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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봄, 공녀 ㅣ 세창역사산책 11
조혁연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9년 12월
평점 :
한 손에 쥘 수 있는 문고판 정도의 짧은 분량의 책이라 신선하다.
역사산책이라는 이 시리즈의 제목답게 하나의 주제를 가볍게 살펴볼 수 있는 괜찮은 기획의도 같다.
다만 표지 디자인이 요즘 책답지 않게 너무 촌스러워 이 부분만 좀 개선을 하면 훨씬 매력적인 책이 되지 않을까.
일단 공녀를 주제로 삼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항상 이 부분이 의문이었다.
중국은 왜 한반도에 공녀를 요구했을까?
청나라 때 포로로 붙잡아 간 것도 아니고 일종의 화친 정책이나 복속의 상징으로 일부 처녀들을 끌고 간 것일까?
전 시대에 걸쳐 행해진 것도 아니고 고려 말의 원나라 때와 조선 초 명나라 때 잠깐 있었다는 것도 신기하다.
일종의 공물처럼 생각하고 사대의 예를 다하는지 시험해 보기 위함일까?
엄청난 수를 데려간 것도 아니고 단순히 노비나 성노예로 부리려고 한 것도 아닌 듯하고 오히려 양반집 규수들을 뽑아 황제의 후궁으로 삼아 기황후나 한확의 누이들처럼 중국에서 출세한 여인들도 있으니 참 독특한 현상인 듯하다.
저자는 명나라가 건국 초 만주의 여진족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북원과의 일전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과의 확실한 동맹을 위해 일종의 정략결혼 개념으로 공녀를 원했다고 본다.
그래서 영락제는 3차에 걸쳐 뽑은 공녀들에게 모두 후궁 작위를 내리고 그 아비와 형제에게 황친의 자격도 하사했다고 한다.
영락제는 베트남에도 환관들을 요청해 이들이 북경의 황궁을 지을 때 큰 역할을 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정말 영락제는 복속과 화친의 의미로 속국에 공녀를 요구한 것일까?
영락제 이후로는 공녀로 뽑혀 가도 후궁의 작위가 내리지도 않고 오히려 조리사나 바느질 하는 사역인을 더 원했다고 한다.
점점 결혼동맹의 의미가 퇴색된 탓일까?
저자는 영락제와 경태제의 생모가 조선인 공녀였을 거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데 근거가 매우 부족한 야사라고 생각한다.
영락제의 고려인 생모 이야기는 중국에도 많이 퍼진 야사 같던데 일본인 교수가 쓴 <영락제> 평전을 보면 근거없는 이야기로 보이고 마치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었다는 식으로 황위를 찬탈한 영락제에 대한 민간의 복수가 아닐까 싶다.
권위를 흠집내기 위해서 말이다.
저자는 한 술 더 떠 경태제가 조선인 공녀 오씨의 생모일 거라 말하는데 역시 야사에 불과하고 실제로 명나라 정치에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했으니 생모의 출신이 뭐가 중요할까 싶다.
<인상깊은 구절>
97p
1차 공녀는 전체 7차례의 공녀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헌된 5명 모두가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다. 이처럼 영락제가 5명의 공녀를 후궁으로 대우한 데는 고도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영락제는 조선을 확실한 우방으로 묶어 두고, 북방의 유목민족을 정복하려 하였다. 이렇게 동북아 역사에서는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그 북쪽의 오랑캐(유목민족)와 그 남쪽의 중화족(한족), 그리고 그 중간에 우리나라가 정립하는 삼각구도가 자주 만들어졌고 그때마다 동북아 정세는 크게 출렁거렸다.
172p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한 '마의 삼각구도'는 동북아시아의 역사 속에서 간헐적으로 형성되었다가 중국 대륙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들어서면 해체되었다. 그러면 대륙의 국가와 한반도의 국가 사이에는 어김없이 공녀 현상이 발생하였다.
공녀는 일종의 공물이고, 그 공물은 동아시아 국가 사이에 존재했던 조공과 책봉이라는 외교적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녀는 종주국인 중국과 그 주변 국가인 번속국 사이에 성립되었다. 이 경우 국력이 강한 종주국은 '갑'이 되고, 열세은 번속국은 '을'이 된다.
176p
고려와 원나라, 조선와 명나라의 공녀는 크게 차이가 나고 있다. 원나라가 고려에 공녀를 징구한 배경은 원의 일부다처제 풍습, 병사들에게 아내를 공급하기 위한 求妻 차원, 원 황실이 인력공급 등이었다. 기황후가 바로 원 황실의 使役 용도로 진공되었다가 황후의 위치까지 오른 경우이다.
원나라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던 우리 역사의 공녀는 명나라가 중원 대륙을 통일한 후 다시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 배경은 고려-원나라의 공녀 수수 관계와는 크게 달랐다. 명 태조 주원장은 인접국 조선을 회유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조선 왕실과의 정략결혼 추진으로 나타났으나, 주변 정세의 변화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명나라 영락제도 정략결혼이라는 유화책을 통해 조선을 자국의 영향력 아래에 묶어 두고 대몽골 공격의 전초기지로 삼으려 하였다. 그 결과, 영락제 재위기간의 1~3차 공녀는 흠이 없는 경우 모두 '후궁'의 품위를 받았고, 그 친족은 '황족'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영락제 재위 후반부터는 공녀 요구 내용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영락제는 음식 잘 만드는 조선 여자와 음식을 징구하다가 사망하였다. 명나라의 새 황제 선덕제는 조선에 동녀 외에도 다반부녀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6,7차 공녀에서는 그 선호도가 더욱 명확해져 아예 조선 음식과 반찬 만드는 집찬녀를 집중적으로 요구하였다. 따라서 4차 이후부터는 일부 특별한 경우는 제외하고 후궁의 품위가 주어지지 않았고, 친족도 황족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다만 한확의 여동생 한계란(5차 공녀)에게는 후궁의 품위가 주아졌고, 그 친족은 황족의 대우를 받았다.
조선의 공녀 진공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처음에는 명 황실과 조선 왕실 간의 정략결혼 차원에서 출발했으나 점차 명 황실의 사역인 용도로 변해갔다는 점이다. 정략결혼에는 명나라 황제 개인의 성적 욕구 해소도 포함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