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과 인현왕후의 국혼 조선의 사대부 16
김세은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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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례라고 하면 영조와 정순왕후 가례만 보다가, 조선사에서 가장 유명한 부부인 숙종과 인현왕후의 국혼이 주제라 흥미로웠다.

형식적인 절차를 주로 다뤄서 지루하긴 하다.

인현왕후와 숙종의 정치적 배경은 워낙 잘 알려져 새로울 것도 없지만 삼간택 과정이나 왕비를 뽑는 당시 풍습에 대해 좀더 많은 정보가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왕후가 죽고 나면 보통 3년상을 치룬 후 새 왕비를 간택하지만 21세의 국왕이 아직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독자인 아들이 걱정된 모후 명성왕후가 강력하게 주장하여 5개월 만에 간택이 시행된다.

15세부터 19세까지의 처녀들을 간택했는데 임신 가능한 처녀를 뽑아야 하니 국왕의 나이와는 상관이 없었다.

숙종이 재혼 당시 21세이고 인현왕후는 15세라 적당해 보이지만, 삼혼 당시는 42세이고 신부 인원왕후는 16세로 26년차가 난다.

국왕이 오래 살면 어쩔 수 없이 새 왕비는 어려지고 국왕 사후 대비가 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15p

숙종은 자신이 여러 해를 참고 기다린 끝에 이런 처분을 내린 것이며, 신유년 국혼 때 왕비 책봉을 하던 날 지진이 일어나는 드문 변고가 있어 마음이 항상 우울했는데, 이제 보니 하늘의 뜻이었다는 내용의 비망기를 내렸다.

(정말 찌질함의 극치다. 무려 9년 전 혼인할 때 천재지변이 있어 마음에 걸리더니만 결국 폐위하게 됐다니, 이게 마누라 쫓아내면서 할 소리인가 싶다.)

116p

인현왕후는 본가에서 외롭게 살면서 먹고 입는 것도 스스로 해결해야 할 정도로 곤궁하게 살았다. 간혹 신료들이 별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양식을 내려주어야 한다는 상소를 했지만 숙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인현왕후는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며 찬 방에서 잠을 자고, 아름다운 옷을 입지 않았다. 하루가 긴 여름에도 점심을 먹지 않았다. 어려운 처지에도 항상 "오늘날까지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성은이 아닌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보통 사람과 똑같이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근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 죄도 없이 쫓겨나 친정은 풍비박산이 났으니 이 불행한 전처를 위해 양식이라도 내려줄 만 하건만 숙종은 정말로 냉정하다. 인현왕후는 양반가의 여식답게 본가에서도 가난함을 견디며 근신하는 모습을 보여 다시 남편의 마음을 움직였으니, 과연 조선시대 현숙한 여인상에 잘 어울리고, 만약 복위가 안 됐더라면 그녀의 일생이 너무나 불행했을 것 같다)

117p

인현왕후가 처음 발병했을 때 의관들은 통풍으로 진단했지만 전체적인 발병 과정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상했을 때 나타나는 '옹저'라는 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할 때 흔히 발병했다. 왕비 책봉과 폐위, 복위를 겪어낸 인현왕후가 오랫동안 느꼈을 두려움과 슬픔, 불안, 분노, 울분 등으로 얻은 병이었다.

(옹저가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으나 허리와 다리가 붓고 소변이 안 나온다고 하는 걸 보면 심부전이나 신부전 같은 게 있었을 듯 한데 어찌 됐든 조선 500년 동안 폐위와 복위, 그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걸 보면서 견뎌야 할 심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으리라. 더군다나 자신은 아이를 낳지도 못하는데 상대는 당시까지 국왕의 유일한 아들을 낳은 후궁에다가 사서에 기록될 만큼 미모가 출중하고 정치력이 뛰어나 최초의 중인 출신 왕비가 된 장희빈이 아닌가! 평범한 양반가 여식이 견뎌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 같다)



<오류>

113p

왕실 자손인 동평군, 숭선군과 장렬왕후의 재종동생인 조사석 등으로부터 정치적 후원을 받고 있었다.

-> 조사석은 장렬왕후의 재종동생이 아니라 사촌동생이다.

114p

작은아버지 민정중은 평안도 벽동으로 유배되어 죽었고

-> 민정중은 작은 아버지가 아니라 둘째 큰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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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4 - 교토의 명소,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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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편 두 번째 책은, 무로마치 막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의 역사다.

여전히 일본 역사는 체계가 잘 안 잡혀 반복해서 읽고 있다.

2년 전에 갔던 교토 절들을 떠올리면서 읽으니 감회가 새롭다.

마지막에 실린 가쓰라 이궁과 수학원 이궁은 따로 신청을 해야 하는 곳이라 못 가봐서 아쉽다.

저자의 교토 예찬을 듣고 있노라면 문화에 대한 애정이 지극하다는 생각이 들고, 이렇게 교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교토인들도 무척이나 감사할 것 같다.

가쓰라 이궁의 과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하고 기능적인 건축미를 예찬하는 브루노 타우트의 글도 애틋하다.



<인상깊은 구절>

96p

천룡사호를 비롯한 무역선의 빈번한 왕래는 일본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화폐경제가 활성화되었으며, 중국의 선승들이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선종이 크게 일어났고, 도자기와 그림 등 중국의 발달된 문화가 속속 전래되었다. 이것은 무로마치시대에 일본문화가 꽃피는 물질적, 문화적 자산이 되었다.

120p

사람들은 운동이라는 것을 그저 체력과 훈련으로 다져진 기술 정도로 생각하고 운동선수에게서 어떤 철학적 사고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 쏟은 집념에는 나름대로 마음가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평소 논리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결정적인 때는 즉발적인 감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곤 한다.

 당시 김연아 선수가 인터뷰를 하면서 "저보다 절실하게 금메달이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갔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인생을 달관한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을까 놀랍기만 했다.

325p

타우트는 가쓰라 이궁의 결정적인 매력은 우아한 삶, 높은 도덕, 고상한 취미를 다 담아내면서도 그것을 어떤 일본 주택보다도 '문자 그대로 간소하게' 처리했다는 점이라고 했다.

327p

브루노 타우트는 가쓰라 이궁을 보면서 일어난 감격을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예술작품을 만날 때면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나는 가쓰라 이궁의 저 신비에 가까운 수수께끼 속에서 예술의 아름다움은 형태의 미가 아니라 그 배후에 서려 있는 무한한 사상과 정신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감지할 수 있었다."

332p

이처럼 지방문화가 활성화됨으로써 일본의 문화유산은 아주 풍성해졌다. 이것은 봉건사회를 제대로 경험해본 일본 역사의 산물로 단 한 번도 지방분권이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나라와 비교된다. 

356p

나는 수학원 이궁에 와서도 일본 정원에서 인공과 자연의 관계는 조화가 아니라 병존이고 강한 콘트라스트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극명한 대비로 그 둘을 모두 간직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 인공이 흔연히 어울려 어디까지가 인공인지 모르는 우리 정원의 모습과 아주 다르다. 우리는 되도록 인공적인 태를 감추려고 하는데 일본은 반대로 인공의 자취를 강조하며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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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 - 교토의 역사 “오늘의 교토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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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나미 총서의 <교토>를 읽은 김에 재독하게 됐다.

벌써 세 번째 읽으니 일본 역사와 교토의 명승지에 대해 조금은 감이 잡힌다.

표지 디자인이 참 예쁘고 사진 도판도 괜찮은데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 어둡게 나온 것 같아 아쉽다.

교토는 두 권으로 나눠져 있는데, 이 책은 가마쿠라 막부 때까지 역사를 절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그러고 보면 일본의 불교 역사는 매우 깊고 신불습합이라고 하여 전통 신앙과 잘 조화된 것 같다.

조선처럼 숭유억불로 불교를 완전히 밀어낸 것은 메이지 유신 때니 불교가 곧 일본의 전통인 듯하다.

책에 나온 절들은 교토 여행 때 거의 가 봤는데 33간당이 폐관시간에 걸려 못 본 게 너무 아쉽다.

목조각 전통이 너무 훌륭한데 사진으로만 봐야 하는 게 아쉽다.

저자의 표현대로 1000점이나 되는 관음상들이 거대한 법당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얼마나 장관일지 궁금하다.

항상 느끼는 바지만 유홍준씨의 책은 답사기의 정석 같다.

정보와 감상을 잘 버무려 명승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인상깊은 구절>

196p

신을 앞세운 악승들의 위세에 절대권력을 자랑하던 상황의 원정도 어쩔 수 없었다. 시라카와 법황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가모가와의 물, 쌍륙의 주사위, 그리고 산법사(즉 히에이산의 승병)이다."

247p

청수사의 결구를 보니 가로세로로 어긋나게 물린 것이 여간 야무져 보이지 않는다. 마냥 바라보다가 또 올려다보며 그 공교로움을 감상하고 있자니 인간은 참으로 못하는 일이 없는 무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건축이라는 장르는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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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사라지지 않는 로마, 신성로마제국 - 실익과 명분의 천 년 역사
기쿠치 요시오 지음, 이경덕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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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래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이었는데 근처 도서관에 없어서 못 읽다가 드디어 읽게 됐다.

250 페이지의 짧은 분량인데도 불구하고 밀도있게 신성로마제국의 복잡한 정치 체제를 잘 설명한다.

일본 번역서들은 조잡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특히 자기계발서나 에세이류) 적어도 전공자들의 역사교양서들은 정말 짜임새 있고 수준이 높다.

신성로마제국의 정체는 비잔틴 제국보다 더 모호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책에 정확히 기술한대로 "독일인의" 신성로마제국었다.

프랑크 왕국이 갈라지면서 서프랑크는 프랑스라는 국민국가가 일찍 만들어져 독립했고, 중프랑크는 제일 먼저 소실됐던 반면, 동프랑크는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황제위를 지키는 대신에 중국식의 절대군주가 아닌 선거에 의해 뽑힌 무수한 제후국들의 상징적 통치자로 남았다.

막시밀리안 1세가 즉위한 후부터는 교황에 의해 대관식을 치를 필요도 없이 세습됐지만, 실제로 통치 영역은 합스부르크 영지인 오스트리아 정도에 국한됐다.

그 후 프로이센에 의해 독일이 통일되면서 국민국가가 만들어지고 오스트리아는 떨어져 나간다.

유럽은 오랫동안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무수한 전쟁을 치뤘는데도 자본주의를 발달시켜 19세기에는 전 세계의 패권을 쥐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 하다.

수천 년 전부터 통일 국가를 이룩한 중국이 자기식으로 세계화를 이룩했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경쟁 속에서 성장한다는 말이 맞는 것인가 싶다.

복잡한 중세 유럽사를 잘 이해할 수 있게 쉽고 명료하게 잘 설명해 준 책이고 번역도 아주 매끄럽다.



<인상깊은 구절>

33p

왕권의 영속성은 권위의 밑바당이 된다. 지배가 오랜 기간 이어질수록 지배자 일족의 혈통에 아우라가 부여되게 마련이며 그것이 지배의 근간이 된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종교적 가치이다. 메로빙거 왕조가 사분오열된 서유럽에서 강대국으로 나설 수 있었던 요인은 로마 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의 승인은 메로빙거 왕조의 권위를 높였다.

44p

로마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중세적 제국 이념은 훗날 독일의 역대 황제들에게 "이탈리아를 지배하지 않고 어떻게 황제라 할 수 있겠는가?" 라는 강박관념을 심었다. 여기에 독일 황제 뿐만 아니라 프랑스 황제도 제위 찬탈을 노리면 끊임없이 이탈리아로 손을 뻗쳤다. 이렇게 이탈리아를 둘러싼 독일과 프랑스의 격돌은 중세 유럽의 역사를 팽팽한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50p

남자 균일상속이라는 왕가의 개인적 사유 때문에 나라가 분할된 모습은 당시의 나라가 공공의 것이 아니라 왕가의 개인 재산이었음을 알려 주는 좋은 증거이다. 도한 넓게 퍼져 있는 지배 지역에는 나라라는 일체감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은 라인강과 알프스 산맥이라는 자연의 구분에 따라 셋으로 나눌 수 있는 각 지역의 다른 풍속들이었다. 그리고 상속 문제로 제기된 제국 삼분할은 중부 프랑크 왕국의 영지인 알프스 이북을 제외한 풍속이 다른 지역들 사이에서 훗날 민족 감정이 생기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즉 나중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되는 원형이 탄생한 것이다.

53p

국왕 선거는 게르만의 오래된 관습으로 선거 원리는 혈통 원리와 크게 모순되지 않았다. 오히려 선거와 혈통은 서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게르만 왕제는 세습 선거제의 형태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즉 국왕을 선거로 뽑기는 하지만 선거에 나설 수 있는 후보자는 전왕의 혈연자로 한정되었다. 여기에 더해 전왕은 후계자를 지명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국왕 선거는 형식적인 절차였다. 다시 말해 이 선출 과정은 새로운 왕이 전왕의 혈연자이기 때문에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참된 국왕에 어울리는 사람익 때문에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의식에 불과했다. 

77p

힐데브란트는 가차 없이 덮쳐오는 세상의 모든 모순을 받아 내는 가난한 농부 출신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불굴의 힘을 가진 남자의 마음에 클뤼니 교회 개혁 운동의 정신이 깊이 파고들었다. 그 정신은 강철처럼 그를 단련시켰고 귀하게 큰 도련님들이 빠지기 쉬운  꿈과 같은 이상주의에 경도되지 않았다. 그는 성직자의 금욕, 성직 매매의 금지, 교황권의 확립이라는 이상을 실현시키려면 어쩔 수 없이 세속적인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끄 때문에 그는 황제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를 휩쓸고 있던 노르만인의 세력과 주저 없이 손을 잡았다.

86p

독일 제후둘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교황과 결탁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레고리우스 7세가 이상으로 생각했던 신권 정치 시스템을 받아들일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91p

하인리히 4세가 악전고투하며 어찌어찌 해서 56살까지 황제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타고난 자질 때문이 아니라 특별한 '왕의 영험한 위엄'이 그의 편을 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의 매형이자 강력한 적이었던 슈바벤 공작의 죽음이 그랬다.

116p

교황이 파문한 이유는 프리드리히가 내뱉은 말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프리드리히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모세, 그리스도, 무함마드는 세계 3대 사기꾼이다!"

이것은 종교가 위정자에게 어디까지나 통치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후세에 스위스 역사가인 부르크하르트에게 '왕좌에 앉은 최소의 근대인'이라고 칭송을 받은 프리드리히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125p

당시 "교황의 파문 따위 개나 줘라!"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사람은 당대 유일한 허무주의자였던 프리드리히 정도였다. 욕심이 강한 제후들도 결국 신앙심이 깊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최후의 심판'은 두려운 것이었고, 프리드리히와 같은 배를 탈 배짱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독일 각지에서도 반란의 불꽃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는 교황이 계속해서 보내는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이슬람 병사로 구성된 황제 직속의 이교도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각지를 전전했다.

130p

삼왕조 시대의 독일 왕들은 바로 이런 에피고넨들이었다. 그들은 '조상의 가치를 느끼는 자'였기 때문에 위대한 로마제국 황제의 에피고넨으로서 제국을 부흥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꿈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념과 행동이 여과 없이 결합되어 있던 유럽 중세 세계를 헤집고 다녔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황제다운 황제였다.

160p

카를은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칼을 휘두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달았다. 독일로 돌아온 카를은 역대 여러 왕들이 좌절하였고 결국 혁명적인 수단과 격렬한 전쟁을 경험하지 않으면 실현할 수 없는 독일 특유의 문제, 즉 제후 특히 선제후의 힘을 억누르겠다는 패권의 길을 버렸다. 그는 이 길을 버림으로써 평화의 확립이나는 대의를 얻었다. 그의 이러한 선택은 현실을 직시하는 분석 능력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카를은 모험주의를 배제하고 오로지 현실 노선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167p

당시의 귀족은 모두 토지 귀족이었고, 군인 귀족, 법복 귀족, 부르주아 귀족 등이 아직 출현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토지 분쟁이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귀족은 자기의 영지를 죽을 힘을 다해 지켰다. 재판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있으나 마나 했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법적 수단은 무력 충돌이었다. 당연히 치안은 문란해지고 페데의 희생자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물론 희생자는 농민을 비롯한 일반 대중이었다. 

183p

왕권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조직, 단체의 강한 힘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 조직은 내부에 수도회처럼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수도사들이 조직한 많은 단체를 거느리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그 단체에 속해야 비로소 교회 상층부로부터 자신들의 개인적인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교회 조직의 단체 개념은 세속에도 영향을 미쳐 신분이나 직업이 같은 동지들이 조합 등의 단체를 만들고 그 단체를 통해서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여기에 과거 게르만 민족정신이 얽혀 왕권과 각 단체가 교섭하는 장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권 특유의 신분제 의회가 생겨났다.

 제국 회의에서 왕권에 제한을 가하고 자기들의 특권 확보에 광분했던 제후들도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면 제국 회의의 축소판인 영방 회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신단이 주군에게 쉽게 복종하지 않은 구도가 당시의 영방 국가의 모습이었다.

203p

신성로마제국은 서유럽의 황제로서 이 이교도의 침략을 막을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의 왕'이어야 할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논리로 이교도 슐레이만과 손을 잡았다. 악마를 쓰러뜨리기 위해 사탄과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합스부르크 집안에 대한 증오가 강했다.

211p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에 '독일 국민'이라는 문구를 덧붙이려는 징조는 15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 영역이 독일과 그 주변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의 증거이며 동시에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대한 적대적인 선을 그은 독일 국민감정이 싹트로 있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독일뿐 아니라 이 무렵이 되면 유럽의 나라들은 제각기 국가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다. 당시 국가 기구의 대표자인 왕실은 이 움직임을 잘 파악해서 왕권을 강화하여 절대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다.

 독일에서 싹튼 국민감정은 16세기에 들어 종교 개혁과 함께 쑥쑥 자라났다.

234P

독일 30년 전쟁 이후 유럽의 패권은 프랑스가 장악했다. 독일 제후는 무엇보다 전쟁을 사랑한 태양왕 루이 14세의 모험주의적인 확장 정책에 전전긍긍했다. 당시 18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초강대국 프랑스는 마구잡이로 패권주의의 길을 걸었다. 여기에 맞선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두 나라 모두 상업 국가였다. 상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판로 확대를 위해 세력의 균형 상태를 간절하게 원했다. 두 나라는 제국에 금전이라는 강심제 주사를 계속 놓았다. 제국을 프랑스에 대항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245p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7년 전쟁이라는 계속된 전란에서 희생된 사람은 무려 100만 명에 이른다. 두 전쟁의 당사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운이 좋은 전쟁보다 어정쩡한 평화가 훨씬 낫다"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 이후 내정으로 눈을 돌렸다. 물론 이것은 제국의 내정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집안의 세습 영지의 내정이었다. 제국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의지에 휘둘린 전쟁'으로 불에 타 지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52p

애초에 유럽에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카를 대제에 의해 부활한 서로마제국을 마지막으로 세계제국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세의 농업 혁명'으로 유럽은 11세기경부터 경제가 팽창하기 시작했고 사람의 이동과 물자의 유통이 왕성해졌다. 14세기 중세 최대의 불황을 거쳐 15세기 이후 자본주의적 경제가 발흥하여 유럽 각 지역은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윌러스턴이 말하는 '유럽의 세계 경제'의 성립이다. 

 16세기 합스부르크 집안은 이 유럽의 세계 경제라는 세계 시스템을 '제국'화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17세기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을 채용해서 유럽은 결정적으로 세계 경제 시스템의 길을 선택했다. 이것은 세계 제국 시스템의 포기를 의미한다.


<오류>

100p

하인리히 사자공은 의부인 영국왕 헨리2세에게 몸을 의탁했다.

-> 하인리히 사자공의 부인이 헨리 2세의 딸 마틸다이므로 의부가 아니라 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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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잊혀진 유목제국 이야기
쳉후이 지음, 권소연 외 옮김 / 네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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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고 내용도 우리나라 역사 스페셜 수준이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무조건 외웠던 요나라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TV 다큐를 책으로 낸 것이라, 밀도면에서는 상당히 떨어지지만 거란사를 처음 접하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좋은 선택일 것 같다.

확실히 중국은 한족 중심에서 다민족 국가로 선전을 바꾸려고 하는 것 같다.

위구르나 티벳의 독립을 탄압한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이고, 여러 민족을 포용하려는 관대한 자세라면 이들의 역사를 품어 보편제국으로써 내연이 확대되는 것이니 좋은 일이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현재 중국의 태도를 보면 좋은 쪽은 아닐 것 같지만 말이다.

(소국 대국 타령하는 국가 지도자를 가진 나라니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하다)


요나라의 창시자 아율아보기가 사망하자 황후 술률평이 오른팔을 자르고 순장 대신 그 팔을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완황후라는 무서운 별칭이 생겼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소작, 즉 경종의 황후이자 성종의 생모는 한족인 한덕양과 사실혼 관계였고, 심지어 성종이 부친으로 우대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남편을 따라 죽는 순장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술률평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 것인가 의아하다.

또 성종의 정비는 아들을 낳지 못했는데, 후궁 소누근이 낳은 흥종이 즉위하자 핍박받아 자진하고 만다.

궁녀 출신인 소누근은 흥종이 16세로 왕위에 오르자 전권을 휘두르고 심지어 큰아들을 폐하고 작은 아들을 세우려는 음모까지 꾸민다.

조선 같으면 아무리 왕을 낳은 생모라 해도 대비로 추존될 수 없고 어떤 권력도 가질 수 없는데 유목민족의 관습이 참 신기하다.

이를테면 정조가 왕위에 올랐어도 생모인 혜경궁은 대비가 아니기 때문에 며느리인 효의왕후보다도 모든 의절에서 뒷자리였던 것과 비교된다.

그래서 청나라의 서태후도 정궁인 동태후를 핍박해 죽이고 전권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인가? 

거란사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었고 이런 가벼운 교양서들이 많이 발간되면 좋겠다.



<인상깊은 구절>

51p

아율아보기가 별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술률평은 중요한 고위 관료들을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신들은 돌아가신 황제가 그리운가?"

"돌아가신 황제의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땅히 그를 보러 가라"

 술률평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자 아보기와 생사를 같이한 문무 중신들은 반박할 여지도 없이 참수되어 순장되었다. 대신들은 무고하게 살해되었고, 그들의 식솔들은 속수무책으로 울고불고할 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과부살이를 하고 있으니 너희들도 마땅히 나를 본받아야 한다!" 

59p

거란군대는 기병을 위주로 하고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을 줄곧 사용해왔다. 개봉을 점령한 후에 거란 군사들은 도처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는 중원 사람들의 강력한 반항을 불러일으켰고 야율덕광은 3개월도 채 버티지 못하고 모친이 그립다는 명분으로 초원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개봉을 돌아보며 야율덕광은 매우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나는 중원 사람들이 이렇게 다스리기 어려운줄 몰랐다!"

88p

목종은 보기 드문 황제였다. 그는 술을 좋아했지만 도리어 여색은 좋아하지 않았다. 사료를 보면, 그가 총애한 그 어떤 여인의 기록도 없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도 없었다. 목종의 성격은 괴이하였다. 이는 그의 선천적인 성 불능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성격은 괴팍하고 냉혹하며 심리 상태는 변태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온 정력을 술 마시는데 쏟았기 때문에 술 마실 때에는 병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146p

이는 수레에 장막을 친 것으로 사람이 안에서 살 수 있었다. 조리용은 소작과 한덕양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은 같은 줄에 앉아있는 것이다. 만약 부부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태후와 '나란히' 앉겠는가? 태후 또한 신하와 '나란히' 앉으려고 하겠는가?

153p

그는 중원왕조는 무력은 약하지만 문화는 발달했다는 점과 장기적인 대처는 거란국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전연의 맹약을 맺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덕양은 승천태후의 신임과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그는 승천태후에게 충성하여 그녀만을 사랑했고, 거란의 진흥과 발전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았다

180p

소누근은 큰아들과의 악화된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흥종이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생모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아프하지 않았다. 흥종의 황후 소달리가 슬픔에 잠겨 울고 있는 것을 본 그녀는, 옆에서 냉정하게 "너는 아직 나이가 젊은데, 구태여 이렇게 슬퍼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말했다.

199p

소관음은 도종에 의해 죽기 전 <절명사>를 지은 뒤에, 목을 매어 자진하였다. 그녀의 나이 서른 여섯이었다.

"내가 태어났으니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어찌 이 순간을 두려워하겠는가?"

황태숙의 반란을 경험한 도종은 집안싸움으로 '활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라는 새'처럼 되었다. 그는 황제 자리를 차지하려고 모의하는 사람이 있을까 언제나 근심하였고, 특별히 가까운 친족을 더욱 의심하였다. 야율을신은 그러한 도종의 병적인 심리 상태를 이용하여 황후와 황태자를 제거한 것이다.

202p

생산력 수준이 아주 낮은 당시의 형편에서 많은 노동력이 사회 생산에서 이탈하였으므로, 백성들은 헛되이 이런 무리(승려)를 먹여 살려야 했다. 이것이 거란국 후기 백성과 조정 사이의 모순을 날로 첨예하게 만들었다.

 지나친 불교 숭상은 용맹하고 싸움을 잘 하는 거란 민족의 정기를 잃어버리게 하여, 대요 제국의 흥망성쇠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217p

거란 왕조는 국내의 여러 민족을 비교적 잘 융합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중국의 농업 지역을 확대시켰고, 장성 밖 유목민족의 정치이념과 문화사상, 사회습속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중화민족의 정체성 형성을 촉진하였다.

 학자들은 요 왕조가 이후의 금, 원, 청 같은 유목 왕조가 장성 밖에서 흥기하고 중국의 각 민족들이 식민주의자들의 침입에 저항할 수 역사적 기초를 다졌다고 생각한다.

 근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의 눈길을 장성 밖과 이미 사라져버린 요나라로 돌리고 있다. 사람들은 일찍이 초원에서 말달리던 저 영웅적인 민족을 잊을 수 없다.

225p

최근 중국 문명주의의 확장에는 장성 북쪽의 유목민족과 남쪽의 농경민이 투쟁과 교류를 통해 서로 혈통적, 문화적, 제도적으로 뒤섞이는 과정에서 중국의 문화를 형성하였다는 인식, 다시 말하면 한족 위주의 중국 역사상에서 탈피하려는 인식이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북방의 강력한 세력으로 중국을 지배한 거란족은 중국역사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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