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아름다움 - 고미술에 매혹된 경제학자의 컬렉션 이야기
김치호 지음 / 아트북스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미술 컬렉터가 쓴 에세이다.

수집욕은 없지만 미술, 특히 도자기나 서화 등 고미술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읽게 됐다.

책 디자인도 잘 되어 있고 내용도 괜찮았다.

고미술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 다소 사변적이고 당위적인 예찬론이 많아 뒤로 갈수록 지루하긴 했지만,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해 본 좋은 시간이었다.

저자의 수집품을 소개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어떤 작품을 모으는지, 왜 그 작품을 사랑하는지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가 없어 아쉽다.

특히 전시 공간을 갖기 힘든 일반 컬렉터들은 자신의 수집품을 어떤 식으로 보관하는지 궁금하다.

나는 소유보다는 감상 쪽이지만 본질적으로 미에 대한 욕구는 같기 때문에 많이 공감했다.

특히 무라카미 류의 말을 빌려, 취미만으로는 큰 성취감을 얻기 힘들고 일로 접근할 때 비로소 몰두하여 큰 만족감을 얻게 된다는 주장이 신선했다.

돈을 들여 수집을 하는 사람들처럼 나 역시 독서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생산성이 없는 단순한 취미는 그저 가볍게 즐길 뿐 깊이 몰두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만족도 역시 낮을 수밖에 없다.

관심이 가는 분야는 역시 서화이고, 그 외 도자기도 좋지만 나도 저자처럼 목가구나 토기가 참 좋다.

사방탁자 같은 목가구의 공간미, 비례미도 좋고 도자기는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삼국시대 토기에 마음이 끌린다.

저자도 삼국시대 토기가 제 값어치를 못받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한다.

분청사기의 현대적인 조형미도 좋지만, 흙이 주는 투박함, 특히 수천 년 전의 기물이라는 긴 시간의 깊이까지 더해져 기회가 된다면 토기는 한 번 소장해 보고 싶다.

가격도 좋은 것이 백만원 수준인라니 초심자들이 관심가져 볼만 하겠다.



<인상깊은 구절>

미술품의 창작과 거래, 컬렉션 문화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국가든 개인이든 축적된 자본에서 창출되는 경제적 풍요를 토대로 꽃을 피우고 발달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높에 평가받는 고급한 미술품을 비롯해서 세계가 찬탄하는 문화유산들은 대개가 절대왕조시대,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상류층의 후원과 주문으로 만들어지고 수집 보존되어온 결과임을 상기하자.

 근대를 지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일반 시민계급으로 분산되는 가운데 컬렉션 문화는 사회 저변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역사적 뿌리가 오래된 부(경제력)와 미술품 컬렉션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별 변함이 없다. 미술품 수요는 본질적으로 '소득'보다는 '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45p

우현 고유섭 선생의 말을 떠올린다. "한국 미술은 신앙과 삶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즉 '생활 자체의 본연적 양식화'라는 점에서 민예적 성격을 갖는다."

95p

과학기술의 수준이 낮고 더욱이 그 진보가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되던 근대 이전, 풍토와 마을이 인간의 미술활동을 비롯해 삶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진보를 경제력 향상과 물적 풍요의 원천으로 인식하는 이 시대에는 인간이 자연에 순응하며 살던 시대와는 달리 자연환경과 마을의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그 대신 과학기술,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문명화와 같은 새로운 환경요소의 역할이 커지게 된다.

107p

당시만 하더라도 이 분야 연구 성과가 거의 축적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이 분야와 관련이 없는 농림학교 졸업 학력의 일본인이 이 정도의 연구보고서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이링 아닐 수 없다. 다쿠미의 그런 업적에 대해 나는 오직 조선 도자와 민예에 대한 그의 열정과 사랑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114p

그 추도 호에서 1920년대에 이미 천재 도예가로 명성을 떨쳤던 가와이 긴지로는 다음과 같은 헌사를 남겼다.

"한일합방 이래 조선에 건너간 일본인들이 그 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취급했던가에 생각이 미치면 지금도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됩니다. 그런 가운데 아시카와 씨 등이 매사에 그에 대한 속죄를 하시던 일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복자가 저지른 과오. 그런 야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당신이야말로 인간의 무지에 빛을 비추어준 분이었습니다."

 아사카와 노리다카, 그는 조선 도자기를 조선 사람보다 더 깊이 탐구하고 수많은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아우 다쿠미와 더불어 조선의 도자문화와 민예를, 그리고 조선미술의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깊이 이해하고 사랑한 몇 안 되는 일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39p

"인생에서 살아갈 만한 가치를 부여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일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말이다. 

153p

"취미의 세계에는 자신을 위협하는 건 없지만 삶을 요동치게 만들 무언가를 맞닥뜨리거나 발견하게 해주는 것도 없다. 가슴이 무너지는 실망도,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환회나 흥분도 없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해냈을 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성취감과 충실김은 상당한 비용과 위험이 따르는 일 안에 있으며, 거기에는 늘 실의와 절망도 함께 한다. 결국 우리는 '일'을 통해서만 이런 것들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

무라카미 류는 '취미'와 '일'에서 비롯하는 감흥이나 성취감의 정도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으며, 오직 일을 통해서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성찰하고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말에 너무나 공감한다. 그저 좋아서 하는 순수한 취미는 생산성을 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전심전력하면서 몰두하지 않는다. no pain, no gain 은 성취감에도 해당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직업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인간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므로 너무나 소중하고 사명감을 갖게 만든다)

162p

예를 들어, '완물상지'를 경계하는 유교적 시대정신이 미술창작이나 수집 감상 활동을 억제했다고 보는 관점이다. 유교정신에 충실한 사대부들이 지배하던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하면 일리 있는 지적이라 하겠다. 하지만 나는 조선시대의 나라 형편이 미술활동을 후원하고 고급 골동서화를 즐겨 소장할 수 있을 정도로 물적 경제적 토대가 충분치 않았다고 보는 관점에 더 점수를 주고 있다.

165p

시대적으로 대략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서화를 수집하고 완상하는 취미는 권력과 경제력을 갖춘 왕실이나 종친, 또는 사대부만이 누릴 수 있는 고급하고 아취있는 생활의 한 방편이었다. 적어도 중인이나 상민의 영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 세상은 변하기 시작한다.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화폐경제가 확산되는 가운데, 새로운 시대조류를 앞서 인식하고 전문기술 직종에 종사하면서 부를 축적한 중인계층이 새로운 서화 수집과 감상층으로 가세한 것이다. 중인계층 가운데서도 특히 경제력이 확대된 의관이나 역관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들은 당시 문화 선진국인 청나라를 왕래하며 새로운 사상사조인 북학을 받아들이면서 시대변화를 앞서 읽었고, 한편으로는 서화 컬렉션을 통해 사대부 영역으로의 진입을 꿈꾸기도 했다.

"세상 모두가 나를 버렸듯이 나도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문화를 선양하여 태평시대를 수놓음으로써 300년 조선의 풍속을 바꾸어놓은 일은 먼 훗날 알아주는 이가 나타날 것이다."

206p

마지막 세 번째 삶은 문화예술을 통한 삶이다. 문화예술의 세계에서는 1000년 단위로 흥망성쇠와 순환 질서를 이야기한다. 그만큼 그 세계의 힘(삶)은 질기고 그 영향(생명력)은 오래간다는 말이다. 인간의 인식체계로는 영원의 삶, 내세의 삶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그래서 문화예술에 내재된 흥망성쇠와 순환 질서는 100년을 살기 힘든 인간의 안목이 아닌 역사의 안목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256p

우리 사회에서 고미술품 딜러나 컬렉터들이 문화계를 이끄는 지성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지만... 신뢰를 토대로 하는 거래문화의 정착은 결국 고미술계 사람들의 양식과 모럴에 달려 있다는 보편적 인식에 지금의 현실이 겹쳐질 때, 그 둘의 어긋남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오류>

136p

도판의 주인공은 메디치가를 세운 국부 코시모 데 메디치가 아니라 훗날 공작 가문을 연 후손인 코시모 1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후기 중앙 군영과 한양의 문화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9
노영구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 체제로 바뀌면서 군대가 한성에 주둔하게 되고 그로 인해 바뀌게 된 제반 상황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명의 필자가 쓴 책들은 통일성이 부족하기 마련인데, 하나의 주제로 잘 압축되어 있는 좋은 기획이라 조선 후기 군사 체제에 대해 많은 정보를 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수도 방위에 중점을 두게 되어 한성에는 많은 주둔군이 생긴다. 

당시 한양에 거주하는 남성 인구가 10만, 여성이 10만인데 군사가 무려 2만이니 남자의 20%, 전 인구의 10%가 군인이었던 셈이다.

조선은 흔히 문치주의 나라라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군사가 한양에 주둔했다는 것도 놀랍고 무신정변 등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잘 관리된 점도 신기하다.

훈련도감 군인들은 모병제인데 미달되자 3년에 한 번씩 전국 각지에서 군역을 질 승호군을 뽑아 올린다.

그런데 한 번 승호군에 뽑히면 고향의 재산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상경해야 돼서 한양은 군인들의 거주지 부족에 시달린다.

또 처음에는 재원을 조달했으나 재정이 피폐해지고 균역법 시행 등으로 군필이 줄어들자 군영에서는 활자 인쇄나 조총 판매, 심지어 화폐 주조 등을 하게 된다.

군영에 장인들이 소속되어 직접 무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적인 상업 활동도 어느 정도 용인되어 난전 등에서 팔게 되자, 시전 상인의 이득과 충돌하여 금난전권 문제로 다투게 된다.

국사 시간에 배울 때만 해도 시전 상인들이 난전을 금하여 이익을 독점하려 하자 정조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를 철폐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시전 상인들 역시 시장에서 장사하는 권한을 얻기 위해 많은 세금과 역을 부담하고 있고 군영 등에서 상업 활동을 하면서 군대의 힘을 빌려 괴롭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라에서는 군대에 제대로 급료를 지급하지 못하기 때문에 알아서 먹고 살 길을 찾으라는 의미로 적당히 눈감아 줬던 모양이다.

역시 역사는 간단하게 선악으로 구분할 수 없는 문제다.




<인상깊은 구절>

24p

조선의 기병은 16세기 말까지도 전투의 주역이었다. 물론 16세기 명나라의 요동 지배가 안정적이었으므로 조선의 군사적인 역할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따라서 조선은 이전과 같은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필요성이 줄어들어 군사력이 상당히 축소되었다. 이에 더해 중국의 강남 지방에서 발달한 수전 농법이 조선에 전해지면서 주로 말 목장이 있었던 저지대 일대가 논으로 개발되었고, 목장이 주로 해안 도서로 이동하면서 이전에 비해 말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정병 중 기병인 기정병의 숫자가 줄어들거나 보병, 즉 보정병으로 전환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나기도 했다.

51p

기병이 공격의 주요 무력이 된 것은 그들의 신분이 일반인(농민)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왕조 국가의 신분제에서 력을 소유하는 지배층에서 기병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보아야 한다. 말을 유지하는 비용도 문제지만, 기병이 되기 위한 무예의 단련과 기간은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병이 사용하는 검술, 궁술의 습득은 아동기부터 학습해야 양성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따라서 기병 위주의 군대는 신분제가 강하게 유지되는 사회가 뒷받침한 결과라고까지 해석할 수 있다.

66p

장용영에 대한 우수성과 뛰어남을 말하지만, 군사적으로 보면 새로운 군영이거나 신무기로 육성된 군부대도 아니었다. 정조와 화성이 언급되면서 등장하는 군영이어서 조명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정조 사후 장용영이 급속히 해체되고 그 흔적조차 사라진 것을 보면 확인되는 일이다. 장용영의 체제나 군병이 군사적으로 유용한 것이었다면 비록 해체되더라도 다른 군영에서 접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심지어 정조 대 가장 큰 기념비적 건물인 화성조차 더 이상 군사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결국 정조가 장용영을 이용해 군제를 변화시키고 병력을 재배치한 과정은 군사력 강화라든지, 수도권 방어망의 구축이라는 군사적인 면보다는 군영을 이용해 정국을 좌우하려던 심중에서 나온 국왕의 통치행위로 해석해야 하겠다.

 정조가 서거한 1800년, 장용영은 별다른 논쟁도 없이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일견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장용영의 병력과 재원이 다른 군영에서 이속한 것이 많았고, 화성을 지속적으로 경영할 정도로 국가 재원이 넉넉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70p

정조가 주도해서 창설한 장용영도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기구이며, 정조의 정치적 명분을 수행하던 임시 기관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장용영 설치가 일시적 방편에 불과한 것이었으므로 정부의 공식 기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신료들의 인식이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심환지의 말뜻은 장용영이 정조와 신료 간의 타협에 의해 만든 것이 아닌 국왕이 사적인 의도를 가지고 만든 기구이므로 더 이상 존속시킬 이유가 없으니 철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으로 보인다. 심환지와 신료들의 장용영에 대한 시각은 정조가 장용영을 설립하기 위해 기존 군영들을 재편하고 축소하던 시각과 별반 차이가 없다. 군영은 정국을 돌파하거나 새로운 정치 판도를 만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던 것을 확인하여 준다.

 정순왕후는 국가의 재정을 풍족하게 하게 하는 민생 위주의 정치를 하기 위해 장용영처럼 쓸데없는 제도는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조도 시대가 바뀐 상황에서 동일한 정책을 시행했을 것이라고 했다. 관료는 물론 상민에 이르기까지 장용영의 군사적 기능은 유지해야 한다는 등의 반대 의견이 없었던 것은 심환지 등이 장용영 철폐를 주장한 것에 대부분 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95p

광해군이 풍수나 술법에 많이 의지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이어하기를  꺼려했던 것은 노산군과 연산군이 폐위된 곳이기 때문이다.

106p

왕조 시대의 국왕은 국가와 같은 의미를 지닌 존재였다. 그 때문에 왕을 지키는 것은 국가를 지키는 것과 동일하게 여겨졌다. 

123p

양 난 이후 오군영이 설치되면서 '북벌'이라는 기치 아래 군사력이 증강되었지만 실상 급료병 운영은 많은 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는 사업으로 군문을 창설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지에도 많은 재정이 투입되어야 했다.

 당시 유통을 고려한 화폐는 백성이 동전 형태로 당장 입거나 먹을 수 없었지만, 동전을 주조해 배포할 때 액면가대로 곡식을 받거나 주전 과정에서 이익을 확보한다면 그만큼 잉여 자원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부 입장에서는 주전을 통해 제작한 동전 자체로 부가가치를 높인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 것이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정부는 조선초기부터 화폐의 유용성에 주목해 민간에 화폐를 유통시키려고 노력했다. 특히 동전뿐만 아니라 비교적 재료비가 적은 저화를 유통시키려는 노력을 개국 초부터 지속했다. 저화 같은 지폐는 액면가에 해당하는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해 민간에서는 화폐의 가치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금속화폐는 제작량이 충분하지 않아 전국적으로 사용을 강제할 수 없었던 이유가 컸다. 

132p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군문은 정번한 재원뿐만 아니라 주전을 통해 남는 재원을 창출했고 이를 국가재정으로 활용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164p

18세기 서울시장에서 난전의 폐단으로 문제시되는 부류는 생계를 위해 좌판을 벌이는 빈잔한 민호가 아니라 왕실, 세가, 군문처럼 권력을 가지고 조달시장에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특히 균역법 시행 이후 군문에서는 줄어든 군포 수입을 균역청으로부터 급대받기는 했지만, 급대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재정의 부족분을 만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문 차원에서 군인들의 상업활동을 조장한 측면 역시 간과할 수 없다. 특히 군문의 장인들은 직접 수공품을 생산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난전활동에 가담하기 쉬웠다.

169p

정부에서는 왜 시전상인들의 요구에 따라 군문의 난전활동을 강력하게 규제하지 않았을까? 형조와 한성부,사헌부로 대표되는 삼법사가 난전에서 거두는 속전이 관원의 급료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난전을 일방적으로 줄일 수는 없었다. 정부로서도 이미 속전을 재원으로 활용하고 있었으므로 난전을 없애기보다 단속하는 차원에서 관리하는 편이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기존의 금난전권을 행사하는 시전 상인의 특권을 최소한으로 인정해 주는 선에서 정부는 서울시장의 참여 계층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자 했다. 군문의 경우 이미 음성적인 상업활동을 통해 이권에 가담하고 있었던 데다가 군문에 속한 군인들 역시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국역에 편제되어 있었으므로 이들의 상업활동을 일방적으로 규제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195p

화기도감은 국왕이 장인들의 작업 실태를 매월 보고받을 정도로 국가적 사업의 성격을 지녔으므로 장인들을 동원하는 방법도 강제성을 따고 시행되었다. 

198p

당시 개인 휴대 화기로서 조총보다 뛰어난 것은 없었으며 왜란을 통해 이미 그 위력이 증명되었는데도 생산에 주력하지 않은 것은 큰 의문이다. 광해군 대는 조선에서 조총 제작에 용이한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조총의 지속적 개발과 연구가 필요했다. 그런데도 대형 화기인 화포를 중점적으로 제조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당시의 대외 방어책이 산성 중심이었고, 조선초부터 야인의 침입에 화포가 큰 효능을 발휘했다는 것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겠다.

204p

왕조시대에 개인이 무기를 보관한다는 점은 의아할 수도 있지만, 상번군이 화기인 조총과 개인 군장을 모두 구매해서 상경하던 일은 조선후기에 흔한 일이었다.

216p

우의정 정유성이 "군복 차림으로 도성 안에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데, 지금 병기를 가진 군사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어 식자들은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조선후기 한성부는 많은 수의 군병들로 가득했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군병들이 서울 인구 증가에 큰 원인이 되었다.

222p

17세기 국방력 강화와 함께 국가는 승호군의 수효를 점차 증액하였는데, 이는 많은 수의 지방 군병이 서울로 올라오는 계기가 되었다. 군병들은 생활기반이 전혀 없는 서울에서 적은 급료로 가족까지 부양했으므로 서울의 상권 발달을 이용해 상업활동을 하거나 각종 토목공사, 하역작업의 일용노동자로도 활동하였다. 하지만 절도나 강도 행각을 서슴없이 행하는 자들이 생길 정도로 지방 군병의 서울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289p

18세기 후반 조선의 중심인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 중의 첫째가 바로 배경 없는 무인들이 관직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으로 언급될 정도로 차별받는 무인들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표현이다.

303p

군영 소속 무인들은 공공 분야에서 민간인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제력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조선시대는 생활 전반에 관습법이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시대였다. 그러므로 미풍양속을 해치는 사건 혹은 그 사건의 주체들에 대한 간섭 및 통제력 역시 어느 정도 예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궁중서화 1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도록 제6책
국립고궁박물관 지음 / 그라픽네트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회화와 서예 작품 도록이다.

논고가 많지 않아 얻을 만한 정보가 적은 점이 아쉽지만 대신 도판이 아주 선명해서 감상하는 맛이 있다.

이런 큰 도록들은 대출제한 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출이 돼서 집에서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작품은 해강 김규진의 죽란도 병풍이다.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의 근대서화전에서도 비슷한 작품을 봤던 기억이 난다.

굉장히 큰 규모의 병풍에 단지 먹과 붓으로만 저렇게도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감탄스럽다.

격조 높은 궁중의 청록산수화도 멋스럽지만 역시 이름있는 화가들의 예술 작품들이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연잎을 그린 이도영의 수묵담채도 먹이 주는 청아한 감상미가 있어 좋았다.

그림과 글씨를 자수로 수놓은 자수병풍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기도 힘든데 그걸 실로 수놓기까지 하다니, 바느질 솜씨가 정말 대단하다.

서예는 감상하는 법도 모르고 다 비슷해 보였는데, 이하응의 서예 작품 바로 다음에 손자며느리인 순명효황후의 글씨가 실린 걸 보니 수준 차이가 극명하게 대조되어 아, 하고 무릎을 쳤다.

흥선대원군의 글씨는 그야말로 예술적인 작품 같은데, 뒤에 나온 손부의 글씨는 마치 초등학생이 붓글씨 연습한 것처럼 보인다.

명성황후의 글씨는 좀 나은데 여성들은 붓글씨 쓸 일이 많지 않아 그런지 단정하긴 하지만 서예가 주는 예술적 느낌이 전혀 없다.

서예 병품을 보면 과연 동양에서는 붓글씨가 회화와 같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게 믿겨진다.

흥선대원군의 난 그림도 시서화와 여백의 미가 어우러져 아주 좋았다.



<인상깊은 구절>

369p

궁중장식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장식적인 용도에 부합하는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장식적인 색채가 사용되었지만 깊이 있는 색감의 구현으로 지나치게 튀지 않는 품격을 갖추고 있는 것도 궁중장식화의 특징이다. 그러나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회화 유물 중 일부에서는 단순화, 도식화가 심화되고 정교하지 못한 필치와 이질적인 색감들이 눈에 띈다. 전반적으로 수준이 낮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그림들은 조선말기와 대한제국시대를 거치며 궁중 회화 전담 기구가 폐지되고 외래 문물이 밀려들어오는 등의 급격한 변화를 겪던 시기의 산물로 보인다. 정교한 필법과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감이 어우러져 높은 격조를 자랑하던 전통 궁중장식화의 흐름이 이렇게 단절되고 만 것이다. 


<오류>

366p

혜경궁 홍씨 (1737-1815)

-> 혜경궁은 1737년생이 아니라 1735년생이다.

426p

안중식 (1851-1919)

-> 안중식은 1851년이 아니라 1861년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기 백제사의 제문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82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8년 12월
평점 :
품절


어려워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비교적 평이하게,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다.

사료 인용 부분만 한자 때문에 다소 어려웠고 그 외 저자들의 설명은 역사에 관심있는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친절하게 기술한다.


중국 동북공정이 백제까지 미치는 줄은 몰랐다.

만주에 위치했던 고구려 뿐 아니라, 부여에서 출자했다고 믿어지는 백제까지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황당하다.

부여가 만주에 있었고 전연에 의해 망한 후 옥저로 옮겨갔다가 낙랑이 고구려에 의해 사라지는 틈을 타 옛 대방고지에 세운 나라가 백제이므로 곧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삼국통일 때 백제를 당나라가 멸망시키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했으며 그 유민들을 대거 중국으로 사민시켰던 점도 근거로 거론된다.

또 중국 자료는 일본서기를 신뢰하는 바람에,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것 같아 놀랬다.

백제가 문화를 전파하고 대신 왜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았다는 정도는 이해되는데, 왜의 부용국이었다고까지 주장하는 게 황당하다.

당이 백제를 멸망시켜 한반도에서 이익이 줄어들자 백촌강 전투를 일으켰고 거기서 패하자 비로소 당에 굴복해 견당사를 보냈다고 한다.

백촌강 전투라고 하면 우리는 부모의 나라인 백제가 위기에 처하자 일본이 온 국력을 다해 구하기 위해 달려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백제 왕실이 과연 부여에서 출자했는가에 대한 논의도 흥미로웠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기로는, 백제는 주몽의 왕자인데, 유리가 부여에서 건너오자 어머니 소서노 부족과 함께 남하하여 세운 나라이고, 고구려 역시 부여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결국 백제와 고구려 모두 부여 왕실에서 기원했다.

백제는 성씨마저 부여씨를 쓰고 성왕 때 남부여로 국호를 바꾸기까지 했다.

그런데 고고학적 자료로는 4세기 이전에 한성 백제에서 국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뿐더러 부여계 유물은 더더군다나 없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는 재지계, 즉 마한계 유물만 발견되어 남조 역사서에 실린대로, 마한 54개국 중 백제국이 성장하여 나라를 이루었다고 본다.

신라 왕실 역시 흉노 기마민족설이 부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백제도 실제로는 북쪽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토착 세력이 성장하여 이룬 국가인지, 매우 흥미로운 문제다.

그렇다면 왜 백제는 부여 출자설을 대외적으로 선전했을까?

저자는 고구려와 경쟁하는 상황에서 대등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이 부분이 납득이 좀 안 됐다.

단지 고구려와 똑같은 위치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한 집안이었다고 선전했을까?

뭔가 관련이 있으니 그런 주장을 폈을 것 같다.


요서 경략설도 부여와 관련이 있다.

전연의 공격으로 부여가 망한 후 그 유민을 요서 지방에 사민시켰는데, 백제인들은 남조와 교류하기 위해 연안항로를 이용하면서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런 현상을 두고 실제로 요서를 지배하지 않았던 중국 남조에서 백제 요서 경략설을 유포시켰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다른 책에서도 읽었던 것 같다.

간단히 말해 무역 등 문화경제적으로 요서와 관련있는 백제를, 실효지배 하지 않았던 남조에서 제대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혹은 북조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가 요서를 경략했다고 사서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어떤 저자는, 부여 유민이 일으킨 반란을 백제가 일으킨 것으로 오해했다고도 한다.

이런 것을 봐도 확실히 백제와 부여는 관련이 있긴 한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5p

백제의 요서 경략설이나 전연에 백제가 공파되었다는 기록은 백제가 북방에 있었다는 중국 사료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난제에 속한다. 이들 사료의 자료적 성격을 짚어 기재 내용 그대로 이해될 수 없음을 밝혔다. 그러면서 전연에 의해 요서로 강제 사민된 부여계 이주민의 존재가 이들 사료의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에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

49p

1980년대에 서울 잠실 부근에서 몽촌토성과 석촌동고분을 비롯한 백제 왕도 관련 유적들이 대거 발굴, 조사되기 시작하면서 유적의 편년과 <삼국사기> 기록의 불일치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각종 고고자료의 편년은 <삼국지> 기록과 더 잘 어울렸다

68p

백제가 "부여의 별종"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만큼 문헌자료에서는 부여와 백제의 계승관계가 각별하다. 그런데 고고자료는 그렇지 않다부여의 물질문화 특징에 대한 조사, 연구가 아직 미진하긴 하지만, 무덤 양식과 출토 유물 등 지금까지 알려진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부여와 백제 사이의 연관성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고구려와 백제, 마한과 백제, 그리고 심지어 한군현과 백제 사이의 문화적 영향관계가 더 잘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서 백제의 부여 계승의식을 4~5세기경의 국제 정세가 반영된 관념상의 문제로만 보려는 견해도 있다. 한강 유역의 적석총에 묻힌 사람들, 곧 압록강 유역에서 살다가 남하하여 백제의 지배계층으로 부상한 세력이 4세기 이후에 그들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와 격렬한 군사 경쟁을 벌이게 되면서 대외적으로 고구려와 대등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원류인 부여를 더 중시하고 그것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한강 유역에서 적석총에 앞선 시기의 지배층 묘제가 그리 뚜렷하지 않다는 현상에 기초하고 있다.

 한강 유역과 그 인근 지역, 곧 석촌동 고분군을 비롯해 김포 운양동, 충북 오송 등지에서 부여 또는 부여계 집단과의 문화적 교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으므로, 앞으로의 조사 결과를 조금 더 살펴보아야 한다. 더욱이 지금까지 확인한 한성 지역의 백제 지배층 무덤이 대략 4세기대 이후의 것이라면, 또 아직 석촌동 일대의 움무덤에 관한 조사, 연구가 턱없이 미흡하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앞으로 부여 계통 물질자료가 더 늘어날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80p

4세기 초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자 다수의 유민이 백제에 귀화하였을 것이고, 백제가 평양성을 공격할 정도로 북진을 거듭한 근초고왕 재위 무렵에는 더 많은 낙랑, 대방 사람들이 백제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근초고왕대의 박사 고흥은 아마도 그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근초고왕이 동진에서 받은 '낙랑태수'호는 황해도 일대에 살고 있던 낙랑계 주민을 회유하는 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옛 낙랑, 대방의 주민 중에는 여전히 중국의 정통 왕조인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백제는 고구려, 신라에 비해 제도와 문화 면에서 중국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여기에는 낙랑계 유민의 활동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백제의 중국계 귀화인이 모두 낙랑계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한성도읍기에는 중국계 귀화인의 절대 다수가 낙랑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87p

고고자료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은 문헌자료의 편년 시비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아직은 기존 역사학의 연구 성과를 지나치게 의식하여 고고자료 자체의 과학적 요소를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고 일시적 또는 인상적 논증자료로 활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자못 아쉽다.

104p

전연 모용씨의 압박에 못 이긴 부여 사람들이 한반도로 이동하여 마한 땅을 점령함으로써 백제를 건국하였고, 그 시기는 모용씨가 제국을 선포한 352년부터 백제와 동진의 교류가 시작된 372년 사이라고 추정하였다. 

109p

백제는 372년부터 373년에 연이어 동진과 통교를 하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당시 중국으로 이르는 길이 연안항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간 기착지로서 부여 왕 현이 사민된 요서 지역 부근만큼 적당한 지점이 없었을 것이다. 중국 왕조가 안정이 되어 공식적인 교류가 허용되는 경우에는 항해가 어렵지 않겠지만, 혼란기에는 남조와 통교를 하려면 백제가 스스로 중간 기점을 확보해야 한다. 만약에 이러한 중간 거점이 없었다면 남천한 동진과 통교하는 자체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으 앞의 사료는 부여인들이 사민된 요서 지역에서 활발하게 교류한 백제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된다. 백제와 부여의 연관성을 보여주지만 백제의 침략을 받았다는 사실은 찬자 인식의 오류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110p

백제는 쇠약해진 부여 및 부여의 이주민들과 통교를 하면서 요서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가 전연의 수도에까지 이르렀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앞의 사료는 백제인들이 요서 지역에 진출하여 거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전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교류는 문제를 삼을 만한 사안이 아니며 경제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를 묵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구가 급격히 팽창되자 전연 내부에서 식량 부족과 폭동의 가능성 등에 대해 나름대로의 방책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113p

이와 같이 부여계 인물이 이 지역에서 활약을 하게 된 것은 바로 부여계의 세력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처럼 광개토왕 연간에 고구려 일파인 고운이 북연의 왕으로 추대된 점을 참조하면, 현재의 민족적 개념보다는 해당 지역에서 세력을 얼마나 굳건히 유지하느냐 여부가 정치력의 관건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117p

오히려 백제에서는 부여 출자의식뿐만 아니라 고구려 출자의식도 상존하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고구려를 의식한 부여씨 사용이 좀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감안하면 근초고왕 때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고구려와 다투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그 시점부터 출자를 부여로 천명한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백제가 부여에서 유래하였지만 부여씨의 사용과는 별개로, 정치적 목적상 그 출자의식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고구려의 정벌을 요청한 개로왕 때 부여 출자설을 강조한 것은, 부여 출자설을 통해 부여의 정통 계승자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분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성왕 때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라고 칭하는 것도 그 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근초고왕 때 부여 성을 사용한 것은 부여 출자설의 시작이며, 이는 고구려와 경쟁하고자 한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인다.

118p

여울 등이 부여라는 족성을 사용한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행동이며 이는 당시 보편적 선진문화였던 한화의 표현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백제 왕의 부여 성씨 사용은 부여와의 친연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그럼으로써 요서 지역에서 활동 중인 부여계 이주민들과 같은 종족이라는 의식을 형성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23p

낙랑이 313년에 장통의 인솔로 대릉하 방면으로 옮긴 것도 주목된다. 이는 백제가 받은 낙랑태수 직과 요서 지역으로 옮긴 낙랑이 혼선을 빚을 수 있는 요인을 제공하였다. 이에 따라 낙랑태수호를 고구려에 대한 억지력과 낙랑 유민에 대한 친화력의 근간으로 이용하려는 백제의 움직임이 남조 사가들에게 낙랑 교군에 대한 영유권으로 인식되었고, 이를 통해 백제의 요서 경략설이 등장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127p

이러한 배경으로는 남북조의 대치 상황에서 북중국의 땅은 남조의 영역이 아니어서 얼마든지 실제와 상관없는 주장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남조의 입장에서 요서 지역의 영유권 주장에 대한 인정은 북조와 백제의 대립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에 바람직한 상황이다. 백제의 입장에서도 이들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백제의 요서 경략이 일정 정도 시대에 맞게 재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제가 고구려를 의식하여 요서 경략을 주장하는 것은, 남북조 대치 상황에서 남조와 비슷한 상황으로 이해되어 남조 국가의 공감과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이를 의식하여 백제는 고구려와의 대치 상황으로 몰아갔고, 이러한 점이 사가들에게 강하게 인식되어 고구려의 요동 경략과 대구하여 백제의 요서 경략이 인정되었다고 보인다.

 백제가 요서 지역에 이른 것은 서진의 패망과 낙랑, 대방군의 퇴각 이후 중국과 교류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낙랑, 대방 문화를 접한 백제는 이들의 발달한 선진 문물에 매료되었으며, 이를 흡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의 본거지인 중국에까지 이르러 직접 수용하고자 노력하였다. 고구려 또한 요동 지역으로의 진출과 낙랑, 대방으로의 남하를 동시에 추진하였다. 이처럼 백제와 고구려는 양 방향에서 필사적인 노력을 강구하였고, 이러한 두 나라의 대립의식은 요서 경략설이 생성되는 배경이 되었다.

142p

대부분의 경우는 부여 왕실과 백제 왕실의 계승성을 염두에 두고 있을 터이지만, 이는 역사 기록이나 신화, 전승에서 가능하지, 고고학적 물질문화를 통해서는 쉽지 않다.

177p

"신라의 북변에 거주하면서 소규모 단위로 노략질을 하고 때로는 고구려의 부용병으로 동원되던 집단"이라는 공통성으로 인해 신라 통일기 이후 어느 시점에 예를 말갈로 개서하였다는 해석이 내려진 바 있다.

180p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백제 국가의 국민 절대 다수는 경기-충청-전라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이후 장기간 성장한 주민집단이라는 점이다. 고구려의 기원을 고찰하면서 맥족 이동설을 부정하고 고구려의 등장에서 압록강 중류 지역과 혼강 유역에서 적석총을 조영하며 생활해온 토착민사회의 성장을 중시하는 견해는, 백제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에도 많은 시사를 준다. 설령 부여나 고구려에서 소수의 주민이 이주하여 백제 왕실 구성에 일조하였다고 하더라도 백제인의 주축이 재지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197p

백제는 <삼국지> 위지 마한전에 기록된 마한을 구성하는 부락 중 하나인 백제가 발전한 국가로서, 그 왕실에 부여 왕의 혈통이 있거나 혹은 부여 왕자인 구태가 남하하여 백제 부락의 추장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구태가 부여족을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국을 건설했다는 기록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백제 민족과 국가는 백제는 마한 영역에서 성장한 민족으로 고구려나 부여와 하등 관계가 없으며, 백제 왕실이 부여씨를 차용한 것은 그들의 지위가 고구려 왕과 동등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204p

백제가 졸본부여에서 출자했다고 주장하는 강유공 등은,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는 기사는, 졸본부여의 후예인 여암이 전진이 멸망하던 혼란기를 틈타서 일시적으로 요서를 점거했던 사건을 지칭한 것으로 이해했다.

213p

4세기 중반 일본은 임나일본부를 건설하고, 이후 백제를 조공국으로 삼았는데, 고구려에 패한 후 한반도에서 세력이 위축되었다. 수당제국의 중국 통일과 고구려에 대한 공격은 한반도에서의 왜의 이익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백제가 멸망한 후 부흥운동을 일으키자 왜가 개입하였지만, 백강 전투에서 패한 후 당과 역량의 차이를 절감한 일본은 대륙정책을 전환하여 견당사를 파견했다는 것이다.

214p

왜와 백제의 관계를 종주국과 속국이라는 불평등한 관계로 파악하는 학계의 의견에 반대하고, 상호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관계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백제가 왜에 대해 저자세 외교를 취한 것은 삼국간의 분쟁에서 왜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기 위해였다고 했다. 왜가 백제 일변도의 정책을 취한 것은 한반도 가야 지역에 대한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였지만, 왜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던 백제계 이주민들의 역할도 중요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시기의 양국 외교관계의 특징은 백제의 선진 문화의 수출과 왜의 군사적 지원으로 귀결된다고 했다.

230p

일제 강점기 때 행해진 일본 학자들의 한국사 연구를 비판하였는데, 특히 <삼국사기>의 역사적 지위를 높이고 중국 정사의 가치를 폄훼한 점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삼국사기>는 믿을 만한 역사서사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따라서 이를 기초로 한 연구결과는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넷 2019-07-0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두고는 아직도 못 읽고 있네요. 얼마전에 개정판으로 나온 노중국 교수님의 백제정치사도 빨리 읽어야 하는데... 읽을 책들들은 많고 시간은 너무 부족하네요,

marine 2019-07-06 08:33   좋아요 0 | URL
저도 보관함 리스트가 1000권이 넘어갑니다.
신간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ㅠㅠ
나이드니 눈 안 보여 책 못 볼까 봐 두려워요
 
조선 양반가의 치산과 가계경영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6
문숙자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책 속의 선비들은 실생활과 별 상관없는 고담준론, 형이상학만 논하길래 도대체 어떻게 가계를 영위했을까 궁금했다.

관료는 녹봉이라도 받을텐데 지방 사족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양반은 학문 이외에는 어떤 경제 활동도 하지 않고 학문 역시 돈을 벌기 위함은 전혀 아닌데 말이다.

부인들이 삯바느질이라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갔던 것일까?

이 책은 양반가의 재산 형성과 유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 재산을 나눠주는 분재기와 문서 등을 통해 분석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많이 와 닿는다.

간단히 말해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학문이나 정치만 했을 뿐 실제적인 노동은 할 필요가 없는 대지주들이었다.

토지 뿐 아니라 노비제를 통해 인신 구속까지 할 수 있는 지방의 대단한 세력가들이었다.

조선 후기로 올수록 양반이 흔해지고 잔반도 생기지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양반이라는 사족 계층은 노비와 전답을 엄청나게 소유한 귀족들이었던 셈이다.

책에 예시로 든 이맹현이라는 양반은 상속 노비가 무려 700명이 넘었고 전국 각도에 흩어져 신공을 바쳤다.

조선 후기의 윤선도 역시 500명이 넘는 노비를 자손들에게 남긴 엄청난 부호였다.

기본적으로 재산은 균분상속 됐으나 윤회봉사를 하던 전기와는 달리 장남이 제사를 지내면서 재산 역시 장남에게 집중되었다.

보통 재산의 영세화를 막기 위해 장자 상속을 했다고 하지만 저자는 그보다는 가문의 위상을 유지하고 조상의 제사가 끊기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본다.

문중의 제사를 위해 따로 재산을 상속하고, 그 나머지를 자식들이 균분상속 하는 식이다.

윤회봉사가 사라지고 장남이 전담하게 되면서 종가의 재산은 곧 장남이 갖게 되고 가문은 재산의 집중으로 지역에서 위상을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양반들의 나름 생존전략이었던 것 같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인신 구속이 어렵게 되자 멀리 사는 납공 노비들은 점차 방매하게 되고, 토지에 더 비중을 둔다.

이 때 개간이 큰 역할을 한다.

간척지 등을 양반가에서 열심히 개간하는 모습을 보면 양반들 역시 그저 한가롭게 학문만 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개간한다고 무조건 자기 땅이 되는 것은 아니고 입안 등의 절차를 통해 소유권을 확정지어야 하므로 양인보다는 절차에 밝고 인맥이 넓은 양반들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제사가 중요한지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현대인의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인상 깊은 구절>

6p

가족공동체의 유지, 존속이 기본이고, 그 가족공동체의 위치를 지역 사회의 대중들과 비교하여 상대적 우위를 지닌 양반 신분에 두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것이 중앙의 권력집단으로부터 물러나와 지역에 세거하는 양반들이 지역 내에서 또 다른 권력을 보장받으며 대대로 살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소수의 양반 가계를 통해 살펴본 이러한 삶의 방식이나 이념들은 조선 후기를 지나면서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전파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혈연에 기초하여 가족공동체를 어떤 공동체보다 우선시하고, 자기 가계의 출발점을 조선시대 양반, 관료, 학자에서 찾으며 수백 년간 가계가 계승되어온 것으로 믿고 있다. 

25p

안동 중심의 영남 유명 가문들과 통혼 및 사우 관계를 맺으면서 지역 내 사회적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36p

딸의 사망 후 처가와 의절하고 처가의 제사를 봉행하지 않은 사위를 상속 대상에서 배제한 것은 재산상속과 봉사의 불가분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처럼 자식으로서 부모 및 조상에 대한 봉사 의무를 제대로 수행한 이들에게만 재산상속의 권리가 동등하게 주어졌다. 

69p

대체로 한 집안에서 노비의 비중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점차 줄고, 토지는 확대되는 추세를 보인다. 이는 재산에 대한 양반가의 인식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조선 전기에는 노비의 중요도를 높게 평가하였으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노비보다 토지 소유 욕구가 증대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그 배경에는 임란 이후 빈번하게 발생하는 노비의 유망과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노비제 쇠퇴 분위기있었다. 이와 달리 토지 분야에서는 다양한 농법의 도입과 그로 인한 토지 생산성의 증대 이루어지고 있었다.

91p

하나의 입안문서에 나타난 토지가 이미 산록과 대로를 경계로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방대한 규모였다는 점이다. 윤씨가는 16세기 후반에 이미 개간을 전제로 많은 토지를 확보하였다. 그 후 17~18세기에도 같은 활동이 이어졌으므로 개간을 통해 확보한 토지가 실로 방대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거기에 덧붙여 입안을 받아두었던 토지에 대해 소유권이 상실되지 않도록 끊임없는 관리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0p

해남윤씨의 사례에서도 양안에의 등재 여부를 중시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양안에 현록하는 것이 소유권을 확고히 하는 방안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4p

16~17세기는 재경, 재지사족은 물론하고 진전을 개간하여 토지를 확장하려고 노력하는 시기로 판단된다. 그들은 입안이라는 제도를 잘 활용하여 토지를 비교적 용이하게 확보해나갔다. 실제 해남윤씨가의 경우 해택 입안을 활발히 받았을 뿐 아니라, 이를 위해 여러 경로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뿐만 아니라 갑술, 경자양전 등을 대비하여 양안에 자신들의 이름이나 노명을 등재하기 위해서도 활발히 움직였다. 이는 토지의 일시적 확장에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경영에도 그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105p

17세기 이후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전 개발도 얼마간의 노동력과 재력만 있으면 양인들까지 뛰어들 만큼 일반적인 현상으로 정착하고 있다. 

110p

거주율이 변화하여 처가살이나 처가 주변에 거주하는 관행이 점차 사라지면서 처가 주변에 위치한 토지의 관리에 부담을 느끼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처가 주변의 재산을 타인에게 방매하지 않고 이씨 가문의 종손인 이은보에게 방매한 사실이 중요하다. 이매를 통해 사위들이 처가로부터 멀어지는 현상과 함께, 종가 주변의 재산이 종손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써 사위들은 처가 주변 재산뿐 아니라 처가의 제사로부터도 점차 멀어지고 있다. 

112P

거주지 주변으로 토지를 집적하려는 노력이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노력으로 점차 양반들의 세거지는 이성잡거 촌락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위들이 처가 주변의 재산을 처가에 되파는 재령이씨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점차 사위들은 처가 주변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사위들이 이매를 이유로, 또는 봉사조 명목으로 내놓는 토지들은 처가의 장남에게 집중되었다. 거주지 주변으로 토지가 집적되는 현상은 한 걸음 나아가보면 종가 주변으로의 토지 집적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보다 직접적으로 종가에 토지를 집적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재산상속 시 종가에만 세전할 토지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118p

16세기 중반 이후 거주지를 중심으로 한 재산의 집중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토지를 거주지 주변에 집적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졌고, 자연히 종가 주변에 아들이 모이고 그들만이 주변 토지를 소유하는 경향이 생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토지의 재편 방향은 장남 위주로 진행되었다. 종가 주변 토지, 선대 묘소 주변의 토지, 개간이나 매득 등의 집중 투자가 이루어진 토지는 분할하지 않고 장남 가계로만 세전하는 지침들이 여러 가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125p

봉사조가 장남의 소유재산이 아니라는 점에서 봉사조의 증가를 종가의 재산집중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장자를 봉사자로 지칭하고 있는 사례에서 보듯이, 윤회봉사로부터 봉사의 중심이 장남에게 옮겨가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봉사조는 장남의 개인 재산은 아니지만, 가계를 대표하여 장남이 관리해야 할 재산으로 정착하고 있는 것이다. 

142p

양반들의 노비경영에 있어서 노비 가족은 일방적으로 해체되거나 보호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양반들의 재산 운용상의 필요에 따라 그것은 보호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대체로 主家 에서 멀리 떨어져 거주하는 노비, 주가에 인신적 예속이 약한 노비의 경우 가족의 분할상속은 양반들의 노비 관리상 매우 필요한 방식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집에서 수족처럼 사환하는 앙역노비, 가작 등 경작에 동원하는 노비 등은 오히려 가족의 안정이 노비경영상 유효하였을 수도 있다. 노비의 유망이 증가하는 16세기 후반 이후 노비 가족의 분할은 오히려 줄어들었는데, 이는 이때부터 원방노비 수를 줄이고 거주지 주변으로 노비를 제한하려고 하는 양반가의 축소지향적인 노비 소유 방식에서 비롯된다.

148p

해남윤씨가는 이 시기 토지의 집중적 매입과 개간을 통해 해남현 내의 재산을 확장하였다. 토지의 확장과 함께 동일 지역 노비 역시 집중적으로 매입되고 있으므로, 토지 확장 경영과 노비 유입의 관련성 여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149p

주가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거주하면서 사환하는 경우 가족을 분산하려는 의지가 약한 반면, 원방에 거주하면서 납공노비인 경우 관리의 편의상 가족을 무시하고 단신 위주의 상속과 매매를 행하였다. 원방노비의 비중이 축소되는 16세기 중반 이후 가족 해체 비율이 낮아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59p

"앙역노비는 두터이 구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의 것을 덜어 아래에 보태는 道 를 써서, 주가에서 쓸 것을 줄여 노비의 의식을 보다 좋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이들로 하여금 고생스럽고 힘이 들어 원한을 품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간혹 크게 힘쓸 일 외에 사소한 잡역이나 일상적인 사환 등은 가내노비에게 맡기고 戶奴 에게 맡기지 말아서 그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지내며 스스로 본업에 힘쓰게 하여 삶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야 한다. 洞人을 종종 부리는 것은 더욱 불가하다.

 이제 비록 배로 짐을 실어 나를 때 노비를 곁꾼으로 삼더라도, 앙역노 외에는 모두 때에 맞게 가감해서 格價 를 지급해야 한다."

(윤선도가 가훈으로 남긴 것들이다. 양반이라고 하면 노비를 착취한다고만 생각되는데 역시 그도 인정이 있는 사람이고 학문하는 사대부라 그런가 도덕적 인격도 높았던 것 같다)

189p

치산이재나 가계경영, 가계계승은 양반들에게 있어서는 재산상속을 원활히 하여 조상의 향화가 이어지도록 하려는 과정을 의미한다.

194p

균분상속과 윤회봉사로 대표되는 조선 전기의 가계운영 양상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노비나 토지 경영의 변화 양상, 봉사 방식의 변화와 봉사조의 증가,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주체를 아들, 나아가 장남으로 설정하려는 노력들이 가훈 등의 이념이나 분재기 등의 실상에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성리학의 도입이나 종법적 가족제도의 정착 등 형이상학적인 부분에서 찾기 이전에, 근본적으로는 사회 변화 속에서도 가계의 존속을 사명으로 인식한 양반가의 현실적 생존 본능이 자리 잡았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오류>

23p

그는 태종의 친왕자 인(姻)의 외손녀이며 대문벌인 파평윤씨와 혼인했는데, 처가의 위상은 그의 사회, 경제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 태종의 친왕자 이인은 바로 함녕군인데 한자가 姻 이 아니라  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