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가 낳은 천재들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29
이나미 리쓰코 지음, 이동철.박은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5천년 중국 역사에 남을 천재들은 과연 누구일까?

영웅 호걸 보다는 문인들에 중점을 둔 책이다.

흔히 알고 있는 이백이나 백거이 같은 유명인 외에도 처음 들어보는 다양한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300 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에 56인이나 인물평을 하다 보니 주마간산 식인 경우도 있지만, 인물의 생을 한 문장으로 잘 짚어낸 경우도 많아 흥미롭게 읽었다

책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류 시인들 이야기도 흥미롭다.

우리나라로 치면 허난설헌 정도의 인물들이다.



<인상깊은 구절>

10p

비록 현실 정치에서 큰 뜻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공자는 결코 무기력한 지식인이 아니었다. 키가 9척 6촌에 달하는 위풍당당한 대장부로서, 거인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강인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로 장기간에 걸친 방랑 생활을 꿋꿋하게 이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39p

사람들이 "종사관 나리와 의논해봐야 한다"고 하자, 반초가 화를 내며 말했다. "잘되고 못되고는 바로 오늘 결판난다. 종사관은 머리가 굳은 문관 나리이니 이 얘기를 들으면 필시 두려워하여 계획을 누설하고 말 것이다. 죽으면서도 아무런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은 과연 대범하고 두려움이 없다)

58p

틈만 나면 부지런히 소박한 학문 작업에 매달렸던 두예는 청담이 유행하고 재치 있는 재사들이 환영받던 화려한 귀족사회 서진의 이단아였다. 그래서 어쩌다 그가 모임에 모습을 드러내면 좌중의 분위기가 썰렁해지곤 했다는 일화도 전하는데, 정말 그랬을 법한 이야기다.

64p

시대의 거친 파도를 순조롭게 넘어갔던 숙부들과는 달리, 태생적으로 귀족이었던 왕희지는 때때로 권모술수도 동원할 줄 알아야 하는 중앙 관리 생활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66p

동진 중기는 비교적 평온하고 안정된 시대여서, 정권을 지탱하던 귀족들 사이에 사교 모임이 번성했고, 그들의 미의식 또한 점점 더 세련되어졌다. 이런 가운데 서화가 예술 장르로 확립되어 서예의 왕희지와 회화의 고개지를 필두로 많은 예술가들이 배출되었다. 강남의 망명 왕조 아래서 화려한 예술이 꽃을 피우다니, 역사는 참으로 모순적인 것이다.

71p

'서성' 왕희지는 명문 귀족 출신이어서 서예를 취미로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든든한 배경이 없던 고개지는 자신을 후원해줄 유력자를 끊임없이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84p

학식이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안심할 수 있다. 난리(후경의 난)가 일어난 이래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다. 비록 백 년 동안 조상 대대로 신분이 비천했다 하더라도 <논어>와 <효경>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하다못해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도 되었다. 반면 천 년 넘게 조상 대대로 귀족이었다 하더라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전부 밭 갈고 말 먹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런 예를 볼 때, 어찌 학문을 열심히 갈고 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항상 책 수 백 권을 보유할 수 있다면, 천 년이 지나도 결코 낮은 신분으로 전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안씨가훈>

(과연 학자 집안의 가훈답다)

88p

측천무후에게는 사람을 압도하는 면이 있어서, 원래부터 백성들에게도 무척 인기가 좋았다. 그녀는 합리적이고 유능한 대정치가임과 동시에 극단적인 신비주의자이기도 했다. 위대한 여인이었지만 어쩐지 음침하기도 했던, 복합적인 요소를 두루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합리와 비합리가 뒤섞인 복합성은 그녀의 이미지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시아버지의 후궁으로 시작해 중국 5천 년 유일무이의 여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과연 남다른 카리스마와 매력과 지략을 가졌을 것 같다)

90p

당나라 때는 과거제도가 채 정비되지 않아 상인 계층은 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백은 넘치는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정식 관문을 거쳐서는 관직에 오를 수가 없었다. 이것이 이백의 생애를 좌우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92p

그러나 자유분방한 이백에게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궁정 문인의 역할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노령에 접어든 현종은 양귀비와 환락에 빠져 있었고, 그 측근들은 온통 비열한 소인배뿐이었다. 이에 완전히 실망한 이백은 출세를 향한 그 간절했던 소망도 잊고, 엉망으로 술에 취해 현종이 총애하는 환관 고력사에게 자기 신발을 벗기게 하는 등 방약무인한 광태를 거듭했다.

98p

당시 한미한 집안의 수재들이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등용문인 과거에 반드시 합격해야만 했다. 그에 따라 백거이도 과거 공부에 힘을 기울였다. 

(당나라에도 나름 계층 사다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107p

겁을 먹은 황제는 그만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 여전히 재상의 지위에 있던 풍도는 도망친 황제와 진퇴를 같이하는 대신 이종가에게 '권진문', 곧 황제 자리에 오르기를 권하는 문장을 지어 바쳤다. 그러면서 반대하는 동료들을 향해 "일이란 모름지기 현실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위대한 현실주의자의 면모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후 풍도는 이와 유사한 상황에 종종 맞닥뜨릴 때마다 자신의 발언대로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차례차례 교체되는 왕조에서도 항상 행정의 달인으로 중용되어 정치의 중추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풍도의 이러한 삶을 절조 없고 파렴치하다며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때는 군사력을 거머쥔 자가 차례로 주도권을 장악하던 난세였다. 그 와중에 행정을 담당하는 문관에 불과했던 풍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현하는 권력자에게 일일이 충성하고 의리를 지켰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116p

이러한 금전적인 도움이 임포의 은둔생활을 지탱해주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정작 임포 자신은 아무리 도움을 받아도 고맙다는 인사라든가 부담스러워하는 내색 따위는 전혀 하지 않고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 배포 한 번 크다고 할 수 있겠다.

128p

휘종은 예술가로서는 흠잡을 데 없는 초일류였다 .요컨대 정치에는 몽매했던 예술가 휘종이 황제로 즉위한 일은 본인에게도, 북송이라는 시대에도 커다란 불행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159p

이탁오는 유교의 경전으로 손꼽히는 <논어>와 <맹자>에 대해서는 "영원한 진리 따위는 없다. 이것들을 절대시하는 자는 말라비틀어진 인간뿐이다"라는 등 가차 없이 혹평을 날렸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저서 <장서>에서, 한 시대에는 그 나름의 기준이 있으므로 역사상의 인물을 고정된 유교적 기준에 의해 일률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사문난적으로 사형당했을 것 같다)

174p

일설에 따르면 장대는 강희 28년 93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의 지배 아래서 반세기 가까이를 명나라 '頑民(완강한 유민)'으로 살았다는 말이 된다. 실로 가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망한 나라를 추종하면서 살았으니 긴 삶이 오히려 불행이었을 것 같다)

120p

김농과 정판교를 필두로 한 '팔괴'는 명나라 중기 소주에서 활약한 '오중사제'의 명맥을 계승하여, 청나라 중엽 양주를 거점으로 자립형 서예가, 화가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렇게 명에서 청으로 왕조는 교체되었지만, 그것을 초월하여 비록 소수일지라도 사대부 지식인 안에서 자유를 추구하며 자립 생활을 지향한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출현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234p

그중 압도적인 양을 차지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잡문집이다. 이 엄청난 양의 잡문 속에는 고전학자나 소설가로 대성하는 길을 버리고 논쟁의 장에 몸을 던져 전환기를 살아간 루쉰의 흔적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주인일 때 타인을 전부 종 취급하는 사람은, 주인을 모시게 되면 반드시 스스로도 종으로 처신한다. 이는 만고 불변의 진리로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오류>

36p

흉노가 부쩍 세력을 키워 후한 제12대 황제인 명제 무렵에는

-> 명제는 후한 12대가 아니라 2대 황제이다.

139p

오고타이의 아들 쿠빌라이 시대에는

-> 오고타이는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이고, 그 아들은 구육이다.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의 4남 훌라구의 아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