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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양반가의 치산과 가계경영 ㅣ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6
문숙자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6년 8월
평점 :
역사책 속의 선비들은 실생활과 별 상관없는 고담준론, 형이상학만 논하길래 도대체 어떻게 가계를 영위했을까 궁금했다.
관료는 녹봉이라도 받을텐데 지방 사족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양반은 학문 이외에는 어떤 경제 활동도 하지 않고 학문 역시 돈을 벌기 위함은 전혀 아닌데 말이다.
부인들이 삯바느질이라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갔던 것일까?
이 책은 양반가의 재산 형성과 유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 재산을 나눠주는 분재기와 문서 등을 통해 분석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많이 와 닿는다.
간단히 말해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학문이나 정치만 했을 뿐 실제적인 노동은 할 필요가 없는 대지주들이었다.
토지 뿐 아니라 노비제를 통해 인신 구속까지 할 수 있는 지방의 대단한 세력가들이었다.
조선 후기로 올수록 양반이 흔해지고 잔반도 생기지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양반이라는 사족 계층은 노비와 전답을 엄청나게 소유한 귀족들이었던 셈이다.
책에 예시로 든 이맹현이라는 양반은 상속 노비가 무려 700명이 넘었고 전국 각도에 흩어져 신공을 바쳤다.
조선 후기의 윤선도 역시 500명이 넘는 노비를 자손들에게 남긴 엄청난 부호였다.
기본적으로 재산은 균분상속 됐으나 윤회봉사를 하던 전기와는 달리 장남이 제사를 지내면서 재산 역시 장남에게 집중되었다.
보통 재산의 영세화를 막기 위해 장자 상속을 했다고 하지만 저자는 그보다는 가문의 위상을 유지하고 조상의 제사가 끊기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본다.
문중의 제사를 위해 따로 재산을 상속하고, 그 나머지를 자식들이 균분상속 하는 식이다.
윤회봉사가 사라지고 장남이 전담하게 되면서 종가의 재산은 곧 장남이 갖게 되고 가문은 재산의 집중으로 지역에서 위상을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양반들의 나름 생존전략이었던 것 같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인신 구속이 어렵게 되자 멀리 사는 납공 노비들은 점차 방매하게 되고, 토지에 더 비중을 둔다.
이 때 개간이 큰 역할을 한다.
간척지 등을 양반가에서 열심히 개간하는 모습을 보면 양반들 역시 그저 한가롭게 학문만 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개간한다고 무조건 자기 땅이 되는 것은 아니고 입안 등의 절차를 통해 소유권을 확정지어야 하므로 양인보다는 절차에 밝고 인맥이 넓은 양반들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제사가 중요한지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현대인의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인상 깊은 구절>
6p
가족공동체의 유지, 존속이 기본이고, 그 가족공동체의 위치를 지역 사회의 대중들과 비교하여 상대적 우위를 지닌 양반 신분에 두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것이 중앙의 권력집단으로부터 물러나와 지역에 세거하는 양반들이 지역 내에서 또 다른 권력을 보장받으며 대대로 살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소수의 양반 가계를 통해 살펴본 이러한 삶의 방식이나 이념들은 조선 후기를 지나면서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전파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혈연에 기초하여 가족공동체를 어떤 공동체보다 우선시하고, 자기 가계의 출발점을 조선시대 양반, 관료, 학자에서 찾으며 수백 년간 가계가 계승되어온 것으로 믿고 있다.
25p
안동 중심의 영남 유명 가문들과 통혼 및 사우 관계를 맺으면서 지역 내 사회적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36p
딸의 사망 후 처가와 의절하고 처가의 제사를 봉행하지 않은 사위를 상속 대상에서 배제한 것은 재산상속과 봉사의 불가분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처럼 자식으로서 부모 및 조상에 대한 봉사 의무를 제대로 수행한 이들에게만 재산상속의 권리가 동등하게 주어졌다.
69p
대체로 한 집안에서 노비의 비중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점차 줄고, 토지는 확대되는 추세를 보인다. 이는 재산에 대한 양반가의 인식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조선 전기에는 노비의 중요도를 높게 평가하였으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노비보다 토지 소유 욕구가 증대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그 배경에는 임란 이후 빈번하게 발생하는 노비의 유망과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노비제 쇠퇴 분위기가 있었다. 이와 달리 토지 분야에서는 다양한 농법의 도입과 그로 인한 토지 생산성의 증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91p
하나의 입안문서에 나타난 토지가 이미 산록과 대로를 경계로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방대한 규모였다는 점이다. 윤씨가는 16세기 후반에 이미 개간을 전제로 많은 토지를 확보하였다. 그 후 17~18세기에도 같은 활동이 이어졌으므로 개간을 통해 확보한 토지가 실로 방대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거기에 덧붙여 입안을 받아두었던 토지에 대해 소유권이 상실되지 않도록 끊임없는 관리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0p
해남윤씨의 사례에서도 양안에의 등재 여부를 중시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양안에 현록하는 것이 소유권을 확고히 하는 방안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4p
16~17세기는 재경, 재지사족은 물론하고 진전을 개간하여 토지를 확장하려고 노력하는 시기로 판단된다. 그들은 입안이라는 제도를 잘 활용하여 토지를 비교적 용이하게 확보해나갔다. 실제 해남윤씨가의 경우 해택 입안을 활발히 받았을 뿐 아니라, 이를 위해 여러 경로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뿐만 아니라 갑술, 경자양전 등을 대비하여 양안에 자신들의 이름이나 노명을 등재하기 위해서도 활발히 움직였다. 이는 토지의 일시적 확장에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경영에도 그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105p
17세기 이후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전 개발도 얼마간의 노동력과 재력만 있으면 양인들까지 뛰어들 만큼 일반적인 현상으로 정착하고 있다.
110p
거주율이 변화하여 처가살이나 처가 주변에 거주하는 관행이 점차 사라지면서 처가 주변에 위치한 토지의 관리에 부담을 느끼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처가 주변의 재산을 타인에게 방매하지 않고 이씨 가문의 종손인 이은보에게 방매한 사실이 중요하다. 이매를 통해 사위들이 처가로부터 멀어지는 현상과 함께, 종가 주변의 재산이 종손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써 사위들은 처가 주변 재산뿐 아니라 처가의 제사로부터도 점차 멀어지고 있다.
112P
거주지 주변으로 토지를 집적하려는 노력이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노력으로 점차 양반들의 세거지는 이성잡거 촌락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위들이 처가 주변의 재산을 처가에 되파는 재령이씨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점차 사위들은 처가 주변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사위들이 이매를 이유로, 또는 봉사조 명목으로 내놓는 토지들은 처가의 장남에게 집중되었다. 거주지 주변으로 토지가 집적되는 현상은 한 걸음 나아가보면 종가 주변으로의 토지 집적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보다 직접적으로 종가에 토지를 집적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재산상속 시 종가에만 세전할 토지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118p
16세기 중반 이후 거주지를 중심으로 한 재산의 집중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토지를 거주지 주변에 집적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졌고, 자연히 종가 주변에 아들이 모이고 그들만이 주변 토지를 소유하는 경향이 생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토지의 재편 방향은 장남 위주로 진행되었다. 종가 주변 토지, 선대 묘소 주변의 토지, 개간이나 매득 등의 집중 투자가 이루어진 토지는 분할하지 않고 장남 가계로만 세전하는 지침들이 여러 가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125p
봉사조가 장남의 소유재산이 아니라는 점에서 봉사조의 증가를 종가의 재산집중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장자를 봉사자로 지칭하고 있는 사례에서 보듯이, 윤회봉사로부터 봉사의 중심이 장남에게 옮겨가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봉사조는 장남의 개인 재산은 아니지만, 가계를 대표하여 장남이 관리해야 할 재산으로 정착하고 있는 것이다.
142p
양반들의 노비경영에 있어서 노비 가족은 일방적으로 해체되거나 보호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양반들의 재산 운용상의 필요에 따라 그것은 보호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대체로 主家 에서 멀리 떨어져 거주하는 노비, 주가에 인신적 예속이 약한 노비의 경우 가족의 분할상속은 양반들의 노비 관리상 매우 필요한 방식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집에서 수족처럼 사환하는 앙역노비, 가작 등 경작에 동원하는 노비 등은 오히려 가족의 안정이 노비경영상 유효하였을 수도 있다. 노비의 유망이 증가하는 16세기 후반 이후 노비 가족의 분할은 오히려 줄어들었는데, 이는 이때부터 원방노비 수를 줄이고 거주지 주변으로 노비를 제한하려고 하는 양반가의 축소지향적인 노비 소유 방식에서 비롯된다.
148p
해남윤씨가는 이 시기 토지의 집중적 매입과 개간을 통해 해남현 내의 재산을 확장하였다. 토지의 확장과 함께 동일 지역 노비 역시 집중적으로 매입되고 있으므로, 토지 확장 경영과 노비 유입의 관련성 여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149p
주가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거주하면서 사환하는 경우 가족을 분산하려는 의지가 약한 반면, 원방에 거주하면서 납공노비인 경우 관리의 편의상 가족을 무시하고 단신 위주의 상속과 매매를 행하였다. 원방노비의 비중이 축소되는 16세기 중반 이후 가족 해체 비율이 낮아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59p
"앙역노비는 두터이 구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의 것을 덜어 아래에 보태는 道 를 써서, 주가에서 쓸 것을 줄여 노비의 의식을 보다 좋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이들로 하여금 고생스럽고 힘이 들어 원한을 품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간혹 크게 힘쓸 일 외에 사소한 잡역이나 일상적인 사환 등은 가내노비에게 맡기고 戶奴 에게 맡기지 말아서 그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지내며 스스로 본업에 힘쓰게 하여 삶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야 한다. 洞人을 종종 부리는 것은 더욱 불가하다.
이제 비록 배로 짐을 실어 나를 때 노비를 곁꾼으로 삼더라도, 앙역노 외에는 모두 때에 맞게 가감해서 格價 를 지급해야 한다."
(윤선도가 가훈으로 남긴 것들이다. 양반이라고 하면 노비를 착취한다고만 생각되는데 역시 그도 인정이 있는 사람이고 학문하는 사대부라 그런가 도덕적 인격도 높았던 것 같다)
189p
치산이재나 가계경영, 가계계승은 양반들에게 있어서는 재산상속을 원활히 하여 조상의 향화가 이어지도록 하려는 과정을 의미한다.
194p
균분상속과 윤회봉사로 대표되는 조선 전기의 가계운영 양상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노비나 토지 경영의 변화 양상, 봉사 방식의 변화와 봉사조의 증가,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주체를 아들, 나아가 장남으로 설정하려는 노력들이 가훈 등의 이념이나 분재기 등의 실상에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성리학의 도입이나 종법적 가족제도의 정착 등 형이상학적인 부분에서 찾기 이전에, 근본적으로는 사회 변화 속에서도 가계의 존속을 사명으로 인식한 양반가의 현실적 생존 본능이 자리 잡았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오류>
23p
그는 태종의 친왕자 인(姻)의 외손녀이며 대문벌인 파평윤씨와 혼인했는데, 처가의 위상은 그의 사회, 경제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 태종의 친왕자 이인은 바로 함녕군인데 한자가 姻 이 아니라 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