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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중앙 군영과 한양의 문화 ㅣ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9
노영구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18년 10월
평점 :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 체제로 바뀌면서 군대가 한성에 주둔하게 되고 그로 인해 바뀌게 된 제반 상황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명의 필자가 쓴 책들은 통일성이 부족하기 마련인데, 하나의 주제로 잘 압축되어 있는 좋은 기획이라 조선 후기 군사 체제에 대해 많은 정보를 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수도 방위에 중점을 두게 되어 한성에는 많은 주둔군이 생긴다.
당시 한양에 거주하는 남성 인구가 10만, 여성이 10만인데 군사가 무려 2만이니 남자의 20%, 전 인구의 10%가 군인이었던 셈이다.
조선은 흔히 문치주의 나라라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군사가 한양에 주둔했다는 것도 놀랍고 무신정변 등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잘 관리된 점도 신기하다.
훈련도감 군인들은 모병제인데 미달되자 3년에 한 번씩 전국 각지에서 군역을 질 승호군을 뽑아 올린다.
그런데 한 번 승호군에 뽑히면 고향의 재산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상경해야 돼서 한양은 군인들의 거주지 부족에 시달린다.
또 처음에는 재원을 조달했으나 재정이 피폐해지고 균역법 시행 등으로 군필이 줄어들자 군영에서는 활자 인쇄나 조총 판매, 심지어 화폐 주조 등을 하게 된다.
군영에 장인들이 소속되어 직접 무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적인 상업 활동도 어느 정도 용인되어 난전 등에서 팔게 되자, 시전 상인의 이득과 충돌하여 금난전권 문제로 다투게 된다.
국사 시간에 배울 때만 해도 시전 상인들이 난전을 금하여 이익을 독점하려 하자 정조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를 철폐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시전 상인들 역시 시장에서 장사하는 권한을 얻기 위해 많은 세금과 역을 부담하고 있고 군영 등에서 상업 활동을 하면서 군대의 힘을 빌려 괴롭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라에서는 군대에 제대로 급료를 지급하지 못하기 때문에 알아서 먹고 살 길을 찾으라는 의미로 적당히 눈감아 줬던 모양이다.
역시 역사는 간단하게 선악으로 구분할 수 없는 문제다.
<인상깊은 구절>
24p
조선의 기병은 16세기 말까지도 전투의 주역이었다. 물론 16세기 명나라의 요동 지배가 안정적이었으므로 조선의 군사적인 역할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따라서 조선은 이전과 같은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필요성이 줄어들어 군사력이 상당히 축소되었다. 이에 더해 중국의 강남 지방에서 발달한 수전 농법이 조선에 전해지면서 주로 말 목장이 있었던 저지대 일대가 논으로 개발되었고, 목장이 주로 해안 도서로 이동하면서 이전에 비해 말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정병 중 기병인 기정병의 숫자가 줄어들거나 보병, 즉 보정병으로 전환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나기도 했다.
51p
기병이 공격의 주요 무력이 된 것은 그들의 신분이 일반인(농민)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왕조 국가의 신분제에서 무력을 소유하는 지배층에서 기병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보아야 한다. 말을 유지하는 비용도 문제지만, 기병이 되기 위한 무예의 단련과 기간은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병이 사용하는 검술, 궁술의 습득은 아동기부터 학습해야 양성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따라서 기병 위주의 군대는 신분제가 강하게 유지되는 사회가 뒷받침한 결과라고까지 해석할 수 있다.
66p
장용영에 대한 우수성과 뛰어남을 말하지만, 군사적으로 보면 새로운 군영이거나 신무기로 육성된 군부대도 아니었다. 정조와 화성이 언급되면서 등장하는 군영이어서 조명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정조 사후 장용영이 급속히 해체되고 그 흔적조차 사라진 것을 보면 확인되는 일이다. 장용영의 체제나 군병이 군사적으로 유용한 것이었다면 비록 해체되더라도 다른 군영에서 접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심지어 정조 대 가장 큰 기념비적 건물인 화성조차 더 이상 군사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결국 정조가 장용영을 이용해 군제를 변화시키고 병력을 재배치한 과정은 군사력 강화라든지, 수도권 방어망의 구축이라는 군사적인 면보다는 군영을 이용해 정국을 좌우하려던 심중에서 나온 국왕의 통치행위로 해석해야 하겠다.
정조가 서거한 1800년, 장용영은 별다른 논쟁도 없이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일견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장용영의 병력과 재원이 다른 군영에서 이속한 것이 많았고, 화성을 지속적으로 경영할 정도로 국가 재원이 넉넉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70p
정조가 주도해서 창설한 장용영도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기구이며, 정조의 정치적 명분을 수행하던 임시 기관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장용영 설치가 일시적 방편에 불과한 것이었으므로 정부의 공식 기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신료들의 인식이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심환지의 말뜻은 장용영이 정조와 신료 간의 타협에 의해 만든 것이 아닌 국왕이 사적인 의도를 가지고 만든 기구이므로 더 이상 존속시킬 이유가 없으니 철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으로 보인다. 심환지와 신료들의 장용영에 대한 시각은 정조가 장용영을 설립하기 위해 기존 군영들을 재편하고 축소하던 시각과 별반 차이가 없다. 군영은 정국을 돌파하거나 새로운 정치 판도를 만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던 것을 확인하여 준다.
정순왕후는 국가의 재정을 풍족하게 하게 하는 민생 위주의 정치를 하기 위해 장용영처럼 쓸데없는 제도는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조도 시대가 바뀐 상황에서 동일한 정책을 시행했을 것이라고 했다. 관료는 물론 상민에 이르기까지 장용영의 군사적 기능은 유지해야 한다는 등의 반대 의견이 없었던 것은 심환지 등이 장용영 철폐를 주장한 것에 대부분 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95p
광해군이 풍수나 술법에 많이 의지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이어하기를 꺼려했던 것은 노산군과 연산군이 폐위된 곳이기 때문이다.
106p
왕조 시대의 국왕은 국가와 같은 의미를 지닌 존재였다. 그 때문에 왕을 지키는 것은 국가를 지키는 것과 동일하게 여겨졌다.
123p
양 난 이후 오군영이 설치되면서 '북벌'이라는 기치 아래 군사력이 증강되었지만 실상 급료병 운영은 많은 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는 사업으로 군문을 창설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지에도 많은 재정이 투입되어야 했다.
당시 유통을 고려한 화폐는 백성이 동전 형태로 당장 입거나 먹을 수 없었지만, 동전을 주조해 배포할 때 액면가대로 곡식을 받거나 주전 과정에서 이익을 확보한다면 그만큼 잉여 자원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부 입장에서는 주전을 통해 제작한 동전 자체로 부가가치를 높인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 것이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정부는 조선초기부터 화폐의 유용성에 주목해 민간에 화폐를 유통시키려고 노력했다. 특히 동전뿐만 아니라 비교적 재료비가 적은 저화를 유통시키려는 노력을 개국 초부터 지속했다. 저화 같은 지폐는 액면가에 해당하는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해 민간에서는 화폐의 가치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금속화폐는 제작량이 충분하지 않아 전국적으로 사용을 강제할 수 없었던 이유가 컸다.
132p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군문은 정번한 재원뿐만 아니라 주전을 통해 남는 재원을 창출했고 이를 국가재정으로 활용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164p
18세기 서울시장에서 난전의 폐단으로 문제시되는 부류는 생계를 위해 좌판을 벌이는 빈잔한 민호가 아니라 왕실, 세가, 군문처럼 권력을 가지고 조달시장에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특히 균역법 시행 이후 군문에서는 줄어든 군포 수입을 균역청으로부터 급대받기는 했지만, 급대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재정의 부족분을 만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문 차원에서 군인들의 상업활동을 조장한 측면 역시 간과할 수 없다. 특히 군문의 장인들은 직접 수공품을 생산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난전활동에 가담하기 쉬웠다.
169p
정부에서는 왜 시전상인들의 요구에 따라 군문의 난전활동을 강력하게 규제하지 않았을까? 형조와 한성부,사헌부로 대표되는 삼법사가 난전에서 거두는 속전이 관원의 급료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난전을 일방적으로 줄일 수는 없었다. 정부로서도 이미 속전을 재원으로 활용하고 있었으므로 난전을 없애기보다 단속하는 차원에서 관리하는 편이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기존의 금난전권을 행사하는 시전 상인의 특권을 최소한으로 인정해 주는 선에서 정부는 서울시장의 참여 계층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자 했다. 군문의 경우 이미 음성적인 상업활동을 통해 이권에 가담하고 있었던 데다가 군문에 속한 군인들 역시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국역에 편제되어 있었으므로 이들의 상업활동을 일방적으로 규제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195p
화기도감은 국왕이 장인들의 작업 실태를 매월 보고받을 정도로 국가적 사업의 성격을 지녔으므로 장인들을 동원하는 방법도 강제성을 따고 시행되었다.
198p
당시 개인 휴대 화기로서 조총보다 뛰어난 것은 없었으며 왜란을 통해 이미 그 위력이 증명되었는데도 생산에 주력하지 않은 것은 큰 의문이다. 광해군 대는 조선에서 조총 제작에 용이한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조총의 지속적 개발과 연구가 필요했다. 그런데도 대형 화기인 화포를 중점적으로 제조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당시의 대외 방어책이 산성 중심이었고, 조선초부터 야인의 침입에 화포가 큰 효능을 발휘했다는 것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겠다.
204p
왕조시대에 개인이 무기를 보관한다는 점은 의아할 수도 있지만, 상번군이 화기인 조총과 개인 군장을 모두 구매해서 상경하던 일은 조선후기에 흔한 일이었다.
216p
우의정 정유성이 "군복 차림으로 도성 안에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데, 지금 병기를 가진 군사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어 식자들은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조선후기 한성부는 많은 수의 군병들로 가득했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군병들이 서울 인구 증가에 큰 원인이 되었다.
222p
17세기 국방력 강화와 함께 국가는 승호군의 수효를 점차 증액하였는데, 이는 많은 수의 지방 군병이 서울로 올라오는 계기가 되었다. 군병들은 생활기반이 전혀 없는 서울에서 적은 급료로 가족까지 부양했으므로 서울의 상권 발달을 이용해 상업활동을 하거나 각종 토목공사, 하역작업의 일용노동자로도 활동하였다. 하지만 절도나 강도 행각을 서슴없이 행하는 자들이 생길 정도로 지방 군병의 서울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289p
18세기 후반 조선의 중심인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 중의 첫째가 바로 배경 없는 무인들이 관직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으로 언급될 정도로 차별받는 무인들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표현이다.
303p
군영 소속 무인들은 공공 분야에서 민간인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제력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조선시대는 생활 전반에 관습법이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시대였다. 그러므로 미풍양속을 해치는 사건 혹은 그 사건의 주체들에 대한 간섭 및 통제력 역시 어느 정도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