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에서 24시간 살아보기 - 3000년 전 사람들의 일상으로 보는 진짜 이집트 문명 이야기 고대 문명에서 24시간 살아보기
도널드 P. 라이언 지음, 이정민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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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의 주인공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 재발굴에 참여한 미국인 학자의 유쾌한 이집트 시대 이야기다.

미국에서는 전공학자들이 대중 교양서를 수준있게 잘 편찬하는 것 같다.

이 책도 이집트 신왕국 시대상을 이야기 형식으로 흥미롭게 풀어낸다.

고대 이집트인들도 21세기를 사는 현대인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평균수명이 짧고 거의 문맹이라 문화적 혜택을 적게 누리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까, 감정이나 사고방식은 현대인과 전혀 다를게 없다.

고대 이집트의 번영은 나일강이 주는 옥토의 놀라운 생산력 덕분인 것 같다.

워낙 토양이 기름져 씨앗만 뿌리면 신민을 다 먹여 살릴 정도로 충분한 수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역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비로소 문화가 가능한 모양이다.


<인상깊은 구절>

81p

이집트의 사제들은 신의 물리적 조각상 자체를 숭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신들이 형상 안에 실존하고 머문다고 생각했다. 또한 신성한 공간 내에서라면 신들을 직접 응대하고 찬양할 수 있다고 믿었다.

181p

파라오 아멘호테프의 고관인 그는 통치자의 오른팔로서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다. 파라오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지위를 누리는 그는 지위에 걸맞은 호화 생활과 혜택, 그리고 부를 누리며 산다. 하지만 그 대신 끝없는 업무량을 감당해야 한다. 그는 평소에 불평이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궁극의 결정권자 아멘호테프보다 오히려 자신이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273p

고대 이집트 건축물은 대부분 진흙 벽돌로 만들어져 지난 수세기를 거치는 동안 살아남지 못했다. 진흙 벽돌은 시간에 따라 풍화되고 부서지기 때문이다. 특히 나일강이 범람하는 시기에 건축물이 물에 잠기면 완전히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돌로 만들어진 신전과 무덤만이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이것이 이집트에서 신전과 무덤 외에 다른 건축물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다. 따라서 현존하는 건축물만 보고 이집트인들이 종교와 죽음에만 집책했다는 섣부른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275p

이집트인들은 피부색이나 지리적 뿌리를 이유로 외국인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굳이 나서서 차별하지 않아도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어차피 열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284p

왕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이집트인은 일부일처제를 유지했고 근친혼은 흔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한 번에 한 명씩이었고, 친척과의 결혼은 대개 사촌 이상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졌다. 흔히들 남편이 부인을 '누이'로 불렀지만, 애정의 표현이었을 뿐 유전적 현실을 반영하는 호칭은 아니었다. 왕가 내에서는 부와 권력을 한 가문 내에서만 유지할 수 있도록 의붓 형제와 남매간, 그리고 아버지와 딸 사이의 결혼이 이따금 이루어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337p

고대 이집트인들은 출산과 유아기를 무사히 넘길 경우 평균 30~35세까지 살았다. 죽음의 원인은 다양했는데 질병, 작업 중 사고, 혹은 전쟁이 대표적이었다. 현대 의학과 예방 접종으로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여러 감염병과 질병 등 비교적 단순한 병으로도 죽음에 이르곤 했다. 삶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기생충과 안구 질환도 흔했으며, 현재 미라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처럼 암의 종류도 매우 다양했다.


<오류>

120p

이 오벨리스크는 파라오 투트모세 3세가 위탁하여 그의 손자인 투트모세 5세가 테베의 카르나크 신전에 건축한 것이다.

-> 투트모세 3세의 손자는 투트모세 4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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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화유적답사기 - 하남성.하북성.서안.강소성.절강성 문화유적 심층 답사기
김종원 지음 / 여행마인드(TBJ여행정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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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독특한 컨셉 같다.

본격적인 여행서는 아닌데 그렇다고 인문학적 컨셉도 아니고, 800 페이지 남짓되는 엄청난 분량의 매우 꼼꼼한 답사기다.

분량이 많아 걱정했는데 사진이 워낙 많고 쉽게 서술되어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의 특장점은 깜짝 놀랄 정도로 뛰어난 사진들이다.

저자가 직접 찍은 것 같은데 프로 사진 작가 수준이다.

사진의 양도 엄청나게 많아서 글로 설명하는 답사기라기 보다는 눈으로 즐기는 여행기 같아 너무 좋았다.

3만원이라는 책값이 전혀 비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중국 각 지역의 자연 풍경과 유적 사진들이 많이 실려 있다.

대부분의 책들이 도판 수준이 실망스러운데 어쩌면 이렇게 선명하게 잘 인쇄를 했는지 참 신기하다.

다만 붉은 색이나 파란색 색감은 좀 과하게 밝게 나와 간혹 촌스러운 관광 엽서 사진 같은 컷도 몇 개 있긴 했다.

중국 역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유적지 곳곳이 다 흥미로웠다.

가 본 곳이라고는 북경 밖에 없지만 만리장성에 갔을 때의 감동이 잊혀지지 않는다.

자금성은 오히려 생각보다 별 감흥이 없었고, 만리장성은 이 높은 산 위에 이렇게도 엄청난 성벽을 건설해서 이민족의 침입을 막았다는 게 정말 놀라웠다.

책을 읽으면서 가 보고 싶은 곳을 꼽아 봤다.

1. 칭더의 피서산장.

청나라가 최고의 국력을 자랑할 때에 건립된 곳이라 그런지 건축물들이 정말 웅장하고 화려하다.

18세기 조선 선비 박지원이 이 곳에 와서 보고 느꼈을 문화적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2. 청동릉, 청서릉, 명 13릉 같은 황제의 무덤들.

중국 황제들은 정말 스케일이 크다.

땅덩어리가 넓고 부릴 수 있는 인력이 많아서 그런가, 진시황릉만 대단한 줄 알았더니 명나라와 청나라의 왕릉들도 정말 규모가 엄청나다.

크기가 주는 압도감이 있는 것 같다.

3. 소주나 항주의 원림들.

이번에 프랑스 가서도 잘 가꿔진 정원들을 보면서 정말 감탄했다.

인간이 자연을 아름답게 조경하는 정원 문화는 자연과 어울어져 눈이 즐겁다.

동양의 정원, 특히 개인 정원들은 어떤 개성을 지녔는지 가 보고 싶다.

소주는 운하의 도시라 더욱 풍경이 수려할 것 같다.

4. 시안의 병마용과 성벽, 당나라 유적지들

진시황이 묻혀 있는 지하궁전은 아직 발굴이 안 되었고 그 옆의 병마용 세 개가 발굴되어 전시되고 있다.

무려 6천 개의 토용이 묻혀 있다니 정말 놀랍다.

작은 토용들도 아니고 180cm 에 달하는 실제 등신상이라니 과연 중국 대륙을 통일한 시황제답다.

그 외 중국의 탑들도 석탑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나무나 전탑들이 많아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고 직접 올라가 볼 수 있다니 꼭 관람해 보고 싶다.

당나라 때 만들어진 성벽도 가보고 싶다.

또 중국은 유적지에서 화려한 공연이 펼쳐지는 게 신기하다.

장이머우 감독의 인상 시리즈 외에도 다채로운 공연들이 많아 관람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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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가 낳은 천재들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29
이나미 리쓰코 지음, 이동철.박은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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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5천년 중국 역사에 남을 천재들은 과연 누구일까?

영웅 호걸 보다는 문인들에 중점을 둔 책이다.

흔히 알고 있는 이백이나 백거이 같은 유명인 외에도 처음 들어보는 다양한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300 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에 56인이나 인물평을 하다 보니 주마간산 식인 경우도 있지만, 인물의 생을 한 문장으로 잘 짚어낸 경우도 많아 흥미롭게 읽었다

책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류 시인들 이야기도 흥미롭다.

우리나라로 치면 허난설헌 정도의 인물들이다.



<인상깊은 구절>

10p

비록 현실 정치에서 큰 뜻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공자는 결코 무기력한 지식인이 아니었다. 키가 9척 6촌에 달하는 위풍당당한 대장부로서, 거인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강인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로 장기간에 걸친 방랑 생활을 꿋꿋하게 이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39p

사람들이 "종사관 나리와 의논해봐야 한다"고 하자, 반초가 화를 내며 말했다. "잘되고 못되고는 바로 오늘 결판난다. 종사관은 머리가 굳은 문관 나리이니 이 얘기를 들으면 필시 두려워하여 계획을 누설하고 말 것이다. 죽으면서도 아무런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은 과연 대범하고 두려움이 없다)

58p

틈만 나면 부지런히 소박한 학문 작업에 매달렸던 두예는 청담이 유행하고 재치 있는 재사들이 환영받던 화려한 귀족사회 서진의 이단아였다. 그래서 어쩌다 그가 모임에 모습을 드러내면 좌중의 분위기가 썰렁해지곤 했다는 일화도 전하는데, 정말 그랬을 법한 이야기다.

64p

시대의 거친 파도를 순조롭게 넘어갔던 숙부들과는 달리, 태생적으로 귀족이었던 왕희지는 때때로 권모술수도 동원할 줄 알아야 하는 중앙 관리 생활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66p

동진 중기는 비교적 평온하고 안정된 시대여서, 정권을 지탱하던 귀족들 사이에 사교 모임이 번성했고, 그들의 미의식 또한 점점 더 세련되어졌다. 이런 가운데 서화가 예술 장르로 확립되어 서예의 왕희지와 회화의 고개지를 필두로 많은 예술가들이 배출되었다. 강남의 망명 왕조 아래서 화려한 예술이 꽃을 피우다니, 역사는 참으로 모순적인 것이다.

71p

'서성' 왕희지는 명문 귀족 출신이어서 서예를 취미로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든든한 배경이 없던 고개지는 자신을 후원해줄 유력자를 끊임없이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84p

학식이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안심할 수 있다. 난리(후경의 난)가 일어난 이래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다. 비록 백 년 동안 조상 대대로 신분이 비천했다 하더라도 <논어>와 <효경>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하다못해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도 되었다. 반면 천 년 넘게 조상 대대로 귀족이었다 하더라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전부 밭 갈고 말 먹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런 예를 볼 때, 어찌 학문을 열심히 갈고 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항상 책 수 백 권을 보유할 수 있다면, 천 년이 지나도 결코 낮은 신분으로 전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안씨가훈>

(과연 학자 집안의 가훈답다)

88p

측천무후에게는 사람을 압도하는 면이 있어서, 원래부터 백성들에게도 무척 인기가 좋았다. 그녀는 합리적이고 유능한 대정치가임과 동시에 극단적인 신비주의자이기도 했다. 위대한 여인이었지만 어쩐지 음침하기도 했던, 복합적인 요소를 두루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합리와 비합리가 뒤섞인 복합성은 그녀의 이미지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시아버지의 후궁으로 시작해 중국 5천 년 유일무이의 여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과연 남다른 카리스마와 매력과 지략을 가졌을 것 같다)

90p

당나라 때는 과거제도가 채 정비되지 않아 상인 계층은 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백은 넘치는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정식 관문을 거쳐서는 관직에 오를 수가 없었다. 이것이 이백의 생애를 좌우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92p

그러나 자유분방한 이백에게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궁정 문인의 역할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노령에 접어든 현종은 양귀비와 환락에 빠져 있었고, 그 측근들은 온통 비열한 소인배뿐이었다. 이에 완전히 실망한 이백은 출세를 향한 그 간절했던 소망도 잊고, 엉망으로 술에 취해 현종이 총애하는 환관 고력사에게 자기 신발을 벗기게 하는 등 방약무인한 광태를 거듭했다.

98p

당시 한미한 집안의 수재들이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등용문인 과거에 반드시 합격해야만 했다. 그에 따라 백거이도 과거 공부에 힘을 기울였다. 

(당나라에도 나름 계층 사다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107p

겁을 먹은 황제는 그만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 여전히 재상의 지위에 있던 풍도는 도망친 황제와 진퇴를 같이하는 대신 이종가에게 '권진문', 곧 황제 자리에 오르기를 권하는 문장을 지어 바쳤다. 그러면서 반대하는 동료들을 향해 "일이란 모름지기 현실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위대한 현실주의자의 면모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후 풍도는 이와 유사한 상황에 종종 맞닥뜨릴 때마다 자신의 발언대로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차례차례 교체되는 왕조에서도 항상 행정의 달인으로 중용되어 정치의 중추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풍도의 이러한 삶을 절조 없고 파렴치하다며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때는 군사력을 거머쥔 자가 차례로 주도권을 장악하던 난세였다. 그 와중에 행정을 담당하는 문관에 불과했던 풍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현하는 권력자에게 일일이 충성하고 의리를 지켰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116p

이러한 금전적인 도움이 임포의 은둔생활을 지탱해주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정작 임포 자신은 아무리 도움을 받아도 고맙다는 인사라든가 부담스러워하는 내색 따위는 전혀 하지 않고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 배포 한 번 크다고 할 수 있겠다.

128p

휘종은 예술가로서는 흠잡을 데 없는 초일류였다 .요컨대 정치에는 몽매했던 예술가 휘종이 황제로 즉위한 일은 본인에게도, 북송이라는 시대에도 커다란 불행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159p

이탁오는 유교의 경전으로 손꼽히는 <논어>와 <맹자>에 대해서는 "영원한 진리 따위는 없다. 이것들을 절대시하는 자는 말라비틀어진 인간뿐이다"라는 등 가차 없이 혹평을 날렸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저서 <장서>에서, 한 시대에는 그 나름의 기준이 있으므로 역사상의 인물을 고정된 유교적 기준에 의해 일률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사문난적으로 사형당했을 것 같다)

174p

일설에 따르면 장대는 강희 28년 93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의 지배 아래서 반세기 가까이를 명나라 '頑民(완강한 유민)'으로 살았다는 말이 된다. 실로 가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망한 나라를 추종하면서 살았으니 긴 삶이 오히려 불행이었을 것 같다)

120p

김농과 정판교를 필두로 한 '팔괴'는 명나라 중기 소주에서 활약한 '오중사제'의 명맥을 계승하여, 청나라 중엽 양주를 거점으로 자립형 서예가, 화가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렇게 명에서 청으로 왕조는 교체되었지만, 그것을 초월하여 비록 소수일지라도 사대부 지식인 안에서 자유를 추구하며 자립 생활을 지향한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출현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234p

그중 압도적인 양을 차지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잡문집이다. 이 엄청난 양의 잡문 속에는 고전학자나 소설가로 대성하는 길을 버리고 논쟁의 장에 몸을 던져 전환기를 살아간 루쉰의 흔적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주인일 때 타인을 전부 종 취급하는 사람은, 주인을 모시게 되면 반드시 스스로도 종으로 처신한다. 이는 만고 불변의 진리로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오류>

36p

흉노가 부쩍 세력을 키워 후한 제12대 황제인 명제 무렵에는

-> 명제는 후한 12대가 아니라 2대 황제이다.

139p

오고타이의 아들 쿠빌라이 시대에는

-> 오고타이는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이고, 그 아들은 구육이다.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의 4남 훌라구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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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시황제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13
쓰루마 가즈유키 지음, 김경호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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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판의 가벼운 책인 줄 알았는데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이다.

일본에서는 수준높은 교양서들이 정말 많이 출간되는 것 같다.

특히 중국사의 분석 수준이 탁월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고 분서갱유를 일으킨 희대의 폭군, 좋게 말하면 정복 군주의 느낌이 강한 진시황의 인간적인 측면을 분석한 책이다.

인간적인 면이라고 해서 사서 몇 줄 가지고 맘대로 이랬을 것이다, 상상하는 수준낮은 아마추어식 분석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김종성 씨가 떠오른다)

저자는 사마천의 사기라는 보편적인 문헌 자료 외에, 최근에 발굴된 죽간 같은 출토 자료를 근거로 인간 시황제를 묘사한다.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온 영자초가 여불위의 소개로 조희를 만나 12개월 만에 진시황을 낳았으므로 저자는 여불위 소생 설을 일축한다.

좀 의아했던 점은 진시황이 영씨가 아니라 조씨로 기록한 책도 있는 것이다.

무덤이나 옛 우물 등에서 발굴된 출토자료 중 <사기> 보다 먼저 편찬된 <조정서>라는 책이 있다.

진시황의 이름은 영정으로 알려졌는데, 이 책에서는 진나라 왕족이 趙 성에 봉해졌다고 해서 조정이라고 칭한다.

이 책에서 처음 접한 내용이라 조나라 출신도 아닌데 왜 조정인지 의아하다.

또 한 가지 의문은, 장평 전투에서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무려 45만 명을 생매장 했다는데, 현실적으로 이 숫자가 가능할까?

당시 수도의 인구도 45만 명이 될까 말까 할 것 같은데 지나치게 과장된 숫자는 아닌지 궁금하다.

진시황의 할아버지 효문왕은 즉위 후 3일 만에 사망한다.

저자는 죽간 등을 통해 당시는 10월부터 새해가 시작됐고, 효문왕이 즉위한 시점은 윤 9월이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즉위 3일 만에 사망이라니, 심장마비로 급사한 걸까?

만력제의 아들인 태창제가 즉위 한 달 만에 사망하긴 했지만 3일은 정말 심하다.

치우를 산동성 제나라의 전쟁신으로 보는 시각도 독특했다

보통 치우라고 하면 동이족, 곧 한민족과 관련있다고 믿고, 붉은 악마가 바로 치우를 뜻한다고 대중매체에 알려졌는데 중국에서 보는 동방이 한반도라기 보다는, 산둥 반도와 발해만을 얘기하는 모양이다.

불로초를 찾아주겠다는 서복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갔고 진씨, 곧 하타씨의 시조가 됐다는 것도 일본에서 전해지는 전설인 모양이다.

하타씨라고 하면 신라인의 후예라고 알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그 기원을 진나라로 보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어떤 책에서, 삼한의 진이 바로 시황제 통일 전후의 혼란기 때 한반도로 내려와 정착한 유이민이라는 가설을 읽은 적도 있다.

고대를 현재의 국경 혹은 민족주의 시각에서 봐서는 안 되는 게 분명하다.



<인상깊은 구절>

10p

<사기>에는 시황제가 죽은 직후 사구에서 호해, 조고, 이사 세 사람이 음모한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적혀 있다. 장남 부소에게 후계를 맡긴 시황제의 유조가 이곳에서 파기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정서>에는 시황제하에서 호해를 정통적인 후계자로 하는 회의가 열려, 시황제도 이에 동의했다고 한다. <사기>와 차이가 명확하다.

(호해 치하에서 진나라가 계속 통일국가를 유지했다면 사기의 전승이 야사가 됐을 것 같다)

72p

어쨌든 노애보다도 진왕이 먼저 움직인 것은 성인이 된 진왕이 노애보다 더 영리했다고 할 수 있다. 진나라의 위기를 느껴 기민하게 행동한 것이다.

(먼저 거사를 일으켜 정도전 일파를 친 후 그들이 나를 공격해서 방어했다는 논리를 편 태종이 생각난다. 승자들은 항상 상황판단이 빠르다)

76p

모초는 진왕의 행위는 제후에게 신뢰받지 못하므로 진에 반기를 드는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어머니에 대한 진왕의 불효가 뒤에서 비난받았을 것이다. 

 진왕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불효에 대해서는 민감했다. 진시대에서도 가문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효가 요구되었다.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진왕 자신에게 이런 불효의 규율이 적용되지는 않지만 불효로 인해 제후와 민중의 신뢰를 잃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태종이 함흥에 가 있는 아버지를 모셔 오기 위해 애를 썼던 것도 단순히 개인적인 효심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106p

자영이 유방에게 항복하여 왕을 퇴위한 시점에서 진나라는 멸망하였고 왕의 생사는 국가의 멸망과는 관계가 없었다. 전국시대 국가를 나타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직이었으며 왕이 제사지내는 토지의 신과 곡물의 신을 없애는 것이 국가의 멸망을 의미했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멸망했을 때도 여전히 왕은 천수를 누린 것을 보면 과연 그런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인 견훤의 행동은 당시 사람들에게 잔악무도하게 비춰졌을 것 같다)

114p

중앙으로부터 전파된 통일선언만으로 지방이 바로 다스려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더욱 시황제가 친히 지방으로 가는 순행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신문 방송 매체가 있지만, 현재 기준으로도 엄청나게 넓은 땅덩어리를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의 업적을 전국에 알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왜 진시황이 교통도 불편한 시대에 통일 후 죽을 때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행했는지 그 까닭이 비로소 이해된다)

144p

어떻게든 동방 땅으로 들어가서 전쟁이 아니라 제사를 통하여 통일사업을 침투시키려는 진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중앙에서 통일을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완전하게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진제국의 영역은 광대했다. 시황제 스스로가 몇 번에 걸쳐 지방을 순행했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147p

통일전쟁에서 진군은 스스로 정의의 병사로 칭하고 괴팍하고 잔인한 왕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겠다며 육국을 멸하고 천하를 군현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는 군현화한 제국을 바깥에 있는 만이로부터 지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고대에서도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념은 필요했다. 시황제는 동쪽 바다에 정착하여 육국이라는 적을 잃은 지금, 남북을 향하여 만이라고 하는 새로운 적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만이를 멸하고 복속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시황제는 진제국의 주변에 만이를 두어 중화와 만이의 세계를 대치시킨 제국을 쌓아올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만이의 세계에 위신을 보여야만 중화인 것으로 시황제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시황제는 한 세기 전의 알렉산더와 같은 무한한 정복욕을 가진 캐릭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156p

담기양씨의 <중국역사지도집>에서는 만리장성이 평양 서쪽 해안에서 끝나는데 이것이 실제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진이 요동반도에 집착했던 이유는 연과 흉노와 조선이 교착하는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삼자의 연계를 끊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 위해서라도 장성의 동단을 바다에 둬서 발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필요가 이었다.

(한국 사람 입장에서는 만리장성을 평양까지 연결하는 행위는 동북공정의 대표적인 역사왜곡일 듯한데, 외국 학자들은 이렇게도 생각하는 모양이다. 고조선은 한 무제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독립된 왕국이었으니 진시황 때 만리장성이 한반도까지 왔다는 것은 무리한 추측 아닐까?)

162p

흉노와 백월과의 전쟁은 남북 모두 무모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시황제는 중화 바깥과의 전쟁을 통해 진과 옛 육국 지역에 일체감을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 통일 후 조선을 침략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 같다. 내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외부의 적이 필요한 셈이다)

164p

하천을 따라 진나라 사람들이 거주하는 현과 성을 벗어나면 산악지대에는 월인들의 세계가 펼쳐졌다. 진의 지배는 이 지역에서 점과 같은 지배에 지나지 않으며 점과 점은 하천을 따라 생긴 교통로로 겨우 연결돼 있었다.

167p

원래 진의 백월 지배와 그 이후의 남월 독립은 진에서 남하한 동일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시황제 사후, 2세 황제 때에 멀리 중원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이 멸망했기 때문에 남월을 건국하여 조타는 무왕(자국 내에서는 무제로 자칭)이 되었다. 조타 주변의 지배자는 원래는 진에 정복당한 옛 육국지역 사람으로, 월인들을 기반으로 하여 그들이 정복왕조를 세웠다. 

(위만이 연나라에서 고조선으로 넘어와 위만 조선을 세우고 현지화 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일까?)

171p

이런 말 등은 법치주의라기보다는 신분의 귀천과 남녀 분업을 지켜야 한다는 예치주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황제는 법치만으로는 통치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75p

시황제는 이러한 이사의 분서령 제안에 동의했다. 80만 명이나 되는 인원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치루고 있는 전쟁, 겉으로는 만이를 내쫓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부담은 컸다. 이사는 전쟁을 비판하는 언론을 억압하였다.

 공자의 학문 그 자체를 탄압했던 것이 아니라 전시체제하의 인민들을 불안하게 했던 점이 법에 저촉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잔인한 행위가 있었던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일반에게 유포된 '분서갱유'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르다.

(신분 차별과 충성, 효 등을 내세운 유교가 통치에 적합하다는 것을 시황제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저자의 분석대로 분서갱유는 전시체제 하의 불만 여론을 잠재우려는 상징적인 행위였을 것 같다)

184p

시황제는 우주의 움직임을 거스르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중화제국 주변의 정치 상황을 확인하기로 했을 것이다. 황제든 서민이든 고대 사람들에게 천문은 일상생활과 결부돼 있었다. 

(마치 유럽의 중세인들이 기독교의 교리가 곧 일상 생활의 축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198p

시황제는 본인의 죽음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품은 채 주변에 대해서는 순행을 통하여 중화제국 제왕으로서의 위신을 지속적으로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면 마지막 순행 전 후계자 문제를 정리해 놨더라면 진 제국이 15년 만에 허망하게 멸망하지는 않았으려나? 표트르 대제도 갑자기 요석 때문에 요도가 막혀 1주일 간 패혈증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을 걸 보면, 전근대 사회에서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오긴 했다)

200p

승상 이사와 어사대부인 풍거질은 먼 거리를 순행하는 가운데 신하들에게 詔 를 내리면 대신들의 음모를 야기할 수도 있음을 염려하여 호해를 비밀리에 후계자로 택하도록 제안했다. 진왕 자신의 재가가 있고 나서 진왕은 죽고 호해가 즉위했다. 이 고사에는 장자인 부소는 등장하지 않고 시황제 자신이 호해를 정식으로 후계자로서 인정한 것이다.

 <조정서>가 무제 만년에 편찬된 <사기>보다도 이른 무제 전기의 책이라면 사마천도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다만 사마천은 '호해 후계의 고사'를 다루지 않고, '부소 후계의 고사'를 택한 것이다. 시황제와 관련된 고사는 수없이 전해지고 있어 사마천도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궁궐 내에서도 아니고 순행 중 시황제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고 새 황제가 등극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도 후계 계승의 정확한 내막을 몰랐을 것 같다. 오직 이사와 조고 몇 사람만이 진실을 알고 무덤 속으로 가 버렸을 것이다)

223p

공자는 사람을 닮은 俑 을 묻는 일이 참기 어려웠다고 한다. 여기에는 살아 있는 인간의 순사를 대신해서 진흙으로 만든 인형을 만들었다는 <일본서기>에 보이는 발상은 없다. 등신대도 살아 있는 인간을 충실하게 잘 모방해서 만든 진의 병마용을 만약 공자가 보았다면 심히 슬퍼했을 것이다. 사람의 혼을 옮긴 것 같은 리얼한 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유가 사상이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제사 지낼 때 영정이나 소상 대신 신주를 모시나 보다. 서구와 달리 조각이 발전하지 못한 까닭도 사람의 형상을 꺼리는 유교 전통 때문일까?)

230p

2세 황제의 짧은 3년간 재위기간 중에 조고는 궁중에서 황제의 명령을 공포하고 이윽고 승상 이사를 대신해서 승상에 올라 안팎의 권력을 맘대로 휘둘렀다. 시황제 시대를 총괄하여 신화화하고 시황제의 지하제국을 정비한 것도 조고의 힘에 의한 바가 크다. 노애와 함께 악역 이미지가 강하지만 악역이라고 하면 할수록 조고라는 인간의 실상을 들추어내고 싶어진다. 

(시황제 사후 겨우 3년 만에 제국이 와해됐으니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도 엄청난 무덤을 건설한 조고의 노력이 대단하긴 하다)

236p

조고가 이사를 배척하고자 해도 자의적으로는 실행할 수 없어 일정한 재판 수속을 밟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는 진의 법치주의가 철저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고대에도 마음에 안 든다고 권력자가 갑자기 죽여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문을 해서라도 죄를 인정하고 자백을 받아내는 끔찍한 절차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247p

패공 유방도 상장군 항우도 황제의 지위를 바라지 않고 우선은 진나라 땅인 관중의 왕이 되기를 바랐다. 동방 땅은 이미 전국의 나라들이 다시 일어났기 때문에 두 사람은 진을 대신해서 관중의 왕이 될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력에서 우세했던 항우도 결국 관중의 왕은 되지 않았다. 항우 입장에서 보자면 시황제가 만든 제국 따위는 허구로밖에 비춰지지 않았을 것이다. 

 시황제릉을 파헤친 일에 대해서는 함양이 3개월간이나 불탔다는 고사에 이끌려 후대에 과장되었던 것으로 실제로 항우가 지하궁전까지 파헤쳤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지하궁전이 천천히 계속 불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리모트 센싱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하 공간은 확실히 남아 있다.

(항우가 전부 도굴했다면 오늘날까지 그 엄청난 규모의 병마용과 무덤이 전해질 리가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왜 여전히 전부 발굴하지 않는지 참 궁금하다)

252p

매일 정해진 업무의 수행과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유능한 전제군주인 시황제, 분서갱유나 만리장성의 건설 등으로 인한 폭군의 대표적 인물인 시황제. 그런 시황제의 이미지와는 달리 본서에서는 동방 육국을 통일하여 하나의 중국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낯선 동방의 해양 문화를 접촉하면서 당혹스러워하는 황제가 아닌 '나약한' 인간 시황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293p

사후의 시호 제도를 폐지하고 2세 황제, 3세 황제라고 하는 칭호를 사전에 결정해둔다. 황제가 되면 동시에 사후를 생각하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군이 신하에게 평가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314p

2세 황제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서는 효행뿐만이 아니라 신하로서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행동이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은 것이므로 사죄를 받을 것인지 순사하여 효와 신을 다할 것인지를 공자와 공주들은 추궁당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반역한다는 의심을 받아 아사당한 사도세자의 경우도, 영조는 부자관계라는 사적인 情 보다 신하로서의 忠 을 먼저 내세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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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왕실여성 인물사전 한국학 주제사전
김창겸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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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여성 인물사전이라는 형식이 독특해 읽게 됐다.

사전 특성상 지루한 인물 나열일까 봐 걱정했는데 관심이 워낙 많아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라 정리하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다.

워낙 역사서에 등장하는 왕실 여성들이 적기 때문에 무려 단군의 어머니 웅녀부터 덕혜옹주까지 내려갔는데도 400 페이지가 안 된다.

왕조별로 나누고, 그 안에서는 가나다 순이라 시대적 흐름이 약간 뒤섞인 것은 보기 불편했다.

사전이라는 특성상 찾아보기 쉽게 하려고 그런 것 같긴 하다.

삼국시대는 익히 알려진 이야기들이라 정리하면서 읽었고 고려 시대의 복잡한 족내혼 때문에 약간 힘들었다.

삼국시대와 고려까지는 왕실에서 족내혼이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조선 역시 왕비는 사대부가에서 들였지만 사돈끼리 혼인하는 겹사돈이 매우 활발했다.

왕가의 자식들이 혼인할 수 있을 정도의 위상을 가진 명문가가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려시대까지는 그마저도 혈통 보전을 위해 같은 왕실 내에서만 이루어지다 보니 사촌이나 이복남매끼리 혼인은 물론이고, 이모나 조카와의 결혼도 흔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왕실 여인들의 출산율이 매우 높아 후궁 뿐 아니라 왕비들도 10여 명의 자식을 낳았다.

확실히 유교적 교조주의가 강화되면서 금욕할 날들이 많아져 왕실이 후계자 부족으로 시달리지 않았나 싶다.

조선시대 후궁들의 집안이 간략히 나왔는데 의외로 간택 후궁이 많고 승은 후궁은 몇 안 되는 것 같다.

중전 자리에 오른 장희빈만 하더라도 궁인임에도 중인 역관 집안이었다.

이 책에서는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무수리가 아닌, 침방 나인으로 나온다.

쟁쟁한 왕가 사람들 속에서 영조가 느꼈을 출신 컴플렉스가 얼마나 컸을지 새삼 느껴진다.

사료가 많지 않다는 게 너무 아쉽다.

이 많은 왕실 여성들 중 자신의 문집을 낸 사람은 오직 혜경궁 홍씨 한 사람이라는 것도 새삼 대단하다.

<한중록> 같은 개인적 자료가 많이 나올 수 있는 문화였다면 역사는 얼마나 풍부해졌을까!



<인상깊은 구절>

319p

정순왕후를 간택한 이유는 학문적으로도 명망이 있고, 영조의 첫째 사위 월성위 김한신을 배출한 만큼 가문의 위상도 있었던 데 비해 정치적으로는 한미하였기 때문이다. 영조는 자녀들을 당대 최고의 가문 자제들과 혼인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외척들이 존재하였다. 초기에는 외척들과 협조하여 탕평을 추진하였지만, 강력한 외척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49p

효의왕후는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문안을 받는 차서를 혜경궁보다 먼저 받게 하자 이를 환수하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혜경궁 홍씨를 지극히 모셨다. 또한, 우애가 극진하여 화완옹주가 그를 괴롭혀도 개의치 않았고, 특히 시누이 청연군주, 청선군주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점잖은 정조와 아주 잘 어울리는 부덕있는 배필이었던 것 같은데, 자식을 못 낳아 안타깝다. 시어머니 혜경궁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특한 며느리였을까 싶다)


<오류>

54p

마야부인은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혼인한 천명부인과 자매이다.

-> 마야부인은 진평왕의 부인으로, 선덕여왕과 천명부인의 어머니이다.

57p

원성왕-인겸-충공-문목부인과 원성왕-예영-헌정-희강왕으로 이어지는 원성왕 후손(8촌)간의 근친혼으로 맺어졌다.

-> 문목부인과 희강왕은 8촌이 아니라 6촌이다.

89p

조생부인의 남편은 <삼국유사>에는 눌지마립간의 동생 기보갈문왕으로, <삼국사기>에는 나물왕의 증손 습보갈문왕으로 되어 있다.

-> <삼국사기>에 따르면 습보는 나물왕의 손자이다.

206p

창왕이 즉위한 뒤 "사헌에서 혜비, 신비, 정비(正妃), 현비의 4妃 들이 모두 본처가 아니니 충혜왕 때 경비의 전례에 의하여 공상을 중지하고 세록을 지급할 것을 청하였다."

-> 正妃 는 우왕의 6비인 정비 신씨로, 우왕 폐위 후 곧 쫓겨났고, 위 기사의 정비는 공민왕의 비 이씨로 한자가 定妃이다.

239p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인인 민부대부인의 친족으로 명성황후가 종질녀의 항렬이 된다.

-> 명성황후와 부대부인은 질녀가 아니라 12촌 자매 사이로, 같은 항렬이다.

1884년 급진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발생하여 민치호가 죽음을 당하였다.

-> 갑신정변 때 죽은 사람은 순명효황후의 아버지 민태호이다.

276p

1885년(고종 22) 을미사변이 발생하였을 때

-> 을미사변은 1895년에 발생했고 고종 32년이다.

294p

의인왕후의 아버지는 번성부원군 박응순이며

-> 반성부원군이다.

302p

인성왕후는 1577년 11월 66세로 승하하였다.

-> 1514년생이므로 66세가 아니라 64세에 승하하였다.

309p

장렬왕후는 1688년 64세로 창경궁 내반원에서 사망하였다.

-> 장렬왕후는 1624년생이므로 65세로 사망하였다.

328p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는 정희왕후의 오빠 윤사분의 증손녀이고

-> 장경왕후는 오빠 윤사윤의 증손녀이다.

331p

안동김문에서는 19세기에서만 3명의 왕비를 배출하게 되었는데 모두 김성행의 후손들이었다.

-> 김성행의 후손은 철인왕후이고, 순원왕후는 김달행, 효현왕후는 김탄행의 후손이다.

364p

가계도에서 조생부인이 자비마립간의 딸로 나왔는데, 눌지마립간의 딸이고 자비마립간의 누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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