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장식미술 기행
최지혜 지음 / 호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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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인데 드디어 서구 도서관에서 빌렸다.

제목만 보고 막연히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 탐방기인 줄 알았는데, 영국의 여러 고저택들을 방문하여 건축이나 인테리어 양식 등을 논한 책이었다.

역사적 배경이 있는 귀족들의 저택이 관람객들에게 공개되어 잘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소쇄원 같은 느낌이랄까?

한국은 선비 문화 때문인지 장식이라는 문화 자체가 없는 것 같고 검박하고 단아한 멋을 추구하는데 서양은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으로 대변되는 화려함의 극치라 정말 두 문화가 다름을 느꼈다.

또 서양의 공예가들은 비록 순수 예술인 회화와 조각처럼 예술가로써 대접받지는 못한다 해도 제작자들의 이름이 남아 있는 반면 우리는 아무리 아름다운 청자 백자라 해도 그저 무명일 뿐이라는 게 안타깝다.

하다못해 일본만 해도 도공들의 이름이 면면히 전해져 오는데 과연 조선에서는 공예품이 사회적으로 전혀 대접받지 못한 천기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수백 년 된 저택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게 부럽다.

아쉬운 점은 도판!

황당할 정도로 도판의 질이 조악하다.

2013년에 책값 17000원이면 싼 가격도 아닌데, 출판사 측의 무성의가 아쉽다.


<오류>

155p

베스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자신의 딸을 메리 여왕의 남동생 찰스 스튜어트와 결혼시켰다.

->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태어난지 6일 만에 아버지가 죽었는데 왠 남동생인가 했다.

찰스 스튜어트는 메리의 남동생이 아니라 남편인 단리 경, 즉 헨리 스튜어트의 동생이다. 메리의 할머니 마거릿 튜더가 할아버지 제임스 4세와 사별한 후 재혼해서 낳은 손자가 헨리와 찰스이므로 할머니 쪽으로는 사촌이긴 하다.

305p

레드 하우스의 동쪽 정원에는 우물이 하나 있다. 이 아름다운 우물은 애초부터 장식용이었다고 한다. 과연 이 낭만의 성지에 어울리는 트릭이다.

-> 찾아보니 이 우물은 장식을 위해 디자인 한 것이라 오해를 받지만 이 집에서 오래전부터 써 온 유서 깊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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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풀니스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
한스 로슬링.올라 로슬링.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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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에게 추천받아 읽은 책.

정말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다.

뭔 얘긴지 모르겠는 제목과는 달리, 책 주장에 깊이 공감하고 진실과 통계에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 인간은 얼마나 극단적이고 감상적인 존재인가 실감했다.

책에 나온 13가지 질문들 중 단 하나만 맞출 수 있었다.

나도 책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이 세상은 실제보다 훨씬 불행하고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유일하게 맞춘 문제는 세계의 빈곤이 지난 세기보다 얼마나 줄었는가이다.

이 부분은 제프리 삭스의 <빈곤의 종말>이라는 책을 통해 교정이 되어 있었다.

그 외 여성의 교육이라던가, 예방접종률, 기대 수명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 나는 아주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저자의 지적처럼 이른바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의 오만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빈곤에 시달리고 있고 서구권 사람들이 세상을 이끌어 나간다고 말이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놀라울 정도로 발전시켰고 절대 빈곤층은 전 세계의 9% 정도이다.

10억 인구가 적은 수는 아니지만 이 전 세기에 비하면 엄청나게 감소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 소득에 분포하고 있고 이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인구는 중산층이 되어 엄청난 소비자가 될 것이다.

정말 인구가 힘이라는 생각도 든다.

저자는 전 세계를 4단계로 분류한다.

1단계는 절대 빈곤 상태, 4단계는 풍족한 상태.

물론 우리는 4단계이고, 1단계에서 4단계로 올라선 극적인 예시로 등장한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 동일하지 않다는 예로 나온다.

세상은 더디게 발전하고 있지만 누적이 되면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극단적인 빈곤층을 없애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국제적인 협력이 가장 중요하다.

평화가 없이는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다.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가 전쟁을 막기 위해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도 지구 번영의 중요한 힘일 것 같다.

저자는 스웨덴의 공중보건학자인데 초고를 완성하고 췌장암으로 타계했다고 한다.

안타깝다.

기후변화 부분만 빼고는 모두 공감했다.

감성보다는 이성에 기반하여 문제를 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통계와 숫자를 잘 살펴보자.



<인상깊은 구절>

27p

세상은 해를 거듭하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진다. 모든 면에서 해마다 나아지는 게 아니라, 대체로 그렇다. 더러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지만, 이제까지 놀라운 진전을 이루었다. 이것이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이다.

52P

중간 소득 국가와 고소득 국가를 합치면 인류의 91%에 해당하는데, 이들 대부분이 세계시장에 편입되었으며 상당한 발전을 이뤄 그런대로 괜찮은 삶을 산다. 인도주의자에게는 기쁜 일이고, 세계적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중간층에 사는 50억 인구가 잠재적 소비자로서 삶의 질을 높이며, 삼푸, 오토바이, 생리대, 스마트폰을 소비한다. 그런 사람들을 그저 '가난한' 사람으로 치부한다면 큰 시장을 쉽게 놓쳐 버리는 꼴이다.

59p

한 가족이 1단계에서 4단계로 올라가기까지 대개 여러 세대가 걸린다. 어쨌거나 각 단계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 독자의 머릿속에 명확한 그림이 그려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개인이든 국가든 단계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에는 삶이 두 종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면 좋겠다.

 인간의 역사는 1단계에서 출발했다. 10만 년이 넘도록 누구도 1단계를 넘어서지 못했고, 아이들은 부모가 될 때까지 살아남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200년 전만 해도 세계 인구의 85%가 여전히 극도로 빈곤한 1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97p

언론의 자유가 더욱 커지고 첨단 기술이 발달한 덕에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소식을, 많은 재난 이야기를 접한다. 수백 년 전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원주민을 대량 학살했을 때 그 일은 당시 뉴스에 나오지 않았다. 중국에서 중앙 계획이 실패하는 바람에 대량 기근이 발생해 시골 사람 수백만 명이 기아로 죽었을 때 유럽에서 붉은 공산주의 깃발을 흔들던 젊은이들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과거 어떤 종 전체 또는 생태계가 파괴되었을 때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알거나 관심을 갖기 않았다. 그러다가 인류의 다양한 발전과 더불어 고통을 감시하는 능력도 놀랍도록 개선됐다. 이처럼 좋아진 언론 보도 자체가 인류 발전의 표시이지만, 그 덕에 사람들은 정반대의 느낌을 받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활동가와 로비스트는 일정한 추세에 일시적 문제가 나타날 때마다 전반적으로는 분명히 발전하고 있는데도 마치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교묘히 포장해, 과장된 우려와 예측으로 사람들을 겁준다.

152p

'위험한 세계'라는 이미지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 효과적으로 방송을 타지만, 실제 세계는 다른 어느 때보다 덜 폭력적이고 더 안전하다. 

 한때 우리 조상의 생존을 도왔던 공포가 오늘날에는 언론인을 먹여 살리는 데 일조한다. 

163p

사람들은 최대한 빨리 후쿠시마를 탈출했지만 이후 1600명이 더 목숨을 잃었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방사능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방사능을 피해 도망쳤지만, 방사능 때문에 사망했다고 보고된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다. 1600명은 탈출 과정 또는 탈출 후에 사망했다. 이들은 대개 노인이었고, 피난 그 자체나 대피소의 삶에서 오는 정신적, 신체적 스트레스가 사망 원인이었다. 한마디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방사능이 아니라 방사능 공포였다.(1986년 체르노빌에서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가 일어난 뒤에도 사람들은 사망률이 크게 증가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러한 예상을 확신할 근거는 없었다)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안전 규정을 만들었다. 많은 나라가 DDT 사용을 금지하고, 원조 단체도 DDT 사용을 중단했다. 그러나! 대중이 화학물질 오염에 느끼는 공포가 거의 과대망상 수준에 이르는 부작용이 생겼다. '화학물질 공포증'이라 부르는 현상이다.

(광우병 파동을 생각해 보라!)

174P

위험성=실제 위험*노출 

어떤 대상의 위험성은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 아니라, 실제 위험과 그것에 노출되는 정도를 합쳐 결정된다.

220p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요소는 종교나 문화, 국가가 아니라 소득이라는 점이다.

226p

누군가가 예를 달랑 하나만 내놓고 집단 전체에 대해 결론을 내리려 한다면, 그게 해당하는 예를 더 제시하라고 말해야 한다. 아니면 상황을 뒤집어서 반대 사례 하나가 나오면 정반대 결론을 내리겠느냐고 물어봐야 한다. 안전하지 않은 화학물질 하나를 기준으로 모든 화학물질이 안전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겠다면, 안전한 화학물질 하나를 기준으로 모든 화학물질이 안전하다고도 결론 내릴 수 있겠는가?

244p

나는 극빈층에서 가장 늦게 벗어날 사람은 무력 충돌이 일어나는 지역과 가까운 곳에 붙박여 살며 척박한 땅에서 농사짓는 아주 가난한 농부들일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이런 사람들은 아마도 2억 명 정도로, 그중 절반을 약간 넘는 수가 아프리카에 산다. 물론 이들 앞에는 대단히 힘든 시기가 놓여 있다. 변치 않거나 변할 수 없는 문화 때문이 아니라, 척박한 토양과 무력 충돌 때문이다.

252p

나는 아시아를 여행할 때면 늘 구스타브 할아버지 같은 완고한 노인의 가치와 마주한다. 한 예로, 한국과 일본에서는 많은 여성이 자녀 돌보는 일을 전적으로 책임질 뿐 아니라 시부모도 부양한다. 이런 상황을 자랑스러워하는 남자도 많이 만났다. 그들은 이것을 '아시아의 가치'라고 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는 많은 여성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런 문화를 참을 수 없어 하고, 그런 가치 때문에 결혼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고 말한다.

262p

점진적 개선을 추적하라. 매년 일어나는 작은 변화가 수십 년 쌓이면 거대한 변화가 될 수 있다.

274p

경제성장의 최종 목표는 개인의 자유와 문화 발전이며, 그런 가치는 수치로 포착하기 어렵다. 

286p

경제와 사회가 크게 발전한 나라라고 해서 다 민주국가는 아니다. (산유국도 아닌)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빨리 1단계에서 3단계로 넘어갔고, 그 시기는 줄곧 군부 독재가 이어졌다. 2012~2016년에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 열 곳 중 아홉 곳은 민주주의 수준이 낮았다.

 경제성장과 보건 의료 발전에 민주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그와 모순되는 현실에 부딪치기 쉽다. 따라서 우리가 좋아하는 다른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민주주의가 우월한 수단이라고 주장하기보다 민주주의 자체를 목적으로 지지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340p

우리는 올림픽, 국제무역, 교육 교류 프로그램, 자유로운 인터넷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인종과 국경을 뛰어넘어 소통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한 안전망을 강화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세계 평화 없이는 우리의 지속 가능성 목표 중 어느 것도 달성할 수 없다

(남한은 일단 김정은의 핵위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343p

도움을 주기 가장 어려운 사람들은 정부의 힘이 약한 나라에서 폭력적이고 무질서한 무장 범죄 조직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가난에서 탈출하려면 안정된 군대가 필요하다. 무장한 경찰관은 죄 없는 시민들을 폭력에서 보호해야 하고, 정부 당국은 교사들이 평화롭게 다음 세대를 교육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전히 가능성 옹호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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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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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이 나왔을 때 신청해 놓고 이제서야 읽게 됐다.

책 판형이 한 손에 들고 읽기 딱 좋은 사이즈고 디자인도 괜찮다.

한 쪽은 사진만 한 쪽에만 글이 실려 내용은 적은 편이다.

저자의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책 전체에 흐르는 굴절있는 삶에 대한 애환이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막연한 동경과 긍정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독재와 파시즘에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찬은 있으면서 왜 스탈린과 마오쩌둥 같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애도는 드문 걸까?

왜 공산주의는 평등을 말하면서 1인 독재와 1당 독재를 이어가는 걸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같은 비판을 쉽게 접하지 못하는 것 같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스탈린과 마오쩌둥과 어떻게 다른가?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과연 다른가?


덕수궁 미술관에서 개최한 조르디 모란디 전시회를 우연히 보고 나서 이 화가의 정물화에 완전히 빠졌다.

모란디는 미술사에서 별로 언급도 안 되는 화가라 그 때 처음 알게 됐다.

이 책에도 모란디 이야기가 나와 반가웠다.

미학적으로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화가가 평생 추구했던 본질을 느낌으로는 이해할 것 같다.

이탈리아 인문 기행이라는 제목과 잘 어울리는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43p

반종교개혁의 시대, 로마라는 위험한 도시의 공기가 "기질적으로는 반역자였지만, 종교적 신조에서는 열광적인 정통파"였던 이 젊은 화가 카라바조를 혁명가로 키워낸 셈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을, 그 잔학함과 어리석음까지 놓치지 않고 그려낼 수 있었던 혁명가로. 

124p

얀 판 에이크,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한스 멤링, 로베르 캉팽 등 플랑드르파 회화의 명품은 단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놀랄 만큼 생생하다. 어째서 14~15세기라는 시대에 이러한 명화가 집중적으로 탄생했던 걸까?

 하위장아의 <중세의 가을>에 따르면, 그것은 페스트의 대유행, 유대인 학살, 백년전쟁, 십자군, 끊임없이 반복되던 기근처럼 혹독하고 무참한 사건으로 뒤덮였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재앙과 빈곤이 누그러질 날이 없었다. 역겨우리만큼 가혹했다. 영예와 부를 열심히 바라며 탐욕에 사로잡혔던 것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참혹하기 그지없던 가난으로 인해 그 차이가 명예와 불명예의 대조처럼 너무나도 극명했기 때문이다. 처형을 비롯한 법의 집행, 큰 소리로 떠드는 행상들,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을 알리는 행렬 뒤로 고함소리, 애도하는 울음, 그리고 음악이 따라왔다."

 이런 혼란한 시대가 역설적이게도 보석과도 같은 플랑드르파의 그림을 낳았던 셈이다. 하위징아의 저 묘사도,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르네상스 시대의 '극단적이기까지 한 양면성'은 아니었을까.

293p

미술은 태생 자체가 권력에 휩쓸리기 쉬운 성격이 있기 때문에 권력과는 항상 위태로운 관계를 맺어왔다. 피카소 같은 예외적인 사례가 있다고는 하지만 권력으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지켜내는 일은 예술가에게 숙명적 난제다. 최대의 패트런인 권력자는 힘과 재력을 무기 삼아 예술가에게 기념할 만한 대작을 제작해달라고 요구한다. 어떤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경우는 기뻐하며 예술가는 그 요구에 응한다.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만들고 싶다'는 제작 욕구처럼 제어하기 힘든 욕망을 충족해야만 하는 예술 행위 특유의 함정이 늘 도사리고 있는 까닭이다.

325p

하지만 미켈란젤로에 대한 하니 고로의 관점은 오늘날 '이상화, 단순화'된 의견으로 여겨진다. 원래 당시 '시민'이란 오늘날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시민'과는 달리 "옛 귀족층으로부터 도시 권력을 탈취한 부유한 상인이나 은행가를 중심으로 한 신흥 시민 계층"이었다.

<그들은 자신보다 아래 계급인 중소시민 상공업자나 하층 노동자에 대해서는 명확한 우월감과 차별의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주장했던 공화주의 체제는 한정된 귀족적 공화제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으며, 근대적인 민주 공화제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334p

미켈란젤로가 눈앞의 수입이나 영달을 위해 일했다면 이 같은 삶을 완수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강인하고 대적할 자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간적인 연약함을 지닌 채 소심하게 자기보신을 했던"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 속에서 끓어오르는 창조의 욕구에 충실했다. 언제나 더 멀리 내다보고 더 높은 곳을 우러렀다. 미켈란젤로가 도달하고자 했던 지점은 권력자가 원했던 바를 훌쩍 뛰어넘는 곳에 있었다. 그가 펼쳐난 창조의 힘은 500년 후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다. 이것이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이다. 마리오 시로니나 후지타 쓰구하루와는 역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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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최혜진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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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삶이 부럽기도 하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 미술관 여행, 그림 감상하고 여행하면서 에세이를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삶.

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이런 에세이스트로 쉽게 전환하는 것 같다.

부러우면서도 책 읽는 독자로서 냉정히 말하자면 훌륭한 에세이스트, 혹은 전문적인 필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독자에게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하던지 혹은 수필로서 읽을 만한 글을 쓰던지 둘 중 하나가 되야 하는데 전공자가 아닌 경우 문필가로서 읽을 만한 책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시대에 살다 보니 블로그나 1인 미디어에 올릴 만한 잡스런 수준의 글도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와 양서를 고르는 게 오히려 어려운 시대가 된 것 같다.

항상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자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도 감정의 과잉이 넘쳐나 만연체의 긴 글들이 가독성을 방해한다.

어쩌면 이런 예민한 감성들이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게 만든 원동력이었겠지만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많이 불편했다.

책의 주제와는 관계없이 페미니즘과 여성의 전통적 역할, 피해의식에 대해 생각해 봤다.

저자는 가부장제의 기억이 남아 있는 여성으로서 여전히 사회에서 여성이 차별받고 있다고 강변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공감이 어렵다.

나도 한때는 페미니즘에 경도되어 여성할당제에 공감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성, 특히 차별받는 여성, 약자로서의 여성이라는 범주화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교육과 경제력이다.

사회적 약자에서 벗어나려면 많이 배우고 경제적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북유럽 여성 화가들도 작품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역사에 남겼다.

관심있던 스카겐 화파들의 그림이 소개되어 반갑다.

어찌 보면 세계 미술계를 선도하는 서유럽 회화에 비해 옛스럽고 시대에 뒤처진 느낌도 들지만 인간 본연의 따뜻하고 외로운 속성을 잘 드러내 주는 그림들이라 마음이 간다.

마지막에 실린 뭉크 그림은 여전히 가슴이 뛴다.

실제로 감상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뭉크 그림에서도 새삼 느낀다.

왜 뭉크가 유명한지 공감을 못했는데 한가람 미술관에서 뭉크 전시회를 본 후 완전히 빠져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작품들이 참 많이 왔던 것 같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지금도 왜 뭉크가 유명한지 전혀 몰랐을 것 같다.

유명하지 않은, 그렇지만 자꾸 보고 싶어지는 19세기 북유럽 회화들을 접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187p

독실한 루터교 집안에서 태어난 프리드리히에게는 '광활한 자연경관'이 신비이고 경이였다. 자연이 곧 신의 뜻이라고 믿었다. 안개나 노을, 눈, 깊고 어두운 나무 숲 등을 통해 아득한 무한의 세계를 전달하려 했다. 장대하고 적막한 풍경 안에 고독한 사람을 놓거나 수도원, 공동묘지 등을 폐허로 그려서 신 앞에 선 인간의 무력감과 불완전성을 표현하길 즐겼다. 덕분에 "풍경화의 비극을 발견한 화가"라는 평을 들었다.

259p

"우리가 절망이라 명명하는 한계 상황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바로 그 한계의 돌파구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강자'의 징표다. 강한 자는 병에 걸리지 않거나 죽음을 초월한 자들이 아니라 병을 건강으로 가치 변환시키는 자들, 한계에 맞닥뜨렸을 때 그 한계에서 다시 시작하는 자들이다. 뭉크는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강자였다."

-에드바르 뭉크, 세기말 영혼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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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 어떻게 이루어졌나
이도학 지음 / 학연문화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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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이라 어려울까 봐 걱정했는데 교양서 수준으로 쉽고 재밌게 읽힌다.

특히 사진이 많아 지루하지 않았다.

아쉬운 점은 동어 반복이 많고, 과도한 논리전개로 간간히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삼국유사에 나온 대로 백제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이고 한 발 더 나가 의자왕이 선화공주의 아들이며 처가와 외가가 적국인 신라라는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더더욱 신라 공격에 앞장섰다는 식이다.

이미 미륵사지 석탑에서 금제사리봉안기가 나와 무왕의 왕비가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밝혀졌는데도 아무 근거도 없이 그녀는 나중 부인일 것이고 선화공주가 첫번째 부인이며 의자왕의 생모라고 정황상 근거로 밀어부친다.

전공자의 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거친 논리 전개라 공감하기 힘들었다.

전설에 빗대어 소정방이 당나라에서 죽은 게 아니라 삼국통일 후 신라와 대치 중일 때 피살됐다는 주장도 수긍이 안 간다.

당의 역사서에 버젓이 나와 있는 사망 기록은 개연성이 없다고 무시하고, 우리나라에 떠도는 전설을 근거로 소정방 피살설을 주장하는 게 의아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사소한 부분이고, 그 외 대부분의 역사적 평가에는 많이 공감했고 삼국 통일의 주역인 신라인들의 명예를 되살려 준 점에 대해 감동했다.

삼한 통합을 이루려는 신라와, 옛 한사군의 땅을 되찾겠다는 당나라의 이익이 맞아떨어져 한반도에 비로소 완전한 통일국가가 성립됐다.

단지 고구려 옛 땅을 잃었다는 이유로 한반도 최초의 민족국가 성립을 폄훼하는 요즘 대중들의 역사인식이 안타깝고, 소국이었던 신라가 지도층의 살신성인 정신과 놀라운 외교력, 그리고 외세를 몰아내고 하나의 완전한 국가를 이룬 단합력 등은 후손인 우리가 높이 평가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춘추와 그 아들인 문무왕, 그리고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일화는 읽을수록 가슴이 뜨겁다.

한반도의 어떤 왕이 나라를 위해 직접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외교전을 편 적이 있었던가.

아버지 김춘추는 통일 전쟁을 위해, 아들인 문무왕은 당을 몰아내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김유신과 화랑도는 과연 신라가 통일을 이룰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상깊은 구절>

126p

고구려가 국왕 주도하에 말갈병과 더불어 요서 지역을 공격한 배경도 재해석이 가능하다. 수 문제 이래의 고구려 침공 배경도 고구려의 침공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수대에 고구려 서쪽 영토가 갑자기 넓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에 위협을 느낀 수가 고토수복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침공한 것으로 판단된다. 수와의 전쟁 전 고구려 영토가 요서 지역에 소재했다는 것이다. 수가 붕괴되고 당이 들어선 후에는 고구려와 관계 정상화를 서둘렀다. 그러한 차원에서 경관을 허물어 적대 의식을 청산하였다. 동시에 천리장성도 축조하여 고구려의 서쪽 계선을 명확히 했다. 요서 지역에 소재한 고구려 군진이 일제히 요동으로 철수한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 집권 후 당의 내정간섭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써 고구려는 요하를 건너 양국 간의 공지였던 영주와 지금의 천리장성 사이를 석권했을 수 있다. 이 구간은 거란이나 해와 같은 유목민족들이 이동하거나 잠주했던 곳이었다. 당으로써는 이를 고토수복론의 빌미로 삼을 수 있었다. 

131p

경관을 헐게 된 배경에는 고구려측의 양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와 당 간의 화평의 표지로써 경관을 헐고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한 것으로 보겠다.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축조함으로써 중국을 넘볼 일이 없음을 가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598년 고구려군의 요서 기습과 같은 침범이 재현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즉 중국에 대한 불가침 표지라고 하겠다. 동시에 당으로 하여금 요동에 대한 고지수복론을 재론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고구려와 당이 각자 절충하여 타협하는 선에서 고구려의 서계가 설정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고구려는 양국 간의 화평을 꾀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화평 관계는 642년에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파견한 연개소문이 그래 10월 영류왕을 시해하고 집권함으로써 파탄 상태에 빠졌다. 화평의 표상인 천리장성 축조에 파견된 이가 연개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그에 대한 불만으로 대당 유화론자인 영류왕을 시해하고 대당 강경노선으로 치달았다. 연개소문은 당 태종의 침공을 막아낸 후에 천리장성이 아무런 상징적 구실도 못한다는 것을 체감하였다. 당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요서 지역의 거란이나 해를 비롯한 주변 민족을 영향권에 넣어야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랬기에 고구려의 지배권이 요하 서쪽으로 넘어설 수 있었다고 본다.

151p

연개소문의 위세가 비록 하늘을 찌르기는 했지만 복종하지 않는 세력이 지방에 여전히 온존했음을 뜻한다. 아울러 연개소문이 지방의 성주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과정을 통해 일정 기간 고구려가 내전 상태에 놓였음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불완전한 연개소문의 지배 체제를 강고하게 만든 것이 당군의 침공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연개소문은 고구려군을 파견하여 지원했다. 이러한 비상시국의 전쟁 극복 과정을 통해 연개소문의 지배력은 자연히 지방 말단까지 미치는 게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연개소문 아들에까지 권력이 승계되는 세습체제가 확립될 수 있었다. 

193p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의 장수 유원외가 선조 앞에서 한 말이 있다.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으로 불리었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고 잘타했다. 고구려로 인해 강국 이미지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229p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려 백제의 공격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신라는 바다 건너의 당과 제휴하게 되었다. 백제와 연화하는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거의 유일한 세력이 당이었기 때문이다. 당이 고구려를 침공함으로써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231p

반란군의 기세에 여왕은 무서워서 어쩔줄을 몰랐다. 김유신이 여왕을 뵙고 말하기를 "길흉은 무상하여 오직 사람이 하기에 따른 것입니다. 덕이 요사를 눌러 이길 수 있으니 星辰 의 변이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왕은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즉시 김유신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안기고 연에 실어 날려 하늘로 올라가게 하였다.

(과연 삼국을 통일한 명장의 언사답다. 선덕여왕은 이런 용장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했을까!)

238p

전통적 권위의 위광을 지닌 정치적 수반으로서의 신라 왕, 쟁란의 시대를 군사로서 직접 지배하는 김유신, 그리고 국가존망에 깊이 관련되는 외교를 짊어진 김춘추의 3세력이 결합하여, 신라 독자의 권력집중 방식을 성립시켰다는 점이다. 그 결과 그 후에 전개된 삼국통일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친당자립의 장기적이고도 공고한 체제가 확립될 수 있었다. 실제 신라는 곡절 많고 복잡한 삼국통일 과정에서, 친당책을 추구하면서도 자립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하였다. 그 결과 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을 포섭하여 백제 고토를 회복하고, 당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할 수 있었다.

 선덕여왕을 옹호한 김춘추와 김유신은 비담의 난을 진압한 후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다. 김춘추의 극적인 혼인담은, 지방호족 세력을 대표하는 야심 많은 김유신이 엄격한 신분제사회의 제약을 깨고 신라 중앙권력의 핵심부에 진출할 목적으로, 김춘추의 '등'을 빌리기 위한 주도면밀한 계획의 산물이었다. 이로 인한 두 사람의 운명공동체적인 결속은, 7세기 한반도와 만주대륙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매김 받을 수 있다. 

249p

당은 고구려 침공과 그 지배를 위한 명분으로서 역사적 근거를 자주 들먹였다. 이러한 실정이니 고구려 패망 후 그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신라에 선선히 넘겨 줄 이유가 없었다. 신라로서는 현실적으로 당의 지원이 다급한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타협하고 절충하는 선에서 '평양 이남' 지배로 선을 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신라는 삼한 영역의 당초 북계인 임진강을 넘어섰다. 즉 대동강선까지의 고구려 영역을 지배하는 발판을 구축하는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이 점은 주시할만한 대목이다. 요컨대 신라 삼국통일의 영토적 불완전성은 통일 과정에서의 역부족이 아니었다. 당초부터 내재된 이러한 약정의 산물이었다. 아울러 신라는 통일의 정당성과 명분의 확보에서 중요한 소재를 개발하였다. 즉 "삼한을 합쳐서 한 집을 이루었다"는 표제인 것이다. 분열을 청산한 통합은 분명 성과요 위업이라는 긍정적 기제의 극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당은 고구려 영역 가운데 위대 이후의 요동군과 과거 한4군 영역을 수복지로 지목하였다. 당 태종은 "요동은 옛적에 중국 땅이었다. 짐은 장차 가서 이를 경략하려 하는 것이다"고 했다. 

250p

고구려 영역 가운데 요동반도에 대한 지배로 마무리하고, 중만주와 동만주 일대가 방치된 것은, 이러한 당의 영역관에 기인하였다. 그랬기에 방치된, 즉 신라나 당으로서는 일종의 무연고지였던 동만주를 기반으로 발해가 흥기할 수 있었다. 요컨대 당의 고구려 침공은 고토탈환전이었고, 신라로서는 삼한통합전이었다. 고구려 멸망은 이념적으로는 중국인들의 누대 숙원과 신라인들의 삼한통합대망론의 귀착점이었다.

 신라인들은 자국 영역의 북계인 대동강을 삼한의 북계로 인식했다.

276p

의자왕의 경우에는 지속적인 음주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알코올 중독의 결과로 간주할 수 있으며,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잔치에 참여한 구성원들 간의 일체감을 조성하여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의자왕이 성충이나 흥수의 간언을 배제하거나 제거할 수 있었던 요인도 술에 기반하였다. 술의 힘을 빌어 단호하게 정적들을 제거했다. 의자왕은 신라와 당의 침공 대비라는 피곤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 자신은 신라와 당의 협공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았다. 그럼에도 경고긔 비상 나팔을 불어대자 짜증을 낸 것이다. 의자왕이 현실을 잊거나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서 술을 이용한 측면도 배제하기 어렵다. 

282p

진덕여왕은 "작은 것이 큰 것을 범하려다가 위태로워지면 장차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여기서 '작은 것'은 신라이고, '큰 것'은 백제를 가리킨다. 이에 김유신은 "군사가 이기고 지는 것은 크고 작은 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따름이옵니다. 지금 저희들은 뜻이 같아서 더불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할 수 있으니, 저 백제라는 것은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나이다"고 했다. 

(死卽生 生卽死 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이 생각난다. 난세의 영웅들은 범인이 근접할 수 없는 담대하고 초연한 기개를 가진 듯하다)

310p

"신라군이 진군하여 당군과 합세해 진구에 이르러 강가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홀연히 새 한 마리가 소정방의 진영 위를 빙빙 날아다녔다. 사람을 시켜 그것을 점치게 하니 "반드시 원수가 상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두려워 군대를 이끌고 싸움을 그만두려고 했다.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일러 말하기를 "어찌 날아다니는 새의 괴이함으로 인해 천시를 어길 수 있으리오.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응하여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정벌하는데 어떻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라고 말하고는 이내 신검을 뽑아 그 새를 겨누자, 새는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좌중 앞으로 떨어졌다."

327p

의자왕은 종전에 백제가 취해 왔던 것과는 달리 당에 크게 양보하면서 적극 예속되는 선에서 타협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의자왕은 예하의 신료들과 무력 수단을 당군에 깨끗이 헌납하는 항복의 길을 통해 멸망의 기로에 선 국가의 활로를 트고자 했다. 의자왕은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소정방의 경우도 백제와 기를 쓰며 싸워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당의 숙적은 고구려지 백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제를 멸망시키는 일은 신라 왕실의 숙원이었다. 당은 궁극적으로 고구려를 장악하기 위한 동방정책의 일환으로 참전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당은 백제 공략전에서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던 것이다. 

345p

신라와 당군에 힘차에 대적하던 백제 군대는 일제히 항쟁을 멈추었다. 그런데 신라측에서 백제의 존속을 용납하지 않았다. 신라로서는 숙원의 백제 멸망을 손아귀에 넣었는데 포기할 리 만무했다. 결국 신라의 강력한 항의와 더불어 고구려 정벌에 필요한 신라로부터의 병참 지원 문제도 따랐다. 당은 백제 멸망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454p

김부식은 고구려가 패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했다. 고구려가 자리잡은 중국의 동북 모퉁이는 난세에는 영웅들이 많이 일어나 격동치는 곳이니 '두려움이 많은 땅'이라고 했다. 게다가 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강역을 침략하여 원수를 맺고, 또 중국의 군현에 들어가 살았으니 전쟁이 언제나 끊이지 않았고 편안할 날이 없었다고 했다. 오만한 고구려의 몰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김부식의 평가는 틀리지 않다. 고구려는 수,당과의 오랜 전쟁을 통해 국력이 피폐해져 있었다. 614년 수의 제2차 침공시 고구려는 "우리나라 또한 어렵고 궁핍하여 있었다"고 실토했다. 고구려는 수, 당의 침략을 모두 격퇴하기는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영토와 주민은 중국에 빼앗겨 줄어들었다. 고구려로서는 실리를 챙기지 못한 승리였다. 오히려 패배한 중국이 실리를 챙긴 측면도 있었다.

 김부식이 지적한 고구려 패망 요인 가운데 '겸손의 뜻이 없고'는 굽히지 않는 당당한 모습으로 재현할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멜로스인의 당당한 태도는 국가 파멸로 이어졌다. 유연성을 잃은 연개소문의 굽히지 않는 태도 역시 이와 동일하였다.

462p

"당군이 우리를 위해서 적국을 멸망시켰는데, 도리어 그들과 서로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돕겠소?" 김유신인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제 다리를 밟으면 주인을 물게 되니 어찌 국난을 당하고서도 자신을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대왕은 이를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668넌 9월 이후 신라는 당초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당을 실력으로 축출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으로서 신라는 고구려의 재건을 명문으로 했다. 신라는 우선 고구려 유민들을 포섭하였다.

476p

<삼국사기> 열전은 김유신 한 사람에게 지나친 편중을 보여준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삼국사기>의 저자는 김유신에게 이다지도 많은 비중을 할애하였을까? 그건 두말할 나위 없이 김유신의 생애가 후대의 귀감이 되는 한 시대의 권화로서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김유신이 출생하여 15세에 화랑이 된 후 79세로 사망할 때까지의 일생 기록인 김유신전은 멸사봉공과 위국충절로 일관되었다. 특히 신의가 크게 돋보이고 있다.

 가령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당군에게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신라 군대가 나섰다. 그런데 엄동설한이라 군사와 우마들이 얼어 죽는 형편이었다. 이때 칠순을 바라보는 대장군 김유신이 어깨를 벗어 붙이고 앞으로 달려가니 젊은 장병들이 힘을 다하여 달려가며 땀을 흘리면서 감히 춥다는 말을 못하였다. 그 밖에 국운을 건 낭비성 전투에서 신라 군대가 계속 패하여 밀리자 김유신은 말에 올라 칼을 뽑아 들고는 단기로 고구려군 진영에 돌진하였다. 그는 적장을 베고 진영을 흔들어 전세를 반전시키는 등 수범을 보인 자세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거인 김유신은 시대의 소임을 다하고 세상을 건너갔다.

(이런 지도자의 표상같은 위인이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둥 폄훼당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494p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소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 김문영을 군문에서 목을 베려 하였다.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로 삼으려 하니, 나는 죄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서니,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 하니, 정방이 곧 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위의 기사를 통해 목전의 백제군과 대처한 상황에서도 김유신은 소정방과 정면 대결하였기에 김문영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 의존이 아니라 외세 이용이었다. 외세 이용도 자주성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친당자주 정권의 면면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런 지도자였으니 군사들이 충심으로 믿고 따랐을 것 같다)

505p

소국 신라가 대국들을 상대하여 지루하게 투쟁해서 얻는 성과였다. 통일전쟁에 있어서 신라 지배층의 사망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특히 당군과의 전투에서 국토를 사수하기 위해 현령급의 사망은 비일비재했다. 이들이 수범을 보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통일을 이루어 넓어진 영토와 불어난 인구 환경 속에서 토지와 노비를 상급으로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정도로 지배층의 희생은 실로 컸던 것이다. 신라의 통일로 인해 문화의 황금기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한 문화적 전통은 고려를 경유해서 조선과 지금의 대한민국에까지 면면히 이어졌다고 본다.

 신라가 통일할 수 있었던 요인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째 소정방의 발언에 적혀 있듯이 신라는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신뢰로 맺어진 관계였다. 신라는 상대등 비담의 난을 진압한 후 국왕 중심의 일원적인 국가체제를 구축했다. 국가라는 대의를 위한 희생을 시대의 권화로 여겼다. 지배층 전사단이 수범을 보였다. 이는 백제나 고구려의 지배층이 분열된 상황과는 비교된다. 고구려가 수 양제의 대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자산은 사회적 인화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절대권력 구축 이후 고구려 사회는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렸다. 그나마 연개소문의 강고한 권력은 한시적이나마 국가를 지탱하게 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망이라는 절대권력의 소멸은 마지막 결속력의 줄을 끊게 했다. 백제도 의자왕이 강력한 권력을 구축한 15년 이후부터 민심 이반이 가속되었다. 신라는 이러한 고구려나 백제와는 분명히 구분되었다.

508p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최고의 야전 지회관으로 평가받은 조지 스미스 패튼은 전쟁을 회고하면서 "좋은 군인이 되는 것은 자랑스러운 특권"이라며, "좋은 군인이 되려면 규율, 자존감, 부대와 국가에 대한 자긍심, 의무감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충만한 긍지는 정신전력의 기본이었다. <신라사연구> 서문에서 쓰보이 구메죠는 신라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드디어 한반도를 통일하고서 3백년간 국사를 유지한 것은 당의 외번이 되어 그 부액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라인들의 마음속에 응위한 바탕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이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고 단언했다.

522p

소나의 전사 소식을 접한 그 처는 "내 남편은 항상 말하기를 '장부는 진실로 마땅히 전쟁에서 죽어야지, 어찌 병상에 누워서 집사람의 돌봄을 받으며 죽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의 평소의 말이 이와 같았으니 지금 죽은 것은 그 말과 같다"고 하였다. 

 화랑은 신라 지배계급 가운데 가장 에너지가 넘치고 야심 많은 귀족의 자제가 출세하는 길이었다. 화랑의 낭도가 되는 것만으로도 당시 사회의 유동성을 저지해 온 엄격한 골품제로부터도 어느 정도 탈피할 수 있었다. 때문에 화랑은 인도적 사회를 만드는데 필요한 몇 가지 요소를 지녔다. 그리고 화랑제도는 신라의 문화에 커다란 활기를 가져다주었다. 신라 문화에 깊은 뿌리를 내린 비합리적인 열병적 사고는 무려 3백여 년 간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주민들을 끊임없이 동원시키게 했다. 신라 왕은 삼국통일전쟁을 국가의 신성한 대과업으로 정당화시켰다.

 화랑의 역할로 인해 신라 사회가 격조 있는 품격 사회로 전환하였다. 화랑들이 일상 생활에서 보여준 신의와 품격은 귀감이 되기에 족했다. 이들을 선망하면서 지금까지의 본성에 좌우된 거친 삶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그 결과 격렬한 전쟁 속에서 사회 전반의 격조를 상승시켰다. 이렇듯 화랑도는 신라 사회를 선도하는 동력원이었다. 김대문은 삼국통일을 위해 전장을 뛰어다닌 신라의 장병과 화랑들의 보국적인 역할, 그리고 그들이 맛보았던 승리의 감격과 전장에서 속절없이 사라진 동료들의 죽음에 대하여 깊은 비탄을 느꼈던 것 같다. 이들의 무사로서의 꽃다운 행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화랑세기>를 집필했다고 생각된다. 

 왕족인 김흠운은, 낭도들이 아무개가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고 말하면, 개연히 눈물을 흘리고는 하였다. 감읍한 것이다. 김흠운과 같은 문하에 있던 승려 전밀이 이러한 모습을 보고는 "이 사람이 적진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 뒤 김흠운은 백제와의 전쟁에 출정했다. 부하들이 "공은 신라의 귀골이니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요 우리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하면서 후퇴하기를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굳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칼을 뽑아 뿌리치고는 적진에 돌진하여 여러 명을 죽이고 장렬히 산화하였다.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서로 군사를 일으킨 이래로 그 풍속이 나아가 죽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물러나 사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여 王事 로 죽은 자가 귀산 이하 수십 인이 있었으나, 백제가 망할 적에는 계백만이 있었고 고구려가 망할 적에는 죽어 절개를 지킨 자가 하나도 없었다. 고구려, 백제의 절의가 퇴폐한 것이 이 같았으니, 어찌 신라를 대적할 수 있었으랴!"고 했다. 백제나 고구려가 절의로 충만한 신라를 이길 수 없었다고 단언했다.

 김종선 교수는 화랑의 정신세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 "국가를 위한 광적이고 일신을 돌보지 않는 헌신적 행위는 신라 무사들의 정신 속에 샤머니즘이 강한 지류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진충의 정신은 물론 삼국시대의 끝없는 위기 상황이 몰고 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으니 충효사상이 샤머니즘과 결합하게 되어 매우 특이한 성격을 띠게 된 것으로 보인다."

570p

당에서의 백제 유민들 가운데는 군문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은 백제인들이 국가를 회복하기 위해 항쟁할 때 용맹성을 깊이 체감하였다. 무력으로써는 제압하기 어려운 대상인 백제인들을 당의 우환인 돌궐이나 토번 정벌에 투입했다. 흑치상지를 비롯한 사타상여와 예식진 등의 현달은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백제 유민들의 기량은 그들 스스로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오류>

199p

이 만치가 곧 475년 한성 함락시 문무왕을 보필했던 목만치로 비정되기도 한다.

-> 문무왕이 아니라 문주왕이다.

450p

남생의 아들 현성은 내준신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했다.

-> 현성이 아니라 헌성이다.

489p

축천무후가 조회를 3일간이나 폐하고

-> 측천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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