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헌팅턴의 미국
새뮤얼 헌팅턴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새뮤얼 헌팅턴이라면 홍정욱의 에세이 "7막 7장" 에서 봤던 사람이다
한국학의 대가라고 알고 있는데 미국 내에서 꽤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인 것 같다
하긴 하버드대라면 우리나라의 서울대랑 마찬가지니까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 가서 느낀 거 쓴 책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무래도 외국인과 내국인의 차이겠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를 읽으면서 평범한 미국인의 일상을 느꼈다면 이 책에서는 미국인의 의식과 문화에 대해 또 역사와 그 배경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강한 주장을 펴지 않으면서도 한쪽으로 몰고 가는 기술이 탁월하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은 감정적이고 당위를 논하는 것에 불과한데, 이 책은 학자풍의 느낌이 난다
그래서 더 신뢰가 간다

그렇지만 솔직히 옳은 얘기인지는 모르겠다
진보란 국가와 인종, 또는 민족을 넘어 전인류애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헌팅턴은 기존의 개척자 문화로 통일하길 원한다
대표적인 것이 이중언어 정책이다
효율성으로만 따지면 이중언어는 명백히 낭비다
스위스처럼 4개 국어가 쓰이는 나라를 보라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프랑스어를 쓰는 스위스인과 독일어를 쓰는 스위스인이 만나면 영어로 대화한다는 말이 농담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갈수록 늘어나는 히스패닉인들의 권리를 무시할 수 있을까?
어차피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인데 언제까지 기득권층 문화만 강조할 것인가?
그래서 헌팅턴은 엘리트 집단이 나서서 이중언어 정책을 추진한다고 비판한다
실제 국민의 80%가 영어 단독 사용을 지지하는데, 다원화 문화에 경도된 엘리트층이 스페인어 사용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또 이들은 공직에 출마하기 때문에 전 미국인의 12%에 달하는 히스패닉인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스페인어 사용을 지지하기도 한다
글쎄, 뭐가 옳은 것일까?

개척자 문화와 이민자 문화의 정의는 참 유용했다
개척자 문화란 17세기 영국 정부의 억압을 피해 신세계로 건너와 신앙의 자유를 지킨 앵글로 색슨 청교도를 일컫는다
이들은 인디언과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혔고 지배 문화를 형성했다
땅은 넓은데 사람은 적으니 노동 인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무분별한 이민자 유입이 좋게 말하면 미국 문화의 다양성을 가져 왔고, 나쁘게 말하면 단결심을 해치게 됐다
이것은 비단 미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독일의 터키인들이나 프랑스의 북아프리카인들도 마찬가지다
노동력은 필요한데 정식 시민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위선적인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이민자 문제는 계속 심각할 것이다

그런데 "관용에 대하여" 를 읽어 보면 집단의 권리를 강조하는 것은 또다른 민족주의에 지나지 않다
개인으로서 차별받지 않는 것은 중요한 문제지만, 집단으로 뭉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진짜 진보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헌팅턴은 집단으로서의 권리를 외치는 민족주의자들의 지도자가 부수적인 이익을 위해 애쓴다고 비난조로 말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난하는 아라파트 같은 행태라고 할까?
궁극적으로 프랑스처럼 개인으로서는 차별하지 않고, 집단으로서 뭉치는 것은 제재하는 것이, 즉 완전한 동화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 이중언어 정책은 폐지해야 할 것이다
영어 못해서 난리치고 심지어 영어 공용론까지 펼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다

완전한 동화는 가능할까?
이민 1세대야 어쩔 수 없다지만 2세대, 3세대가 되면 자신의 뿌리가 되는 문화를 지킨다는 것이 어려워진다
어차피 그 사회에 살면 동화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실제로 얼굴색이나 민족적 이유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면 이들이 뭉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또 소수 민족의 수가 많아져 어느 정도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면 당연히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까?
개인은 약하지만 집단은 강한 법이니까
그러므로 헌팅턴 같은 국가주의자, 혹은 기득권층은 소수 민족주의자들을 비난할 게 아니라 이들이 개인으로서도 차별받지 않도록 사회 정책들을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한 동화를 이루도록 애쓰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을 정의하는 가치관 중 하나는 기회의 평등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실체도 바로 이 기회의 평등일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대부분의 사회에서 계급 이동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기득권층에 편입한다는 것은 사실 대단히 힘들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이고 기득권층 형성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계급 이동이 활발한 편이다
자신만 열심히 한다면 말이다
헌팅턴은 이것을 강조한다
즉 미국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준다고 주장한다
철저한 개인주의와 기회의 평등이 미국의 신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미국은 유럽보다 빈부 격차가 월등하게 큰 나라다
이민간 한국인들을 생각하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자기만 열심히 일하면 왠만큼은 살 수 있으니까
반면 흑인들은 워낙 게으르기 때문에 계급 상승이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헌팅턴은 결과의 평등까지 보장해 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미국은 기회의 평등을 제공하는 나라인가?

세계 대전이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했다는 사실은 좀 놀랍다
전쟁이 때로는 득이 되기도 하나 보다
2차 세계 대전은 핵폭탄의 사용으로 인간성이 파괴된 전쟁으로 유명한데, 오히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애국심을 드높히는 좋은 기회였다고 한다
2차 대전을 수행하면서 소련 국민들이 행복했다고 하는데 정말일까, 과장일까?
어쨌든 2차 대전 때 자발적으로 천여만명의 사람들이 지원하면서 인종, 민족 등을 초월해 미국인의 정체성 아래 뭉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치 남북 전쟁을 통해 모든 백인들이 하나의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은 것처럼 말이다
혹시 6.25도 뭔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까?
전쟁을 하면 빈부 격차가 줄어든다고 한다
다 같이 못 사는 게 상대적 빈곤보다 더 좋은 것인가?

저자는 미국의 선택 영역을 셋으로 나눈다
세계화를 주장하는 엘리트들이 원하는 초월적 국가주의, 아니면 제국주의, 일반 대중이 원하는 국가주의가 있다
물론 저자는 앵글로-기독교 문화가 지배하는 국가주의를 원한다
저자는 이것을 애국심이라고 표현한다
이 책의 미덕은 서문에 밝힌대로 애국심과 학문적 분석을 혼동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간극은 날이 갈수록 커진다
일찌기 플라톤이 한탄한대로 대중은 어리석고 민주주의는 인기에 영합한 포퓰리즘으로 갈 확률이 다분하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국가 정책을 맡겨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선출직으로 뽑힌 엘리트들이 대중과 분리된 정책을 고수할 경우 그들의 특권 유지에 급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의 민주정치라는 기본 이념이 빛을 바랠 수 있다
선출직 관리들이 입법하고 집행할 때는 어느 정도 대중의 뜻을 반영한다는 기본적인 신뢰가 깨진다면 결국 민주주의는 붕괴되는 게 아닌가?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세계화는 곧 우리 지식인들이 자주 거론하는 진보의 실체다
박홍규가 늘상 얘기하는 아나키즘도 같은 맥락이다
국가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민족과 인종을 초월해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수용하는 것이 바로 세계화이고 진보가 아닌가?
왜 대중들은 진보적 사고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나마 있는 기득권이 뺏기리라는 두려움 때문인가?
하긴 헌팅턴의 분석을 읽으면 이해가 간다
헌팅턴은 "폴링 다운" 에 등장하는 노동직 백인 남성을 예로 든다
이제 그들은 소수가 되어 비백인들에게 일자리를 뺏기고 무력하게 거리로 나앉았다
이 영화는 한국인을 비하한다고 문제가 됐는데, 아시아인에 대한 일반적인 분노를 표현했다는 걸 알게 됐다
엘리트로 편입한 것도 아니고, 밀려 오는 이민자에게 치이는 판국에 그나마 정부에서는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급급하니, 능력없는 기존의 백인들로서는 불안감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헌팅턴은 이들이 히스패닉이나 흑인들처럼 집단으로 단결할 수 있음을 우려한다

미국이 종교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서구 사회가 종교 전쟁을 통해 공적인 영역에서 (심지어 사적인 영역도) 종교를 완전히 몰아 냈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교적 압박을 느끼지 않은 미국인은 훨씬 더 종교적이다
하긴 종교의 자유를 찾아 그 먼 영국땅에서 미지의 나라로 배를 타고 건너 올 정도면 그들이 얼마나 종교적이었을지 알만 하다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는 개척자 문화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종교가 도덕적 해이를 막는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종교와 도덕이 과연 얼만큼의 상관 관계를 갖는지 의심스럽다
하나님의 선과 인간의 선은 명백히 다르기 때문에 종교는 세속 생활의 원리가 될 수 없다고 믿는다
미국인들은 공적 영역에 종교를 집어 넣고자 한다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개개인의 믿음을 표현하고 그 원리에 따라 사는 건 자유지만, 또 한편으로 바람직한 면도 있지만 종교가 집단을 지배하는 것은 교조주의의 부활에 불과하다
중세 천년을 겪고도 여전히 종교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지, 참 한심스럽다
하긴 우리나라가 유교의 폐해를 알면서도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버리지 못하듯, 미국 역시 자신들의 뿌리가 되는 지배 이념을 한순간에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사회를 지배하는 중심 원리가 필요하다면, 기존의 것을 대체할 강력한 이념이나 질서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함부로 기존의 원리를 버릴 수 없겠지

그렇다면 미국을 지배할, 혹은 우리를 지배할 바람직한 가치관과 이념은 무엇일까?
헌팅턴은 실망스럽게도 국가주의를 거론한다
애국심을 바탕으로 미국인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단일 언어를 사용하며 민족의 뿌리를 부정하고 기독교와 앵글로 색슨 족의 전통 위주로 뭉치는 그런 사회 말이다
비록 헌팅턴은 앵글로-개신교인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문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결국 다원화 대신 기존 질서의 유지를 주장하는 게 아닌가?
통합이라는 명분 아래 하나의 지배 원리만을 중시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태도다
물론 세계화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강력하게 혹은 빠르게 진행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국가에 대한 헌신이 부족한 엘리트 계층이 세계화를 선도하지만, 일반 대중들은 여전히 민족과 인종, 종교 같은 자신의 뿌리에 집착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시대든 거스를 수 없는 시대 정신과 흐름이 있는 법이다
애국심에 기초한 헌팅턴의 국가주의는 왠지 시대에 역행하는 기분이 든다

헌팅턴이 지적하는 다원화주의의 문제점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이중 언어 정책이 국가 정체성을 해치고 결국 미국을 둘로 나눌 것이라는 견해는 결코 엄살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헌팅턴 식으로 국가 정체성을 강조해서 문명의 충돌 어쩌고 하는 식으로 이슬람을 적으로 규정해서 미국인의 단결을 촉구한다면 세계는 계속 전쟁을 치뤄야 할 것이다
자꾸 우리를 강조하면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지금이야 말로 관용의 정신을 발휘해야 할 때가 아닐까?
왈짜의 말처럼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평화를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수 민족의 집단주의 역시 반대다
민족의 권리를 내세우며 개인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사회를 분열시킨다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지도자란 사람들이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결국 가장 좋은 것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개인이 선택하고 사회는 그것을 존중해 줘야 한다고 믿는다
집단으로서의 다원화는 반대지만, 개인으로서의 다원화는 인정해 주는 문화, 결국은 아나키즘과 자유 정신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레가 주창한 자유주의 교육을 받아야 할까?
권력과 억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자유인이 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얘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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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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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시 박홍규는 대단하다 그가 현실 정치 대신 학문적인 분야에 치중함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오늘 그의 책을 읽고 보니, 지식인의 정치 참여를 권력 획득의 일종으로 비판하고 있어 현실 정치에는 아무 관심도 없음을 볼 수 있는데, 아무리 똑똑하고 순결한 사람일지라도 현실 저치에 뛰어들면 흠집이 나고 자기 오류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를 책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내가 읽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은 2001년에 출간된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이다 나는 이 책이 박홍규가 번역한 "오리엔탈리즘" 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나온 책이었다 솔직히 그 책을 읽으면서 크게 감동한 것은 아니었다 명성이 자자하길래 심오하고 훌륭한 책이라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평이하고 감정적인 발언들이 많아 읽기 불편했다 자신이 쓴 "오리엔탈리즘" 의 아류작이라서 그런가? 차라리 새뮤얼 헌팅턴의 책은 그 국수주의적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용 자체만으로는 훨씬 더 학구적이고 분석적이라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그는 주류라서 굳이 강하게 자기 주장을 할 필요가 없었을까? 원래 마이너리티들은 큰 소리로 자기 주장을 강조하는 법인가? 어쨌든 사이드의 책은 근거가 부족하고 덜 분석적이며 감정적인 호소들이 많은 반면, 헌팅턴의 책은 철저하고 객관적인 분석을 통해 간접적으로 논지를 밝힌 점이 대조적이다 나는 헌팅턴의 책이 그 주장과는 별개로, 훨씬 더 마음에 들고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박홍규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는 서구 제국주의를 비난하고 아나키즘적인 세계를 꿈꾸지만 현실적으로 권력이나 기득권의 포기가 과연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그저 이상향으로 영원히 우리 머릿속에만 남을지도 모른다 남보다 힘이 있는 사람이, 그 힘이 주는 특혜를 무시하고 보통 사람과 똑같이 살라는 얘기는 공산주의와 다를 게 없다 결국 공산주의도 실패로 끝났지 않은가?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그는 서구 선진국들에게 후진국과 똑같은 권리만 가지라고 주장한다 이게 가능한 얘기일까? 더구나 국제 사회는 말 그래도 힘이 지배하는 사회인데, 도덕적으로 부당하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고 약자의 편을 드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적어도 주체성을 갖자는 말에는 동의한다 사실 그가 진짜 바라는 것은 현실적인 힘의 논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기죽지 않는 베짱인지도 모른다 박홍규는 사대주의를 극도로 경계한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서양에 의해 규정되는 동양임을 간파한다 즉 동양 스스로의 주체적인 사상이 아니라 서양에 의해 정의되는 수동적이며 식민지적 이데올로기라는 얘기다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그 사상의 원류인 서양 제국주의는 찬양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요즘이야 반미가 유행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을 따라가는 것이 곧 세계화이고 영어 공용론까지 대두될 정도로 미국에 대한 애정은 열렬했다 프랑스가 미국을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들을 미국과 대등하게 보기 때문일 것이다 나랑 비슷한 놈인데 앞서 간다고 생각하면 불편한 감정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일본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 박홍규나 사이드가 주장하는 주체적 인식은 공감하는 바다 일본을 배척하는 것은 서양을 추종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이고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일본의 발전상은 늘 우습게 보면서도 미국이나 유럽의 것은 무조건 추종하며 대단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사대주의 근성은 저자의 말대로 미국 유학병에서 비롯된 건지도 모른다 일본의 경우 서양의 많은 고전들이 번역됐는데 우리나라는 번역본이 아주 부실하고 수도 적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일본을 번역물의 천국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 대학 교수들은 번역을 흔히 대학원생에게 맡겨 버릴 정도로 번역 작업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역이 많아 번역물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 원서주의가 받들어지는 이유다 대학 다닐 때 교수님들도 그랬다 한서 번역은 믿을 수가 없으므로 원서로 봐야 하고, 일본의 경우 자기말로 번역이 많이 됐는데 번역서 보다는 원서를 보는 게 낫다고 했다 사실 원서를 보는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번역서가 더 어렵다는 말은 다 잘난 척 하는 말에 불과하다 한글로 매끄럽게 번역이 돼 있으면 공부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일본의 경우 학자가 정계에 진출하는 통로가 아예 막혀 있어 번역 같은 일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교수들은 현실 참여를 주장하면서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므로 자연히 번역 작업 같은 일은 하찮게 여겨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론의 현실 적용 같은 문제는 너무 어렵고 수많은 문제점들이 있으므로, 이론이나 제대로 하라는 저자의 비난에 수긍이 가기도 한다 사이드가 정의하는 지식인이란 권력에 저항하고 모든 권위에 비판적인 주변인적 존재다 그의 이론을 적용하자면 우리나라에 진짜 지식인이란 아주 드물고 희귀한 존재일 것이다 사이드는 교육의 본질을 지식의 전달에 두지 않고, 모든 권위에 저항할 수 있는 정신의 함양이라고 했다 우리 교육과 정반대의 얘기를 하고 있다 학생과장이나 사랑의 매 따위가 학교에서 왜 사라져야 하는지를 사이드가 설명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교육의 본질을 기존 권위에 대한 저항으로 생각하는 교육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학생은 교사가 계도하고 바로잡아야 할 객체일 뿐이다 교육의 주체는 학생이 아니라 교사라는 말이다 사이드의 교육론은 페레의 자유주의 교육과도 일맥상통 하는데, 비단 학교 교육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가정 교육에서도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생각대로 원하는 길을 가라는 말인데, 과연 자식이 자기 길을 가겠다는 것을 인정할 부모가 몇이나 될까? 무한정으로 쏟아지는 애정의 이면에는 자식에 대한 지배 심리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현실적인 것은 인정하고 중용의 도를 취하면 안 될까? 박홍규가 비판하는 책들이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지만, 이분법적으로 나누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른 건 안 읽어 봐서 모르겠고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 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이 책을 처음에는 재미없게 읽었지만 나중에 해설서를 보면서 작품의 주제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된 후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로빈슨 크루소" 나 "15소년 표류기" 등을 보면 유럽인이 무인도에 가서 민주주의를 수립하고 문명 사회를 건설하는 식으로 미화되지만, 실상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추악하며 힘에 의한 지배를 추구한다고 했다 또 순수한 미개인은 신화에 불과하고 국가나 사회 제도가 없으면 인간은 폭력적이고 야만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아무리 대영제국의 시민이라 할지라도 영국이라는 국가 밖에 있으면 자연 상태에서는 그저 야만인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박홍규는 골딩이 야만인을 흑인처럼 묘사했다고 제국주의적 발로라고 비판한다 이건 너무 지난친 비약 아닌가? 비단 흑인만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문명 이전의 상태를 묘사했을 뿐이다 오히려 대영 제국인은 무인도에 떨어져도 민주주의를 건설한다는 식의 오만함 보다 훨씬 솔직하고 자기 비판적인 것 아닐까? 가끔 박홍규의 비판을 듣다 보면 극단주의로 치닫는다는 느낌이 든다 골딩이 말하고 싶은 것은 아프리카 흑인들의 미개함이 아니라 문명 이전의 사회이다 비단 흑인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박홍규 식으로 하면 문명 이전의 상태도 문명화와 마찬가지로 같은 가치를 갖는 셈인데, 그렇다면 대체 발전의 개념은 뭔가? 누가 뭐라고 해도 객관적인 발전은 부인할 수 없다 개화되고 문명화 된다는 개념을 부정하면 모든 것은 다 상대주의 내지는 다원주의로 이해되어 가치 평가 자체가 불가능 하다 좀 적당히 비판의 수위를 조절할 수는 없을까? 왠지 그를 보면 극단주의를 대하는 느낌이 든다 그가 비판한 까뮈의 "이방인" 역시 식민지 알제리인을 아무 이유없이 죽인 게 아니라, 그저 햇빛에 눈이 부셔 우발적으로 한 남자에게 총을 쐈을 뿐이다 더구나 자세히 읽어 보면 이유없이 죽인 것도 아니다 죽은 알제리인은 뫼르소의 친구를 위협했고, 당연히 뫼르소도 한 패거리로 봤다 그저 친구의 총을 맡았을 뿐이지만 뫼르소가 자신을 쏠 거라고 생각하고 방어적으로 칼에 손이 간다 햇빛에 눈이 부신 뫼르소는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서다가 우발적으로 그에게 총을 발사하고 만다 이 소설의 핵심은 뫼르소가 알제리인을 왜 죽였느냐가 아니라, 그를 죽인 후에도 전혀 변명하지 않고 사형 선고를 담담히 받아들였다는데 있다 햇빛에 눈이 부셔 총을 쐈다는 진실을 말하면 사형을 언도받고, 반대로 그가 나를 위협해서 정당방위 차원에서 총을 쐈다고 거짓을 말하면 석방되는 삶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박홍규 식으로 해석하면 까뮈가 말하는 부조리는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건지... 제발 오버 좀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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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 강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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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마 히로시가 쓴 책이다
"조선과 중국 근세 5백년을 가다" 를 인상깊게 읽었던 터라 기대를 많이 했다
그 때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분석해서 보여 준 16세기 양반의 생활상이 자세히 기록되어 도움이 많이 됐다
이번 책은 통계 자료 인용이 많아서 읽기가 편하지는 않았다
내용 자체는 쉬운데 다소 복잡하다
나처럼 통계나 그래프에 약한 사람은 굳이 증거를 들이댈 것 없이 결론만 말하면 편한데, 결론은 처음과 뒷쪽 두 챕터에 불과하고 나머지 부분은 전부 통계 분석에 쓰였다
그래서 집중을 못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양반이라는 계층의 존재에 대해, 혹은 유교 문화의 전통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양반이란 계층은 유럽의 귀족이나 일본의 무사 계급과는 달랐다고 한다
사회적은 관습과 용인에 의해 인정되는 것이지, 법적으로 그 지위가 보장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의 기준은 매우 엄격해서 그 외의 계층과 절대 섞이지 않는 배타성을 보였다
그러나 세습되는 지위는 아니기 때문에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분 계층간의 유동성이 증가해 19세기에는 양반이 무려 70% 이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물론 이들이 다 양반으로 대우받은 건 아니다
양반은 군역을 내지 않았으므로 법적으로 군역을 지지 않을 자격을 획득했을 뿐, 사회적인 의미의 양반은 아니었을 것이다

양반은 서울의 경반과 지방의 향반으로 나뉜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하고 매스 미디어도 없었을 때니, 중앙 집권 국가에서 서울 지배 계층의 힘이 막상한 것은 당연하다
이른바 명문 거족인 일부 가문이 서울에서 세력을 형성했고 대부분은 자기 고향에서 터를 잡고 향촌 사회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재지 양반으로 존재했다
이 재지 양반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세거지라는 지역 기반이다
여기를 벗어나면 다른 곳에서는 양반 대우를 받기 힘들었기 때문에 한 마을에 뿌리를 내리면 곧 동족 부락이 형성됐다
서울에서 높은 관리를 역임한 송순도 담양으로 낙향한 후 그 지역에서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해 애를 썼다는 기록이 세거지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동족 부락, 혹은 집성촌의 형성은 이처럼 양반들의 세력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관습의 하나로써 함부로 남의 땅에 터잡고 행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반이 아닌 계층도 한 곳에 모여 살게 된다
양반 문화의 하층민화가 이뤄진 것이다

이 향반들은 서원을 설립하고 문중이 형성되며 향약 등을 통해 마을 통치에 일정 부분을 담당한다
조선 시대 수령들은 자기 고향으로 보내지지 않고 이동도 잦았기 때문에 터를 잡고 사는 향반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지방관 파견이 드물었던 고려 시대 지방을 통치하던 향리 계층이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나간 후 다시 낙향해 향반이 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들은 수령의 통치를 보좌할 수 있었다
사실 과거라는 것이 아무리 양반이 적다고 해도 3년 마다 겨우 33명을 뽑는 것에 지나지 않고, 미관말직까지 합쳐야 겨우 200여 석에 불과할 정도로 관직을 얻기 힘든 상황에서 그나마 서울 거족들의 자녀들로 채워지는 상황이었으니 나머지 양반들의 권리를 어느 정도 보상해 줘야 했을 것이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았다고 지배층으로서의 권리를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면 사대부들의 나라 조선이 500년 씩이나 유지됐을 리가 없다
왕은 정치에 참여하는 일부 가문을 제외한 지방 양반들에게 지방 통치권의 일부를 나눠 준다
단 이것은 법에 명시된 권리가 아니므로 얼마든지 상황에 맞춰 임의적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현명한 통치법이 아닐 수 없다

일단 향반으로 자리잡으면 그 지역에서 농토를 넓히기 위해 애썼다
조선 초기부터 중기를 거치는 동안 농토가 비약적으로 발전해 향반들의 경제적 부도 크게 확대됐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나눠 줄 것도 많았다
분재기가 재산 분배 과정을 자세히 보여 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 이상 개간할 땅도 없고 농토 확대가 한계에 부딪치자 물려 줄 유산이 적어졌다
어쩔 수 없이 장남에게 집중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많을 때는 이 사람, 저 사람 풍족하게 다 나눠주겠지만 재산이 적으니 한 사람에게라도 집중적으로 물려 줘 부모로서 권위도 세우고 집안을 유지해 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남녀 균등 상속이었다가 중기에는 아들 형제에게 균등 상속했고 후기에는 장남에게 집중적으로 상속된 이유다

간단히 말해서 조선 후기 사회가 보수적으로 변한 원인은 조선 자체의 정체성에 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얘기다
유럽처럼 산업 혁명 등을 거쳐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해외로 뻗어 나갔다면 사회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근대화도 가능했을텐데, 인구가 늘어나는 것에 비해 생산량은 예전 그대로였으니 어쩔 수 없이 지배 계층은 기득권 수호를 위해 보수화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때 형성된 문화가 이른바 전통 문화다
문중이 형성되고 주자학이 하층민들에게까지 뿌리내려 가부장 문화가 전 계층을 지배하게 된다
사실 주자학이 양반에게만 국한됐다면 양반 계층이 해체된 오늘날에도 가부장 문화가 힘을 발휘하지는 못할 것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가 유교 문화, 더 정확히는 가부장 문화에 지배되는 까닭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주자학이 하층민에게까지 퍼졌기 때문에 생명력이 길어진 것이다
현대 사회에 가부장 문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다지 좋은 현상은 아닌 것 같다

저자는 유곡 권씨 집안의 고문서 분석을 통해 양반 계층의 재산 증식과 분배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양반이라고 하면 소작농에게 소작료를 받는 지주를 연상시키는데 중기까지만 해도 직영지가 많았다고 한다
이 직영지를 경작하는 것은 당연히 노비들이다
그러니 노비 수가 7,8백 명을 육박할 수 밖에
독립된 생활을 하고 지대만 바치는 솔거 노비들이 많았는데 전국에 흩어진 경우도 있었다
만약 우리나라 땅이 넓었다면 로마처럼 노예에 의해 경영되는 대농장 같은 개념이 성립될 수 있었을까?
노예에 의한 경작은 효율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주인에게 예속된 몸이라 해도 자기 것이 아닌데 열심히 안 하는 건 당연하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을 무시했으니 말이다)
자료의 주인공 권벌도 노비들의 게으름을 한탄한다
결국 후기로 갈수록 직영지는 줄어들고 소작제로 전환하게 된다

분재기를 보면 노비수가 정말 엄청나다
사실 땅은 단위 자체가 감이 안 잡히고 노비 숫자로 규모를 짐작했다
향반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로 나간 것도 아닌데 재산이 계속 증식된 걸 보면 확실히 농법 개량과 개척 사업이 큰 몫을 차지한 것 같다
윤선도 같은 경우는 해남으로 내려 와 개간 사업을 통해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다
노비에 대한 권리는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죽여도 별다른 터치가 없었다
권벌은 도망간 노비 한복을 잡아 (어쩌다 잡혔을까!!) 장 80대를 친 후 관가에 넘겼는데 투옥 과정에서 죽었는데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실록을 보면 장 80은 흔히 등장하는 형벌인데 죽은 걸로 봐서 80대 정도 맞으면 원래 죽을 지경이 되는 건지, 아니면 도망가다 잡혀서 워낙 심하게 다뤄진 건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숫자만 해도 몇 백을 헤아릴 정도니, 양반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역자 후기를 보면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조선과 중국 근세 5백년을 가다" 에서 보면 저자는 광해군 일기가 두 부가 된 까닭을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한명기가 쓴 "광해군" 을 읽으면 그 과정이 소상히 나온다
이처럼 외국 학자이다 보니 세세한 부분까지 다 챙기기가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역시 외국 문화나 역사에 대해 쓴 후 그 나라에서 번역이 되면 많은 문제점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역자도 그 점을 인정하면서 이 책이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무엇보다 조선의 고문서들을 꼼꼼히 분석한 것이 마음에 든다
서술도 어렵지 않게 쉽고 재밌게 해서 읽는 맛이 난다
식민지 지배 탓도 있지만 어쨌든 일본의 기록, 분석 문화는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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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사회의 일상문화코드
박재환 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사회의 일상 영역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분석한 책이다
표지부터 확 띄는 게 마음에 든다
여러 명의 필자들이 모여 쓴 글은 통일감이 없고 다소 산만한 편인데 이 책은 비교적 괜찮다
그렇지만 간혹 수준이 떨어지는 글도 있긴 있다
지난 번 "결혼할까 혼자살까" 를 읽으면서도 느낀 거지만 왜 박사 학위 씩이나 있는 사람들의 분석 수준이 이것 밖에 안 되는 걸까?
지식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피상적이고 단편적이며 감정적이라 읽으면서도 한심할 때가 있다
다행히 이 책의 전체적 수준은 괜찮은 편이고 각각의 글도 무난할 정도의 평균은 된다
때로 날카로운 분석이 돋보이는 글도 보이는데, 내 편견 때문인지 몰라도 확실히 교수 두 사람의 글은 정독할 필요가 있었다

한국 사회의 특징은 전통 문화의 계승과 단절일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를 이룩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 모든 면에서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 생긴다
더구나 일제 지배와 6.25를 거친 후 단기간에 산업화를 이룩했기 때문에 몸이 커지는 것에 비해 정신은 그 속도에 맞춰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전통을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민 사회의 정신 대신 과거의 이데올로기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어제 읽은 "양반" 에서도 느낀 바지만 18세기 이후 주자학이 하층민들에게까지 침투되면서 전 국민의 양반화가 이뤄졌고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가족 중심주의나 체면 중시 풍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등이 그렇다

저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인은 대단히 낙천적이다
또 현세 중심주의라 지금 당장의 쾌락을 즐긴다
직선적인 기독교적 사관과는 달리 순환적인 사관을 믿기 때문에 샤머니즘이나 범신론적 속성도 갖고 있다
원죄 의식 대신 타인의 눈치를 보는 문화가 성행한다
정말 한국인이 낙천적일까?
음주가무를 즐긴다는 점에서는 그렇지만 과연 현대의 한국인들이 인생을 제대로 즐기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술 마시는 거 말고는 제대로 된 여가 생활이 드물지 않나?
오히려 서양 사람들이 여가 생활을 훨씬 많이 하지 않나?
내가 보기에는 선진국으로 갈수록 노동 시간은 단축되면서 여가 시간은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이 정말 낙천적이고 현세를 제대로 즐기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저자는 또 비언어적 교류를 지적한다
간단히 말하면 눈치 문화다
말 안 해도 알아서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단점이라면 흔히 알려진 대로 상대의 뜻을 오해할 수도 있고 항상 분위기 파악을 해야 하니까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또 대화와 토론이 부족하고 윗사람이나 동료들 눈치를 봐야 하니까 주관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
한마디로 피곤하다 이거다
공개적으로 말을 안 하니 사적인 정보망에 의존해야 하고 결국 학벌이나 지연 등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 투명성을 보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대신 말하기 껄끄러운 점을 상대가 알아서 파악하니까 어떨 때는 편하기도 할 것 같다
불편한 얘기는 서로 삼가하니까 인간 관계도 더 부드러울 것이고 친밀감도 높지 않을까?
결과가 좋으면 의미 부여도 좋을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지금 한국이 선진국은 아니니까 눈치 문화를 좋게 해석할 수는 없는 문제다

뭐니뭐니 해도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가족주의일 것이다
개인주의의 서구 사회가 오히려 사회적 연대 의식이 강하다는 건 참 아이러니컬 하다
흔히 개인주의 하면 이기주의를 떠올리는데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한국 사회는 오히려 남을 돕는데 대단히 인색하다
아니, 그런 전통 자체가 없다고 해야 하나?
시민 혁명 같은 걸 경험한 적이 없으니 그런 문화 역시 부재할 수 밖에
개인주의의 성립 조건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책임이라고 한다
사실 남의 자유를 존중해 주지 못한다면 내 자유와 권리도 타인에게서 보장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내 권리와 자유를 즐기기 위해서는 상대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게 필수적이다
이런 전제 조건 덕분에 사회적 연대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문화는 개인 대신 우리, 더 정확히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중시한다
나만 해도 그렇다
가족의 가치관에 나 자신을 맞추고 있다
아빠 역시 가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자식의 성공이 곧 내 삶의 의미라는 식으로 말한다
자식과 부모를 따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부분이 한국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자식과 부모를 동일시 하기 때문에 자식이 더 높은 계급으로 편입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기러기 아빠를 생각하면 참 기가 막힐 정도다
넘치는 교육열도 교육이 신분 보장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자신과 가족을 분리하지 못하는 가족주의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난 가족주의를 넘어 설 자신이 없다
어떤 의미로 보면 한 사람의 개인으로 완전히 독립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충분히 독립할 수 있는데도 여전히 나는 부모의 품을 벗어나질 않으려고 하고, 아빠는 결혼한 후에도 정신적으로 나를 데리고 있으려 한다
부모와 자식의 완전한 분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가족주의의 해체도 불가능할 것이다
가족주의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성이 상실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바람직한 대안일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개인으로 완전히 설 수 있느냐는 자아 주체성 문제로 보면 극복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야 좀 더 넓은 안목으로 사회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내 가족으로 범위를 한정하면 사회적 연대 역시 불가능 하다는 생각이 든다

제일 뜨끔했던 것은 몰개성적 합일주의였다
신세대 문화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그저 또래 집단과 매스 미디어를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는 저자의 일갈에 깊이 반성하는 바다
아무리 개성을 중시하고 기성 세대에게 반발하는 신세대라 할지라도 이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왕따 현상이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집단의 가치에 어긋난다고 해서 전체가 한 사람을 따돌리고 심지어 폭력을 행사한다는 건 어떤 의미로 보든지 가학적이고 파쇼적인 문화가 아닐 수 없다
또 무조건 유행을 따라야 소외되지 않는 문화 역시 결국 체면을 중시하며 남의 눈치를 보는 기성 세대의 특성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조상들의 사대주의는 욕하면서도 명품에 집착하는 것 역시 결국은 사대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명품이란 것도 결국 남과 나를 구별짓는 계급적 차이의 확인일 뿐이다
그런데 명품 회사에서는 차이를 강조하면서 무리를 하면 살 수 있는, 약간 더 비싼 가격으로 대량 판매를 하고 있으니 남과 구별되기는 커녕 광고 마케팅에 놀아난 꼴이 될 뿐이다

명예 퇴직에 관한 부분을 읽을 때는 정말 마음이 무거웠다
시위 구호 대신 토플 책이 들려 있다는 비유가 나를 후벼 파는 기분이었다
남들은 자기 경쟁력을 높히기 위해 애쓰는데 나만 한가하게 책을 보는 건 아닌가, 죄책감이 들었다
도서관에서 한가하게 인문서적 보는 사람은 나 뿐이었으니까
갈수록 무한 경쟁 체제로 바뀌면서 경쟁력이 없는 사람은 화이트 컬러에서 노동자층으로 쉽게 떨어지고 만다
중산층이 얕아지는 것이다
그나마 자격증 때문에 남보다 덜 급하긴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본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일반 샐러리맨처럼 불안에 떨어야 할 것이다

경쟁 체제의 냉혹함과는 반대로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아주 역설적인 글이다
앞에서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돈 밖에 모른다고 비난하더니, 뒤에서는 무한경쟁체계라 낙오하면 큰일이라고 겁을 주니 말이다
자본을 소유하지 않으면 언제 탈락할지 모르는 불안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어떻게 돈을 최우선시 하지 않겠는가!!
결국 사회 보장 체제를 확대하고 경쟁 시스템을 완화시켜야 황금만능주의도 사라진다는 얘기다
사회적 연대 의식을 고취시키려면 가족주의부터 넘어야 하고 개인주의 성립을 위해서는 남의 눈치를 보는 대신 나의 주체성을 확립해야 하고...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부분에서만 개혁해서는 소용이 없다
사회는 유기적 존재라더니 그 말이 딱 맞다

확실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순환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상 숭배와 장례 문화에 정성을 쏟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황금으로 된 수의를 입혀 황골이 되면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어찌보면 어처구니 없기까지 한 광고가 먹혀 들어가는 걸 보면 한국인들의 내세관은 여전히 전통적이다
1억원 하는 황금 수의라...
무덤을 치장하는 것도 결국 후손의 재력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
부조금이나 축의금 내는 것이 인맥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사라지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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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의 유혹 - 쇼핑의 역사와 문화에 얽힌 인간 욕망의 9가지 얼굴
토머스 하인 지음, 김종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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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가 쇼핑을 하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소비 생활을 위해서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백화점에 진열된 물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고, 직접 물건을 구매할 때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다
쇼핑 중독자의 경우 백화점 순례하는 게 최고의 여가 활동 아닌가?
돈을 주고 물건을 구입할 때의 그 희열감은, 비록 지불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그래서 외상 구매, 혹은 신용 카드가 생긴 거 아니겠는가?
만약 사람들이 합리적인 소비만 한다면 충동 구매를 부축이기 위한 신용 카드 같은 제도는 애당초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쇼핑은 하나의 여가이자 소비 활동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중론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다양한 관점으로 쇼핑을 분석한다
사람들은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쇼핑을 한다
쇼핑과 소속감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그룹에 끼기 위해 비슷한 물건을 구매한다
저자의 분석처럼 취향과 유행은 좀 다른 개념인데, 유행이 잠깐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데 비해 취향은 거의 영구적으로 우리 마음을 지배한다
유행이야 무시할 수도 있지만, 취향은 그 사람의 본질을 지배하는 중요한 특성 중 하나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중년의 남성은 유행 따위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대신 자기가 갖는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은, 누가 뭐라 한다 해서 쉽사리 바뀔 만한 취약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대단히 견고한 자신만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 취향을 드러내기 위해 쇼핑을 한다
말하자면 그의 쇼핑 목록은, 나는 이런 사람이오, 라고 현시적으로 보여 주는 도구가 된다

이 취향을 공유하는 소수의 집단들은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비단 쇼핑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동호회 같은 것도 여기게 속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참으로 개성적인 존재다
대중 매체에 의해 끊임없이 똑같아지라는 압박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독특한 생각과 스타일을 어떻게 해서든 드러내려고 애를 쓴다
요즘 같은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는, 곧 비슷한 취향의 소비자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어 주기 쉽다

오늘날 쇼핑의 특징으로는 브랜드 네임 밸류가 있다
옛날에는 점원들의 설명을 듣고 직접 눈으로 확인한 후 구매를 결정했는데, 20세기 후반의 소비자들은 브랜드 이름만 가지고 제품의 품질을 판단한다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바로 광고다
광고를 통해 대중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그 제품 품질이 좋다는 것을 수많은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알릴 수 있겠는가?
현대 사회는 정말 모든 분야가 유기적으로 연결됐다는 생각이 든다
부어스티니 주장하는 그 이미지의 환상도 결국 매스 미디어 시대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필수 요소다
광고가 없는 21세기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기업들은 광고를 통해 이미지를 팔고, 소비자들은 그 이미지로 제품의 질을 판단한 뒤 대량 구매를 한다
대량 생산과 대량 구매는 광고라는 중간자가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쇼핑의 새로운 개념으로 책임감이라는 게 있다
대체 쇼핑과 책임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쇼핑이라는 단어에는 과소비와 무절제라는 속뜻이 숨어 있는 기분인데, 쇼핑을 책임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을까?
저자는 한 푼이라도 아껴서 꼭 필요한 물건만을 구입하는 가정 주부들을 예로 든다
그들은 한정된 액수 내에서 가족에게 최대의 효용성을 안겨 줄 물품을 구하기 위해 애쓴다
따지고 보면 자급자족 시대가 아닌 이상, 시장에 나가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는 먹고 살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내가 필요한 제화를 구입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닌가?
그러므로 쇼핑의 속성에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노리는 "책임"이라는 덕목이 들어 간다
(나 역시 그런 면에 해당된다)

쇼핑을 하는 또다른 이유로는 주목(attention)을 들 수 있다
물품 구매를 통해 타인의 주목을 받고 싶은 심리를 말한다
이것은 부유층일수록 더욱 그렇다
유한 계급이란 생활에 필수적이지 않는 것을 구매할 능력이 있는 계층이라고 누군가 정의했다
여기에는 사치 품목 뿐 아니라 오페라나 클래식, 발레 같은 예술도 포함된다
부유층들은 보다 값비싼 물품을 구입함으로써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계층과 차이를 두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들을 흉내내기 위해 한 달 월급을 명품에 쏟아붓는 서민층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명품을 소유했느냐, 안 했느냐는 본질이 아니다
명품, 혹은 사치품은 그저 차이를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하다
본질적으로 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단지 그들이 갖는 몇몇 물건들을 소유했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겠는가?
소득 격차를 인정하고 각자의 능력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다

쇼핑을 하는 다른 이유로는 축하를 들 수 있다
제일 쉬운 예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생각하면 된다
흔히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이 데이를 관련 업계의 상술이라고 비난하지만, 저자의 말을 들어 보면 사람들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사실 인간이 얼마나 영리한 동물인데 남의 말에 속아서 돈을 지불하겠는가?)
선사 시대 이래로 사람들은 축제를 즐겼다
생산력이 부족한 시대에 축제는 거의 유일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기회였다
더구나 축제 때는 귀족들이 자선의 은혜를 베푼다
(크리스마스의 불우 이웃 돕기란 이런 맥락의 전통이었나 보다)
1년 중 단 며칠을 쉴 수 있는 축제 기간 동안,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므로써 개인적인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한다
사실 아무 날도 아닌데 친하게 지내자고 선물을 건넨다면 얼마나 어색하겠는가?
사람들이 기념일을 찾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크리스마스 등의 축일을 기념함으로써 그들은 새로운 인간 관계를 다진다

현대 사회의 특징으로 인터넷 쇼핑과 홈쇼핑이 빠질 수 없다
세계가 복잡해지면서 사람들은 쇼핑을 위해 시간을 따로 내기 힘들어진다
대형 쇼핑몰이 번창하는 이유도, 바쁜 현대인을 위해 모든 물건들을 한 곳에 모아 놨기 때문이다
이제 인터넷 쇼핑이니 홈쇼핑이 대중화 되면서 고객들은 원하는 물건을 앉아서 바로 구매할 수 있다
물론 직접 눈으로 볼 수 없고, 조언자도 없기 때문에 불안한 심리가 있지만, 환불 제도를 통해 극복해 가고 있다
저자는 쇼핑의 마지막 특징으로 이러한 편의성을 들고 있다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깊이가 얕긴 하지만, 비교적 일목 요연하게 쇼핑의 심리에 대해 잘 기술하고 있다
지나친 비약을 피하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문제들을 예로 든 것도 이해를 돕는다
일반인이 현상을 분석한 책을 읽었으니, 이제는 보다 학문적으로 접근한 글을 읽고 싶다
확실히 인간은 소비하는 동물이다
도구적 인간, 정치적 인간 등등 인간을 정의하는 수많은 개념 속에 소비하는 인간도 함께 포함시켜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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