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 일본 역사학자의 진짜 교토 이야기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하야시야 다쓰사부로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4월
평점 :
품절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이 많이 생각났는데 광고를 보니 유홍준씨가 이 책을 참조했던 모양이다.

교토의 역사, 특히 하타씨가 가쓰라 강의 제방을 쌓는 대목이나 고구려인들이 세운 야사카 신사 부분이 특히 그렇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확실히 일본인이 쓴 자국의 교토 이야기라 깊이가 다르다.

교토나 일본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부족해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천년 수도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경주 사람들이 이런 자긍심을 갖고 있을까?

경주는 고려 시대 이래 소외된 지역이라 교토와는 다를 것 같다.

일본 역사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한국과는 매우 다른 사회였음을 느낀다.

일본은 확실히 전통적으로 무사가 지배하고 상인들이 뒤를 받치는 사회였던 듯 하다.

점잖은 선비들의 나라였던 한국과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읽기 편한 판형이라 좋긴 한데 컬러 사진이 없어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75p

당대 축성술의 정수가 녹아 있는 각지의 성들은 풍토와 조화를 이룬 조형미를 보여주며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지녔다.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중앙의 획일주의로 칠해지고 있는 지금, 성이야말로 거기에 대항하는 지역주의의 위대한 상징이 아닐까.

133p

황후는 이곳에서 레이제이 천황이 앓는 정신병의 쾌유를 빌었다고 한다. 특히 족 사회는 영달을 위한 경쟁이 치열했던 만큼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정신까지 놓아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테고, 근친혼이 부른 비참한 결과로 비슷한 병을 얻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148p

섭관 정치의 바탕이 된 장원의 급속한 발달로 각 지방 관청의 수입이 줄자 수령이라고 불리는 지방관들을 중심으로 황족의 미나모토라는 성씨를 하사받고 신적이 강하된 왕당파들을 앞세워 먼저 후지와라 씨와 관련이 적은 고산조 천황 밑에서 적극적인 장원 정리에 나섰다. 하지만 섭관가의 반발과 천황의 병환 등으로 좌절되면서 결국 율령제와 섭관제에 얽매지이 않는 새롭고 자유로운 권력 기구로서 등장한 것이 원정 정권으로 그 중심인물이 바로 시라카와 천황인 것이다.

 장원 정리를 명분으로 내세우다 보니 각 지방의 지방 관청과 장원 간의 분쟁이 급속히 증가했다. 그 결과 장원 영주의 중요한 세력 중 하나인 사찰, 특히 나라의 고후쿠지와 히에이산의 엔랴쿠지 등의 원정에 대한 항의가 표면화되었다. 원정 정권으로서는 이 승병들의 무력에 맞설 필요가 있었다.게다가 이때는 장원이라는 영유 형태를 부정한다 해도 지방에서 성장한 강력한 부호층과 어떤 식으로든 담판을 짓지 않으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원정 정권으로서는 무사단이라는 버팀목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원정 정권은 왕당파의 부활, 수령층의 진출, 무사단의 지원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필수 조건으로 성립했다. 따라서 그 안에는 율령 국가적 의식을 재현할 요소와 함께 중세 무가 사회로의 전망도 품고 있었다.

 호쇼지는 이런 원정 문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그 거대하고 기발한 디자인은 원정이라는 권력에 매료된 지방 호족들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176p

어떻게 이처럼 교토 안에 이질적인 존재감을 가진 선종을 전파할 수 있었을까. 교토는 비록 가마쿠라의 무력과 정치력에 굴복했을지언정 사상과 문화 면에서는 그리 쉽게 감화될 리가 없었다. 선종이 가마쿠라 막부의 힘으로 교토에 정착할 수 있었다면 그 이유는 에이사이가 늘 천태사문을 칭하고 겐에이 원년(1206) 도다이지의 조겐이 세상을 떠난 후 도다이지 부흥에도 힘쓰는 등 원,밀,선,계의 4종 겸학이라는 포용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천태종과 불교의 부흥이라는 에이사이의 높은 이상이 교토의 정신과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닐까.

 또 에이사이가 가마쿠라 막부와 가까워진 것은 당시 이미 교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와 사네토모가 귀의한 것이지 호조씨 일문에 고개를 숙인 것은 아니었다. ... 숙취로 고생하는 사네토모를 위해 차 한 잔을 권하면서 이 책의 '차의 덕을 칭송하는 장' 한 권을 바쳤다고 한다. 사네토모가 이렇게 과음을 한 것이 어쩌면 호조 일문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자폭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 그 시절 에이사이가 권한 차 한 잔에 담긴 그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지는 듯하다. 이런 에이사이의 마음이 곧 교토인의 마음이었다.

186p

교토에서 임제선의 교세가 압도적이었던 것은 조동종이 기도 등의 행위에 따른 종교성이 강했던 데 비해 임제선은 교양적 요소를 지닌 문화성이 강했기 때문이 아닐까. 앞서 겐닌지에서도 보았듯이 선종 사찰은 그리 친근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문화성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문화성을 보여주는 한 가지가 차였다.

208p

마치슈들의 생활은 본래 적극적이고 활기가 넘쳤다. 게다가 몰락한 공가의 고전적 교양과 부유한 창고업자들의 경제력 덕분에 더욱 풍요로워졌다. 이렇게 연결된 마치 간에는 연대 의식과 동시에 경쟁의식도 강하다. 연대 의식이란 각자가 독립된 주체로서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따라서 각 가문의 독립과 서로의 독립을 침해하지 않고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마치슈의 신조였다. 이런 정신을 기반으로 마치슈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221p

마치구미를 만든 주역은 본래 상,수공업자 중심의 마치슈들이었다. 특히 동업조합의 보호와 특권을 이용해 부를 쌓은 이들도 있었지만 총 대표를 맡은 창고업자들의 계보는 소시민 계층의 상승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들 중 다수는 남북조 이래의 내란기에 교토로 이주한 무사들이거나 데릴사위로 들어가 마치슈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토의 상업적 발전의 토대가 된 조합 조직의 대표직을 매수하는 식으로 장악해온 것으로 보인다.

257p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난바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라는 절명시를 남겼다.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배하에서 지잔과 전화 등의 불운을 겪다가 결국 허물어졌다. 후시미도 꿈속의 꿈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복숭아밭으로 변한 그 터를 '모모야마(桃山)'라고 부르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알지 못했던 향기로운 봄꿈과 같은 이름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의 문화적 소산을 모모야마 문화라고 부르게 된 것은 황폐한 성터에서 화려했던 옛 명성을 그리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호화로운 양식에 걸맞은 명칭이라고 생각한다.

 모모야마 문화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황금이다. 그것은 금은 광산 개발과 함께 교토, 사카이, 하카타의 거상들이 떠받쳐온 정권의 월등한 경제력을 보여준다. 따라서 모모야마 시대의 유산은 단순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권력자의 힘만이 아니라 상층 마치슈로서 거상들의 힘이 크게 작용하면서 탄생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의 화려한 유산은 마치 안에 조화롭게 녹아 있다.

272p

세상에는 성인과 현인의 길을 배운다면서 실은 처세의 도구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고에쓰는 평생 처세법을 알지 못했다.

 '처세법'이란 바꿔 말하면 봉건사회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권력에 순응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일 것이다. 고에쓰는 이런 현실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저항하진 않았지만 소극적으로 무시하고 도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사귀었던 소안 등은 하나같이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은 교토의 상층 마치슈들이었다. 

279p

전국 시대에 궁정은 완전히 쇠퇴하고 어소는 서쪽에 발달한 6조 마치의 주민들이 지키며 공경들도 마치슈들 사이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부터 궁정과 상층 마치슈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294p

"메이지 황제께서 도쿄로 행차하시어 교토가 정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자 우리 교토 시민 특히 니시진의 방직업 종사자들은 폐하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소 주위를 수없이 돌며 기원했다."

 교토가 왕성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자 앞으로의 산업을 이끌 니시진이 가장 크게 좌절했다. 이 또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며 서로 협력해온 교토의 특성일 것이다. 교토 부지사는 천황이 하사한 금 15만 냥 중 3만 냥을 떼어 니시진 물산회사를 창립하고 직조소를 18개사로 나누어 니시진 부흥에 나섰다. 

 니시진 물산회사는 처음부터 중개상으로서가 아닌 오직 니시진 직조소의 흥망을 걸고 세워진 회사로 원사의 집약적 구입을 통해 생사 업체의 지배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했다. 종래의 니시진의 약점을 철저히 개선하고자 나선 것이었다.

(천황이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황궁 주위를 돌았다는 교토 시민들의 마음이 너무나 애잔하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엄청난 변혁의 시대를 맞아 천황이 위로금으로 하사한 돈을 허튼데 쓰지 않고 산업 구조를 바꾸는데 투자한 교토 정치인들의 자세가 놀랍다.)

300p

기타가키 지사가 펼친 두 정책의 성공과 실패 속에는 교토의 산업이 가진 안팎의 이면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것은 중공업을 키우지 못하는 교토의 민간 자본의 약소성과 항상 역사의 첨단을 달리는 교토 시민들의 진취성이다. 전자는 중세의 마치구미 이래 유지되어온 시민 생활의 균등성이 전후좌우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산업 면에서는 출중한 산업의 진출을 방해해 소위 도토리 키재기 식의 현상을 초래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니시진 일대의 거대 포목상들도 그 자본을 산업에 투자하지 않고 교토를 떠나버렸던 것이다. 한편 후자는 천년의 왕도라는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토 시민들에게는 도쿄에는 질 수 없다는 강한 자의식이 흐르고 있다. 대립 의식 같은 대등성조차 거부하는 그 정신은 때로는 중화 의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만큼 사회의 동향에 무척 민감하고 역사의 진보에 뒤처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메이지 7년경 <도쿄신문>은 '도쿄 천도 후 이내 쇠퇴할 것이라는 서민들의 우려는 의외의 번영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했다. 그야말로 위기에 직면한 교토 시민들의 자의식의 발로였다.

323p

보통 상인들의 세계에서 매사를 보는 관점은 대개 관념적이기보다는 경제적이고 형식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주자학과 같은 관념적인 사상 체계가 관학으로서 자리를 굳히고 있는 한 마치의 학문이 성장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토 진사이가 고기학을 통해 학문적인 입장에서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사상의 속박을 벗어던진 많은 학문들이 자유롭게 성장하게 되었다.

(주자학이 지배하는 조선에서 상업이 번성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주자학과 상업은 상극이다)

339p

지금까지 교토시가 국제 문화관광도시의 미명 아래 강력하게 추진해온 관광 지상주의에 대해서는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계절마다 열리는 교토의 다양한 종교적 행사를 하나같이 관광 자원으로만 소비하는 정책은 종종 논란이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신앙과 관광의 타협점은 오로지 문화의 존중이라는 점이었다. 문화관광도시를 자부하는 이상 문화가 관광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문화도시로서의 철저한 자각이 관광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교토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공업도시화도 논의되어왔다. 하지만 그것도 근접지역을 합쳐 공업지대를 조성하는 것이라면 단순히 세수를 늘리기 위한 타력본원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경주나 부여 같은 한국의 관광도시도 비슷할 것 같다. 단순히 관광만을 위한 도시가 아닌, 도시 자체의 정체성과 발전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오류>

282p

간에이 6년 도시히토 친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간에이 18년 도시타다 천황에 의한 가쓰라 이궁의 제 2차 공사가 시작되었다.

-> 도시타다 천황이 아니라 친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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