관가야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그 이후 금관국은 이들을 통제할 기구가 필요했다. 가야가 이들 왜인을 직접 통치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면, 간접적으로 통제할 기구라도 필요했다고 판단된다. 가야의 왜 통제기구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부'가 아니었을까.
194p
12세기, 즉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고려의 지배층은 자국사가 단군조선이 아니라 기자조선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당연히 시조는 기자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역사관은 1055년 거란의 동경유수에게 보낸 외교 문서 중 "우리나라는 기자의 나라를 계승하여 압록강으로써 경계를 삼았다"라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이 정보에 따르면, 14세기 초반까지는 단군이 고려 전체의 시조가 아니라 그저 평양 지역의 선조에 불과했다. 고려 지배층에게 단군이 건국한 나라로 알려진 고조선은 자국사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 시조가 단군이라고 주장하며 인용한 <고기>, <단군본기> 등은 고려 지배층 전체가 아닌 평양 일대에 거주했던 고조선 계통 주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던 전승을 기록한 문헌 자료였을 가능성이 크다.
201p
주나라에 의해 상나라가 멸망하자 기자가 그 일족을 데리고 피신한 지역이 바로 대릉하 유역이었다는 해석을, 이들 청동기가 가능하게 해준다. 기자 일족이 대릉하 연안 지역을 거쳐 정착한 곳은 산둥성 일대로 보인다. 그럼 왜 '기자산동설'이 아니고 '기자조선설', 즉 기자동래설이 퍼졌을까? 그것은 아마도 기자가 잠시 중국의 동북 지방, 즉 랴오닝성에 망명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 대로, 기자와 그 일족이 대릉하 연안 지역에 잠시 동안 거주한 뒤 동북 지방에는 기자가 망명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기자 일족의 주력은 산동 지방으로 이주했을지라도 그 일부는 고조선 지역으로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고조선 주민 가운데 기자의 후예를 자처한 집단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 사실 기자가 조선에 망명했다는 시기인 기원전 11세기에는 조선에 관한 정보가 중원에 전혀 없었다. 중국 문헌 자료 가운데 조선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는 최초의 문헌은 <관자>와 <산해경>이다. 이들 문헌에 담긴 고조선에 관한 정보는 한대의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한대의 문헌 자료에서 비로소 기자가 조선에 망명했다는 언급이 등장하는 것은 한대 지식인의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한나라 지식인들이 기자동래설을 조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 중원 왕조는 옛 조선 지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려면 무력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사대 명분론에 입각한 이념적 통치 방식을 모색하였다. 이에 따라, 상나라 멸망 후 기자의 막연한 행적에 착안해 조작해낸 논리가 바로 기자동래설이었다. ... 이렇게 조작된 기자동래설을, 고려 이래로 한반도의 소중화주의자들은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중국에서 일찍부터 성인으로 추앙받던 기자가 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해 문명국가로 만들었다는 전설의 내용을 자랑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중국이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고 있다고 인식한 소중화주의자들이, 자신의 나라도 중국식 모델을 받아들여 또 다른 중화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심지어 그들은 원 제국 역시 중화 제국으로 인식했다. ... 흔히 일연은 김부식과 달리 자주적 인물로 알고 있지만, 그 역시 소중화주의자에 불과했다. ... 일연과 이승휴는 평양 일대 고조선계 주민들의 전승을 기록한 <고기> 등을 가지고서 중국의 요 임금과 같은 시기에 선조들이 나라를 세워 중국 못지않게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는 역사상을 만들어냈다. 더구나 요와 순의 관계처럼 단군에게 선양받은 기자에 의해 선조들의 첫 나라가 중국과 같은 문명국가, 즉 소중화가 되었다는 자랑스러운 역사상을 창안해냈다. 앞서 말했듯이, 일연과 이승휴는 부여나 고구려에 흡수된 고조선 계통의 일부 유민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부루나 주몽을 단군의 후손으로 조작한 전승 기록을 토대로 부여와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역사 체계를 만들어냈다. ... 신화에 불과한 고조선 건국 연대를 정부가 나서서 역사적 사실로 강요하는 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 정체성 정립, 남북 동질성 회복, 나아가 남북 통일에 기여할 수 있다면서, 단기를 정부의 공용 연호로 채택해야 한다는 국수주의 연구자들의 주장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오류>
164p
신라의 실성왕이 내물왕의 아들이자 자신의 동생인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고서야 왜와 화친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성왕이 미사흔을 보낸 것은 맞는데, 내물왕의 아들이자 미사흔의 형은 눌지왕이다.
저자는 혹시 실성왕을 내물왕의 아들로 생각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