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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시황제 ㅣ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13
쓰루마 가즈유키 지음, 김경호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2월
평점 :
문고판의 가벼운 책인 줄 알았는데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이다.
일본에서는 수준높은 교양서들이 정말 많이 출간되는 것 같다.
특히 중국사의 분석 수준이 탁월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고 분서갱유를 일으킨 희대의 폭군, 좋게 말하면 정복 군주의 느낌이 강한 진시황의 인간적인 측면을 분석한 책이다.
인간적인 면이라고 해서 사서 몇 줄 가지고 맘대로 이랬을 것이다, 상상하는 수준낮은 아마추어식 분석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김종성 씨가 떠오른다)
저자는 사마천의 사기라는 보편적인 문헌 자료 외에, 최근에 발굴된 죽간 같은 출토 자료를 근거로 인간 시황제를 묘사한다.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온 영자초가 여불위의 소개로 조희를 만나 12개월 만에 진시황을 낳았으므로 저자는 여불위 소생 설을 일축한다.
좀 의아했던 점은 진시황이 영씨가 아니라 조씨로 기록한 책도 있는 것이다.
무덤이나 옛 우물 등에서 발굴된 출토자료 중 <사기> 보다 먼저 편찬된 <조정서>라는 책이 있다.
진시황의 이름은 영정으로 알려졌는데, 이 책에서는 진나라 왕족이 趙 성에 봉해졌다고 해서 조정이라고 칭한다.
이 책에서 처음 접한 내용이라 조나라 출신도 아닌데 왜 조정인지 의아하다.
또 한 가지 의문은, 장평 전투에서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무려 45만 명을 생매장 했다는데, 현실적으로 이 숫자가 가능할까?
당시 수도의 인구도 45만 명이 될까 말까 할 것 같은데 지나치게 과장된 숫자는 아닌지 궁금하다.
진시황의 할아버지 효문왕은 즉위 후 3일 만에 사망한다.
저자는 죽간 등을 통해 당시는 10월부터 새해가 시작됐고, 효문왕이 즉위한 시점은 윤 9월이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즉위 3일 만에 사망이라니, 심장마비로 급사한 걸까?
만력제의 아들인 태창제가 즉위 한 달 만에 사망하긴 했지만 3일은 정말 심하다.
치우를 산동성 제나라의 전쟁신으로 보는 시각도 독특했다
보통 치우라고 하면 동이족, 곧 한민족과 관련있다고 믿고, 붉은 악마가 바로 치우를 뜻한다고 대중매체에 알려졌는데 중국에서 보는 동방이 한반도라기 보다는, 산둥 반도와 발해만을 얘기하는 모양이다.
불로초를 찾아주겠다는 서복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갔고 진씨, 곧 하타씨의 시조가 됐다는 것도 일본에서 전해지는 전설인 모양이다.
하타씨라고 하면 신라인의 후예라고 알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그 기원을 진나라로 보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어떤 책에서, 삼한의 진이 바로 시황제 통일 전후의 혼란기 때 한반도로 내려와 정착한 유이민이라는 가설을 읽은 적도 있다.
고대를 현재의 국경 혹은 민족주의 시각에서 봐서는 안 되는 게 분명하다.
<인상깊은 구절>
10p
<사기>에는 시황제가 죽은 직후 사구에서 호해, 조고, 이사 세 사람이 음모한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적혀 있다. 장남 부소에게 후계를 맡긴 시황제의 유조가 이곳에서 파기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정서>에는 시황제하에서 호해를 정통적인 후계자로 하는 회의가 열려, 시황제도 이에 동의했다고 한다. <사기>와 차이가 명확하다.
(호해 치하에서 진나라가 계속 통일국가를 유지했다면 사기의 전승이 야사가 됐을 것 같다)
72p
어쨌든 노애보다도 진왕이 먼저 움직인 것은 성인이 된 진왕이 노애보다 더 영리했다고 할 수 있다. 진나라의 위기를 느껴 기민하게 행동한 것이다.
(먼저 거사를 일으켜 정도전 일파를 친 후 그들이 나를 공격해서 방어했다는 논리를 편 태종이 생각난다. 승자들은 항상 상황판단이 빠르다)
76p
모초는 진왕의 행위는 제후에게 신뢰받지 못하므로 진에 반기를 드는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어머니에 대한 진왕의 불효가 뒤에서 비난받았을 것이다.
진왕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불효에 대해서는 민감했다. 진시대에서도 가문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효가 요구되었다.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진왕 자신에게 이런 불효의 규율이 적용되지는 않지만 불효로 인해 제후와 민중의 신뢰를 잃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태종이 함흥에 가 있는 아버지를 모셔 오기 위해 애를 썼던 것도 단순히 개인적인 효심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106p
자영이 유방에게 항복하여 왕을 퇴위한 시점에서 진나라는 멸망하였고 왕의 생사는 국가의 멸망과는 관계가 없었다. 전국시대 국가를 나타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직이었으며 왕이 제사지내는 토지의 신과 곡물의 신을 없애는 것이 국가의 멸망을 의미했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멸망했을 때도 여전히 왕은 천수를 누린 것을 보면 과연 그런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인 견훤의 행동은 당시 사람들에게 잔악무도하게 비춰졌을 것 같다)
114p
중앙으로부터 전파된 통일선언만으로 지방이 바로 다스려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더욱 시황제가 친히 지방으로 가는 순행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신문 방송 매체가 있지만, 현재 기준으로도 엄청나게 넓은 땅덩어리를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의 업적을 전국에 알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왜 진시황이 교통도 불편한 시대에 통일 후 죽을 때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행했는지 그 까닭이 비로소 이해된다)
144p
어떻게든 동방 땅으로 들어가서 전쟁이 아니라 제사를 통하여 통일사업을 침투시키려는 진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중앙에서 통일을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완전하게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진제국의 영역은 광대했다. 시황제 스스로가 몇 번에 걸쳐 지방을 순행했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147p
통일전쟁에서 진군은 스스로 정의의 병사로 칭하고 괴팍하고 잔인한 왕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겠다며 육국을 멸하고 천하를 군현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는 군현화한 제국을 바깥에 있는 만이로부터 지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고대에서도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념은 필요했다. 시황제는 동쪽 바다에 정착하여 육국이라는 적을 잃은 지금, 남북을 향하여 만이라고 하는 새로운 적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만이를 멸하고 복속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시황제는 진제국의 주변에 만이를 두어 중화와 만이의 세계를 대치시킨 제국을 쌓아올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만이의 세계에 위신을 보여야만 중화인 것으로 시황제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시황제는 한 세기 전의 알렉산더와 같은 무한한 정복욕을 가진 캐릭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156p
담기양씨의 <중국역사지도집>에서는 만리장성이 평양 서쪽 해안에서 끝나는데 이것이 실제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진이 요동반도에 집착했던 이유는 연과 흉노와 조선이 교착하는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삼자의 연계를 끊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 위해서라도 장성의 동단을 바다에 둬서 발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필요가 이었다.
(한국 사람 입장에서는 만리장성을 평양까지 연결하는 행위는 동북공정의 대표적인 역사왜곡일 듯한데, 외국 학자들은 이렇게도 생각하는 모양이다. 고조선은 한 무제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독립된 왕국이었으니 진시황 때 만리장성이 한반도까지 왔다는 것은 무리한 추측 아닐까?)
162p
흉노와 백월과의 전쟁은 남북 모두 무모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시황제는 중화 바깥과의 전쟁을 통해 진과 옛 육국 지역에 일체감을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 통일 후 조선을 침략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 같다. 내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외부의 적이 필요한 셈이다)
164p
하천을 따라 진나라 사람들이 거주하는 현과 성을 벗어나면 산악지대에는 월인들의 세계가 펼쳐졌다. 진의 지배는 이 지역에서 점과 같은 지배에 지나지 않으며 점과 점은 하천을 따라 생긴 교통로로 겨우 연결돼 있었다.
167p
원래 진의 백월 지배와 그 이후의 남월 독립은 진에서 남하한 동일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시황제 사후, 2세 황제 때에 멀리 중원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이 멸망했기 때문에 남월을 건국하여 조타는 무왕(자국 내에서는 무제로 자칭)이 되었다. 조타 주변의 지배자는 원래는 진에 정복당한 옛 육국지역 사람으로, 월인들을 기반으로 하여 그들이 정복왕조를 세웠다.
(위만이 연나라에서 고조선으로 넘어와 위만 조선을 세우고 현지화 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일까?)
171p
이런 말 등은 법치주의라기보다는 신분의 귀천과 남녀 분업을 지켜야 한다는 예치주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황제는 법치만으로는 통치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75p
시황제는 이러한 이사의 분서령 제안에 동의했다. 80만 명이나 되는 인원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치루고 있는 전쟁, 겉으로는 만이를 내쫓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부담은 컸다. 이사는 전쟁을 비판하는 언론을 억압하였다.
공자의 학문 그 자체를 탄압했던 것이 아니라 전시체제하의 인민들을 불안하게 했던 점이 법에 저촉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잔인한 행위가 있었던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일반에게 유포된 '분서갱유'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르다.
(신분 차별과 충성, 효 등을 내세운 유교가 통치에 적합하다는 것을 시황제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저자의 분석대로 분서갱유는 전시체제 하의 불만 여론을 잠재우려는 상징적인 행위였을 것 같다)
184p
시황제는 우주의 움직임을 거스르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중화제국 주변의 정치 상황을 확인하기로 했을 것이다. 황제든 서민이든 고대 사람들에게 천문은 일상생활과 결부돼 있었다.
(마치 유럽의 중세인들이 기독교의 교리가 곧 일상 생활의 축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198p
시황제는 본인의 죽음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품은 채 주변에 대해서는 순행을 통하여 중화제국 제왕으로서의 위신을 지속적으로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면 마지막 순행 전 후계자 문제를 정리해 놨더라면 진 제국이 15년 만에 허망하게 멸망하지는 않았으려나? 표트르 대제도 갑자기 요석 때문에 요도가 막혀 1주일 간 패혈증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을 걸 보면, 전근대 사회에서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오긴 했다)
200p
승상 이사와 어사대부인 풍거질은 먼 거리를 순행하는 가운데 신하들에게 詔 를 내리면 대신들의 음모를 야기할 수도 있음을 염려하여 호해를 비밀리에 후계자로 택하도록 제안했다. 진왕 자신의 재가가 있고 나서 진왕은 죽고 호해가 즉위했다. 이 고사에는 장자인 부소는 등장하지 않고 시황제 자신이 호해를 정식으로 후계자로서 인정한 것이다.
<조정서>가 무제 만년에 편찬된 <사기>보다도 이른 무제 전기의 책이라면 사마천도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다만 사마천은 '호해 후계의 고사'를 다루지 않고, '부소 후계의 고사'를 택한 것이다. 시황제와 관련된 고사는 수없이 전해지고 있어 사마천도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궁궐 내에서도 아니고 순행 중 시황제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고 새 황제가 등극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도 후계 계승의 정확한 내막을 몰랐을 것 같다. 오직 이사와 조고 몇 사람만이 진실을 알고 무덤 속으로 가 버렸을 것이다)
223p
공자는 사람을 닮은 俑 을 묻는 일이 참기 어려웠다고 한다. 여기에는 살아 있는 인간의 순사를 대신해서 진흙으로 만든 인형을 만들었다는 <일본서기>에 보이는 발상은 없다. 등신대도 살아 있는 인간을 충실하게 잘 모방해서 만든 진의 병마용을 만약 공자가 보았다면 심히 슬퍼했을 것이다. 사람의 혼을 옮긴 것 같은 리얼한 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유가 사상이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제사 지낼 때 영정이나 소상 대신 신주를 모시나 보다. 서구와 달리 조각이 발전하지 못한 까닭도 사람의 형상을 꺼리는 유교 전통 때문일까?)
230p
2세 황제의 짧은 3년간 재위기간 중에 조고는 궁중에서 황제의 명령을 공포하고 이윽고 승상 이사를 대신해서 승상에 올라 안팎의 권력을 맘대로 휘둘렀다. 시황제 시대를 총괄하여 신화화하고 시황제의 지하제국을 정비한 것도 조고의 힘에 의한 바가 크다. 노애와 함께 악역 이미지가 강하지만 악역이라고 하면 할수록 조고라는 인간의 실상을 들추어내고 싶어진다.
(시황제 사후 겨우 3년 만에 제국이 와해됐으니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도 엄청난 무덤을 건설한 조고의 노력이 대단하긴 하다)
236p
조고가 이사를 배척하고자 해도 자의적으로는 실행할 수 없어 일정한 재판 수속을 밟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는 진의 법치주의가 철저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고대에도 마음에 안 든다고 권력자가 갑자기 죽여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문을 해서라도 죄를 인정하고 자백을 받아내는 끔찍한 절차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247p
패공 유방도 상장군 항우도 황제의 지위를 바라지 않고 우선은 진나라 땅인 관중의 왕이 되기를 바랐다. 동방 땅은 이미 전국의 나라들이 다시 일어났기 때문에 두 사람은 진을 대신해서 관중의 왕이 될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력에서 우세했던 항우도 결국 관중의 왕은 되지 않았다. 항우 입장에서 보자면 시황제가 만든 제국 따위는 허구로밖에 비춰지지 않았을 것이다.
시황제릉을 파헤친 일에 대해서는 함양이 3개월간이나 불탔다는 고사에 이끌려 후대에 과장되었던 것으로 실제로 항우가 지하궁전까지 파헤쳤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지하궁전이 천천히 계속 불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리모트 센싱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하 공간은 확실히 남아 있다.
(항우가 전부 도굴했다면 오늘날까지 그 엄청난 규모의 병마용과 무덤이 전해질 리가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왜 여전히 전부 발굴하지 않는지 참 궁금하다)
252p
매일 정해진 업무의 수행과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유능한 전제군주인 시황제, 분서갱유나 만리장성의 건설 등으로 인한 폭군의 대표적 인물인 시황제. 그런 시황제의 이미지와는 달리 본서에서는 동방 육국을 통일하여 하나의 중국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낯선 동방의 해양 문화를 접촉하면서 당혹스러워하는 황제가 아닌 '나약한' 인간 시황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293p
사후의 시호 제도를 폐지하고 2세 황제, 3세 황제라고 하는 칭호를 사전에 결정해둔다. 황제가 되면 동시에 사후를 생각하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군이 신하에게 평가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314p
2세 황제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서는 효행뿐만이 아니라 신하로서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행동이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은 것이므로 사죄를 받을 것인지 순사하여 효와 신을 다할 것인지를 공자와 공주들은 추궁당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반역한다는 의심을 받아 아사당한 사도세자의 경우도, 영조는 부자관계라는 사적인 情 보다 신하로서의 忠 을 먼저 내세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