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 강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미야지마 히로시가 쓴 책이다
"조선과 중국 근세 5백년을 가다" 를 인상깊게 읽었던 터라 기대를 많이 했다
그 때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분석해서 보여 준 16세기 양반의 생활상이 자세히 기록되어 도움이 많이 됐다
이번 책은 통계 자료 인용이 많아서 읽기가 편하지는 않았다
내용 자체는 쉬운데 다소 복잡하다
나처럼 통계나 그래프에 약한 사람은 굳이 증거를 들이댈 것 없이 결론만 말하면 편한데, 결론은 처음과 뒷쪽 두 챕터에 불과하고 나머지 부분은 전부 통계 분석에 쓰였다
그래서 집중을 못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양반이라는 계층의 존재에 대해, 혹은 유교 문화의 전통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양반이란 계층은 유럽의 귀족이나 일본의 무사 계급과는 달랐다고 한다
사회적은 관습과 용인에 의해 인정되는 것이지, 법적으로 그 지위가 보장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의 기준은 매우 엄격해서 그 외의 계층과 절대 섞이지 않는 배타성을 보였다
그러나 세습되는 지위는 아니기 때문에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분 계층간의 유동성이 증가해 19세기에는 양반이 무려 70% 이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물론 이들이 다 양반으로 대우받은 건 아니다
양반은 군역을 내지 않았으므로 법적으로 군역을 지지 않을 자격을 획득했을 뿐, 사회적인 의미의 양반은 아니었을 것이다

양반은 서울의 경반과 지방의 향반으로 나뉜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하고 매스 미디어도 없었을 때니, 중앙 집권 국가에서 서울 지배 계층의 힘이 막상한 것은 당연하다
이른바 명문 거족인 일부 가문이 서울에서 세력을 형성했고 대부분은 자기 고향에서 터를 잡고 향촌 사회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재지 양반으로 존재했다
이 재지 양반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세거지라는 지역 기반이다
여기를 벗어나면 다른 곳에서는 양반 대우를 받기 힘들었기 때문에 한 마을에 뿌리를 내리면 곧 동족 부락이 형성됐다
서울에서 높은 관리를 역임한 송순도 담양으로 낙향한 후 그 지역에서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해 애를 썼다는 기록이 세거지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동족 부락, 혹은 집성촌의 형성은 이처럼 양반들의 세력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관습의 하나로써 함부로 남의 땅에 터잡고 행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반이 아닌 계층도 한 곳에 모여 살게 된다
양반 문화의 하층민화가 이뤄진 것이다

이 향반들은 서원을 설립하고 문중이 형성되며 향약 등을 통해 마을 통치에 일정 부분을 담당한다
조선 시대 수령들은 자기 고향으로 보내지지 않고 이동도 잦았기 때문에 터를 잡고 사는 향반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지방관 파견이 드물었던 고려 시대 지방을 통치하던 향리 계층이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나간 후 다시 낙향해 향반이 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들은 수령의 통치를 보좌할 수 있었다
사실 과거라는 것이 아무리 양반이 적다고 해도 3년 마다 겨우 33명을 뽑는 것에 지나지 않고, 미관말직까지 합쳐야 겨우 200여 석에 불과할 정도로 관직을 얻기 힘든 상황에서 그나마 서울 거족들의 자녀들로 채워지는 상황이었으니 나머지 양반들의 권리를 어느 정도 보상해 줘야 했을 것이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았다고 지배층으로서의 권리를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면 사대부들의 나라 조선이 500년 씩이나 유지됐을 리가 없다
왕은 정치에 참여하는 일부 가문을 제외한 지방 양반들에게 지방 통치권의 일부를 나눠 준다
단 이것은 법에 명시된 권리가 아니므로 얼마든지 상황에 맞춰 임의적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현명한 통치법이 아닐 수 없다

일단 향반으로 자리잡으면 그 지역에서 농토를 넓히기 위해 애썼다
조선 초기부터 중기를 거치는 동안 농토가 비약적으로 발전해 향반들의 경제적 부도 크게 확대됐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나눠 줄 것도 많았다
분재기가 재산 분배 과정을 자세히 보여 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 이상 개간할 땅도 없고 농토 확대가 한계에 부딪치자 물려 줄 유산이 적어졌다
어쩔 수 없이 장남에게 집중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많을 때는 이 사람, 저 사람 풍족하게 다 나눠주겠지만 재산이 적으니 한 사람에게라도 집중적으로 물려 줘 부모로서 권위도 세우고 집안을 유지해 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남녀 균등 상속이었다가 중기에는 아들 형제에게 균등 상속했고 후기에는 장남에게 집중적으로 상속된 이유다

간단히 말해서 조선 후기 사회가 보수적으로 변한 원인은 조선 자체의 정체성에 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얘기다
유럽처럼 산업 혁명 등을 거쳐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해외로 뻗어 나갔다면 사회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근대화도 가능했을텐데, 인구가 늘어나는 것에 비해 생산량은 예전 그대로였으니 어쩔 수 없이 지배 계층은 기득권 수호를 위해 보수화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때 형성된 문화가 이른바 전통 문화다
문중이 형성되고 주자학이 하층민들에게까지 뿌리내려 가부장 문화가 전 계층을 지배하게 된다
사실 주자학이 양반에게만 국한됐다면 양반 계층이 해체된 오늘날에도 가부장 문화가 힘을 발휘하지는 못할 것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가 유교 문화, 더 정확히는 가부장 문화에 지배되는 까닭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주자학이 하층민에게까지 퍼졌기 때문에 생명력이 길어진 것이다
현대 사회에 가부장 문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다지 좋은 현상은 아닌 것 같다

저자는 유곡 권씨 집안의 고문서 분석을 통해 양반 계층의 재산 증식과 분배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양반이라고 하면 소작농에게 소작료를 받는 지주를 연상시키는데 중기까지만 해도 직영지가 많았다고 한다
이 직영지를 경작하는 것은 당연히 노비들이다
그러니 노비 수가 7,8백 명을 육박할 수 밖에
독립된 생활을 하고 지대만 바치는 솔거 노비들이 많았는데 전국에 흩어진 경우도 있었다
만약 우리나라 땅이 넓었다면 로마처럼 노예에 의해 경영되는 대농장 같은 개념이 성립될 수 있었을까?
노예에 의한 경작은 효율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주인에게 예속된 몸이라 해도 자기 것이 아닌데 열심히 안 하는 건 당연하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을 무시했으니 말이다)
자료의 주인공 권벌도 노비들의 게으름을 한탄한다
결국 후기로 갈수록 직영지는 줄어들고 소작제로 전환하게 된다

분재기를 보면 노비수가 정말 엄청나다
사실 땅은 단위 자체가 감이 안 잡히고 노비 숫자로 규모를 짐작했다
향반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로 나간 것도 아닌데 재산이 계속 증식된 걸 보면 확실히 농법 개량과 개척 사업이 큰 몫을 차지한 것 같다
윤선도 같은 경우는 해남으로 내려 와 개간 사업을 통해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다
노비에 대한 권리는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죽여도 별다른 터치가 없었다
권벌은 도망간 노비 한복을 잡아 (어쩌다 잡혔을까!!) 장 80대를 친 후 관가에 넘겼는데 투옥 과정에서 죽었는데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실록을 보면 장 80은 흔히 등장하는 형벌인데 죽은 걸로 봐서 80대 정도 맞으면 원래 죽을 지경이 되는 건지, 아니면 도망가다 잡혀서 워낙 심하게 다뤄진 건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숫자만 해도 몇 백을 헤아릴 정도니, 양반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역자 후기를 보면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조선과 중국 근세 5백년을 가다" 에서 보면 저자는 광해군 일기가 두 부가 된 까닭을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한명기가 쓴 "광해군" 을 읽으면 그 과정이 소상히 나온다
이처럼 외국 학자이다 보니 세세한 부분까지 다 챙기기가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역시 외국 문화나 역사에 대해 쓴 후 그 나라에서 번역이 되면 많은 문제점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역자도 그 점을 인정하면서 이 책이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무엇보다 조선의 고문서들을 꼼꼼히 분석한 것이 마음에 든다
서술도 어렵지 않게 쉽고 재밌게 해서 읽는 맛이 난다
식민지 지배 탓도 있지만 어쨌든 일본의 기록, 분석 문화는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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