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의 밥상 - 발기 속 음식 172
정혜경 지음 / 푸른역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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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걸맞는 좋은 책이다.

조선 왕실에서 만들어진 밥상을 실제 요리로 재현하고 요리법까지 상세하게 기록했다.

요리에 관심이 없어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눈으로 직접 요리 사진을 보니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일상 수라 뿐 아니라 각종 연회와 제사 음식까지 재현해 책값 45000원이 수긍이 간다.

서양의 요리처럼 아주 장식적이지는 않지만 전통 음식만의 단정한 멋이 있고 보기에도 담백해 보여 부담스럽지 않다.

27개월의 상례 기간 내내 하루 세 끼를 전부 실제 밥상처럼 만들어 신주 앞에 차렸다는 사실이 놀랍다.

어차피 산 사람들이 먹을 음식이긴 하지만 과연 유학의 나라라 봉제사 접빈객이 사대부 여인의 가장 큰 의무였다는 게 이해된다.

조선은 확실히 조상신을 숭배하는 유교의 나라였음이 틀림없다.



<인상깊은 구절>

51p

현재 종가의 제사상차림과 상당히 유사했는데 오히려 최근의 상차림이 좀 더 화려하다. 사실 조선 전기와 중기의 제례상차림은 채소 찬 위주로 차리는 소식의 형태가 일반적이었고 고기는 조상에 대한 효의 실천 차원에서 탕에 사용한 정도였다. 그러니 다시 검박했던 과거의 전통에 따라 간소하게 차리는 것이 오히려 더 조상을 위하고 전통에 맞는 상차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74p

특히 고종과 순종의 탄일발기는 다수가 전하는데 조선 후기 왕실에서 설 다음으로 큰 명절이었다고 한다.

107p

음식을 올리는 의식은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奠과 祭로 구분했다. 하관 이후부터 제가 등장하는데 이때부터 망자를 산 자가 아닌 조상의 신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이나 제와는 별도로 매일 식사 시간에 올리는 상식이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 사회에서 돌아가신 부모님께 올리는 경우 상식을 생전과 똑같이 봉양하는 효의 실천으로 간주하여 매우 중요시했다. 보통 27개월간 매일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바쳐 망자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다했다. 이러한 상식례는 상주로 하여금 효의 실천을 통해 죽음의 충격을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걸 보면 유교에서 조상은 단순히 공경하는 의미가 아니라 종교적 신이었음이 분명하다. 산사람에게 식사를 봉양하듯 3년 동안 아침 점심 저녁으로 실제 음식을 차려서 바치다니, 단순히 혼령을 위로한다면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377p

왕실의 선조 제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賓을 대접하기 위한 大享이므로 제물 진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497p

일반적으로 귀족의 상징은 육식이었다. 정치 권력의 표현 수단으로서 향연이 열렸으며 이를 통해 권력을 과시하고 봉건적 결속력을 유지했다. 장식적인 요리도 매우 발달했다.

519p

무사 정권은 검소한 것을 善 으로, 사치를 敵 으로 보는 금욕주의에 충실했다. 이는 요리에도 반영되어 막부의 향연 요리는 미식을 추구하지 않았고 금욕을 중시했다.

 현대 일본의 세련된 식생활 문화를 창조한 것은 궁궐이나 무사가 아니라 에도 시대의 부유한 시민들이었다. 일본에서는 17세기 후반이 되면 도시의 상인들이 지배계급인 무사보다 경제적 우위를 차지하고 시회적 실력을 갖춘다. 이 시기에 외식 산업의 발달이 눈부시게 이우어져서 일본의 대도시에는 동시대 유럽보다 훨씬 더 다양한 식당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일반 시민을 고객으로 하는 도시의 고급 레스토랑이 최상의 일본 음식 문화를 만들어냈다. 



<오류>

61p

저경궁, 대빈궁, 정호궁과 선희궁에서 춘분과 추분에 지내던 제사상에~

-> 정호궁이 아니라 진종의 생모, 정빈 이씨의 사묘인 연우궁이다.

269p

도판 - 순명효황후 민씨

-> 사진은 순명효황후가 아니라 순정효황후이다.

281p

왕대비는 효종황후다.

-> 왕대비는 효종이 아니라 효정왕후다.

497p

당대의 화려한 왕실 연회식은1368년 이탈리아 갈레아초 비스콘티 2세의 결혼식 연회와~

-> 갈레아초 비스콘티 2세는 1350년에 결혼했고, 아들인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1360년과 1380년 두 번 결혼해서 연도와 안 맞다. 검색해 보니 1368년 갈레아초 비스콘티 2세 시절에 밀라노에 스포르차 성이 세워졌는데 혹시 이 때 연회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499p

1378년 1월 6일 샤를 5세가 샤를 4세, 보헤미아 황제와 그의 아들 바츨라프, 로마인의 왕을 위해 연 연회를 묘사한 그림이다.

-> 샤를 4세는 프랑스의 국왕이고 샤를 5세의 할아버지 뻘이라 1328년에 이미 죽었는데 보헤미아 황제라니, 도대체 누군가 싶어서 찾아 보니, 카를 4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고 보헤미아 국왕인 카를 4세이다. 카를이 프랑스어로 샤를이지만 하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 카를 4세로 고쳐야 할 것 같다.

502p

리젠트 왕자 시절에는 물이 흐르는 상태에서 살아 있는 어류를 저녁 식사로 대접하는~

-> 리젠트 왕자가 누군가 했더니 섭정왕자라는 뜻이었다. 즉, 조지 3세 시절에 미친 아버지를 대신해 섭정한 조지 4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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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과 후원자 - 개정판
이은기 지음 / 시공아트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2016년도에 읽었던 책인데 표지를 바꿔 재간행된 책이라 처음에는 몰라 봤다.

표지 디자인은 강렬하고 잘 만든 것 같다.

무엇보다 도판이 너무 훌륭하다.

22000원이라는 가격이 싸게 느껴질 정도로 도판의 질이 좋고 본문에 나온 작품들이 99% 실려 있다.

미술사 관련 책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의 노력은 들여야 할 것 같다.

작품의 제작연도와 소장처까지 모두 기재되어 있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저자와 출판사의 성실한 태도에 박수를 보낸다.

처음 읽었을 때 썼던 리뷰를 보니 익히 알고 있던 내용이라 시시하다고 되어 있는데, 그 때는 아마도 책을 대충 읽었던 모양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군주들이 예술을 선전 도구로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세기 이후 순수미술에 대한 개념이 생기면서 회화와 조각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승격했지만, 그 전 시대만 해도 오늘날의 미디어 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해 경쟁적으로 수많은 회화와 조각들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의 평처럼, 이런 세속적이고 노골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어 훌륭한 예술품을 만들어 낸 많은 천재 화가들의 업적이 경이롭다.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위대함 때문에 오늘날에도 인류 최고의 예술품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리라.

르네상스 시대상과 미술의 역할에 대한 좋은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125p

이러한 소식망에 의해 이사벨라의 관심의 방향이 정해졌으리라. 이사벨라는 르네상스의 여걸이며 옛 미술품의 이름난 수집가였으나 작은 도시의 안주인으로 고대의 원작을 갖기에는 재력과 권력이 부족했다. 그는 만토바라는 주변 도시에서 로마와 피렌체를 중심에 놓고 바라보고 있었으니 독자적인 수집 성향을 가질 수도 없었다. 따라서 그녀가 수집한 다양한 모조품들은 고대 조각이 갖춘 건강하고 균형 잡힌, 또는 격동적이고 숭고한 맛은 사라지고 궁정 취향의 공예품 수준으로 전락한 셈이다. 고대 조각의 수집은 고대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기보다 상류층의 유행이어서 로마와 피렌체의 중심 문화권 취향을 모방하는 고급 키치로 변모한 것이다.

134p

18세기 말과 16세기 당시의 진열에도 큰 차이가 있으니 바로 보석과 메달들이 없어지고 회화와 조각이 주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회화, 조각을 주로 한 순수미술과 공예품이 주를 이루는 응용미술을 구분하던 19세기에 더욱 본격화되어 오늘의 상황에 이르고 있다. 16세기 말 메디치 가에 의해 수집된 고대 조각은 자연과 예술의 알레고리를 드러내기 위한 많은 수집품 중 일부였으며 이들은 군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수집은 더욱 유행하고 진품을 갖기 위한 발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고대 조각이 수집가의 목적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조각상들의 기능은 변모되었다. 고대 조각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이후 아름다움의 전형, 또는 사실 묘사의 연습 대상이 되어 21세기 초의 한국에서도 이 상들의 석고를 데생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 과정에서의 고대 조각은 단순한 미적 대상이 아니라 이미지 전달력을 지닌 시각 매체였다. 르네상스 시대 고대 조각은 첨단의 사조였던 고대 문화를 연상케 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일단 첨단 취향이 되어 수집의 대상이 되자, 고대 조각이기 때문에 숭상하기보다는 상들이 환기시키는 부과 이익, 즉 지적인 모습으로 포장된 부와 권력의 과시가 수집의 더 큰 목적이 된 것이다. 로마의 품위 있는 조각 정원, 이사벨라의 서재, 메디치 가의 트리부나는 모두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문화적인 공간이지만 수집의 원동력은 과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 시대에 신전에 모셔져 신을 대신했던 신상과 로마 시대의 황제 초상은 르네상스 때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수집되더니 순수미술을 숭상하는 19세기 이후에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아름다움의 전형으로 전시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의 역사 속에서 고대 조각은 제작 당시의 목적을 넘어서 조각상 자체가 문화적인 전달력을 지닌 이미지 매체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142p

한 은행가 집안이 지속적인 권력을 갖기 위해서 행했을 수많은 권모술수는 가려지고 교회와 자선 단체 그리고 인문주의자들에게 아낌없이 후원하고 훌륭한 건축 공사를 함으로써 돈을 건강하게 쓰는 모습만 보인 것이다.

157p

로렌초 마니피코는 피렌체를 주무르고 있었지만 공식적인 직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막후에서 조정하는 실권자였으나 "겉으로는 공식적인 기관을 통한 것처럼 보여야 했고 또 자유가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했기 때문에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달리 시뇨리아가 된 적이 없었다. 21세에 집안의 長이 된 그는 젊지만, 집안의 지위를 보았을 때 시뇨리아 이하의 직책은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뇨리아는 45세 이상이어야 했으니 21세부터 43세에 죽기까지 22년 동안 실권을 쥐고 있었던 그의 권한은 비공식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뇨리아는 되지 못했지만 정계와 제계의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망을 형성함으로써 시뇨리아를 손에 넣은 대부가 된 것이다.

172p

공화정 치하의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건전한 취향으로 사회에 좋은 이미지를 주어야 했으나 공국 형태의 16세기 후반에는 권위를 강조할수록 체제 유지에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피렌체와 베네치아, 시에나 등의 공화제 국가들이 독자적인 예술의 발전을 이루었음은 우연한 현상이 아닐 것이다.

191p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던 이탈리아 옆면 초상과 플랑드르 미술의 특징인 세밀함, 그리고 원경의 배경을 절충시킴으로써 당시의 일반적인 방식과는 차별화된 초상화를 그려냈다. 세부 묘사를 충실히 함으로써 실제 인물의 현존성을 전달했으며, 또한 완벽한 측면을 사용함으로써 현실의 순간을 초월한 영원함과 기념비적인 성격을 동시에 나타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세부 묘사와 모뉴멘탈함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업적은 미술사 연구의 초기부터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화가가 왜 이러한 방식을 창안하였을까 하는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술이 순수예술로 취급되기 이전인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는 언제나 주문에 의해 제작됨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초상화 주인공의 주문 내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뒷면에 그려진 승리의 비유는 이를 간접적으로 증거해 주고 있다. 

220p

미술작품을 순수한 애호나 문화 사랑의 대상으로 본다면 미술의 주문과 수집은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품격을 지닌 활동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미술은 어디까지나 이미지를 통한 전달의 매체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사회적 해석의 중요성이 커진다. 고대 조각을 수집하는 행위는 엘리트 지식층이 누리는 인문주의의 향유와 희귀한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재력을 의미하였으며, 레오나르도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게 함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나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와 견줄 수 있는 가문임을 뜻했다. 이사벨라는 정치와 외교에 뛰어난 현실적인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60대에 제작된 자신의 초상에서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후작부인이기를 바랐다. 미술품의 주문과 수집은 애호를 넘어선 이미지 정책이었으며,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225p

페루지노는 이사벨라 데스테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단지 자기 그림이 걸릴 자리 옆에 이미 있는 만테냐 그림의 인물들 크기를 물었다. 함께 걸릴 때 서로 어울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이사벨라의 실제 관심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사벨라에게는 페루지노가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화가였음이 중요했으며, 그의 화풍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29p

희귀한 고대 조각을 수집하는 일은 원하는 것을 당대의 화가에게 주문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더구나 이탈리아 동북부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 만토바는 로마와 같은 유적지도 없고 피렌체의 메디치 가와 같은 재력도 없었다. 

259p

이교의 신이 주관하는 시의 세계는 의인화가 내건 표어에서 보듯이 바로 '신성함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루어진다. 곰브리치가 간파한 대로 이 방에 그려진 '인간의 지적' 활동은 이교의 신이 하는 일까지도 '하느님으로부터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63p

16세기의 지식인 화가 바사리에게는 이교의 학문을 연구하는 인문주의와 신학이 전혀 상반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벽화의 도상들은 인간의 지식은 모두 신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라파엘로의 조화로운 화풍은 이들이 이룬 질서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여 주고 있다. 

277p

교황과 수도원장은 공통점이 많은 파트너였으니 둘은 모두 "추상적인 아이디어에 대한 관심과 실천적인 가능성을 절충하는" 성격을 지녔으며 "강한 스태미너와 낙관론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279p

이러한 전통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반대하였던 다신교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여기서의 플라톤은 신약을 준비한 구약의 예언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플리토니즘은 오히려 그리스도교에 대한 철학적 의문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신학의 체계에 흡수되어야 함은 물론이었다.

283p

그들은 고대 학문을 부흥시킴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새롭게 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고대와 현대, 신학과 인문학을 조화롭게 절충시킨 긍정적 세계를 상상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두 줄리오 2세의 설교자였으며, 모두 교황의 황금시대를 노래한 낙관론자였다. 라파엘로는 그들의 신학과 인문주의, 교황의 암시적인 목적을 아주 효과적으로 시각화하였다. 그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고대를 상상케 하였고, 중앙 집중적인 원근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다양한 활동을 하나인 신으로 귀결케 하였다. 

284p

로마 교회가 인문주의자들을 후원함으로써 로마는 문학과 예술의 면에서 전성기 르네상스에 유럽의 중심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황청이 궁극적으로 얼마나 좋은 역할을 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인문주의 수사학으로 정교히 짜놓은 희망찬 미래는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혁명이라는 최악의 현실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현실을 개혁하기보다 이미지와 개념을 미화시킴으로써 유지하려 했던 그들의 정책은 정치가와 그 주변 인물들이 빚어낸 일종의 망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망상은 1527년 소위 '로마 약탈'에 의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교회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미화가 아니라 개혁이었을 것이다.

291p

초상화가 오늘날과 같이 다른 작품들과 나란히 박물관에 걸려 있는 회화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원래의 위치인 귀족의 저택이나 궁정에 걸려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면 초상화는 예술품이기보다 가족과 친구,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는 한 방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20p

마키아벨리는 그의 <군주론>에서 "행운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신의 역량에 의해서 군주가 된 지도자들이 있다. 그중 가장 탁월한 사람은 모세 같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모델 중 으뜸으로 모세를 삼은 것인데 그 이유는 모세가 자기 국가를 위해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훌륭한 지도자는 항상 위기의 상황에서 나오며, 위기는 바로 군주에게는 기회이기 때문에 위기를 극복하는 데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모세는 코지모에게는 가장 완벽한 모델이 된 셈이다. 

 모세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듯이 피렌체의 악조건은 바로 메디치 가에게는 호조건이니 기회를 잡으라는 정치 이론가의 권고다.

332p

프로그램이 정해지고, 이를 총괄하는 미술가가 있으며, 화가는 이를 그림으로 실행시키는 코지모 1세의 조직화된 미술 주문 양상은 당시 미술가들의 세계와 미술의 성격도 바꾸어 놓았다. 정치적인 전시 효과의 프로그램들은 전승 기념이나 결혼식 등의 행사 위주여서 규모는 거대하지만 기간은 촉박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거대한 규모를 짧은 시간 내에 완성하기 위해서는 총책임자가 있고, 조직이 필요하며, 화가나 조각가가 일하는 공방에서는 필요에 따라 적합한 화가를 공급해야 했다. 이제 화가는 화가로서의 능력만으로는 유능한 작가가 될 수 없고, 어느 상황에나 자신을 잘 맞추는 미술가여야 했다. 조르조 바사리는 이러한 요구를 탁월하게 수행한 미술 행정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에 적응하는 화가는 궁정적인 생활을 하는 명예 있는 화가가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화가는 개인의 사회 부적응을 심리적으로 해소하는 매너리스트가 되었다.

344p

18세기 중엽까지 우피치는 미술관이라기보다 귀중한 것, 희귀한 것의 수집관이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당시의 미술품은 독립된 미적인 영역이기보다는 과학과의 연관성이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350p

현대의 미술관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 희귀한 것들의 모음이 박물관 역사의 시원이었다. 예술적인 가치보다 '특이한 것', '희귀한 것', '호기심 있는 것'을 모았다는 점에서 현대인으로부터 평가 절하되어 왔으나 이는 20세기 눈으로 인식한 잘못된 평가다. 르네상스인에게 자연의 세계에 대한 관심은 가장 큰 배움의 동기였으며 이의 수집과 전시는 필요 불가결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수집 행위는 소우주에서 대우주를 발견하고자 하는 호기심의 실천 과정이었으며, 전시는 대우주를 소우주에 질서화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360p

차마부에의 <옥좌의 성모자>를 다음과 같이 감상하라고 권하고 있다.

"프리미티브한 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그림의 미숙함에 당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패널화를 멀리서 바라보면 그런 일종의 미숙함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물론 이 패널화가 원래 자리인 산타 트리니타의 제단에 있었을 때는 비례와 형태의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충분한 거리도 없었고, 교회 자체가 너무 넓어서 이런 것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림에서 조형성을 중요시하던 20세기 전반의 순수미술 경향은 그 기준을 근대 이전의 종교 회화에도 적용하여 작품을 감상하는 데 충분한 거리와 적당한 아늑함으로 요구한 것이다. 20세기 중엽 전쟁이 끝나고 경제가 안정되면서 박물관들은 관람객의 감상 조건을 최대한 고려했다.

377p

그러나 놀라운 것은 아무리 까다로운 주문에도 이를 충족시킨 미술가가 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제약이 어떤 화가에게는 장애가 되었지만 어떤 화가에게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해 내는 기회가 되었다. 미켈란젤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티치아노 등 세기의 걸출한 작가의 경우, 현대가 아무리 천재를 부정하는 시대라 해도 그들의 탁월한 해결 방법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은 요구에 부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관심을 용해시키고 요구를 뛰어넘는 작품을 생산해 내었다.

 서양의 변혁을 가져온 프랑스 혁명 이후 시민이 역사의 주역이 되면서 미술 또한 대중의 것이 되었다. 왕궁은 박물관으로 변하고 귀족 소유의 미술품들이 공공의 소유로 이전되었다. 새로운 사회라 해도 미술이 부의 곁을 떠난 적은 없지만 그러나 그 양상은 획기적으로 변하였다. 새 시대의 자본가들은 아무리 권세가 크다 해도 개인의 목적에 따라 미술품을 주문할 수는 없었다. 19세기에는 계몽의 이름으로, 20세기에는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이라는 차원에서 미술은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도시마다 공공미술관들이 들어섰으며, 후원자는 이름을 남기되 미술의 향유자는 다름 아닌 대중이 되었다. 세계 곳곳에는 재벌의 거대한 자본으로 세워진 쾌적한 미술관이 무수히 많고 서민은 단지 몇 천 원으로 작품을 향수하고 있다. 현대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 이래 자기 소유의 미술품이 아니어도 이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오류>

127p

아들 프란체스코 1세로 이어진 수집의 역사는 1589년 코시모 1세의 손자 페르디난도의 결혼식에 맞추어 일단 완료되었다.

->프란체스코 1세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된 페르디난도 1세는 코시모 1세의 손자가 아니라 둘째 아들이다.

132p

이탈리아에 와 본 일이 없는 영국의 샬롯 여왕(Charlotte d'Inghiltera)은 영국 화자 조파니에게 <트리부나>를 그려오도록 주문하였다.

->샬롯은 여왕이 아니라 조지 3세의 부인이므로 샬롯 왕비라 번역해야 하고, Inghiltera의 스펠링도 Inghiterra가 맞다. 또 요한 조파니는 영국에서 활동했으나 독일 출신의 화가다.

160p

1515년 로렌초의 큰아들인 조반니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메디치 가의 권력은 다시 정상에 올랐다.

->조반니는 1475년생으로 로렌초의 둘째 아들이다. 큰 아들은 로렌초의 뒤를 이어 집안의 수장이 된 피에로 2세로 1471년생이다.

210p

페데리코 는 결혼한지 11년 동안 여덟 명의 딸을 두었고 1472년 1월에 귀한 후계자 아들을 얻었다.

-> 위키에 의하면 페데리코는 여섯 명의 딸을 두었다.

211p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통치자가 된 지 17년 만에야 정통성을 갖춘 셈이다. 그리고도 9년을 기다려서야 아들 구이도발도를 낳았다.

-> 페데리코는 1444년 통치자가 되었고 1461년에 교황의 승인을 받아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1472년 아들을 낳았으니 9년이 아니라 11년을 기다렸다.

294p

코시모 1세는 외교적으로 아들 프란체스코 1세를 황제 카를로 5세의 사촌 조반나와 결혼시킴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다.

-> 조반나는 페르디난트 1세의 딸이고, 카를로 5세는 사촌이 아니라 삼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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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지음 / 미술문화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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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덕수궁 미술관에서 20주년 기념전을 했던 모양이다.

당시 도록인가 싶은데 전시작은 90점인데 비해 해설은 1/3도 안 되어 있어 아쉽다.

매력적인 표지 그림은 장운상의 미인도이다.

뒷쪽에 실린 전시작 중 이신자라는 작가가 있어 누군가 찾아봤더니 뜻밖에도 장운상의 부인이었다.

섬유예술가라고 한다.

자녀 넷이 전부 예술 쪽 교수이고, 유영국 화백과 같은 고향(울진) 사람인데, 이 분의 딸도 서울 미대 교수라고 한다.

우월한 유전자 탓인가, 부모가 길을 빨리 제시해 줘서인가 기사 찾아 보니 부러웠다. 

대부분 아는 그림이긴 하지만 도판이 너무 작아 아쉽다.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소장과 전시인 만큼 예산 확보야 말로 좋은 작품을 구입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것 같다.

덕수궁미술관만 해도 건립된지 20년 밖에 안 되는지라 가격이 많이 오른 근대 회화 구입에 어려움이 있었고, 유족과 화랑의 기증을 통해 많은 부분을 해결했다고 한다.

매우 감사한 일이다.

월북 작가 부분도 참 안타깝다.

변월룡이라는 연해주 출신의 화가는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국립레핀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교수까지 됐는데 해방 후 북한으로 건너갔다가 숙청됐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사실주의적 회화가 매력적이다.

이쾌대나 김주경, 김용준, 배운성 등도 월북 내지 납북되어 작품이 많이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

식민지배와 더불어 남북분단도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불행한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송수남이나 이응노 등의 수묵 추상 작품도 인상적이었다.

어떤 재료를 가지고 어떤 주제를 풀어내는가, 라는 점에서 회화는 참으로 매력적인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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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비판 - 『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
이문영 / 역사비평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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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전작 <만들어진 한국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역사학과를 나온 저자는 인터넷에서 널리 퍼진 환단고기에 대한 분노로 유사역사학 혹은 사이비, 아마추어 역사가들과 싸우기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위서를 가지고 역사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어이없으나 학계의 이런 반응 때문에 대중들에게 한민족 지상주의가 의외로 널리 퍼졌던 것을 보면, 학자들이 대중과의 소통에 노력을 많이 해야 할 듯하다.

동이족이 곧 한민족인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은나라라는 주장은 많이 익숙하다.

환국 운운하는 것은 너무나 황당해 별 파급력도 없는 반면, 은나라가 동이족이고 곧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는 얘기는 그럴 듯해 보인다.

저자가 비판한 대로 고대 중국이 이룬 문화적 성과를 우리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동북공정 못지 않은 동이공정이 아닌가.

민족의 역사를 허황되게 확대시키려는 극우파시즘과 유사역사학은 비슷한 점이 있는데 희안하게 좌파들도 좋아한다.

토착왜구라고 상대를 인신공격하고 반일을 외치며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태도는, 역사학자들을 식민사관에 매몰된, 친일파 이병도의 제자들이라고 몰아세우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화랑세기>에 대해서도 저자가 관심을 가져 주면 좋겠다.

이제 치우는 한민족의 조상이 아니고, 은나라 사람들도 동이가 아니며, 동이가 곧 한민족은 더더욱 아니며, 낙랑은 평양에 있었던 한나라의 군현이었으며, 백제는 요서땅을 경영한 적이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알겠다.



<인상깊은 구절>

23p

유사역사학은 "뒷받침하는 증거나 개연성이 없는데도 주로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목적으로 제시되는 주장"이라고 정의한다.

47p

"사이비역사가들은 증거를 선별적으로 채택한다.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는 것은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강화해주는 증거만을 사용한다. 사이비역사가들은 논리 전개 과정에서 가능성과 개연성의 구분을 흐려버리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일이 가능하다'고 했을 때는, 그런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났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발생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반면에 '어떤 일이 개연성이 있다'고 할 때에는 일어났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얘기다. 사이비역사가들은 하고 많은 증거 중에서 하필이면 예외적인 것에 주목한다."

56p

자신들만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친일파와 노론에 의해 나라가 조종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사학자(친일파와 노론의 앞잡이)를 증오하고 이들의 권리를 박탈해야 한다고 믿으며 무책임한 인신공격을 가한다.

"대중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 "증거 하나만 대보라"고 요구하면서 증명의 부담을 자기 쪽에서 체제 쪽으로 돌리려 한다."

역사학은 단 하나의 증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증거들의 결합을 통해 귀납적으로 증명되는 학문이다. 이 증거들 가운데 한두가지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해서 전체 결론이 무너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사역사학가들은 증거의 수렴을 거부하고 자기들 주장에 맞는 것만 취사선택하여 대중에게 알린다.

143p

역사학계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민족적 감정에 호소하는 주장을 늘어놓아 시민들을 현혹하는 것이 유사역사학이 행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더욱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했던 약점을 가진 이병도를 공격하고, 역사학자들은 모두 이병도의 제자라는 어이없는 프레임을 제시하며, 엄연히 존재하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역사학자들(이기백, 전해종 등)까지 친일파 사학자로 몰아간다. 오히려 친일 행적이 뚜렷한 최동이나 문정창 같은 이들의 주장은 잘도 이용하면서 때로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시미치를 떼기도 한다.

174p

유사역사가들이 증오하는 식민사학은 진작에 죽어버렸다. 오히려 죽은 식민사학을 살리려 애를 쓰는 것은, 그것이 살아야 적대적 공생 관계를 끌고 갈 수 있는 유사역사가들이다.

 역사학계는 그동안 대중과의 소통에 힘쓰지 않은 점을 반성하고 더욱 다양한 방법과 경로를 통해 역사에 대한 시민사회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작업을 해나가야 하는 막중한 과제를 안고 있다.

240p

치우는 우리 민족과 아무 관계없는 중국의 전설 속 괴물에 불과하다. 치우가 높이 평가받게 된 것은 중국 한족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황제의 적대자였기 때문이다. 중국에 대한 열등감은 집요한 보상 심리를 만들어냈고, 그 결과 황제의 가장 지독한 라이벌이었던 치우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탈바꿈시켰다. 

 그 최소의 작업은 <규원사화>에서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적 자부심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규원사화>는 치우를 우리 역사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후손이 없는, 그러나 강력한 무력을 지닌 존재'는 후대에 이용해먹기 좋다. 유럽의 여러 국가가 트로이의 후손을 자처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똑같은 이유로 치우는 한민족과 묘족의 조상으로 둔갑해버렸다. 이를 첫 번째로 수행해낸 것이 바로 <규원사화>였다. 

278p

고대 중국은 우리 민족의 역사로 윤색된다. 고대 중국이 이룬 문화적 성과는 모두 동이족이 해낸 것이고, 동이족은 바로 한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중국 고대의 모든 국가를 한민족이 세웠다면 대체 중국사와 한국사를 구분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유사역사학은 '동북공정'보다 더 심한 '동이공정'을 시행하고 있는 셈이다.

 조선은 일본에 의해 멸망했다. 왜? 그것은 조선이 유교 탓으로 문약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토에 엄청나게 집착하면서도 조선의 영토가 고려보다 더 확대되었다는 뻔한 사실조차 외면한다. 조선에 비하면 고려는 무수한 외침에 자주 시달린 편인데, 그런 점도 살피지 않는다. 일본에게 멸망당한 원죄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333p

일본제국이라면 능히 이런 짓을 할 만하다는 확신이 괴담에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해왔다. 쇠말뚝 괴담은 결국 강한 상대에 대한 피해 의식의 발로라 할 수 있으며, 상대를 바꿔가면서 계속 살아남았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일제강점기의 일본인이 했던 짓들 때문에 우리에게 인재가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증거도 없고, 이치에 맞지도 않는 허무맹랑한 미신을 일제의 만행으로 규탄할 때, 우리가 진짜 알아야 하고 규탄해야 할 만행은 오히려 잊힐 수도 있다.

372p

"전문 역사가들은 자기 영역을 그렇게 쉽게 넘겨줘서는 안 된다. 그들은 역사의 모든 풍부함과 복잡성 안에서 과거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 저기 바깥의 대중 영역에 있는 편향되고 틀리기까지 한 역사서에 맞서 싸워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의 지도자와 여론 형성가들이 역사를 악용해 거짓 주장을 강화하거나 어리석은 불량 정책을 정당화하는 것을 용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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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 일본 역사학자의 진짜 교토 이야기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하야시야 다쓰사부로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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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이 많이 생각났는데 광고를 보니 유홍준씨가 이 책을 참조했던 모양이다.

교토의 역사, 특히 하타씨가 가쓰라 강의 제방을 쌓는 대목이나 고구려인들이 세운 야사카 신사 부분이 특히 그렇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확실히 일본인이 쓴 자국의 교토 이야기라 깊이가 다르다.

교토나 일본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부족해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천년 수도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경주 사람들이 이런 자긍심을 갖고 있을까?

경주는 고려 시대 이래 소외된 지역이라 교토와는 다를 것 같다.

일본 역사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한국과는 매우 다른 사회였음을 느낀다.

일본은 확실히 전통적으로 무사가 지배하고 상인들이 뒤를 받치는 사회였던 듯 하다.

점잖은 선비들의 나라였던 한국과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읽기 편한 판형이라 좋긴 한데 컬러 사진이 없어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75p

당대 축성술의 정수가 녹아 있는 각지의 성들은 풍토와 조화를 이룬 조형미를 보여주며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지녔다.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중앙의 획일주의로 칠해지고 있는 지금, 성이야말로 거기에 대항하는 지역주의의 위대한 상징이 아닐까.

133p

황후는 이곳에서 레이제이 천황이 앓는 정신병의 쾌유를 빌었다고 한다. 특히 족 사회는 영달을 위한 경쟁이 치열했던 만큼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정신까지 놓아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테고, 근친혼이 부른 비참한 결과로 비슷한 병을 얻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148p

섭관 정치의 바탕이 된 장원의 급속한 발달로 각 지방 관청의 수입이 줄자 수령이라고 불리는 지방관들을 중심으로 황족의 미나모토라는 성씨를 하사받고 신적이 강하된 왕당파들을 앞세워 먼저 후지와라 씨와 관련이 적은 고산조 천황 밑에서 적극적인 장원 정리에 나섰다. 하지만 섭관가의 반발과 천황의 병환 등으로 좌절되면서 결국 율령제와 섭관제에 얽매지이 않는 새롭고 자유로운 권력 기구로서 등장한 것이 원정 정권으로 그 중심인물이 바로 시라카와 천황인 것이다.

 장원 정리를 명분으로 내세우다 보니 각 지방의 지방 관청과 장원 간의 분쟁이 급속히 증가했다. 그 결과 장원 영주의 중요한 세력 중 하나인 사찰, 특히 나라의 고후쿠지와 히에이산의 엔랴쿠지 등의 원정에 대한 항의가 표면화되었다. 원정 정권으로서는 이 승병들의 무력에 맞설 필요가 있었다.게다가 이때는 장원이라는 영유 형태를 부정한다 해도 지방에서 성장한 강력한 부호층과 어떤 식으로든 담판을 짓지 않으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원정 정권으로서는 무사단이라는 버팀목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원정 정권은 왕당파의 부활, 수령층의 진출, 무사단의 지원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필수 조건으로 성립했다. 따라서 그 안에는 율령 국가적 의식을 재현할 요소와 함께 중세 무가 사회로의 전망도 품고 있었다.

 호쇼지는 이런 원정 문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그 거대하고 기발한 디자인은 원정이라는 권력에 매료된 지방 호족들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176p

어떻게 이처럼 교토 안에 이질적인 존재감을 가진 선종을 전파할 수 있었을까. 교토는 비록 가마쿠라의 무력과 정치력에 굴복했을지언정 사상과 문화 면에서는 그리 쉽게 감화될 리가 없었다. 선종이 가마쿠라 막부의 힘으로 교토에 정착할 수 있었다면 그 이유는 에이사이가 늘 천태사문을 칭하고 겐에이 원년(1206) 도다이지의 조겐이 세상을 떠난 후 도다이지 부흥에도 힘쓰는 등 원,밀,선,계의 4종 겸학이라는 포용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천태종과 불교의 부흥이라는 에이사이의 높은 이상이 교토의 정신과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닐까.

 또 에이사이가 가마쿠라 막부와 가까워진 것은 당시 이미 교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와 사네토모가 귀의한 것이지 호조씨 일문에 고개를 숙인 것은 아니었다. ... 숙취로 고생하는 사네토모를 위해 차 한 잔을 권하면서 이 책의 '차의 덕을 칭송하는 장' 한 권을 바쳤다고 한다. 사네토모가 이렇게 과음을 한 것이 어쩌면 호조 일문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자폭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 그 시절 에이사이가 권한 차 한 잔에 담긴 그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지는 듯하다. 이런 에이사이의 마음이 곧 교토인의 마음이었다.

186p

교토에서 임제선의 교세가 압도적이었던 것은 조동종이 기도 등의 행위에 따른 종교성이 강했던 데 비해 임제선은 교양적 요소를 지닌 문화성이 강했기 때문이 아닐까. 앞서 겐닌지에서도 보았듯이 선종 사찰은 그리 친근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문화성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문화성을 보여주는 한 가지가 차였다.

208p

마치슈들의 생활은 본래 적극적이고 활기가 넘쳤다. 게다가 몰락한 공가의 고전적 교양과 부유한 창고업자들의 경제력 덕분에 더욱 풍요로워졌다. 이렇게 연결된 마치 간에는 연대 의식과 동시에 경쟁의식도 강하다. 연대 의식이란 각자가 독립된 주체로서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따라서 각 가문의 독립과 서로의 독립을 침해하지 않고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마치슈의 신조였다. 이런 정신을 기반으로 마치슈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221p

마치구미를 만든 주역은 본래 상,수공업자 중심의 마치슈들이었다. 특히 동업조합의 보호와 특권을 이용해 부를 쌓은 이들도 있었지만 총 대표를 맡은 창고업자들의 계보는 소시민 계층의 상승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들 중 다수는 남북조 이래의 내란기에 교토로 이주한 무사들이거나 데릴사위로 들어가 마치슈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토의 상업적 발전의 토대가 된 조합 조직의 대표직을 매수하는 식으로 장악해온 것으로 보인다.

257p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난바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라는 절명시를 남겼다.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배하에서 지잔과 전화 등의 불운을 겪다가 결국 허물어졌다. 후시미도 꿈속의 꿈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복숭아밭으로 변한 그 터를 '모모야마(桃山)'라고 부르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알지 못했던 향기로운 봄꿈과 같은 이름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의 문화적 소산을 모모야마 문화라고 부르게 된 것은 황폐한 성터에서 화려했던 옛 명성을 그리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호화로운 양식에 걸맞은 명칭이라고 생각한다.

 모모야마 문화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황금이다. 그것은 금은 광산 개발과 함께 교토, 사카이, 하카타의 거상들이 떠받쳐온 정권의 월등한 경제력을 보여준다. 따라서 모모야마 시대의 유산은 단순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권력자의 힘만이 아니라 상층 마치슈로서 거상들의 힘이 크게 작용하면서 탄생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의 화려한 유산은 마치 안에 조화롭게 녹아 있다.

272p

세상에는 성인과 현인의 길을 배운다면서 실은 처세의 도구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고에쓰는 평생 처세법을 알지 못했다.

 '처세법'이란 바꿔 말하면 봉건사회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권력에 순응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일 것이다. 고에쓰는 이런 현실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저항하진 않았지만 소극적으로 무시하고 도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사귀었던 소안 등은 하나같이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은 교토의 상층 마치슈들이었다. 

279p

전국 시대에 궁정은 완전히 쇠퇴하고 어소는 서쪽에 발달한 6조 마치의 주민들이 지키며 공경들도 마치슈들 사이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부터 궁정과 상층 마치슈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294p

"메이지 황제께서 도쿄로 행차하시어 교토가 정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자 우리 교토 시민 특히 니시진의 방직업 종사자들은 폐하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소 주위를 수없이 돌며 기원했다."

 교토가 왕성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자 앞으로의 산업을 이끌 니시진이 가장 크게 좌절했다. 이 또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며 서로 협력해온 교토의 특성일 것이다. 교토 부지사는 천황이 하사한 금 15만 냥 중 3만 냥을 떼어 니시진 물산회사를 창립하고 직조소를 18개사로 나누어 니시진 부흥에 나섰다. 

 니시진 물산회사는 처음부터 중개상으로서가 아닌 오직 니시진 직조소의 흥망을 걸고 세워진 회사로 원사의 집약적 구입을 통해 생사 업체의 지배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했다. 종래의 니시진의 약점을 철저히 개선하고자 나선 것이었다.

(천황이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황궁 주위를 돌았다는 교토 시민들의 마음이 너무나 애잔하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엄청난 변혁의 시대를 맞아 천황이 위로금으로 하사한 돈을 허튼데 쓰지 않고 산업 구조를 바꾸는데 투자한 교토 정치인들의 자세가 놀랍다.)

300p

기타가키 지사가 펼친 두 정책의 성공과 실패 속에는 교토의 산업이 가진 안팎의 이면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것은 중공업을 키우지 못하는 교토의 민간 자본의 약소성과 항상 역사의 첨단을 달리는 교토 시민들의 진취성이다. 전자는 중세의 마치구미 이래 유지되어온 시민 생활의 균등성이 전후좌우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산업 면에서는 출중한 산업의 진출을 방해해 소위 도토리 키재기 식의 현상을 초래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니시진 일대의 거대 포목상들도 그 자본을 산업에 투자하지 않고 교토를 떠나버렸던 것이다. 한편 후자는 천년의 왕도라는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토 시민들에게는 도쿄에는 질 수 없다는 강한 자의식이 흐르고 있다. 대립 의식 같은 대등성조차 거부하는 그 정신은 때로는 중화 의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만큼 사회의 동향에 무척 민감하고 역사의 진보에 뒤처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메이지 7년경 <도쿄신문>은 '도쿄 천도 후 이내 쇠퇴할 것이라는 서민들의 우려는 의외의 번영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했다. 그야말로 위기에 직면한 교토 시민들의 자의식의 발로였다.

323p

보통 상인들의 세계에서 매사를 보는 관점은 대개 관념적이기보다는 경제적이고 형식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주자학과 같은 관념적인 사상 체계가 관학으로서 자리를 굳히고 있는 한 마치의 학문이 성장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토 진사이가 고기학을 통해 학문적인 입장에서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사상의 속박을 벗어던진 많은 학문들이 자유롭게 성장하게 되었다.

(주자학이 지배하는 조선에서 상업이 번성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주자학과 상업은 상극이다)

339p

지금까지 교토시가 국제 문화관광도시의 미명 아래 강력하게 추진해온 관광 지상주의에 대해서는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계절마다 열리는 교토의 다양한 종교적 행사를 하나같이 관광 자원으로만 소비하는 정책은 종종 논란이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신앙과 관광의 타협점은 오로지 문화의 존중이라는 점이었다. 문화관광도시를 자부하는 이상 문화가 관광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문화도시로서의 철저한 자각이 관광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교토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공업도시화도 논의되어왔다. 하지만 그것도 근접지역을 합쳐 공업지대를 조성하는 것이라면 단순히 세수를 늘리기 위한 타력본원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경주나 부여 같은 한국의 관광도시도 비슷할 것 같다. 단순히 관광만을 위한 도시가 아닌, 도시 자체의 정체성과 발전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오류>

282p

간에이 6년 도시히토 친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간에이 18년 도시타다 천황에 의한 가쓰라 이궁의 제 2차 공사가 시작되었다.

-> 도시타다 천황이 아니라 친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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