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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사라지지 않는 로마, 신성로마제국 - 실익과 명분의 천 년 역사
기쿠치 요시오 지음, 이경덕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오래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이었는데 근처 도서관에 없어서 못 읽다가 드디어 읽게 됐다.
250 페이지의 짧은 분량인데도 불구하고 밀도있게 신성로마제국의 복잡한 정치 체제를 잘 설명한다.
일본 번역서들은 조잡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특히 자기계발서나 에세이류) 적어도 전공자들의 역사교양서들은 정말 짜임새 있고 수준이 높다.
신성로마제국의 정체는 비잔틴 제국보다 더 모호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책에 정확히 기술한대로 "독일인의" 신성로마제국었다.
프랑크 왕국이 갈라지면서 서프랑크는 프랑스라는 국민국가가 일찍 만들어져 독립했고, 중프랑크는 제일 먼저 소실됐던 반면, 동프랑크는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황제위를 지키는 대신에 중국식의 절대군주가 아닌 선거에 의해 뽑힌 무수한 제후국들의 상징적 통치자로 남았다.
막시밀리안 1세가 즉위한 후부터는 교황에 의해 대관식을 치를 필요도 없이 세습됐지만, 실제로 통치 영역은 합스부르크 영지인 오스트리아 정도에 국한됐다.
그 후 프로이센에 의해 독일이 통일되면서 국민국가가 만들어지고 오스트리아는 떨어져 나간다.
유럽은 오랫동안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무수한 전쟁을 치뤘는데도 자본주의를 발달시켜 19세기에는 전 세계의 패권을 쥐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 하다.
수천 년 전부터 통일 국가를 이룩한 중국이 자기식으로 세계화를 이룩했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경쟁 속에서 성장한다는 말이 맞는 것인가 싶다.
복잡한 중세 유럽사를 잘 이해할 수 있게 쉽고 명료하게 잘 설명해 준 책이고 번역도 아주 매끄럽다.
<인상깊은 구절>
33p
왕권의 영속성은 권위의 밑바당이 된다. 지배가 오랜 기간 이어질수록 지배자 일족의 혈통에 아우라가 부여되게 마련이며 그것이 지배의 근간이 된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종교적 가치이다. 메로빙거 왕조가 사분오열된 서유럽에서 강대국으로 나설 수 있었던 요인은 로마 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의 승인은 메로빙거 왕조의 권위를 높였다.
44p
로마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중세적 제국 이념은 훗날 독일의 역대 황제들에게 "이탈리아를 지배하지 않고 어떻게 황제라 할 수 있겠는가?" 라는 강박관념을 심었다. 여기에 독일 황제 뿐만 아니라 프랑스 황제도 제위 찬탈을 노리면 끊임없이 이탈리아로 손을 뻗쳤다. 이렇게 이탈리아를 둘러싼 독일과 프랑스의 격돌은 중세 유럽의 역사를 팽팽한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50p
남자 균일상속이라는 왕가의 개인적 사유 때문에 나라가 분할된 모습은 당시의 나라가 공공의 것이 아니라 왕가의 개인 재산이었음을 알려 주는 좋은 증거이다. 도한 넓게 퍼져 있는 지배 지역에는 나라라는 일체감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은 라인강과 알프스 산맥이라는 자연의 구분에 따라 셋으로 나눌 수 있는 각 지역의 다른 풍속들이었다. 그리고 상속 문제로 제기된 제국 삼분할은 중부 프랑크 왕국의 영지인 알프스 이북을 제외한 풍속이 다른 지역들 사이에서 훗날 민족 감정이 생기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즉 나중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되는 원형이 탄생한 것이다.
53p
국왕 선거는 게르만의 오래된 관습으로 선거 원리는 혈통 원리와 크게 모순되지 않았다. 오히려 선거와 혈통은 서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게르만 왕제는 세습 선거제의 형태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즉 국왕을 선거로 뽑기는 하지만 선거에 나설 수 있는 후보자는 전왕의 혈연자로 한정되었다. 여기에 더해 전왕은 후계자를 지명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국왕 선거는 형식적인 절차였다. 다시 말해 이 선출 과정은 새로운 왕이 전왕의 혈연자이기 때문에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참된 국왕에 어울리는 사람익 때문에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의식에 불과했다.
77p
힐데브란트는 가차 없이 덮쳐오는 세상의 모든 모순을 받아 내는 가난한 농부 출신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불굴의 힘을 가진 남자의 마음에 클뤼니 교회 개혁 운동의 정신이 깊이 파고들었다. 그 정신은 강철처럼 그를 단련시켰고 귀하게 큰 도련님들이 빠지기 쉬운 꿈과 같은 이상주의에 경도되지 않았다. 그는 성직자의 금욕, 성직 매매의 금지, 교황권의 확립이라는 이상을 실현시키려면 어쩔 수 없이 세속적인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끄 때문에 그는 황제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를 휩쓸고 있던 노르만인의 세력과 주저 없이 손을 잡았다.
86p
독일 제후둘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교황과 결탁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레고리우스 7세가 이상으로 생각했던 신권 정치 시스템을 받아들일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91p
하인리히 4세가 악전고투하며 어찌어찌 해서 56살까지 황제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타고난 자질 때문이 아니라 특별한 '왕의 영험한 위엄'이 그의 편을 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의 매형이자 강력한 적이었던 슈바벤 공작의 죽음이 그랬다.
116p
교황이 파문한 이유는 프리드리히가 내뱉은 말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프리드리히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모세, 그리스도, 무함마드는 세계 3대 사기꾼이다!"
이것은 종교가 위정자에게 어디까지나 통치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후세에 스위스 역사가인 부르크하르트에게 '왕좌에 앉은 최소의 근대인'이라고 칭송을 받은 프리드리히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125p
당시 "교황의 파문 따위 개나 줘라!"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사람은 당대 유일한 허무주의자였던 프리드리히 정도였다. 욕심이 강한 제후들도 결국 신앙심이 깊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최후의 심판'은 두려운 것이었고, 프리드리히와 같은 배를 탈 배짱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독일 각지에서도 반란의 불꽃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는 교황이 계속해서 보내는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이슬람 병사로 구성된 황제 직속의 이교도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각지를 전전했다.
130p
삼왕조 시대의 독일 왕들은 바로 이런 에피고넨들이었다. 그들은 '조상의 가치를 느끼는 자'였기 때문에 위대한 로마제국 황제의 에피고넨으로서 제국을 부흥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꿈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념과 행동이 여과 없이 결합되어 있던 유럽 중세 세계를 헤집고 다녔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황제다운 황제였다.
160p
카를은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칼을 휘두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달았다. 독일로 돌아온 카를은 역대 여러 왕들이 좌절하였고 결국 혁명적인 수단과 격렬한 전쟁을 경험하지 않으면 실현할 수 없는 독일 특유의 문제, 즉 제후 특히 선제후의 힘을 억누르겠다는 패권의 길을 버렸다. 그는 이 길을 버림으로써 평화의 확립이나는 대의를 얻었다. 그의 이러한 선택은 현실을 직시하는 분석 능력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카를은 모험주의를 배제하고 오로지 현실 노선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167p
당시의 귀족은 모두 토지 귀족이었고, 군인 귀족, 법복 귀족, 부르주아 귀족 등이 아직 출현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토지 분쟁이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귀족은 자기의 영지를 죽을 힘을 다해 지켰다. 재판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있으나 마나 했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법적 수단은 무력 충돌이었다. 당연히 치안은 문란해지고 페데의 희생자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물론 희생자는 농민을 비롯한 일반 대중이었다.
183p
왕권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조직, 단체의 강한 힘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 조직은 내부에 수도회처럼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수도사들이 조직한 많은 단체를 거느리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그 단체에 속해야 비로소 교회 상층부로부터 자신들의 개인적인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교회 조직의 단체 개념은 세속에도 영향을 미쳐 신분이나 직업이 같은 동지들이 조합 등의 단체를 만들고 그 단체를 통해서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여기에 과거 게르만 민족정신이 얽혀 왕권과 각 단체가 교섭하는 장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권 특유의 신분제 의회가 생겨났다.
제국 회의에서 왕권에 제한을 가하고 자기들의 특권 확보에 광분했던 제후들도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면 제국 회의의 축소판인 영방 회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신단이 주군에게 쉽게 복종하지 않은 구도가 당시의 영방 국가의 모습이었다.
203p
신성로마제국은 서유럽의 황제로서 이 이교도의 침략을 막을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의 왕'이어야 할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논리로 이교도 슐레이만과 손을 잡았다. 악마를 쓰러뜨리기 위해 사탄과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합스부르크 집안에 대한 증오가 강했다.
211p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에 '독일 국민'이라는 문구를 덧붙이려는 징조는 15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 영역이 독일과 그 주변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의 증거이며 동시에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대한 적대적인 선을 그은 독일 국민감정이 싹트로 있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독일뿐 아니라 이 무렵이 되면 유럽의 나라들은 제각기 국가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다. 당시 국가 기구의 대표자인 왕실은 이 움직임을 잘 파악해서 왕권을 강화하여 절대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다.
독일에서 싹튼 국민감정은 16세기에 들어 종교 개혁과 함께 쑥쑥 자라났다.
234P
독일 30년 전쟁 이후 유럽의 패권은 프랑스가 장악했다. 독일 제후는 무엇보다 전쟁을 사랑한 태양왕 루이 14세의 모험주의적인 확장 정책에 전전긍긍했다. 당시 18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초강대국 프랑스는 마구잡이로 패권주의의 길을 걸었다. 여기에 맞선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두 나라 모두 상업 국가였다. 상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판로 확대를 위해 세력의 균형 상태를 간절하게 원했다. 두 나라는 제국에 금전이라는 강심제 주사를 계속 놓았다. 제국을 프랑스에 대항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245p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7년 전쟁이라는 계속된 전란에서 희생된 사람은 무려 100만 명에 이른다. 두 전쟁의 당사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운이 좋은 전쟁보다 어정쩡한 평화가 훨씬 낫다"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 이후 내정으로 눈을 돌렸다. 물론 이것은 제국의 내정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집안의 세습 영지의 내정이었다. 제국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의지에 휘둘린 전쟁'으로 불에 타 지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52p
애초에 유럽에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카를 대제에 의해 부활한 서로마제국을 마지막으로 세계제국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세의 농업 혁명'으로 유럽은 11세기경부터 경제가 팽창하기 시작했고 사람의 이동과 물자의 유통이 왕성해졌다. 14세기 중세 최대의 불황을 거쳐 15세기 이후 자본주의적 경제가 발흥하여 유럽 각 지역은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윌러스턴이 말하는 '유럽의 세계 경제'의 성립이다.
16세기 합스부르크 집안은 이 유럽의 세계 경제라는 세계 시스템을 '제국'화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17세기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을 채용해서 유럽은 결정적으로 세계 경제 시스템의 길을 선택했다. 이것은 세계 제국 시스템의 포기를 의미한다.
<오류>
100p
하인리히 사자공은 의부인 영국왕 헨리2세에게 몸을 의탁했다.
-> 하인리히 사자공의 부인이 헨리 2세의 딸 마틸다이므로 의부가 아니라 장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