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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과 인현왕후의 국혼 ㅣ 조선의 사대부 16
김세은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7년 12월
평점 :
국혼례라고 하면 영조와 정순왕후 가례만 보다가, 조선사에서 가장 유명한 부부인 숙종과 인현왕후의 국혼이 주제라 흥미로웠다.
형식적인 절차를 주로 다뤄서 지루하긴 하다.
인현왕후와 숙종의 정치적 배경은 워낙 잘 알려져 새로울 것도 없지만 삼간택 과정이나 왕비를 뽑는 당시 풍습에 대해 좀더 많은 정보가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왕후가 죽고 나면 보통 3년상을 치룬 후 새 왕비를 간택하지만 21세의 국왕이 아직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독자인 아들이 걱정된 모후 명성왕후가 강력하게 주장하여 5개월 만에 간택이 시행된다.
15세부터 19세까지의 처녀들을 간택했는데 임신 가능한 처녀를 뽑아야 하니 국왕의 나이와는 상관이 없었다.
숙종이 재혼 당시 21세이고 인현왕후는 15세라 적당해 보이지만, 삼혼 당시는 42세이고 신부 인원왕후는 16세로 26년차가 난다.
국왕이 오래 살면 어쩔 수 없이 새 왕비는 어려지고 국왕 사후 대비가 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15p
숙종은 자신이 여러 해를 참고 기다린 끝에 이런 처분을 내린 것이며, 신유년 국혼 때 왕비 책봉을 하던 날 지진이 일어나는 드문 변고가 있어 마음이 항상 우울했는데, 이제 보니 하늘의 뜻이었다는 내용의 비망기를 내렸다.
(정말 찌질함의 극치다. 무려 9년 전 혼인할 때 천재지변이 있어 마음에 걸리더니만 결국 폐위하게 됐다니, 이게 마누라 쫓아내면서 할 소리인가 싶다.)
116p
인현왕후는 본가에서 외롭게 살면서 먹고 입는 것도 스스로 해결해야 할 정도로 곤궁하게 살았다. 간혹 신료들이 별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양식을 내려주어야 한다는 상소를 했지만 숙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인현왕후는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며 찬 방에서 잠을 자고, 아름다운 옷을 입지 않았다. 하루가 긴 여름에도 점심을 먹지 않았다. 어려운 처지에도 항상 "오늘날까지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성은이 아닌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보통 사람과 똑같이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근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 죄도 없이 쫓겨나 친정은 풍비박산이 났으니 이 불행한 전처를 위해 양식이라도 내려줄 만 하건만 숙종은 정말로 냉정하다. 인현왕후는 양반가의 여식답게 본가에서도 가난함을 견디며 근신하는 모습을 보여 다시 남편의 마음을 움직였으니, 과연 조선시대 현숙한 여인상에 잘 어울리고, 만약 복위가 안 됐더라면 그녀의 일생이 너무나 불행했을 것 같다)
117p
인현왕후가 처음 발병했을 때 의관들은 통풍으로 진단했지만 전체적인 발병 과정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상했을 때 나타나는 '옹저'라는 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할 때 흔히 발병했다. 왕비 책봉과 폐위, 복위를 겪어낸 인현왕후가 오랫동안 느꼈을 두려움과 슬픔, 불안, 분노, 울분 등으로 얻은 병이었다.
(옹저가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으나 허리와 다리가 붓고 소변이 안 나온다고 하는 걸 보면 심부전이나 신부전 같은 게 있었을 듯 한데 어찌 됐든 조선 500년 동안 폐위와 복위, 그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걸 보면서 견뎌야 할 심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으리라. 더군다나 자신은 아이를 낳지도 못하는데 상대는 당시까지 국왕의 유일한 아들을 낳은 후궁에다가 사서에 기록될 만큼 미모가 출중하고 정치력이 뛰어나 최초의 중인 출신 왕비가 된 장희빈이 아닌가! 평범한 양반가 여식이 견뎌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 같다)
<오류>
113p
왕실 자손인 동평군, 숭선군과 장렬왕후의 재종동생인 조사석 등으로부터 정치적 후원을 받고 있었다.
-> 조사석은 장렬왕후의 재종동생이 아니라 사촌동생이다.
114p
작은아버지 민정중은 평안도 벽동으로 유배되어 죽었고
-> 민정중은 작은 아버지가 아니라 둘째 큰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