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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우리의 평온한 삶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위에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해리엇과 베이비드는 첫 눈에 반해 결혼한 후, 교외에 그들만의 행복한 가정을 일군다. 넓은 집과 정원, 그리고 집을 가득 채운 아이들, 친척들로 둘러싸인 화목한 가정이라는 그들의 유토피아는 기대하지 않았던 다섯번째 아이 벤이 태어나면서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다가 결국은 와그르 무너져내린다.
벤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해리엇의 뱃속에서부터 이들의 악연(? 부모 자식간의 인연도 악연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은 시작된다. 해리엇은 뱃속에서 요동치는 벤의 무시무시한 힘 때문에 임신 기간 내내 고통스러워했다. 그 고통을 잊지 위해 미친 듯이 일하고, 엄청난 양의 진정제를 먹고 자신의 뱃속에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미지의 존재에 대해 증오심과 두려움을 느낀다.
남다른 진통 끝에 벤과 처음 시선을 대하는 순간 해리엇은 공감이 불가능할 것 같은 벤의 차가운 눈과 특이한 외모를 보면서 자신이 그렇게 두려워하던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직감하지만, 따뜻한 모성이라는 자신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 벤은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젖을 다 빨고 그래도 부족해서 젖꼭지를 미친들이 물어뜯고 해리엇은 고통에 몸부림친다.
이렇듯, 처음에는 벤과 해리엇의 대립이 시작되지만, 서서히 그 대립은 벤과 다른 가족 모두의 대립으로 번져간다. 보통의 화목한 가정이 그렇듯이 따뜻하게 시작된 관계는 이해할 수 없는 적개심에 불타는 벤의 시선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져간다. 가정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 남편과 시어머니는 벤을 수용시설로 보낼 것을 종용하고 해리엇의 묵인하에 어느 날 벤은 낯선 사람들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진다.
다시 찾아온 가정의 평화.. 그러나 해리엇의 마음을 짖눌러오는 자책감!! 해리엇은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벤을 수용한 시설을 찾아가 짐승처럼 갇혀있는 모습을 보고난 뒤, 어쩔 수 없이 벤을 다시 집으로 데려오고 그녀의 그 행동은 다른 가족 모두의 비난을 사게 된다. 그럼 거기서 벤을 그렇게 짐승처럼 버려진 채, 죽도록 버려두어야 했었을까?
벤과 해리엇은 점점 고립되어 간다. 휴가철에도 친척들이 여러가지 이유를 대면서 더이상 그들의 집을 찾지 않게 되고, 데이비드는 쪼달리는 생계비 때문에 (사실은 벤이 있는 집으로 오기 싫어서가 아닐까??) 돈을 더 벌어야 한다며 늦도록 집에 오지 않고, 집안에서 뛰어놀던 벤의 형과 누나들이 기숙사가 달린 학교로, 외할머니가 살고 있는 이모집으로 가버리면서 커다란 그들의 집은 서서히 비어 간다.
그 큰 집에 남겨진 상처 투성이의 벤과 해리엇, 그리고 벤 때문에 사랑에 굶주는 넷째 아들 폴은끝내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벤과 그를 추종하는 불량배 무리들의 아지트처럼 되어 버린 집을 데이비드와 해리엇이 팔기로 결정하면서, 어디선가 강한 생명력으로 벤이 살아남게 될 것을 해리엇이 예감하는 걸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아름다운 정원과 모든 식구들이 다 모일 수 있었던 커다란 부엌과 여러 층에 걸쳐진 방들로 가득찼던 그들의 아름다운 집이 텅 비어 버린 거처럼, 이상적인 행복한 가정 갔았던 그들의 삶도 벤이라는 이질적 존재에 의해 껍데기만 남은 채 서로 철저하게 고립되어 버려지게 된 것이다.
가족들에게는 이해 불가, 소통 불가의 낯선 존재 벤 보다는 최소한 납득 가능한 존재인 다운 증후군의 조카가 차라리 사랑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우리 속에 만연해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적개심을 참 잘 드러낸 수작이란 생각이다.
벤의 눈에 해리엇과 그의 가족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낯선 자들보다 더 자신을 경계하는 자신의 가족 속에서 그는 무얼 느꼈을까?
책을 읽으면서 내내 예전에 읽었던 딮스라는 책을 떠올리게 되었다. 미처 부모가 될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 있는, 한마디로 잘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딮스라는 정신 지체아, 내지는 자폐아처럼 보이는 소년이 한 헌신적인 놀이 치료 교사를 통해 비로소 사랑받으며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 가면서 사랑을 회복해가는 실화를 다룬 이야기였는데, 벤의 모습에서 딮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동양에서는 위인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되는 표현, 예를 들자면 태어나자 마자 걸었다거나 세 살짜리 아이가 쌀 한 가마니를 너끈히 들었다거나 하는 일들이 이 책에서는 벤의 괴물적 특성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만약 고대의 동양문화권에서 벤이 태어났더라면, 영웅이나, 역사로 일세를 풍미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 보았다.