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최혜진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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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삶이 부럽기도 하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 미술관 여행, 그림 감상하고 여행하면서 에세이를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삶.

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이런 에세이스트로 쉽게 전환하는 것 같다.

부러우면서도 책 읽는 독자로서 냉정히 말하자면 훌륭한 에세이스트, 혹은 전문적인 필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독자에게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하던지 혹은 수필로서 읽을 만한 글을 쓰던지 둘 중 하나가 되야 하는데 전공자가 아닌 경우 문필가로서 읽을 만한 책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시대에 살다 보니 블로그나 1인 미디어에 올릴 만한 잡스런 수준의 글도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와 양서를 고르는 게 오히려 어려운 시대가 된 것 같다.

항상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자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도 감정의 과잉이 넘쳐나 만연체의 긴 글들이 가독성을 방해한다.

어쩌면 이런 예민한 감성들이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게 만든 원동력이었겠지만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많이 불편했다.

책의 주제와는 관계없이 페미니즘과 여성의 전통적 역할, 피해의식에 대해 생각해 봤다.

저자는 가부장제의 기억이 남아 있는 여성으로서 여전히 사회에서 여성이 차별받고 있다고 강변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공감이 어렵다.

나도 한때는 페미니즘에 경도되어 여성할당제에 공감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성, 특히 차별받는 여성, 약자로서의 여성이라는 범주화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교육과 경제력이다.

사회적 약자에서 벗어나려면 많이 배우고 경제적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북유럽 여성 화가들도 작품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역사에 남겼다.

관심있던 스카겐 화파들의 그림이 소개되어 반갑다.

어찌 보면 세계 미술계를 선도하는 서유럽 회화에 비해 옛스럽고 시대에 뒤처진 느낌도 들지만 인간 본연의 따뜻하고 외로운 속성을 잘 드러내 주는 그림들이라 마음이 간다.

마지막에 실린 뭉크 그림은 여전히 가슴이 뛴다.

실제로 감상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뭉크 그림에서도 새삼 느낀다.

왜 뭉크가 유명한지 공감을 못했는데 한가람 미술관에서 뭉크 전시회를 본 후 완전히 빠져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작품들이 참 많이 왔던 것 같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지금도 왜 뭉크가 유명한지 전혀 몰랐을 것 같다.

유명하지 않은, 그렇지만 자꾸 보고 싶어지는 19세기 북유럽 회화들을 접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187p

독실한 루터교 집안에서 태어난 프리드리히에게는 '광활한 자연경관'이 신비이고 경이였다. 자연이 곧 신의 뜻이라고 믿었다. 안개나 노을, 눈, 깊고 어두운 나무 숲 등을 통해 아득한 무한의 세계를 전달하려 했다. 장대하고 적막한 풍경 안에 고독한 사람을 놓거나 수도원, 공동묘지 등을 폐허로 그려서 신 앞에 선 인간의 무력감과 불완전성을 표현하길 즐겼다. 덕분에 "풍경화의 비극을 발견한 화가"라는 평을 들었다.

259p

"우리가 절망이라 명명하는 한계 상황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바로 그 한계의 돌파구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강자'의 징표다. 강한 자는 병에 걸리지 않거나 죽음을 초월한 자들이 아니라 병을 건강으로 가치 변환시키는 자들, 한계에 맞닥뜨렸을 때 그 한계에서 다시 시작하는 자들이다. 뭉크는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강자였다."

-에드바르 뭉크, 세기말 영혼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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