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희망이다>를 리뷰해주세요
거꾸로, 희망이다 - 혼돈의 시대, 한국의 지성 12인에게 길을 묻다
김수행 외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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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을 향해 소리쳐도 이것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흘러 나오고 있는 소통 부재의 시대에 한국의 존경받을 만한  대표 지성인 12명에게 이 혼돈의 시대, 절망의 시대에 나아갈  길을 묻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저자들 면면이 참 대단하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이 걸어가는 좀 쉽고 편한 길이 아니라, 자신의 소신과 영감이 이끄는 대로의 삶을 선택했고, 단지 출세한,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청소년의 롤 모델이 될 법한 사람들에게 우리 시대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지 이제 1년 반! 약속했던 경제 성장은 커녕  여기 저기서 먹고 살기 힘들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곳곳에서는 비정규직 해고가 자행되고, 국회에서는 맨날 싸우고, 사방에서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또 그런 곳들에 대한 압수 수색이 여사로 진행되고 강남 대치동 학원가는 방학을 맞아 단기 학원 과외를 위해 상경한 초중고생들로 넘쳐나고, 농촌은 공동화 되어가는 작금의 시대!  그런 시대에서도 우리 사회의 지성들은 희망을 이야기 한다!!  

어쩌면 바로 지금이 그동안 성장 일변도로, 그것도 뚜렷한 가치관이나 목적 없이 그저 남보다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뼈 빠지게 일하며 달려왔던 우리들에게 자신의 삶과 우리 모두의 삶을 성찰하고 무엇이 진정 행복한 삶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칠 게 아니라, 공동체적인 삶의 가치를 회복하고, 더불어 행복한 삶을 꿈꾸기 시작할 때라고 말한다.   

환경 문제를 이야기하는 녹색 평론의 김종철 발행인은 농촌으로 돌아감으로써 새로운 삶의 가치와 비전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돈벌이가 되는 특용 작물을 생산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적 삶과 자연속의 일부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의 땅이 농촌임을 역설한다. 생태적 삶! 단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환경론이 아니라, 자연속의 한 일부로서 자연과 더불어 순환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이야기 한다.   

또 획일화된 교육에 내맡겨져서 아무 고민 없이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 대기업에 취직해서 안정된 삶을 누리기를 바라는 대부분의 사람이 아니라, 남과 다른 생각하는 하는 개개인에게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음을 역설한다.  정권이나, 사회의 커다란 틀을 한번에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사회 속에 있는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하면서 점차 사회도 더 발전적으로 변해 감을 믿을 수 있기에 이 혼돈의 시대, 좌절의 시대에도 우리 사회의 지성인들은 희망을 이야기 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들, 타자에 대한 연민과 배려를 표현하는 사람들, 자신만의 꿈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단지 돈을 벌기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기업을 꿈꾸는 사람들,  자연속의 일부로 존재하기로 결정하는 사람들 이런 작은 흐름들을 이끌면서, 또 지원하면서 그들은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우리들도 변했으니, 당신들도 조금씩 변하라고.   

 인생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함께 꿈꾸어야 할 미래는 무엇인가. 부익부 빈익빈이 극대화되는 정글 자본주의 체제안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 정글에서 벗어나, 진짜 인간다운 삶을 찾을 것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무얼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럼 다 팽개치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나 지으면서 살라는 거야? 그럼 무얼 먹고 사냐고?" 이런 볼맨 소리는 어쩌면 무의미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서중석 교수의 글이 실린 게 의미심장한 것 같다. 그는 지금 우리 사회의 분열 양상이 해방 전후 좌/우익 대립이 극심했던 그 시기와 거의 흡사함을 말한다. 우리들의 힘으로 힘들게 얻었던 사회적 가치들이 힘의 논리, 자본의 논리 앞에 무참히 부서지고 있는 역진의 시대를 바라보는 노회한 학자는 말한다. "역사란 잠시 에둘러 갈 수는 있어도 영원히 퇴보하지는 않는다!"라고 그러니, 이제 우리 희망과 대안적 가치를 이야기 할 때라고!! 

바로 지금이 그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물신적 가치, 개인주의적 가치가 아니라, 더불어 행복해지는 새로운 세상을 꿈꿔 보자고, 어쩌면 지금이야 말로 그런 희망을 꿈꾸고 그런 희망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최적의 시기라고 우리들을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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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원근법>을 리뷰해주세요
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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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모르는 사람이군!! 고뇌의 원근법이라?? 당연히 서양 회화에 대한 이야기겠네.. 원근법 따지는 것은 서양 미술일테니까..' 

이런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책을 주욱 넘겨 보았다. 일단 책에 그림이 많이 실려 있는 점은 좋았는데, 곳곳에 소개되는 그림들은 나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 그다지 아름답거나, 굉장히 훌륭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미술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오래전에 미술 시간에 배운 몇 안 되는 정보와 달력에 실린 그림들, 아니면, 고흐전, 르느와르전, 클림트전  등처럼 신문 지상에 가끔 소개되는 유명 화가들 작품 정도랄까.  그런데, 책에 언급되는 화가나 그림은 고흐를 제외하고는 모두 낯설었다.   

책의 주제도 바로 그 것이었다. 재일 한국인으로서, 시국 사범으로 투옥된 두 형을 둔 저자는 우리들에게 묻는다.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에 대해 왜 우리는 낯선 느낌을 갖는가? 우리 자신의 미의식이 지나치게 예쁜 것, 혹은 추상적인 것에만 편향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문화 자체가 암묵적으로 과거의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취지를 가지고 저자는 20세기 현대 화가 가운데, 자신이 처한 현실 앞에 진실하고 당당했던 화가들의 작품을 더듬는다. 땅(때로는 독일에 때로는 덴마크에 포함되기도 하는 인간이 만든 국경에 근거한 땅이 아니라,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 자체?)에 뿌리 박고 그곳에 사는 인간의 정서, 그곳의 풍경을 그대로를 표현하고자 했던 에밀 놀데의 그림들을 찾아 동서독을 넘나들기도 하고, 나치 치하에서 전쟁의 무가치함과 참혹함을 그대로 드러낸 그림들로 인해 나치 당국의 탄압을 받았던 오토 딕스의 그림들을 살펴보면서 시대와 함께 숨쉬고 시대의 진실을 표현하는 예술에 대해 고찰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생을 마감한 유대인 화가 펠릭스 누스바움에게  삶과 예술은 분리될래야 분리될 수 없는 주제였다. 멋진 풍경을 그리거나, 퇴폐적일만큼 아름답고 고혹적인 여인을 그리기에는 그의 인생이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독일 중산층으로 태어났지만, 유대인이라는 굴레는 그를 독일 사회에서 내몰았고, 피난처로 택했던 벨기에에서도 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결국 독일인 취급을 받아생시프리앵 수용소에 보내졌다가, 간신히 탈주해서 벨기에로 돌아왔지만, 전쟁 막바지에 결국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굴곡 많은 삶은 그의 불안한 눈빛이나, 분노한 눈빛의 자화상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림 역시도 화가의 사상과 그 화가가 몸 담았던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기에, 혼란의 시대, 격정의 시대, 전쟁과 대량 살육의 시대인 20세기를 거쳐온 화가들의 작품이 슬프거나, 참혹하거나, 가슴이 답답하거나, 경악스러운 것이 어쩌면 보편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 그림보다도 현실이 더 참혹스럽거나 끔찍했으니까.

오히려 똑같이, 아니 어쩌면 저자의 말처럼 그보다 더 험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에게 그런 그림이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대를 반영하는 그림이라고 하면, 고작 운동권에서 만든 커다란 걸개 그림 정도 밖에 떠오르는 게 없다. 하기사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나라에서 그림인들 온전하게 진실할 수는 없을 테고,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한 그림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란, 그저 탐미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아름다운, 보는 그 자체로 사람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고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그림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그런 종류 밖에 없다는 게, 극우 보수로 치닫는 우리 사회의 일면이 그림에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런데, 고뇌의 원근법이라는 책의 제목을 보면서 뭉크의 그림 [절규]를 떠올린 건 나뿐이었을까??  책을 다 덮고 나니 괜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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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이란 책을 읽고 있다. 40대 중반의  영화 평론가인 저자가 모교인 컬럼비아 대학교에 가서 이십여년전에 들었던 교양 강좌를 다시 들으면서 느끼는 감회를 담담히 써 내려간 책이다.    

문득 나도 저자처럼 대학시절, 혹은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다시 배워보고 싶은 열망 같은 게 떠올랐다. 그 때는 너무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라서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많은 수업들이 지금의 내 입장에서는 참 아쉽다. 더 많이 받아들이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알 수도 있었을텐데.. 그냥 저냥 시험 성적이나 올리는 목적으로 밖에 공부하지 않아서.. 그냥 벼락치기 하듯 시험에 나올 것 같은 정보들을 암기하는데 급급했었는데, 이제 다시 공부하게 된다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보다 감사한 마음(내가 순식간에 얻어듣게 되는 정보는 시대를 통해 누적된 지식 더하기  어느 한 사람의 평생에 걸친 노력의 결과일 테니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 하나 새겨들으려고 하지 않을까?? 

하긴 이런 생각하는 자체가 조금은 우스운 일이다. 지금 현재 배움에 정말로 목말라 있다면, 이렇게 만일 그렇다면.. 어쩌구 하면서 상상만 하는게 아니라, 무언가 다른 식의 결단을 내렸을 텐데.. 이 책의 저자처럼 듣고 싶고 알고 싶은 내용을 청강하러 다니거나, 한 분야를 파고 들어 공부하거나.. 등등. 그런데, 그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다시 대학 시절 교양 과목을 청강하는 저자의 처지에 대해 부러워만 하고 있다니.. 저런!!! 

늘 느끼는 거지만, 나의 문제는 딱히 하고 싶은 그 무엇이 없다는 점 일듯 싶다. 하면 좋을 것들은 많이 있지만, 절실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언지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올 여름에 템플 스테이라도 하면서 나 자신을 찾고 싶지만, 과연 거기서는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늘 이런 저런 이유로 나 자신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합리화시키고 변명하는, 말 그대로 생각하는 내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다는 진짜 나의 자아를 만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존재는 과연 무얼 원하는 걸까?/ 

이래저래 머리 아픈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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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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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평온한 삶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위에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해리엇과 베이비드는 첫 눈에 반해 결혼한 후, 교외에 그들만의 행복한 가정을 일군다. 넓은 집과 정원, 그리고 집을 가득 채운 아이들, 친척들로 둘러싸인 화목한 가정이라는 그들의 유토피아는 기대하지 않았던 다섯번째 아이 벤이 태어나면서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다가 결국은 와그르 무너져내린다.  

벤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해리엇의 뱃속에서부터 이들의 악연(? 부모 자식간의 인연도 악연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은 시작된다. 해리엇은 뱃속에서 요동치는 벤의 무시무시한 힘 때문에 임신 기간 내내 고통스러워했다. 그 고통을 잊지 위해 미친 듯이 일하고, 엄청난 양의 진정제를 먹고 자신의 뱃속에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미지의 존재에 대해 증오심과 두려움을 느낀다.  

남다른 진통 끝에 벤과 처음 시선을 대하는 순간 해리엇은 공감이 불가능할 것 같은 벤의 차가운 눈과 특이한 외모를 보면서 자신이 그렇게 두려워하던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직감하지만, 따뜻한 모성이라는 자신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 벤은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젖을 다 빨고 그래도 부족해서 젖꼭지를 미친들이 물어뜯고 해리엇은 고통에 몸부림친다.  

이렇듯, 처음에는 벤과 해리엇의 대립이 시작되지만, 서서히 그 대립은 벤과 다른 가족 모두의 대립으로 번져간다. 보통의 화목한 가정이 그렇듯이 따뜻하게 시작된 관계는 이해할 수 없는 적개심에 불타는 벤의 시선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져간다. 가정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 남편과 시어머니는 벤을 수용시설로 보낼 것을 종용하고 해리엇의 묵인하에 어느 날 벤은 낯선 사람들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진다.  

다시 찾아온 가정의 평화..  그러나 해리엇의 마음을 짖눌러오는 자책감!! 해리엇은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벤을 수용한 시설을 찾아가 짐승처럼 갇혀있는 모습을 보고난 뒤, 어쩔 수 없이 벤을 다시 집으로 데려오고 그녀의 그 행동은 다른 가족 모두의 비난을 사게 된다. 그럼 거기서 벤을 그렇게 짐승처럼 버려진 채, 죽도록 버려두어야 했었을까?

 벤과 해리엇은 점점 고립되어 간다. 휴가철에도 친척들이 여러가지 이유를 대면서 더이상 그들의 집을 찾지 않게 되고, 데이비드는 쪼달리는 생계비 때문에 (사실은 벤이 있는 집으로 오기 싫어서가 아닐까??) 돈을 더 벌어야 한다며 늦도록 집에 오지 않고, 집안에서 뛰어놀던 벤의 형과 누나들이 기숙사가 달린 학교로, 외할머니가 살고 있는 이모집으로 가버리면서 커다란 그들의 집은 서서히 비어 간다.  

그 큰 집에 남겨진 상처 투성이의 벤과 해리엇, 그리고 벤 때문에 사랑에 굶주는 넷째 아들 폴은끝내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벤과 그를 추종하는 불량배 무리들의 아지트처럼 되어 버린 집을 데이비드와 해리엇이 팔기로 결정하면서, 어디선가 강한 생명력으로 벤이 살아남게 될 것을 해리엇이 예감하는 걸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아름다운 정원과 모든 식구들이 다 모일 수 있었던 커다란 부엌과 여러 층에 걸쳐진 방들로 가득찼던 그들의 아름다운 집이 텅 비어 버린 거처럼, 이상적인 행복한 가정 갔았던 그들의 삶도 벤이라는 이질적 존재에 의해 껍데기만 남은 채 서로 철저하게 고립되어 버려지게 된 것이다.   

가족들에게는 이해 불가, 소통 불가의 낯선 존재 벤 보다는 최소한 납득 가능한 존재인 다운 증후군의 조카가 차라리 사랑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우리 속에 만연해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적개심을 참 잘 드러낸 수작이란 생각이다.  

벤의 눈에 해리엇과 그의 가족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낯선 자들보다 더 자신을 경계하는 자신의 가족 속에서 그는 무얼 느꼈을까?  

책을 읽으면서 내내 예전에 읽었던 딮스라는 책을 떠올리게 되었다. 미처 부모가 될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 있는, 한마디로 잘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딮스라는 정신 지체아, 내지는 자폐아처럼 보이는 소년이 한 헌신적인 놀이 치료 교사를 통해 비로소 사랑받으며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 가면서 사랑을 회복해가는 실화를 다룬 이야기였는데, 벤의 모습에서 딮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동양에서는 위인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되는 표현, 예를 들자면 태어나자 마자 걸었다거나 세 살짜리 아이가 쌀 한 가마니를 너끈히 들었다거나 하는 일들이 이 책에서는 벤의 괴물적 특성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만약 고대의 동양문화권에서 벤이 태어났더라면, 영웅이나, 역사로 일세를 풍미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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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리뷰해주세요
보이지 않는 사람들 - 21세기 노예제, 그 현장을 가다
E. 벤저민 스키너 지음, 유강은 옮김 / 난장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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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압받고 착취받고 고통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기아 선상에서 굶주리는 난민, 때로는 자기 키보다 더 큰 총을 들고 무차별적으로 다른 이들을 죽이는 소년 병사, 또 때로는 평생 자신은 한번도 가지고 놀지도 못하는 축구공을 꿰메는 어린 노동자, 달리트라고 불리는 인도의 불가촉 천민들, 멍든 몸으로 거리에서 몸을 파는 창녀, 선진국에서 학대당하는 아시아계 가정부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저자는 그런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한 단어로 규정한다. 바로 노예다!!   

처음엔 현대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 왠 노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물론 저임금으로 학대받고 착취당하는 많은 사람들이나 인신매매 당해서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21세기, 무엇보다개개인의 자유가 중시되는 시대에 현대에 만연한 노예제의 문제를 파헤치겠다니 무슨 얘기일까??

저자에 따르면 "노예는 사기나 폭력의 위협을 통해 생존을 넘어선 어떤 대가도 받지 않고 일하도록 강요 받은 인간"이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전 세계를 누비며, 저자 자신의 정의에 해당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그런 처지로 밀어넣은 사람들과 대담하게 접촉하면서 현대 노예제의 본질을 파고 든다.   

저자에 따르면 세계 곳곳에는 수많은 형태의 노예가 존재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인 아이티에는 더부살이라는 형태의 아동 노예 착취가 만연해 있다. 낙후된 시골의 부모들은 학교에 보내주겠다는 중개상의 말만 믿고 도시로 자신의 아이들을 보낸다. 그렇게 보내진 아이들은 대부분 도시 중하류층의 가정에서 온갖 노동을 강요당하고 성노리개가 되고 쓰레기처럼 버려진다.  

아프리카의 수단은 인종과 종교와 석유 채굴권 등 때문에 여러 차례 내전을 겪었다. 좀더 발전된 수단 북부는 주로 아랍계, 즉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남부는 여러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종교와 관습을 가진 남부 부족 자체의 멸절을 위해 북부 민병대는 끊임없이 남부의 마을들을 습격해서 다루기 껄끄러운 성인 남자는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자기 지역으로 끌고가 가재 노예로 만든다고 한다. 가재 노예란 말 그대로 주인집의 가축과 같은 재산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죽도록 일 시키고 채찍질하고 강간하고 쓸모없어지면 죽여버린다. 

동유럽에는 인신매매가 만연해 있다. 루마니아나 몰도바의 여성들은 돈을 벌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서유럽이나 터키, 심지어 아시아쪽까지 팔린다. 이 세상에서 마약 다음으로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 성매매업이란다. 하루에 수십명의 남자들에게 몸을 팔아도 빚은 계속 늘어만 가고, 포주는 계속 폭행과 협박을 일삼고 때로는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팔 다리를 자르거나 죽여버리기 까지 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성매매를 하다 걸리면 상대 남성은 처벌받지 않고 성노예들만 처벌받는다.

또 저자가 만난 인도의 달리트들은 어떤가? 할아버지 혹은 아버지가 지주로부터 빌려쓴 몇 센트, 혹은 몇 달러가 2대, 혹은 3대를 평생토록 노예의 굴레로 살도록 해도 저항할 수 없다. 함부로 저항하다가는 살해당하게 되고, 힌두교의 가르침 속에서는 달리트를 죽이는 것은 브라만에게는 그다지 큰 죄가 아닌 듯 싶다. 어짜피 전생의 업보 때문에 이생에서 달리트로 태어난 것이니 그 속에서 분수에 맞게 살라는 게 힌두교의 가르침이니까.   

책을 읽다보니, 가슴이 답답하다.  아마 직접 수년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이런 사람들을 직접 만나온 저자나 수십년간 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온 사람들이 느꼈을 분노나 좌절감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폭력에 길들어져 노예로 살다보면, 대부분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은 다 사라져버리고 노예로서의 굴종에 적응하게 된다. 비굴한 삶의 운명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고 두려움에 떨며 주인에게 복종하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이 세상에서 희망을 꿈꾸며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 취급을 받는 인간은 어느 사이엔가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린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때린 놈은 발 뻗고 못 자고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잔다"고. 그런데 현대의 노예들에게는 이 속담은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노예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은 그게 더부살이건, 불가촉천민이건, 성매매여성이건, 가재노예건 간에 자기 스스로의 긍지나 자존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늘 죄인처럼 움츠러들어 있건만, 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은 발 뻗고 호위호식하면서 잘 먹고 잘 산다.

이런 책을 읽다보면 "과연 인간의 본성은 원래 악한 걸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사람을 너무 쉽게 만나게 된다. 누구라도 저런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저런 기회 밖에 주워지지 않았더라면 채찍 앞에서 굽실거리면서 주인 앞에 무릎꿇는 노예로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아니, 더 무서운 것은 노예의 노동의 댓가로  호위호식하면서 노예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불쌍한 노예를 먹여살려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무자비한 노예주나 나 사이에 절대적인 차이는 없다는 점일 것이다.  

자신의 취재원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사건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세계 곳곳에 만연한 노예의 실태를 알려 보다 커다란 변화를 유도하고 싶다는 저자 스스로의 저널리스트로서의 각오는 종종 실제 비참한 상황에 놓인 노예들을 만나면서 당장  그 사람들이라도 돕고 싶다는 인간 본연의 동정심과 종종 충돌을 일으키는 듯 보인다. 하지만, 최대한 저자는 객관적으로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물론, 안다고 해서 바로 문제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현재 전 세계의 빈곤 문제와 맛물려 움직이는 노예제의 실상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 출발점이라는 점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라민 은행의 성공사례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서로 로 연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듯 싶다.  내가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 역시도 소중하다는 너무도 기본적인 사실을 항상 기억하는 것 역시도 중요할 것 같고, 커피의 불공정 무역 시정 사례처럼, 보다 현명한 소비자, 주권자가 되어서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사회를 개선시키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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